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2월 그의 사망설이 퍼지자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추도 연설을 했고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집회 장소를 '쿠시넨 클럽'이라 불렀지만, 그는 헬싱키에 은신한 채 살아 있었다.
핀란드 라우카아의 재봉사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1911~1913년 당 의장을 지냈고, 1918년 혁명정부의 교육담당 인민위원이었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해 핀란드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로 국제공산운동을 지도했다. 겨울전쟁기 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을 맡았고, 대숙청기에는 아내 아이나와 아들 에사가 탄압받는 동안에도 자유와 지위를 지켜 1937~1939년 숙청을 살아남은 극소수 코민테른 최고 간부였다. 1957년 흐루쇼프를 지지하며 CPSU 중앙위 서기 겸 상임간부회 위원이 되어 '전인민국가' 테제로 탈스탈린화를 이론화했고, 1964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58년 1월 27일 워싱턴에서 자루빈은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과 미국이 영화, 음악, 과학, 스포츠 교류를 정부 간 협정으로 제도화한 것은 양국 관계 사상 처음이었다.
소련 외교관으로, 1944년부터 1958년까지 캐나다, 영국, 미국 대사를 차례로 역임하며 초기 냉전기 소련 외교의 핵심적인 대서양 창구였다. 1958년 1월 27일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미소 문화·기술·교육 교류 협정」(레이시-자루빈 협정)에 서명하여 양국 간 최초의 정부 간 문화교류 틀을 수립했으며, 이 협정은 소련 붕괴 시까지 연장되며 볼쇼이 발레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냉전 문화외교의 상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복귀한 지 10개월 만에 사망했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사망 직후, 81세의 쿠즈네초프는 임시 국가원수로서 소련 국민에게 신년사를 낭독했다.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연이어 사망할 때마다 같은 역할을 반복하며 말년 소련 권력 이양의 얼굴이 되었다.
농민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노조 중앙평의회 의장을 거쳐 소련 외교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외무부 제1차관으로 22년간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밀협상, 중소 국경교섭, 유엔 군축외교를 이끌었다. 1977년 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이 된 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사망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권력 공백기마다 임시 국가원수를 지내며 말년 소련을 상징하는 원로가 되었다.
스탈린이 휴양지 식탁에 오른 썩은 바나나를 보고 격노하자, 모든 책임은 대외무역부 장관인 멘시코프에게 돌아갔다. 하루 전 '엄중 경고'를 받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소련의 무역 관료이자 외교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회계 강습을 거친 뒤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런던의 소련 무역 협동조합 아르코스(ARCOS) 책임자를 거쳐 1949년 소련 대외무역부 장관에 올랐으나, 1951년 멕시코산 바나나 품질 문제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해임되었다. 스탈린 사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인도 대사(1953~1957), 주미 대사(1958~1962)를 역임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직전까지 워싱턴에서 미소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연방 차원과 공화국 차원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이력을 남겼다.
알제 히스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볼레프와 파스볼스키에 대해 “그들이야말로 헌장의 형태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미국 측 리오 파스볼스키와 함께 유엔헌장의 구체적 문안을 책임진 공동 기초자였다. 전후 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으로 국제기구의 제도화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의 유엔 상임대표로서 헝가리 봉기 직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냉전기 소련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외무차관으로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지휘했다.
1958년 당 중앙위 정보부장 푸시킨이 흐루쇼프에게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의 위험을 경고했다. 흐루쇼프는 "말도 안 돼! 군대를 들여보내도 전쟁은 안 난다"며 그를 끊고 정보부를 해체했다.
전시 슬로바키아, 전후 헝가리, 동독,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형성기 세 수도에 차례로 대사를 지낸 경력 외교관이다. 1945년 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정치고문으로서 스탈린식 체제 이식의 주요 창구였으며, 1949–1952년과 1954–1958년 두 차례 동독 주재 대사로 재임하며 동독 국가 건설을 소련 측에서 감독했다. 1958년 신설된 당 중앙위 대외정보부장으로서 흐루쇼프에게 국제정세를 직접 브리핑했으나,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가 해임되었다. 1959년 외무차관으로 복귀해 1961–1962년 라오스 중립화 제네바 회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체르넨코가 죽은 이튿날, 그로미코는 고르바초프가 회의를 열자 곧바로 일어나 그를 총서기로 추천했다. 그에게 돌려진 '미소는 상냥하지만 이빨은 강철'이라는 말은 가장 유명해졌지만, 공개된 회의 기록에는 없다.
