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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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예카테리나 콘스탄티노브나 브레시코-브레시콥스카야

Екатерин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Брешко-Брешковская

44년간 감옥과 유형을 견딘 '러시아 혁명의 할머니', 사회혁명당 공동 창립자

「케넌 씨, 우리가 유형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손자들도 유형지에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1885년 시베리아에서 조지 케넌에게.

귀족 출신으로 1861년 농노 해방에 참여한 뒤 1874년 '민중 속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1878년 '193인 재판'에서 정치범 최초의 여성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아 22년간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뎠으며, 조지 케넌의 르포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896년 석방 후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사회혁명당(SR)을 결성하고 전투조직 창설을 주도했으며, 1904년 미국 순회 강연으로 혁명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상징적 원로로 귀환하여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을 맡았으나, 볼셰비키 집권에 반대해 내전 중 백군을 지지했다. 1918년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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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1농노 해방에 참여, 가문 영지의 농민들을 위한 학교·도서관·협동조합 설립
  • 1873–1874키예프에서 급진적 지식인 공동체 결성;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가짜 여권으로 농촌 선전 활동
  • 1874–1878체포되어 페트로그라드 구치소 수감; '193인 재판'에서 유죄 판결, 카라 형무소 5년 카토르가형 — 여성 정치범 최초의 강제노역 선고
  • 1878–1896카라 카토르가 복역 후 바르구진·셀렌긴스크 유형; 1881년 탈주 실패로 4년 추가 카토르가형; 22년간 수감·유형 생활, 조지 케넌과의 인터뷰로 국제적 명성
  • 1896–1901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면으로 석방;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함께 민스크에서 나로드니키 운동 재건, SR 결성 준비
  • 1901–1903사회혁명당(SR) 공동 창립; 게르슈니와 함께 전국 비밀 조직 활동, 전투조직 창설 주도
  • 1903–1905체포 위협으로 제네바 망명; 1904년 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대회 참석 후 미국 순회 강연 — 약 1만 달러 모금, '바부시카' 별명 획득
  • 1905–1910러시아 귀환, 1905년 혁명 참여; 1908년 예브노 아제프의 배신으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910–1917시베리아 종신 유형 선고; 1913년 이르쿠츠크 탈주 시도 실패 후 야쿠츠크 독방 수감; 미국 여론 압력으로 이르쿠츠크 이감
  •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케렌스키의 환영;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 볼셰비키 집권 반대, 체코슬로바크 군단 개입 호소
  • 1918–1934블라디보스토크·일본 경유 미국 망명; 백군 지원 요청 활동; 파리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정착, 카르파티아 노동당 조직; 프라하 인근에서 사망

마르크 안드레예비치 나탄손

Марк Андреевич Натансон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좌파 사회혁명당까지, 반세기 러시아 혁명운동의 위대한 결집자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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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차이콥스키 서클 공동 창립
  • 1876플레하노프와 카잔 광장 시위 조직; '토지와 자유' 결성 주도
  • 1893'인민의 권리'당 창립
  • 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 선출
  • 1915–1916치메르발트·킨탈 회의 참가
  • 1917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 1918혁명적 공산당 공동 창립

파벨 보리소비치 악셀로드

Павел Борисович Аксельрод

대중 노동자 정당의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패배한 논쟁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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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8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 1876–18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 1881–18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 1900–19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 1903–19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 1906–19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 1917귀국,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10월 혁명 반대하고 재망명
  • 1918–1928멘셰비키 망명 지도부; 반볼셰비키 노선 견지; 베를린에서 사망

게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

Георгий Валентинович Плеханов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제자들의 혁명에 반대하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플레하노프는 말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아직 사회주의라는 밀빵을 구울 밀가루를 빻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이식한 사람. 레닌 세대 전체가 그의 책으로 배웠다. 그러나 1917년 37년 만에 귀국한 그는 10월 봉기를 「역사의 단계를 무시한 시기상조」라 규탄했다. 제자들이 세운 정권 아래에서 결핵으로 죽었고, 장례식은 반(半)야당 시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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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1880「토지와 자유」 활동가, 망명
  • 1883제네바에서 「노동해방단」 창립: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시작
  • 1889–1914제2인터내셔널의 러시아 대표 이론가
  • 1903당 분열에서 점차 멘셰비키 쪽으로
  • 191737년 만의 귀국, 10월 봉기 반대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치헤이제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Чхеидзе

