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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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두아르트 암브로시예비치 셰바르드나제

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그루지야 그루지야 1928–2014 ○ 자연사, 사망

냉전을 끝낸 소련 외무장관, 그루지야 대통령이 되다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외무장관직 사임과 탈당을 선언했다. 일부 기록은 이 연설을 12월 21일로 적어 날짜가 엇갈리며,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28년 그루지야 마마티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5년 그루지야 내무장관을 거쳐 1972년 당 제1서기가 되어 대규모 부패 단속과 아바샤 실험을 벌였고, 1985년 외교 경험 없이 소련 외무장관에 발탁되어 군축과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을 협상했다. 1990년 12월 20일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며 사임했고, 1992년 조국으로 돌아가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으로 2003년 장미혁명 때까지 이끌었다. 2014년 7월 7일 트빌리시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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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72그루지야 내무장관
  • 1972–1985그루지야 당 제1서기: 부패 단속과 실험적 개혁
  • 1985–1990외무장관: 군축,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 협상
  • 1990.12「독재가 오고 있다」 경고하며 사임
  • 1992–2003그루지야 국가수반, 대통령: 2003년 장미혁명으로 퇴진
  • 1957–1961그루지야 콤소몰 제1서기
  • 1992–2003국가평의회 의장, 의회 의장, 국가수반, 대통령

야코프 페트로비치 포그레브냐크

Яков Петрович Погребняк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28–2016 ○ 자연사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며 리가초프의 마산드라 비노테카 파괴 명령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의 내용물을 테이블 밑에 쏟아버렸다. 옆에 있던 당 서기가 속삭였다. '이봐, 내 바지가 벌써 다 젖었어. 구두 속에도 보드카야!'

도네츠크 공업대학을 졸업한 금속공학자 출신으로, 1957년부터 당에 들어가 크라마토르스크,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6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내 시행을 감독했으며, 후일 예고르 리가초프가 마산드라 와인 공장의 150년 역사 비노테카를 파괴하라고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1987년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리보프로 발령받아 1990년까지 제1서기를 지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우크라이나-폴란드 협회' 회장을 맡으며 회고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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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0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2서기
  • 1960–1962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63–1964폴타바 공업주당 제1서기
  • 1966–1969이바노프란코프스크 주당 제1서기
  • 1969–1971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
  • 1971–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통상·반알코올 캠페인)
  • 1987–1990리보프 주당 제1서기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체르나빈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рнав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8–2023 ○ 자연사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 최초로 북극 빙하 아래를 항해한 원자력잠수함 장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충각 작전을 지시하며 주저하던 흑해함대 사령관에게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을 지낸 원자력잠수함 장교. 1962년 11월급 공격원잠 K-21 함장으로서 소련 원자력잠수함 최초의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를 성공시켜 북극 작전교범의 초안을 만들었다. 이후 델타급 전략원잠 사단장, 북방함대 사령관, 해군 총참모장을 거쳐 1985년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랐다. 재임 중 소련 해군은 전성기를 맞아 상시 200척 이상의 함정을 세계 해양에 배치했으며,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대한 충각 작전 '나발'을 승인하고 직접 책임을 졌다. 소련 해체 후 1992년 독립국가연합(CIS) 해군의 유일한 사령관을 지냈고, 퇴역 후 잠수함장 연합을 창설해 2014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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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M.V. 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북방함대 잠수함 부대 배치
  • 1956–1959S-347 함장 (위스키급), 북대서양 30일 자율항해 성공
  • 1959–1962K-21 함장 (11월급 공격원잠), 소련 최초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 수행 및 빙하작전교범 작성
  • 1969–1972제19잠수함사단장 (델타급 전략원잠), 북방함대
  • 1973–1974제3잠수함전단 사령관, 북방함대
  • 1977–1981북방함대 사령관, 전략원잠의 남대서양·인도양 상시 배치 주관
  • 1981–1985소련 해군 총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1983년 해군원수 진급
  • 1985–1992소련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92년 2월–8월 독립국가연합(CIS) 해군 사령관
  • 1992–2014러시아 잠수함장 연합 창설 및 회장, 2014년부터 명예회장

