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마르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арр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그루지야 1865–1934 ○ 뇌졸중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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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학부 졸업 및 강사
  • 1912제국 학술원 정회원
  • 1921야페트 연구소(후일 언어·사고 연구소) 설립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공도서관 관장
  • 1930공산당 입당 (제국 학술원 출신 최초·유일)
  • 1930–1934소련 학술원 부원장

필리프 이에세예비치 마하라제

ფილიპე იესეს ძე მახარაძ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68–1941 ○ 자연사

그루지야를 온건하게 소비에트화하려다 스탈린에게 쫓겨난 볼셰비키 원로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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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903캅카스 연합위원회 RSDLP 위원, 1905년 혁명 참여
  • 1907–1915자캅카스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도
  • 1917『캅카스 노동자』 편집자, RSDLP(b) 캅카스 지역위원회 위원
  • 1918–1920멘셰비키 정부하 그루지야에서 지하활동
  • 1921.02–07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온건 노선으로 스탈린에게 해임
  • 1922–1938그루지야 중앙집행위 의장,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고스플란 의장, 자캅카스 중앙집행위 의장
  • 1938–1941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소비에트 부의장

폴리카르프 구르게노비치 므디바니

Поликарп Гургенович Мдивани

레닌의 마지막 싸움에서 스탈린의 중앙집권화에 맞선 그루지야 공산주의자

「나를 총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사지를 찢겨야 한다! 11군을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나였다. 나는 내 민족을 배신했고, 스탈린과 베리야라는 이 변종들이 그루지야를 노예로 만들고 레닌의 당을 무릎 꿇리는 것을 도왔다」 — 1937년 NKVD 재판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캅카스 혁명운동과 내전에서 활동했다. 1922년 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스탈린의 '자치화' 계획에 반대하며 그루지야 공화국의 연방 내 주권을 주장했고, 이 갈등은 레닌이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를 비판하며 므디바니 측을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출당·유배 후 복당했으나 대숙청 와중인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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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캅카스에서 혁명활동
  • 1918–1919제11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 1920북페르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임무 수행
  • 1921주터키 RSFSR 전권대표,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 1922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연방 동의회 의장 — '그루지야 사건'에서 스탈린에 반대
  • 1923좌익 반대파 합류, 소비에트 최고경제회의 양보위원회 위원
  • 1924–1928소비에트 연방 주프랑스 무역대표
  • 1928–1931반대파 활동으로 출당·유배, 1931년 복당 신청 후 복권
  • 1931–1936그루지야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경공업인민위원·인민위원회 제1부의장
  • 1937체포, '트로츠키주의 첩보-파괴 센터' 혐의로 사형, 7월 10일 총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78–1953 ○ 자연사

그루지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당과 국가를 장악한 지도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30분,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리러 크렘린에 왔다. 주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독일의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길게 침묵했다.

1878년 12월 18일(구력 12월 6일) 그루지야 고리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청년기에 마르크스주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프라우다』를 편집했고, 강탈과 납치로 볼셰비키 자금을 조달하며 체포와 국내 유형을 거듭했다. 1917년 10월 혁명 뒤 정치국에 들어가 1922년 소련 성립을 함께 이끌었고, 같은 해 서기장에 올랐다. 이후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 1932∼33년 기근과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쳤다. 1953년 3월 5일 쿤체보 다차에서 사망했다. 일생 동안에는 1879년 출생으로도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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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19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19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1938대숙청
  • 1941–19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19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카모

Симон Тер-Петрося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82–1922 ✕ 교통사고

볼셰비키의 전설적 무장약탈자, 광기를 연기해 사형을 네 번 피한 혁명가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트빌리시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34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트빌리시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트빌리시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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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RSDLP 입당, 트빌리시 위원회 청년조직 지도, 지하인쇄소 조직
  • 1903–1905첫 체포 후 탈옥, 1905년 혁명 참가, 무기 밀반입
  • 1907트빌리시 은행마차 습격 지휘 — 34만 루블 탈취, 레닌에게 전달
  • 1907–1911베를린 체포, 3년간 광기 연기로 사형 면함, 트빌리시 정신병원 탈출
  • 1912–1917코조리 습격 실패 후 체포, 4건 사형선고 →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20년형
  • 1918–1920캅카스·남러시아 볼셰비키 지하조직 재건, 바쿠 봉기 준비
  • 1920–1922참모아카데미 수학, 대외무역·그루지야 재무인민위원부 근무

아카키 비사리오노비치 코바히제

Акакий Виссарионович Кабахидзе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89–1937 ✕ 처형됨

그루지야 문제의 옛 볼셰비키

1922년 그는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시점은 다투어진다. 한 보도는 10월 20일로 적고, 영문 서술은 11월로 본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하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던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грузин, 거주지 트빌리시로 적는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사건 시점은 10월설과 11월설로 갈린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복권되었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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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0 또는 11오르조니키제와 충돌해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음
  • 1922.12레닌의 민족문제 비판과 연결된 인물
  • 1904당 입당, 구볼셰비키협회 회원
  • 192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
  • 1936–1937체포(1936)되어 사형 선고 후 처형(1937)
  • 1957복권됨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혁명의 확성기이자 풍자자

1930년 1월 21일, 레닌 추도식이 열린 볼쇼이 극장에서 마야콥스키는 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3부를 낭독했다. 정부 관람석에 앉은 스탈린은 시인을 향해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석 달 뒤 마야콥스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가장 큰 목소리였던 그는 혁명 뒤 ROSTA 포스터와 장시로 새 체제의 언어를 빚었다. 관료주의를 겨눈 후기 풍자는 문단과 국가의 냉대를 받았고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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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러시아 미래주의 운동과 『바지를 입은 구름』
  • 1917–1921혁명시와 ROSTA 창문 선전포스터 제작
  • 1923LEF 창간과 전위예술 활동
  • 1924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발표
  • 1925–1926멕시코·쿠바·미국 여행과 미국시 연작
  • 1929–1930희곡 『빈대』·『목욕탕』과 자살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 라코바

Нестор Аполлонович Лакоб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3–1936 ✕ 독살

스탈린의 절친에서 베리야의 첫 희생자로: 압하지야의 붉은 군주

스탈린이 라코바에게 했다는 말 — '나는 코바, 너는 라코바.' 1936년 12월 27일 밤, 베리야의 저택에서 저녁 식사 후 극심한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운전기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베리야가 나를 죽였다'고 속삭였다고 증언한다.

압하지야 볼셰비키 지도자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하며 농업과 흑해 휴양지 개발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절친이었으나 베리야에게 독살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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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트빌리시 신학교에서 혁명 선동으로 제적, 바투미에서 RSDLP(b) 입당
  • 1917–1918압하지야 농민 무장대 '키아라즈' 조직, 수후미 군사혁명위 부의장
  • 1920–1921바투미 지하 볼셰비키 조직 지도, RSFSR-터키 모스크바 조약 협상 참여
  • 1922–1930압하지야 SSR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 1930–1936압하지야 A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