이중권력 시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혁명적 수호주의의 얼굴

「인민과의 직접적 소통을 잃자 그는 저항력을 상실했다. 거대한 떡갈나무도 폭풍에 뽑혀 자양분을 공급하던 흙에서 분리되면 시든다. 치헤이제도 그렇게 갔다」 — 이라클리 체레텔리, 1926년 장례식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 멘셰비키. 『공산당 선언』을 그루지야어로 처음 옮겼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이중권력을 주재했으나 10월혁명에 반대했고, 그루지야 독립을 이끌며 파리 망명정부 수반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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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메사메다시 가입, 『공산당 선언』 그루지야어 초역
  • 1898–1907바투미 시의회 의원·시 병원 감독관, RSDLP 입당(1898), 멘셰비키(1903~)
  • 1907–19173·4대 두마 의원(트빌리시 현), 멘셰비키 원내대표
  • 1917.02–0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VTsIK 의장(6월~)
  • 1918–1921자캅카스 세임 의장, 그루지야 제헌의회 의장, 독립선언 서명
  • 1919파리 강화회의 그루지야 대표
  • 1921–1926프랑스 망명, 그루지야 망명정부 수반

알렉산드르 리보비치 파르부스

Александр Львович Парвус

영구혁명론을 공동 창안하고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한 '혁명의 상인'

1917년 12월, 레닌은 파르부스의 귀국 요청을 거부하며 답했다: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독일 사민당(SPD)의 저널리스트로, 1904~1905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공동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 자금으로 러시아 혁명 조직망을 구축했으며, 1917년 4월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집권 후 레닌은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며 그의 귀국을 거부했고, 파르부스는 독일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원칙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논란적인 인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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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바젤대 박사학위, 독일 사민당 입당
  • 1894–1897『디 노이에 차이트』 필진, '파르부스' 필명 채택
  • 1897–1898『젝지셰 아르바이터차이퉁』 편집장
  • 1900레닌·마르토프와 『이스크라』 창간 지원
  • 1904–1905트로츠키와 영구혁명론 공동 정식화
  • 1905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전략가, 「재무선언」 기초
  • 1915독일 외무부에 러시아 혁명 계획 제출, 코펜하겐 작전망 구축
  • 1917레닌의 '봉인열차' 귀환 주선

예브노 피셸레비치 아제프

Евно Фишелевич Азеф

오흐라나의 월급을 받으며 혁명 테러를 지휘한 이중간첩

1902년 6월 아제프는 오흐라나에 500루블을 테러 활동에 기부했다고 보고하며 '당 내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적었다. 경찰과 혁명 양쪽에 동시에 장부를 올린 셈이었다.

사회혁명당(SR) 전투조직의 수장으로 플레베 내무장관(1904)과 세르게이 대공(1905) 암살을 지휘하며 혁명 테러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1893년부터 오흐라나의 유급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료들을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은 이중간첩이었다. 게르슈니의 후계자이자 보리스 사빈코프의 상관으로서 전투조직을 중앙집권적 정예 부대로 재편했고, 암살 성공으로 쌓은 신임을 배신의 밑천으로 삼았다. 1908년 부르체프에게 정체가 폭로되어 SR당 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며, 독일로 도주한 아제프는 혁명운동과 비밀경찰 사이 가장 어두운 접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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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9독일에서 전기공학 수학, 오흐라나 정보원 활동 시작
  • 1899러시아로 귀국, 사회혁명당 운동에 합류
  • 1901–1902통합 SR당 창립 참여, 게르슈니의 부관으로 전투조직 합류
  • 1903–1908SR 전투조직 수장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조직
  • 1905세르게이 대공 암살 조직
  • 1906가폰 신부 암살 지시
  • 1908부르체프에게 정체 폭로, 독일로 도주
  • 1909–1918베를린에서 알렉산더 노이마이어 가명으로 은거

그리고리 안드레예비치 게르슈니

Григорий Андреевич Гершуни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을 창설한 '혁명의 호랑이'

1903년 5월 키예프에서 체포된 직후, 게르슈니는 저항하지 않고 헌병과 검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수갑과 족쇄에 입을 맞추었다.