아르놀드 뤼텔

Arnold Rüütel
에스토니아 국가기관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928–2024 ○ 자연사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주권 선언을 밀어붙여 에스토니아를 제국 밖으로 이끈 농학자

루키야노프가 '반헌법적 행위'로 10년형을 경고하자, 뤼텔은 버티며 말했다. '우리는 최고회의를 소집해 독립 선언을 표결에 부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주권 선언'이 아닌 '독립 선언'이라고 말해 버렸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에스토니아 사레마 섬 출신의 농업경제학자로,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에스토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과 공산당 간부를 거쳐 1983년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198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투옥 위협을 무릅쓰고 주권 선언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소련 해체의 첫 균열을 냈고, 1990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소련 통치의 불법성을 선언하고 독립 회복 이행기를 이끌었다. 1991년 독립 후 2001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6년까지 재임하며 NATO와 EU 가입을 성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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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0사레마 집행위원회 농업부문 수석 농학자
  • 1955–1957타르투 농업기계화학교 교사
  • 1957–1963수의학·축산연구소 실험농장 주임 수의사 겸 농장장
  • 1963–1969타르투 기준국영농장장
  • 1969–1977에스토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
  • 1977–1979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서기
  • 1979–1983에스토니아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83–1990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0–1992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장
  • 2001–2006에스토니아 공화국 대통령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탈리진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Талыз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1991 ○ 자연사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을 만든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고스플란 의장

1967년 오르비타가 가동되자 시베리아·극동 주민 수천만 명이 처음으로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했다. 탈리진은 "우리가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했다.

통신 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테크노크라트로,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 시스템의 과학적 개발을 이끌어 시베리아와 극동 주민 9천만 명에게 중앙 TV를 공급했다. 통신장관(1975~1980)을 거쳐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고스플란 의장으로 발탁되어 초기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의 계획을 주도했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고 1989년 보수파로 분류되어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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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 기술자,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
  • 1965소련 통신부 차관
  • 1970소련 통신부 제1차관
  • 1975–1980소련 통신장관
  • 1980–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5–1988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88각료회의 사회발전국 국장
  • 1988–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빅토르 페트로비치 니코노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Нико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1993 ↓ 해임 1989

고르바초프의 농업 후임자이자 마지막 내부 비판자

1989년 1월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반박했다: "농업의 이런 조직 개편들에 지쳤습니다. 농업이 우선순위를 얻지 못하면 프로그램은 실패할 것입니다. 정말 이게 각료회의와 정치국, 그리고 당신,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 이해되지 않습니까?"

마리 자치공화국 제1서기를 12년(1967~1979) 역임한 농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르자 농업 담당 중앙위 서기를 이어받았다. 안드로포프 시절 구상된 농업 부흥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고 6개 농업 부처를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 창설을 지지했으나, 관료적 통합이 생산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후 정치국에서 수차례 고르바초프와 충돌했다. 1989년 9월 만 60세로 정치국과 서기국에서 동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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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8MTS 주임 농학자, 농업학교 교사, 크라스노야르스크 당 기관 근무
  • 1961–1967타타르 주당 제2서기
  • 1967–1979마리 주당 제1서기
  • 1979–1983소유즈셀호즈히미야 의장 · 소련 농업차관
  • 1983–1985러시아 공화국 농업장관
  • 1985–1989중앙위 서기 (농업 담당)
  • 1987–1989정치국 위원

이반 티모페예비치 프롤로프

Иван Тимофеевич Фролов

페레스트로이카의 철학적 기초를 놓은 마르크스주의 인문학자: 유전학에서 인간학까지

「나는 '당의 과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한다. 정치는 과학의 철학적 해석에만 관여할 뿐, 과학 자체를 평가할 수 없다」 — 『유전학과 변증법』, 1968년

