잠정 국가를 지속 질서로 만든 정치가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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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1909쾰른 부시장
- 1917–1933쾰른 시장
- 1921–1933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장
- 1948–1949의회평의회 의장
- 1949–1963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 1951–1955연방 외무장관
- 1950–1966기독교민주연합 의장
바이마르 공화국 재무장관을 지내고 1945년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을 세운 농업 정치가
쾰른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농학을 공부했고, 1911년부터 로마의 국제농업연구소에서 일했다. 1920년 가톨릭 중앙당 소속으로 식량장관이 되었고, 1922년부터 1923년 8월 쿠노 내각이 물러날 때까지 재무장관을 지냈다. 나치 집권 뒤 체포되었고 콜롬비아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귀국한 뒤 괴르델러 일파와 이어져 7월 20일 사건 뒤 체포되었고, 1945년 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아내가 집행을 늦춰 붉은 군대의 베를린 점령으로 살아남았다. 1945년 6월 베를린과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의 첫 의장이 되었으나, 보상 없는 토지개혁을 비판해 12월 군정청에 의해 물러났다. 서독으로 옮겨 농민연맹 의장을 지내며 통일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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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1914로마 국제농업연구소 부장
- 1920독일 식량장관
- 1922–1923독일 재무장관
- 1945나치 법정에서 사형 선고
- 1945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의장, 12월 해임
- 1948독일 농민연맹 의장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대표였다가 군정청에 밀려나 서독 전독일문제 장관이 된 정치가
바이에른 함멜부르크의 제본공 출신으로 가톨릭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었고, 중앙당 소속으로 1933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나치에 맞선 저항운동에 가담해 1938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1944년 7월 20일 암살 기도 뒤 숨어 지냈다. 전후 소련 점령지구에서 기독교민주연합을 함께 세우고 레머와 함께 대표를 맡았으며,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공산당을 비판한 끝에 1947년 12월 레머와 함께 소련 군정청에 의해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서베를린으로 옮겼다.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에 맞서 중립 통일 독일을 바랐고, 1949~1957년 전독일문제 장관을 지냈다. 1961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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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중앙당 제국의회 의원
- 1938게슈타포에 체포
- 1945–1947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공동대표
- 1947소련 군정청에 의해 해임
- 1949–1957서독 전독일문제 장관
분단 베를린의 목소리가 된 사회민주주의자
“세계의 민족들이여, 이 도시를 보십시오. 이 도시와 이 민족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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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18–1919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 초대 의장
- 1921독일 공산당 베를린 지구 제1서기
- 1926–1931베를린 교통 담당 시의원
- 1931–1933마그데부르크 시장
- 1935–1946앙카라대학교 도시계획 강사·터키 정부 고문
- 1947베를린 시장 당선, 소련 점령당국의 승인 거부
- 1948–1953서베를린 시장, 1951년부터 통치시장
나치 수용소에서 10년을 버티고 전후 서독 사회민주당을 이끌며 공산당과의 통합을 거부한 지도자
서프로이센 쿨름에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었고, 191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다. 뷔르템베르크 주의회와 제국의회 의원으로 나치에 맞섰다. 1933년 7월 체포되어 활동 포기 서약을 거부하고 10년 동안 여러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1945년 하노버에서 당을 재건했고, 소련 점령지구의 그로테볼이 내세운 공산당과의 통합을 거부하며 공산당을 「붉게 칠한 나치」라 불렀다. 1946년 당 의장, 1949년 연방의회 첫 야당 지도자가 되어 중공업 국유화와 통일 독일을 요구하며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 정책에 맞섰다. 1952년 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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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사회민주당 입당
- 1930–1933제국의회 의원
- 1933–1943나치 강제수용소 수감
- 1946–1952사회민주당 의장
- 1949–1952연방의회 야당 지도자
통화 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설계한 서독 경제정치가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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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1922뉘른베르크 상과대학에서 경영학 수학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47비조네 ‘화폐·신용 특별기구’ 위원장
- 1948–1949비조네 경제행정청장
- 1949–1963서독 경제부 장관, 1957년부터 부수상 겸임
- 1963–1966서독 제2대 연방수상
- 1966–1967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1949–1977독일 연방의회 의원
1953년 6월 16일 정부 청사 앞에서 파업 노동자들 앞에 나섰던 동독 중공업 장관
헤센 라우터바흐의 구리 세공인 아들로 열일곱에 광부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 나가 1918년 병사평의회에 들었다.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1922년 공산당에 들어가 작센 지구당 정치 책임자와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감옥과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등 강제수용소에서 나치 시대를 버텼다. 전후 작센 경제·계획장관을 거쳐 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동독에서 공업장관과 중공업장관을 지냈다. 1953년 6월 16일 각료의 집 앞 군중 속에 들어가 책상 위에서 연설했으나 야유에 묻혔다. 1958년 울브리히트에게 「일탈적 태도」로 몰려 직책에서 밀려난 뒤 작가로 살았고, 197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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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독일 공산당 입당
- 1932–1933제국의회 의원
- 1933–1945투옥,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 1948–1949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9–1955공업장관, 중공업장관
- 1958「일탈적 태도」로 직책에서 밀려남
망명 사회민주당 간부로 돌아와 슈마허의 뒤를 이어 서독 사회민주당을 이끈 야당 지도자
마그데부르크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을 이끌었다. 1933년 5월 당 집행부와 함께 프라하로 망명해 망명 사회민주당(소파데)을 꾸렸고, 파리와 리스본을 거쳐 런던에서 전쟁을 보냈다. 1946년 2월 귀국해 하노버의 슈마허 사무소에서 일했고, 그해 부의장이 되어 당 조직과 국제 관계를 맡았다. 1952년 슈마허가 죽자 당 의장,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가 되었다. 1953년과 1957년 총리 후보로 아데나워에게 졌고, 1959년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뒷받침했다. 1963년 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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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사회민주당 입당
- 1928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 의장
- 1933프라하로 망명, 망명 사회민주당 집행부
- 1946사회민주당 부의장
- 1952–1963사회민주당 의장, 연방의회 야당 지도자
분단의 도시에서 화해의 정치를 만든 사회민주주의자
장벽이 세워진 뒤 그는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하지만,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는 살아가야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독재에 맞서 망명과 저항을 거친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였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장벽 건설 뒤 흔들린 도시의 사기를 지키고 서방의 책임을 촉구했으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총리로서는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냉전의 대립을 완화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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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1945나치 독재에 맞선 망명·저항 활동가
- 1948–1953베를린 주재 독일 사회민주당 대표
- 1957–1966서베를린 정무시장
- 1964–1987독일 사회민주당 의장
- 1966–1969외무장관·부총리
- 1969–1974독일연방공화국 연방총리
- 1976–1992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
몰타 회담 직전 10개항 통일 계획으로 독일 문제의 주도권을 쥔 총리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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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라인란트팔츠 주의회 의원 (최연소)
- 1969–1976라인란트팔츠 주총리
- 1973–1998기독교민주연합(CDU) 당수
- 1976–1982연방의회 CDU/CSU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
- 1982–1998독일연방공화국 총리
- 1989.11.28연방의회에서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 발표
- 1990.10.03독일 재통일
- 1998연방선거 패배, CDU 당수 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