사회혁명당의 공동 창립자이자 전투조직의 창설자·초대 지도자로서, 1902년 시피야긴 내무장관 암살을 필두로 1902~1903년 러시아 제국을 충격에 빠뜨린 정치 테러를 기획·지휘했다. 유대인 가정 출신의 약제사·세균학자로서 민스크에서 문화계몽 활동을 펼치다 합법적 수단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업 혁명가로 전향, '혁명의 호랑이'라 불리며 제국 최대의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1903년 체포돼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06년 아카투이 카토르가에서 양배추 통에 숨어 탈출해 중국·일본·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귀환했으며, 사후에 부하였던 예브노 아제프가 오흐라나 첩자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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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키예프대학교 약학 과정 수학, 학생운동 참여로 첫 체포
  • 1898–1900민스크에서 세균학 연구소 개설, 학교·문화계몽 활동, '노동자당' 가입·지도
  • 1901–1902분산된 사회혁명주의 그룹들을 단일 사회혁명당으로 통합 주도, 전투조직 창설
  • 1902–1903전투조직 초대 수장으로서 시피야긴·보그다노비치 암살, 오볼렌스키 암살 미수 기획·지휘
  • 1903–1904키예프에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군사재판 사형 선고 후 종신형 감형
  • 1904–1906슐리셀부르크 요새 복역 후 아카투이 카토르가 이감
  • 1906아카투이 카토르가에서 양배추 통에 숨어 탈출, 중국·일본·미국 경유 유럽 귀환
  • 1907–1908SR 중앙위원 선출, 탄포르페 당대회 의장, 취리히에서 사망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불가코프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Булгаков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러시아 러시아 1871–1944 ○ 사망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버리고 소피아론 신학을 세운 사제 철학자

네 살배기 아들 이반의 장례식에서 불가코프는 '하느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깨달았다'고 기록했고, 이 신비체험을 정교회 귀환의 결정적 계기로 삼았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이자 경제학자로, 법적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출발해 관념론을 거쳐 사제 서품에 이르는 20세기 러시아 지성사의 대표적 전향 궤적을 그렸다. 1890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저술로 명성을 얻었으나, 《자본주의와 농업》(1900)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를 발견하고 칸트와 솔로비요프 철학을 경유해 교회로 복귀했다. 1909년 《이정표》에 기고한 「영웅주의와 금욕주의」에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무신론적 혁명주의를 비판했고,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된 후 파리에서 성 세르기우스 정교신학원을 공동 설립하여 소피아론 신학 체계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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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정치경제학 강사
  • 1895–1900법적 마르크스주의 대표 저술가, 카우츠키·베벨·플레하노프와 교류
  • 1901–1906키예프 공대 교수, 키예프대학 사강사
  • 1903《마르크스주의에서 관념론으로》 출간
  • 1906–1918모스크바대학 사강사, 모스크바 상업대학 교수
  • 1907제2국가두마 의원 (오룔현, 무소속 기독교 사회주의자)
  • 1909《이정표》에 「영웅주의와 금욕주의」 기고
  • 1917–1918전러시아 공의회 위원, 최고교회평의회 위원, 사제 서품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
  • 1925–1944파리 성 세르기우스 정교신학원 공동 설립자·교수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체르노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Чернов

사회혁명당의 창립자이자 수석 이론가

1918년 1월 18일, 타브리다 궁전.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체르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민주적 의회 개회를 선언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이 퇴장한 후에도 회의는 계속되었고, 토지 사회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새벽 4시 40분, 무장한 수비대가 "경비가 피곤하니 회의를 끝내 달라"며 접근했다. 체르노프는 차기 회의 일정을 정하고 휴회를 선언했다. 그날이 마지막 회기였다.

나로드니키 농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토지 사회화를 사회혁명당(PSR) 강령으로 정립한 수석 이론가. 1917년 제헌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볼셰비키의 의회 해산 후 32년간 망명하며 저술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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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나로드니키 서클에서 활동, 1894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900농업사회주의동맹 공동 창립, 농민 대상 불법 출판물 배포
  • 1902사회혁명당(PSR) 공동 창립, 중앙위원, 기관지 《혁명 러시아》 편집자
  • 1905–1907제1차 당 대회 주도, 제2두마 사회혁명당 원내대표, 혁명 진압 후 재망명
  • 1917.05–08임시정부 농업장관, 토지개혁 지연으로 농민 불만 고조
  • 1918.01제헌의회 의장 선출, 토지 사회화법 통과, 볼셰비키에 의해 의회 강제 해산
  • 1918–1920반볼셰비키 투쟁, 사마라 코무치, 모스크바 지하 활동
  • 1920–1952에스토니아·독일·프랑스·미국 망명, 회고록 《폭풍 전야》 집필