리센코주의를 철학적으로 무너뜨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으로 페레스트로이카에 '진정한 휴머니즘'을 제시했으며, 생명윤리와 인간 종합연구를 개척했다. 프라우다 주필과 정치국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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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모스크바대 철학부 졸업 (은메달)
  • 1958철학 후보박사 — 「결정론과 목적론」
  • 1965–1968CPSU 중앙위 이념담당 서기 보좌관
  • 1966철학 박사 — 「생물학 방법론의 문제들」
  • 1968–1977『철학의 제문제』 주필, 1968년 『유전학과 변증법』 출간
  • 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1987『콤무니스트』 주필, TV 「철학 대화」 진행
  • 1987–1989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과학·교육·문화 보좌관
  • 1989–1991『프라우다』 주필
  • 1989–1990CPSU 중앙위 서기
  • 1990–1991CPSU 중앙위 정치국원
  • 1991–199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인간연구소 창설·소장

아폴론 세르게예비치 시스초프

Аполлон Сергеевич Сысц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05 ○ 자연사

소련 항공공업의 마지막 장관: 부란에서 민영화까지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 당시, 시스초프가 주재하던 작전회의는 '시솝니키(сысовник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설계국들은 그의 무뚝뚝한 현장 감각을 두려워하면서도 존중했다.

멜레케스의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타슈켄트 항공공장 모터 조립공으로 시작해 수석 엔지니어까지 오른 현장형 관료였다. 1975년 울리야놉스크 항공산업단지 초대 총책임자로 거대 제조 기지를 건설했고, 1981년 항공공업 제1차관으로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을 감독했다. 1985년 장관에 올라 MiG-29·Su-27·Tu-160·An-124 등 소련 항공기술의 최전선을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항공공업부의 시장 전환을 주도했다. 공산당 중앙위원(1986~1990)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항공산업 민영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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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69타슈켄트 항공공장: 모터 조립공 → 기술자 → 조립공장장
  • 1969–1975타슈켄트 항공공장 수석 엔지니어
  • 1975–1981울리야놉스크 항공산업단지(УАПК) 초대 총책임자
  • 1981–1985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 1985–1991소련 항공공업 장관
  • 1991–1995ОАО «아비아프롬» 부사장

율리 미하일로비치 보론초프

Юлий Михайлович Воронц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9–2007 ○ 자연사

소련군 아프간 철수를 외교로 마무리한 군축 협상가

“2년 반 동안 우리는 입장을 좁혀, 당대 가장 현대적인 무기의 완전 폐기 조약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 1987년 INF 조약에 대해

소련과 러시아의 외교관으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아래서 외무부 제1차관(1986–1990)을 지내며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이끌었다. 소련군 철수 시기인 1988–1989년 아프가니스탄 대사를 겸임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로부터 철수 부대에 대한 사격 금지 보장을 받아냈다. 군축 수석협상가로서 1987년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 도브리닌 아래 워싱턴 대사대리와 인도·프랑스 대사를 거쳐 소련의 마지막 유엔 상임대표와 러시아 초대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에도 유엔 사무차장으로서 쿠웨이트 실종자 및 재산 반환을 조정하는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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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63소련 외무부 유럽부·국제기구부, 유엔 대표부
  • 1966–1977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공사참사관, 워싱턴 대사대리
  • 1978–1983주인도 소련 대사
  • 1983–1986주프랑스 소련 대사
  • 1986–1990소련 외무부 제1차관, INF 조약 수석협상가
  • 1988–1989주아프가니스탄 대사 겸임, 소련군 철수 외교
  • 1990–1994유엔 주재 소련·러시아 상임대표
  • 1994–1998주미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비류코바

Александра Павловна Бирюков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08 ↓ 실각 1990

고르바초프 시기 최고위 여성 정치인, 소비재 품귀를 해결하려 했던 '러시아의 마거릿 대처'

1989년 여름, 비류코바는 일주일 동안 서유럽 8개 도시를 돌며 타이츠 5,000만 켤레, 여성화 170만 켤레를 구매했다. 소비에트 부총리가 직접 생필품 쇼핑에 나선 광경이었다.

