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트의 아이들』 속 스탈린은 말한다: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이 한 문장에 한 시대의 냉혹한 논리가 응축되어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자란 유대계 소비에트 작가. 1933년 NKVD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3년 유배, 전쟁 중에는 전차부대 지휘관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1960년대에 완성한 『아르바트의 아이들』은 20년 넘게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87년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로 마침내 빛을 보아 스탈린주의 청산의 문학적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 가문의 나치 점령 하 투쟁을 그린 『무거운 모래』(1979)는 러시아어 최초의 홀로코스트 소설로 평가받았다.
「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잠자리에 들 때 벙어리였다가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열이 풀리던 시절,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금기의 경계를 설명하며.
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출신으로 『이즈베스티야』 특파원과 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 1986년 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에 임명되어 3만 5천 부의 영문 선전지를 8개 언어 300만 부의 글라스노스트 기관지로 키웠다. 스탈린 숙청, 아프간 전쟁, KGB 활동 등 금기를 잇달아 깨뜨렸고, 1991년 쿠데타 당시 11개 자유언론의 공동호 『옵샤야 가제타』를 발행해 저항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 당선 후 모스크바 아파트를 거절하고 고향 팔라나로 돌아갔다. '내 모든 책은 나에게 고해성사다'라고 그는 말했다.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로, 필명 코얀토(Коянто, '순록의 사람')로 널리 알려진 코랴크 문학의 기념비적 인물이다. 레닌그라드 게르첸 사범대학 북방학부와 고리키 문학대학 고등문학과정을 졸업하고, 1969년 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를 시작으로 코랴크인과 북방 원주민의 삶, 신화, 정체성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1976)는 소련 관료들의 북방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9년 코랴크 자치구에서 소련 인민대표로 선출되어 북방 원주민의 권익을 대변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과 주지사 고문을 지내며 고향을 위해 활동했다.
「70년 동안 우리는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이, 교회를 불태운 자가 영웅이라고 배워왔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왔다」
키이우 출신 시인이자 의사로, 1985년 반미 소설로 국가상을 받을 만큼 체제 순응적 작가였으나, 1986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의 추천으로 『오고뇨크』 편집장에 임명되자 잡지를 글라스노스트의 선봉으로 돌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 대숙청,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을 최초로 폭로하며 구독 부수를 26만에서 460만으로 끌어올렸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의 작품을 최초로 게재했다. 1989년 인민대표로 당선되어 지역간그룹에 가담했고, 1991년 쿠데타 당시 미국 체류 중 귀국을 거부해 편집장직에서 해임된 후 보스턴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 지지해 고국에서 배척당했다.
1988년 9월 11일 「에스티마 라울」 무대에서 30만 명을 향해 외쳤다: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 말은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예술가이자 캐리커처 작가로, 1988년 6월 탈린 노래 축제 광장에서 벌어진 자발적 밤노래 시위 직후 『시르프 야 바사르』에 「노래 혁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이 역사적 명칭을 만들어 냈다. 그해 9월 「에스티마 라울」 집회에서는 30만 청중 앞에서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Ükskord me võidame niikuinii!)"라고 선언해 독립운동의 상징적 구호를 남겼다. 에스토니아 문화유산협회와 라흐바린네(인민전선) 창립에 참여했으며,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1991년 8월 20일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다.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1991년 1월 20일 저녁 오몬의 내무부 공격을 세계에 보여 주려 카메라를 들고 바리케이드로 나섰고, 바스테이칼른에서 촬영하다 총에 맞아 숨졌다.
안드리스 슬라핀슈는 리가 영화 스튜디오에서 활동한 라트비아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촬영기사였다. 리브인의 문화와 라트비아의 역사·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만들며, 기록영화가 억눌린 기억과 현재의 투쟁을 잇는 매체임을 보여 주었다. 1991년 1월 20일 리가 내무부 공격을 촬영하던 중 사망했고, 그가 남긴 장면은 라트비아 독립운동의 국제적 기억을 형성했다.
「노래혁명」의 사운드트랙을 쓴 작곡가, 다섯 조국의 노래로 에스토니아 대중을 하나로 묶었다
밴드의 연주를 멈추고 30만 군중 앞에서 맨손으로 합창을 지휘하며 '나는 에스토니아인이고 에스토니아인으로 남을 것이다'를 불렀다.
에스토니아의 작곡가이자 음악가로, 1980년대 후반 노래혁명 시기 독립 열망을 노래한 〈다섯 조국의 노래〉 연작으로 대중의 감정적 결집을 이끌었다. 1987년 인광석 채굴 반대 운동에 연대해 만든 〈어느 땅도 홀로 있지 않다〉는 노래혁명의 서곡이 되었고, 이듬해 5월 타르투 팝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다섯 곡은 이듬해 9월 30만 명이 모인 〈에스티마 라울〉 공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96년 35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200여 곡을 남겼지만, 역사는 그를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작곡가로 기억한다.
비디오 영상 속에서 일리야는 전차 앞에 서서 군인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잖아!'
모스크바건축대학 출신의 건축가이자 시인으로, 그의 시는 사후 옙투셴코의 《세기의 시절》에 실렸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536호에 불이 붙은 뒤 병사들이 후퇴할 때 돌진했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숨졌다. 사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그의 유대식 장례식은 랍비와 정교회 성직자가 함께 집전한 최초의 공적 종교의례로서 신생 러시아의 다민족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