이반 플라토노비치 칼랴예프

Иван Платонович Каляев

폭탄을 든 혁명 시인, 마차 속 가족을 보고 폭탄을 거둔 '윤리적 테러리스트'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나는 피고가 아니라 당신들의 포로다. 우리는 두 진영이다.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이자 시인으로, 1905년 2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의 숙부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으로 암살한 인물. 이틀 전, 대공의 아내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 투척을 멈춘 그의 행동은 '윤리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낳았고,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다 사회민주당의 점진주의에 실망하여 SR 전투조직에 합류했으며, 플레베 암살 감시에도 참여했다. 재판에서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법정에 선언한 후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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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9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가입 (1898)
  • 1899학생 파업 주도로 예카테리노슬라프 유배
  • 1902베를린에서 혁명 문헌 운반 중 체포, 러시아로 송환되어 야로슬라블 유배
  • 1903제네바에서 SR 전투조직 가입 (아제프 휘하)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작전 감시팀 참여
  • 1905.02.04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세르게이 대공 폭탄 암살
  • 1905.04.05원로원 특별재판에서 전제정치 고발 연설, 사형 선고
  • 1905.05.23슐리셀부르크 요새 교수형 집행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압크센티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Авксентьев

SR당 창건자이자 콜차크에게 전복된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마지막 의장

트로츠키는 그를 두고 '정치가의 완전한 캐리커처였다. 오룔의 여자 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는 매력적인 교사 — 그게 전부다'라고 평했다.

SR 창립자이자 우파 지도자로서,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SR 분파를 이끌었고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과 예비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내전기에는 통일된 반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의 정점으로서, 우파 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11월 콜차크 쿠데타로 체포·추방되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망명 언론 활동을 했다. 그의 정치 궤적은 러시아 혁명기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장한 좌우 세력 사이에서 붕괴한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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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SR 분파 지도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07SR 중앙위원 선출; 오브도르스크 유형 후 해외 탈출
  • 1907–1917파리 망명 중 SR 기관지 《즈나먀 트루다》 편집
  • 1917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내무장관
  • 1917전러시아 민주회의·예비의회(임시평의회) 의장
  • 1918우파 국가회의 의장,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수반
  • 1918–1940파리 망명, 프리메이슨 활동, 《소브레멘니예 자피스키》 발행
  • 1940–1943뉴욕에서 잡지 《자 스보보두》 발행

미하일 이사코비치 리베르

Михаил Исаакович Либер

혁명을 지키려다 혁명의 방향과 충돌한 멘셰비키

1917년 6월 위기 뒤 그는 볼셰비키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며 혁명의 방어를 주장했다.

미하일 리베르는 본명 미하일 골드만으로, 유대인 노동운동의 조직인 분트에서 성장해 멘셰비키의 주요 지도자가 된 혁명가였다. 그는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분트의 조직 자율성을 주장했고, 1917년에는 혁명적 방어주의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임시정부와의 연립을 옹호했으며, 6월 10일 시위 위기 뒤 볼셰비키에 대한 강경 조치를 요구하는 다수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0월 봉기와 볼셰비키와의 협상에 반대한 그는 이후 체포와 유배를 거듭했고, 1937년 처형된 뒤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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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입당
  • 1897–1902분트 창립 세대의 활동가, 1902년 중앙위원
  • 1903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 분트 대표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노동자대표 집행위원
  • 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
  • 1917.02–06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분트 우파 지도자
  • 1917.06–10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상임위원회 위원·부의장
  • 1917.09–10러시아 공화국 임시평의회, 예비의회 위원
  • 1922–1923멘셰비키 중앙위원회 국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젠지노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Зензинов

망명과 기록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킨 사회혁명가

유배지 루스코예 우스티예에 도착한 젠지노프는 일기에 썼다: '이곳은 물론 러시아지만, 17세기, 어쩌면 16세기의 러시아다.'

블라디미르 젠지노프는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중앙위원이자, 세 차례의 시베리아 유배를 북극 시베리아의 민족지·조류학 연구로 바꿔낸 언론인이었다. 1918년 사마라 제헌의회 위원회와 우파 디렉토리에서 볼셰비키와 콜차크 사이의 민주적 대안을 지지하다가 옴스크 쿠데타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기록하는 망명 언론인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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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사회혁명당 입당
  • 1905–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 활동, 모스크바 봉기 참여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
  • 1917–1918제헌의회 의원, 사마라 제헌의회 의원위원회 위원
  • 1918우파 디렉토리 위원
  • 1918–1919옴스크 쿠데타 뒤 체포·중국 추방
  • 1919–1939유럽 사회주의 망명 언론 활동
  • 1940–1953뉴욕에서 망명 언론인·회고록 작가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갈려 나간 웅변가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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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7두마 의원(트루도비키), 정치재판 변호사로 명성
  • 1917.03임시정부 법무장관, 정치범 사면, 사형 폐지
  • 1917.05육해군장관, 6월 공세 강행과 실패
  • 1917.07–10총리, 코르닐로프 사건, 10월에 실각
  • 1918–1970파리·뉴욕 망명, 저술과 강연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주린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зурин

모스크바 무장봉기 전투지휘자이자 최대주의자당의 창립 지도자

타간카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며 남긴 마지막 말: "어머니께 내가 평온하게 죽었다고 전해주게."