섬유공학 엔지니어 출신으로,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거쳐 고르바초프 시기 CPSU 중앙위 서기(1986~1988)와 각료회의 부의장 겸 사회발전국 의장(1988~1990)을 지내며 경공업·소비재·주택·보건을 총괄한 소련 최고위 여성 정치인이었다. 1988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라 옐레나 스타소바·예카테리나 푸르체바에 이어 소련 역사상 세 번째로 정치국에 진입한 여성이 되었으며, 소비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서유럽에서 한 주 만에 1억 6,500만 달러어치의 생필품을 구매하는 파격적 쇼핑 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반 소비시장 붕괴와 당내 비판 속에 1990년 2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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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제1모스크바 날염직물 공장 기술자, 직장, 작업반장
  • 1959–1963모스크바 시 소브나르호스 섬유·니트 산업관리국
  • 1963–1968트료흐고르나야 마누팍투라 면직 콤비나트 수석기사
  • 1968–1985전소비에트 노동조합 중앙평의회(VTsSPS) 서기
  • 1985–1986VTsSPS 부의장
  • 1986–1988CPSU 중앙위원회 서기 (경공업·소비재 담당)
  • 1988–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각료회의 사회발전국 의장

예브게니 막시모비치 프리마코프

Евгений Максимович Прима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15 ○ 자연사

대서양 상공에서 비행기를 돌린 아랍주의자 총리

「러시아가 힘의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처음으로 보여준 순간」 — 프리마코프의 대서양 회항에 대한 러시아 정치학자들의 평가

소련 최고의 아랍 전문가이자 정보·외교·정치를 가로지른 실용주의자. 《프라우다》 중동 특파원을 거쳐 IMEMO와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89년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1991년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을 창설했으며, 외무장관 시절 '프리마코프 독트린'으로 불리는 다극 외교를 주창했다. 1999년 총리 재임 중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이유로 대서양 상공에서 전용기를 돌려 귀국한 사건으로 널리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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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국영방송 아랍어 편집국, IMEMO 연구원
  • 1962–1970《프라우다》 중동 특파원, 카이로 주재
  • 1970–1977IMEMO 부소장, 비밀 중동 외교 임무
  • 1977–1985소련과학원 동양학연구소 소장
  • 1985–1989IMEMO 소장, 소련과학원 아카데미크
  • 1989–1990정치국 후보위원, 소비에트연방회의 의장
  • 1991KGB 제1총국장 → 중앙정보국장 → SVR 국장
  • 1996–1998러시아 외무장관, 다극체제 독트린
  • 1998–1999러시아 총리, 대서양 반전 귀국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마요레츠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Майоре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29–2016 ○ 자연사

체르노빌 현장에 투입된 마지막 소련 에너지장관

1986년 4월 26일 새벽, 체르노빌 사고 첫 보고를 받은 마요레츠는 니콜라이 리즈코프 총리에게 이를 알린 직후 현장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정격 출력으로 가동 중인 두 원자로 블록을 즉각 정지·비상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자포리자 변압기 공장의 전기기사에서 소련 전기공업장관·에너지장관까지 오른 산업 관료로, 송배전망과 원자력 발전을 사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가장 먼저 보고받아 곧장 현장으로 가 가동 중인 두 원자로를 비상 정지시키고, 소련 원자력 안전 체계 재편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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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 전기기사 → 선임 작업반장 → 책임자
  • 1962–1965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장
  • 1965–1974소련 전기공업부 차관
  • 1974–1980소련 전기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전기공업장관
  • 1985–1989소련 에너지·전화장관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위원회 위원 (셰르비나 위원장)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차조프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Чаз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21 ○ 자연사

크렘린 의료를 20년간 총괄한 소련 심장학의 대부

“핵전쟁은 막지 않는 한 지구상 생명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 1985년 오슬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예브게니 차조프는 혈전용해요법을 개척해 심근경색 치료를 혁신한 소련의 심장학자로, 20년간 크렘린 의료를 총괄하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등 역대 지도자를 진료했다. 1980년 미국 심장학자 버나드 론과 함께 핵전쟁 방지 국제의사회(IPPNW)를 공동 창설해 198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냉전기 동서 진영을 가로지른 보기 드문 협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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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키예프 의과대학 졸업, 모스크바에서 레지던트 수련
  • 1963의학박사 학위 취득
  • 1965–1976소련 의학아카데미 미야스니코프 심장학연구소 소장
  • 1967–1986소련 보건부 제4총국장 (크렘린 의료 총괄)
  • 1968–1986소련 보건부 차관
  • 1976–2014전연방 심장학 연구센터 소장
  • 1987–1990소련 보건부 장관

