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주키야 지방의 농가에서 태어나 마을 사람들이 집안을 부르던 이름 크레베를 필명으로 삼았다. 리비우에서 문헌학 박사 학위를 받고 바쿠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1919년 아제르바이잔 주재 영사가 되었다. 1922년부터 리투아니아 대학교에서 슬라브 문학을 가르쳤고 리투아니아 문학의 고전 작가로 꼽힌다. 1940년 6월 소련 점령 뒤 「인민정부」에 들어가 외무장관과 총리 직무를 맡았으나, 7월 1일 밤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에게 발트 국가들이 모두 소련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사임했다. 1941년 리투아니아 SSR 과학아카데미 초대 원장이 되었고, 1944년 7월 오스트리아로 떠났고, 1947년부터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가르치다 1954년 숨졌다.
1940년 소련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이고 대통령 권한을 쥐었다가 팔레츠키스에게 넘긴 마지막 총리
소농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국방장관(1919, 1926~1927), 클라이페다 지사, 카우나스 시장을 지냈다. 1939년 가을 빌뉴스 지역 정부 전권위원을 거쳐 11월 총리가 되었고, 1940년 6월 최후통첩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스메토나가 망명하자 대통령 직무를 맡았고, 이튿날 라디오로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알린 뒤 6월 17일 유스타스 팔레츠키스를 총리로 임명하고 물러났다. 리투아니아는 이 권한 장악을 위헌으로 본다. 한 달 뒤 스웨덴으로 탈출하려다 리가에서 붙잡혀 사라토프로 추방되었고 1941년 투옥되었다. 1954년 풀려났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이듬해 숨졌다.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고,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뒤 맨 먼저 리투아니아군에 입대했으며 1919년 1월 1일 빌뉴스 게디미나스 탑에 리투아니아 국기를 올렸다. 1925년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1926년 쿠데타에 맞서다 물러났다. 1927~1930년과 1938~1941년 독일 주재 공사를 지냈다. 1940년 소련 점령 뒤 베를린에서 나치와 손잡고 독립을 되찾으려는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을 세웠고, 1941년 임시정부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독일은 그를 가택연금했다. 1944년 리투아니아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각서를 보냈다가 체포되었다. 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회도서관에서 일했다. 반유대적 글 때문에 그를 기리는 이름 짓기는 논란이 되었다.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NATO·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그녀는 각료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리투아니아의 첫 독립 후 총리(1990~1991)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10개월을 이끌었다. 사유디스 창립 멤버로 리투아니아 SSR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으며, 부시·대처·콜 등 서방 정상을 만나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얻고 신생국의 외교적 존재감을 세웠다. 의장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과 달리 실용주의자였으나,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다음 날 사퇴했다. 닷새 뒤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했고, 그녀는 2004년 대선 결선에서 아담쿠스에게 근소하게 패한 뒤 농업장관을 지냈다.
1991년 1월 12~13일 밤 빌뉴스의 시설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가족과 함께 드루스키닌카이로 스스로 물러나 숨았고, 1월 13일 빌뉴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가 정부를 맡고 있었다.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1950년 2월 17일 아니크슈차이 지역의 파필리아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빌뉴스대학에서 경제수학을 전공하고 1981년 경제학 후보 학위를 받았으며, 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한 뒤 강의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에 서명했고, 1991년 1월 10일부터 13일까지 총리를 지냈다. 이후 경제장관과 1996~2000년 세이마스 의원, 2000~2017년 리투아니아 철도 간부로 일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0리투아니아 파필리아이에서 출생
1972–1984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기관 경제학자
1984–1989빌뉴스 공학건설대 경제학 강사, 1989년 부교수
1990–1992최고회의 의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 서명자
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1월 10일~13일)
1991–1992경제장관
1996–2000리투아니아 공화국 세이마스 의원, 경제위원회 위원장
2000–2017리투아니아 철도 개발담당 이사(2006년까지) 및 부총국장(2006~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