사회혁명당(PSR)에서 분리된 급진좌파 '최대주의자'(SSRM)의 창립 지도자 중 한 명으로, 1905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당시 카잔 철도의 전투부대를 지휘했으며, 1906년 3월 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에서 87만 5천 루블을 탈취한 유명한 '엑스'를 주도했다. 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학생으로 1904년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월 선언 사면으로 풀려나 즉시 무장투쟁에 복귀했으며, PSR의 단계적 혁명론을 거부하고 전면적 사회화와 '노동자 공화국'을 요구한 최대주의자들의 실천적 핵심이었다. 1906년 8월 체포 시 무장 저항하다 중상을 입고 며칠 만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24세의 나이로 타간카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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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4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입학, 사회혁명당(PSR) 입당
  • 1904모스크바 선전활동으로 체포, 7년형 선고
  • 1905.1010월 선언 사면으로 석방
  • 1905.12모스크바 무장봉기 — 카잔 철도 전투부대 지휘, 치스티예 프루디·프레스냐 전투 참가
  • 1906.03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 탈취 작전 지휘 (87만 5천 루블)
  • 1906사회혁명당-최대주의자 동맹(SSRM) 공동 창립
  • 1906.08–09아크바리움 정원 인근에서 체포 시 무장저항·중상, 군법회의 사형선고, 타간카 감옥 교수형

아브람 라파일로비치 고츠

Абрам Рафаилович Гоц

사회혁명당 전투조직 출신으로 1917년 제1차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낸 지도자

1907년 체포되어 8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시베리아 치머발트파와 함께 반전 국제주의 활동을 했다.

모스크바의 유대계 차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형 미하일 고츠를 따라 사회혁명당에 들어갔고, 1906년 당의 전투조직에 가담했다. 1907년 체포되어 8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1915년 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로 유배되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의 지도자가 되었고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22년 SR 재판에서 주피고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924년 감형되고 1925년 울리야놉스크로 유배되었다. 1937년 다시 체포되어 1939년 25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라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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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SR 전투조직 가입, 테러 계획 참여
  • 1907체포, 8년 카토르가(중노동형) 선고
  • 1915–1917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 유형지 정착, '시베리아 치머발트파' 활동
  • 1917.03–06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 지도자, 집행위원
  • 1917.06–10제1차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의장
  • 1917.10–1918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 의장, 융커 봉기 지휘
  • 1918–1920내전기 SR 무장분대 조직, 볼셰비키·백군 양면 전선
  • 1922SR 재판 주피고인, 사형 선고 후 감형
  • 1925–1937심비르스크(울리야놉스크) 유형, 경제계획 업무
  • 1937–1940대숙청 중 체포, 1939년 6월 20일 25년형 선고, 1940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라게리에서 사망

마트베이 이바노비치 스코벨레프

Матвей Иванович Скобелев

4월 위기 속 군중을 달래러 보내진 멘셰비키 노동장관

1917년 4월 20일, 밀류코프의 각서에 격분한 15,000명의 무장 군중이 마린스키궁 앞에 집결하자, 고츠와 함께 파견된 스코벨레프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바쿠의 유복한 몰로칸 상인 가문 출신으로, 빈에서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을 도우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2월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에 올랐고, 4월 위기 때 고츠와 함께 마린스키궁 앞 군중을 진정시키러 파견되었으며, 5월 5일 제1차 연립정부 노동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혁명에 반대했으나 1922년 귀국·입당하여 대외무역 분야에서 일했고, 대숙청 속에 1938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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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바쿠 노동자 파업 지도
  • 1906–1912빈 망명,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 빈 공과대학 졸업(1912)
  • 1912–1917제4두마 의원(자캅카스 러시아인 대표), 멘셰비키파
  • 1917.02–05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 집행위원
  • 1917.05–09임시정부 노동장관, VTsIK 부의장(6월~)
  • 1919–1920바쿠 거주, 적군 식량 지원 활동
  • 1920–1925프랑스·영국 망명, 비공식 소련 무역대표
  • 1925–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국가계획위원회·전연방라디오위원회 근무

블라디미르 사벨리예비치 보이트인스키

Владимир Савельевич Войтин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계 1885–1960 ○ 자연사

혁명과 경제학 사이에서 방향을 바꾼 사회민주주의자

북부전선에서 병사들이 더는 공세를 원하지 않는 현실을 케렌스키에게 보고했다.