니콜라이 니키토비치 슬륀코프

Николай Никитович Слюньк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벨라루스 1929–2022 ○ 자연사

트랙터 공장장 출신 정치국원, '당 중앙위의 디렉터'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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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시코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ж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929–2024 ↓ 퇴임 1991

페레스트로이카 경제개혁기의 총리

1990년 5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최고회의에서 빵과 식료품 가격이 인상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1989~1990년 수백 개 도시에 배급제가 도입된 물자 부족 상황에서, 이 발언은 리시코프 내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1929년 9월 28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도네츠크주 딜레예프카 마을의 광부 집안에서 태어나 2024년 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94세로 사망했다. 우랄마시 총지배인과 고스플란 제1부의장을 거쳐 1985년 9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고, 1990년 12월 26일 각료회의가 폐지될 때까지 재임했으나 파블로프가 취임한 1991년 1월 14일까지 형식상 정부 수반으로 남았다. 1990년 12월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뒤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약 1,336만 표를 얻어 옐친에 이어 2위를 했다. 1995년 국가두마 의원, 2003년부터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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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1991.01각료회의 의장

바딤 안드레예비치 메드베데프

Вадим Андреевич Медвед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25 ○ 자연사

이념을 해체한 마지막 이념비서: 검열의 특별보관고를 열고 당의 정통 교리를 폐기하다

1988년 가을, KGB를 통해 솔제니친 전 작품을 입수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인정했지만 〈수용소 군도〉는 주관적 논쟁서라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특별보관고를 열어 솔제니친의 기출판 저작을 모두 일반 서가로 돌려보냈다.

야로슬라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가치법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당 엘리트. 중앙위 선전부와 과학·교육부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 1988년 정치국원 겸 이념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즈다노프의 1946년 문예지 탄압 결의를 폐기하고, 정기간행물 구독 제한을 철폐했으며, 솔제니친과 트로츠키의 저작을 포함한 특별보관고 도서를 일반 서가로 되돌렸다. 대학에서 당사와 과학적 공산주의 강좌를 20세기 사회정치사로 대체했고, 스탈린 시대 탄압 재심의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었으나 소련 붕괴와 함께 모든 공직을 떠나 고르바초프 재단 연구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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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68레닌그라드 대학 경제학부 졸업, 교수, 경제학 박사
  • 1968–1970레닌그라드 시당 서기
  • 1970–1978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78–1983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
  • 1983–1986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1986–1990중앙위 서기, 이후 이념위원회 의장·정치국원
  • 1990–1991소련 대통령자문회의 위원
  • 1992–2025고르바초프 재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연구원

빅토르 표도로비치 그루슈코

Виктор Фёдорович Груш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01 ○ 자연사

해외정보부터 방첩까지 아우른 KGB 작전부사령관

1991년 8월 18일 오후, 야조프 국방장관이 공수군 사령관 그라초프에게 크렘린의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라 명령하면서 덧붙였다. "KGB 부의장 그루슈코·아게예프와 협조하라."

소련 KGB에서 해외정보(PGU)와 방첩(VGU) 양대 본부를 모두 지휘한 정보 장교. 타간로크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MGIMO를 졸업하고 노르웨이 주재 외교관으로 출발, 1960년 KGB로 전직한 후 오슬로 주재관을 거쳐 PGU 제3(영국·스칸디나비아)부장, PGU 제1부국장으로 승진했다. 1989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체제에서 제2총국(방첩)을 맡으며 KGB 부의장이 되었고, 1991년 1월 KGB 제1부의장으로서 작전 부문 최고위직에 올랐다. 같은 해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고, 구금 중 두 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뒤 건강 악화로 석방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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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0소련 외무부, 노르웨이 대사관 근무
  • 1960–1961KGB 제101학교 수료, PGU KGB 제3부 배치
  • 1968–1971오슬로 KGB 부주재관 (정치첩보)
  • 1971–1972오슬로 KGB 주재관
  • 1975–1980PGU KGB 제3부장 (영국·스칸디나비아 담당)
  • 1983–1989PGU KGB 제1부국장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2총국장 (방첩)
  • 1991.01–08KGB 제1부의장

