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邓小平개혁개방으로 중국의 궤도를 바꾼 실권자
1978년 이후의 전환은 계획경제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운동을 경험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다. 문화대혁명 시기 두 차례 실각 뒤 복귀해 1978년부터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을 주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학습
- 1978–1992중국의 사실상 최고지도자·개혁개방 주도
- 1979미국 방문과 대외 개방의 상징적 출발
개혁개방으로 중국의 궤도를 바꾼 실권자
1978년 이후의 전환은 계획경제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운동을 경험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다. 문화대혁명 시기 두 차례 실각 뒤 복귀해 1978년부터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을 주도했다.
'새장 경제' 개념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설계한 공산당 원로
'새장은 계획이고, 그 안에서 새[경제]는 마음껏 날 수 있다.' — 1982년, 시장과 계획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핵심 구상을 정식화하며
중국 공산당 제1·2세대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다. 상하이 상무인서관 식자공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대장정과 옌안 정풍운동을 거치며 당 조직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1949년 이후 중앙재경위원회 주임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고 물가 안정과 통일 재정을 확립했으며, 대약진 운동 붕괴 이후 저우언라이·덩샤오핑과 함께 경제 재건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는 '새장 경제' 개념(시장은 계획이라는 새장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야 한다)을 정식화하며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제2의 실력자로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는 보수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초대 재정부장이자 「61인 반도 사건」의 당사자, 개혁기에 보수적 원로로 돌아온 인물
1940년 8월 26일 팽덕회와 좌권이 이 작전을 「백단대전」으로 명명했으나, 그 개전은 뒤에 모택동과의 노선 갈등 속에 팽덕회를 겨눈 죄목으로 되살아났다.
산시 출신으로 1936년 당의 지시로 국민당 감옥에서 「전향서」에 서명하고 출옥한 61명 중 한 사람이었고, 이 일은 문화대혁명에서 「61인 반도 집단」 사건으로 되살아나 그를 12년 감금으로 몰았다. 건국 후 초대 재정부장으로 세제와 통화 통일을 맡았고 1953년 「신세제」 논란으로 마오의 비판을 받았다. 1979년 복귀해 부총리와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으로 「팔대 원로」의 한 사람이 되어 1987년 후야오방 해임 회의를 주재했다. 2007년 98세로 사망했으며 아들이 보시라이다.
문화대혁명 피해자의 복권과 사상 해방을 이끈 개혁파 총서기, 그의 죽음이 1989년 시위를 불렀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다음 날 비공식 추모 집회가 정부에 그의 업적 재평가를 요구했고, 일주일 뒤 10만여 학생이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했다.
후난 출신으로 열네 살에 소년 홍군이 되어 대장정에 참여했고 건국 후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으며 1977년 중앙조직부장으로 수백만 건의 억울한 사건을 재심해 복권시켰고, 1978년 「진리 기준」 논쟁을 조직해 덩샤오핑의 복귀를 뒷받침했다. 1981년 당 주석, 1982년 총서기로 개혁개방을 추진했으나 1986년 말 학생 시위 뒤 「자산계급 자유화」에 관대했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사임을 강요당했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추모 집회가 톈안먼 시위로 번졌다.
쓰촨의 농업개혁에서 총서기까지, 1989년 계엄에 반대해 15년 연금으로 생을 마친 개혁가
1980~1987년 총리, 1987년 총서기로 정치체제 개혁을 맡았으나 1989년 톈안먼 시위 지지로 실각해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에 있었다
허난 출신으로 광둥의 지방 간부였다가 문화대혁명에서 실각했고, 1975년 쓰촨 제1서기로 복귀해 농가생산책임제와 기업 자율화 실험으로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으라」는 말을 낳았다. 1980년 총리, 1987년 총서기가 되어 가격개혁과 정치체제 개혁 구상을 추진했다. 1989년 5월 학생 시위에 대한 계엄에 반대해 광장에서 학생들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 뒤 실각했고, 이후 2005년 죽을 때까지 베이징 자택에 연금되었다. 몰래 녹음한 회고록이 사후 홍콩에서 출간되었다.
「네가 일을 맡으면 내가 안심한다」는 마오의 후계자, 4인방을 체포하고 덩샤오핑에게 밀려났다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 사후 한 달 만에 화궈펑은 예젠잉·왕둥싱과 함께 중난하이에서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그러나 1981년 덩샤오핑에게 실권을 넘겼다.
산시 출신으로 후난에서 지방 간부로 일하다 마오의 눈에 들었고,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사후 총리 대행, 4월 톈안먼 사건 뒤 제1부주석 겸 총리가 되었다. 마오 사후 10월 예젠잉·왕둥싱과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마오 주석의 결정은 모두 지키고 지시는 모두 따른다」는 양개범시로 정통성을 세우려 했으나 1978년 진리 기준 논쟁과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에게 주도권을 잃었고 1980~1981년 총리와 당 주석직을 내놓았다. 2002년까지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1989년 상하이에서 발탁된 「핵심」, 톈안먼 이후의 중국을 시장경제와 「3개 대표」로 이끈 총서기
1989년 톈안먼 진압 뒤 상하이에서 발탁된 타협의 인물로, 3세대의 「핵심」이 되어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장쑤 출신 전기공학자로 소련 자동차공장에서 연수했고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 서기가 되었다. 1989년 시위 때 상하이의 자유주의 신문 『세계경제도보』를 폐간하고 시위를 큰 유혈 없이 수습해 6월 자오쯔양 대신 총서기로 발탁되었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당의 목표로 삼았고 국유기업 개혁과 WTO 가입, 홍콩 반환을 이끌었다. 2002년 총서기, 2004년 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나며 「3개 대표」론으로 자본가의 입당을 열었다. 2022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1989년 5월 계엄을 선포한 총리, 「베이징의 도살자」라 불린 저우언라이의 양자
수력발전 기술자에서 1987년 총리가 되어 1989년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3~4일 군사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로 지목된 인물이다.
쓰촨 출신으로 아버지가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저우언라이 부부의 보호 아래 자랐다. 모스크바 동력학원에서 수력발전을 배워 전력 관료로 성장했고 1987년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1989년 5월 18일 학생 대표들과의 텔레비전 대화가 결렬된 뒤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4일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가 되었다. 총리 재임 중 삼협댐 건설을 밀어붙였고 1998~200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2019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