블라디미르 보이트인스키는 러시아 혁명가이자 경제학자로, 노동운동과 시장 이론을 함께 탐구했다.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과 시베리아 유형을 거쳐 1917년에는 멘셰비키로 전향해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사이의 협력을 모색했다. 북부전선 위원으로서 6월 공세 준비에 관여했지만, 병사들의 전쟁 피로와 명령 거부를 직접 마주하며 혁명적 군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10월 이후 망명한 그는 국제 노동·경제 연구자로 활동하며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의 길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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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부르크위원회 활동, 실업자 소비에트 조직
  • 1908–1912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체포, 강제노동형과 시베리아 유형
  • 1914–1916시베리아 짐머발트파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활동
  • 1917.04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 중앙집행위원회 기관지 편집진
  • 1917.06–10북부전선 위원, 6월 공세 준비와 전선 정치 업무 담당
  • 1918–1935그루지야 민주공화국 대표·유럽 사회주의 언론인, 국제노동기구 활동
  • 1935–1960미국 인구조사국·사회보장위원회 등에서 경제·노동 연구
  • 1960워싱턴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스테파노비치 안토노프

Александр Степанович Антонов
좌파 사회혁명당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러시아 제국 →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인 1889–1922 ✕ GPU와 총격전 중 사살

봉기의 이름이 된 사나이: 탐보프 '안토놉시나'의 사회혁명당 지도자

「권력은 차르의 사형집행인들 손에서 빼앗아, 공산당 사형집행인들 패거리에게 넘기라고 빼앗은 게 아니다」 — 봉기 중 배포한 전단에서

차르 치하에서 20년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복역한 사회혁명당 전투원.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을 지냈으나, 볼셰비키의 식량강제징발과 지방 통치에 반발하여 1918년 지하로 잠적했다. 1920년 8월 탐보프 농민봉기를 장악해 약 20개 연대 규모의 유격군을 조직하고 '노동농민동맹'을 바탕으로 한 대안정부를 수립했으며, 봉기는 그의 이름을 따 '안토놉시나'로 불렸다. 1922년 6월 GPU 부대에 포위되어 동생 드미트리와 함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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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사회혁명당 입당, 무장 강탈(엑스) 참여
  • 1908인자비노 역 급습 및 다수의 무장 강탈
  • 1909체포,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 감형 — 슐리셀부르크·블라디미르 중앙형무소
  • 1917사면 석방 — 탐보프 시 민병대 부책임자 →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
  • 1918–1920지하로 잠적, 볼셰비키 당국에 맞서 전투부대 편성
  • 1920–1921탐보프 봉기 주작전참모장 — 2개 군, 약 20개 연대 지휘
  • 1921–1922봉기 패배 후 은신; GPU에 포위되어 사살

표트르 토크마코프

Пётр Токмаков

탐보프 연합 파르티잔 군 사령관이자 근로농민동맹 의장을 지낸 농민 출신 장교

탐보프주 키르사노프군 이노콥카 마을에서 태어나 1904년 러일전쟁 때 징집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장기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갈리치아에서 싸워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과 메달을 네 등급 모두 받았고, 1915년 장교로 임관해 1917년 중위에 올랐다. 브레스트 강화 뒤 고향에서 민경대원으로 일하다 1918년 유격대를 꾸렸다. 1920년 6월 제2봉기군 사령관, 11월 탐보프 연합 파르티잔 군 사령관이 되었고 근로농민동맹 의장도 겸했다. 러시아어 출처는 그가 1921년 2월 28일 보고슬롭카 마을 근처 교전에서 전사했다고 쓰지만, 영어 출처는 그의 죽음을 6월 무렵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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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러일전쟁 때 징집, 장기 복무
  • 1915장교 임관
  • 1917중위
  • 1918고향 이노콥카에서 유격대 조직
  • 19206월 제2봉기군 사령관, 11월 탐보프 연합 파르티잔 군 사령관·근로농민동맹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