유리 세르게예비치 플레하노프

Юрий Сергеевич Плех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02 ○ 체포 1991, 사면 1994

KGB 도청 전문가에서 경호 총괄로, 8월 쿠데타의 방아쇠를 당기다

고르바초프의 회고: 「옐친은 누군가 옆에서 도청하는 듯 불편해했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9국장 플레하노프가 그 방을 준비한 것이다.」

안드로포프의 개인 비서로 출발해 KGB 12부서(도청·검열)를 13년간 지휘한 도청 전문가. 크류치코프의 지시에 따라 1991년 7월 29일 노보오가료보 회담실을 사전 도청 장비로 세팅했고,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강경파 교체 밀약이 녹음되어 쿠데타 세력에 전달되면서 8월 쿠데타의 뇌관이 되었다. 쿠데타 당일에는 포로스 별장으로 날아가 공모자들을 고르바초프 앞에 들여보냈고, 실패 후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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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CPSU 중앙위 서기 안드로포프의 비서
  • 1970–1983KGB 12부서장: 도청·전화감청·우편검열 총괄
  • 1983–1990KGB 9국장: 당·국가 요인 경호
  • 1990–1991KGB 경호국장 (9국 후신), 콜레기움 위원
  • 1991.07.29노보오가료보 회담실 도청: 녹음이 쿠데타 세력에 유출
  • 1991.08–1994포로스에서 쿠데타 가담, 체포,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수감, 사면

예고르 블라디미로비치 야코블레프

Ег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Яковл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05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 시대를 연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금기를 깨는 데 앞장서다

「잠자리에 들 때 벙어리였다가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열이 풀리던 시절,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금기의 경계를 설명하며.

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출신으로 『이즈베스티야』 특파원과 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 1986년 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에 임명되어 3만 5천 부의 영문 선전지를 8개 언어 300만 부의 글라스노스트 기관지로 키웠다. 스탈린 숙청, 아프간 전쟁, KGB 활동 등 금기를 잇달아 깨뜨렸고, 1991년 쿠데타 당시 11개 자유언론의 공동호 『옵샤야 가제타』를 발행해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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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졸업
  • 1956–1966『모스크바 프라우다』·『콤소몰카』·『이즈베스티야』 기자
  • 1967–1968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
  • 1968–1985『이즈베스티야』 특파원, 프라하 주재
  • 1986–1991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 1991–1992소련 및 러시아 국영 TV·라디오 의장
  • 1993–2002『옵샤야 가제타』 발행인

스테판 아라마이소비치 시타랸

Степан Арамаисович Ситар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30–2009 ○ 자연사

협동조합법을 폴리트뷰로에서 밀어붙인 소련 최고위 아르메니아 경제학자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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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 1974–1983소련 재무차관
  •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2–200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후에 센터) 소장

레오니트 이바노비치 아발킨

Леонид Иванович Абалкин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수석 경제 이론가,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의 '규제된 시장' 설계자

「우리가 금융 전선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이다」 — 아발킨이 자주 인용한 레닌의 말

모스크바 출신 정치경제학자. 1986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고, 1989년 경제개혁 국가위원장 겸 부총리로 기용되었다. 핵심 구상인 '규제된 시장경제'는 국가 통제 아래 단계적 시장화를 주장했으며,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 제안한 충격요법과 대비되었다. 이 구상은 1990년 5월 최고회의에서 반려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샤탈린의 급진안을 택한 뒤 리시코프 내각이 무너지면서 1991년 초 부총리직을 떠났다. 해체 후 『경제의 제문제』 편집장으로 러시아 사회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옐친식 급진 자유화에 맞서 중국식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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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8칼리닌그라드주 구세프 농업기술학교 교사·교무부원장
  • 1958–1966모스크바 국립경제연구소 대학원 → 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조교·부교수·교수
  • 1966–1976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76–1985CPSU 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84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1기)
  • 1989–1990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겸 소련 부총리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05–12소련 대통령 고문
  • 1991–2005과학아카데미·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2기)
  • 1992–2011『경제의 제문제』(Voprosy Ekonomiki) 편집장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두비닌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Дубин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30–2013 ○ 자연사

고르바초프 시대 페레스트로이카 외교를 워싱턴에서 대면한 소련 대사

1986년 5월, 유엔 주재 소련 대표에서 워싱턴 대사로 전격 이동한 두비닌은 백악관에 신임장을 제출하며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적으로 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소련 말기 고르바초프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워싱턴 주재 대사 시절 INF 조약 체결과 몰타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뒷받침했다. 날치크 출신으로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을 졸업하고 유네스코와 주프랑스대사관에서 외교 경력을 쌓은 유럽통이었다. 1986년 봄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를 거쳐 미국 대사로 부임해 냉전 종식을 위한 양국 정상 간 채널이 작동하도록 실무를 조율했다. 1990년 프랑스 대사로 자리를 옮겨 소련 해체까지 파리에 머물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외무차관과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내며 1997년 우크라이나와의 우호협력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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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6주프랑스 소련 대사관 실습
  • 1956–1959유네스코 사무국 직원 (파리)
  • 1959–1963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3등·2등서기관
  • 1963–1968주프랑스 소련 대사관 1등서기관·참사관
  • 1968–1971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부과장
  • 1971–1978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과장
  • 1978–1986주스페인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6.03–05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6–1990주미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90–1991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94–1996러시아 외무차관
  • 1996–1999주우크라이나 러시아 대사

엔델 테오도로비치 리프마

Endel Teodorovich Lippmaa

인산염 광산 계획을 내부에서 막아낸 에스토니아 과학자

TV 토론에 서류 가방을 들고 나와 상대가 반박할 때마다 해당 문서를 꺼내 사실을 입증하곤 했다.

에스토니아의 물리화학자이자 정치인. 탈린공과대학에서 유혈암 기술을 전공한 뒤 소련권 최초로 NMR 분광계를 자체 제작하며 고체 고분해능 핵자기공명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회원 시절 1987년 인산염 광산 계획의 환경·인구적 위험을 보고서로 폭로해 '인산염 전쟁'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고, 소련 인민대의원으로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를 발굴·공개해 발트 병합의 법적 근거를 무너뜨렸으며, 독립 회복 후 두 차례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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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탈린공과대학 졸업, 유혈암 기술 전공
  • 1956화학 박사 학위 취득
  • 1969소련 화학물리연구소에서 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72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975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2014년까지 이사회 위원
  • 1980화학·생물물리연구소 설립 및 소장 취임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독소조약 비밀의정서 폭로
  • 1990–1991에스토니아 공화국 동방문제 장관
  • 1995–1996에스토니아 공화국 유럽문제 장관
  • 1996–1999리에기코구(국회) 의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라표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Лавё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30–2016 ○ 자연사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마지막 책임자이자 우라늄 지질학자

2009년 글로벌에너지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항상 냉각기와 온난기를 오갔으며, 인간은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아주 짧은 순간만 살아왔다."

소련의 지질학자이자 과학행정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전역의 우라늄 광상을 연구하여 소련 핵연료 자원 기반을 구축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과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임하며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988년부터 소련 해체 후 2013년까지 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을 지내며 지구과학 부문을 이끌었고, 방사성폐기물 지층처분과 북극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평생 700편 이상의 논문과 28권의 단행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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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6이겜 RAS 우라늄광상연구실 선임연구원 → 실장
  • 1966–1972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 부국장
  • 1968–1972전연방 지질기금(ВГФ) 국장
  • 1972–1983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1989키르기스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88–2013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1소련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91소련 총리 부의장 겸 과학기술부 장관
  • 1991–2016이겜 RAS 소장 → 과학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