28년간 외무장관을 지내며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외교에 입문한 1939년 이후 대숙청으로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우며 올라 1943~1946년 주미 대사, 유엔 초대 상임대표를 지냈다. 1940년대 말부터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20여 차례 행사해 '미스터 니예트'로 불렸고,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1973년부터 정치국 정회원이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의 정치적 책임을 함께 졌다. 1985년 3월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를 총서기로 추천했고, 1988년 건강을 이유로 은퇴한 뒤 198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1953년 6월 동독 봉기 당시 정치국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자, 세묘노프는 '소련은 독일 노동자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23년간 소련 외무차관을 지내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일 정책을 거의 40년간 주무른 외교관이다. 2차대전 후 소련군정 정치고문으로 동독 수립과 베를린 봉쇄의 핵심 설계자였으며,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 당시 정치국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차관으로 서독과의 동방정책을 뒷받침하고 SALT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이끌었다. 1978년 주서독 대사로 부임해 말년까지 본에서 근무했으며,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 컬렉터로도 알려져 있다.
1971년 9월 3일, 아브라시모프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한 뒤 남긴 말: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향한 말이자, 냉전 최전선에서 10년 가까이 협상해온 외교관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직업 외교관이자 당 관료.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전후 벨라루스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57년 외교로 전환하여 동독 주재 대사를 두 차례(1962–1971, 1975–1983) 역임하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1971년 9월 베를린 4국 협정에 소련 대표로 서명했다. 두 번째 동독 임기 중 동독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치 대사'라 불렸고, 결국 호네커의 요청으로 1983년 소환되었다.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과 주일 대사를 끝으로 1986년 은퇴했다.
1962년 5월 크렘린에서 흐루쇼프가 물었다.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일까?' 알렉세예프는 회고했다. '당혹감을 애써 누르며 나는 피델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의심을 말했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시토프.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NKVD에 들어가 이란·프랑스·아르헨티나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다. 1959년 TASS 특파원 신분으로 쿠바에 도착해 피델 카스트로 및 체 게바라와 개인적 신뢰를 쌓았고, 1962년 5월 소련의 초대 주쿠바 대사로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흐루쇼프에게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무시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카스트로의 핵 선제타격 주장을 진정시키고 모스크바와 아바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1968년 8월 21일,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간 체르보넨코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무저항 전문을 이끌어냈다. 그레치코 원수의 회고: 「그 공으로 대사에게 레닌훈장을 두 개 줘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더군.」
소련 외교관으로 중소 분열기 주중 대사(1959~1965), 프라하의 봄 당시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1965~1973), 주프랑스 대사(1973~1982)를 지냈다. 1968년 8월 21일 모스크바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가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무저항 명령을 설득해 대규모 유혈 충돌을 막았으며, 소련 지도부는 이 공로에 「레닌훈장 두 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1961~1989년 CPSU 중앙위원, 5개 레닌훈장 수훈.
“소련 체제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다” — 도브리닌 대사가 키신저에게 알렉산드로프-아겐토프를 설명하며, 1972년.
스웨덴 문헌학도 출신으로 타스 통신원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주재 스웨덴 소련 공사관 보좌관을 거쳐 외교 경력을 시작했다. 1961년 브레즈네프의 국제문제 보좌관이 된 이래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까지 네 명의 서기장을 연속으로 보좌하며 데탕트 시대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실무자로 활약했다.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을 직접 집필하고 미소 정상회담과 헬싱키 협정(1975년) 체결에 배석했으며, 자신의 외교 경력 중 최대 성과로 전후 유럽 국경 승인을 꼽았다. 1986년 은퇴 후 회고록 《콜론타이에서 고르바초프까지》를 남겼다.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트로야놉스키가 무심히 던진 '죽는 것보다 붉은 게 낫군'이라는 한마디에, 안보리 회의장은 긴장이 풀려 웃음이 터졌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는 스탈린의 통역에서 출발해 흐루쇼프의 외교 보좌관, 주일 대사,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주중 대사를 역임한 소련의 외교관이다. 초대 주미 소련 대사의 아들로 워싱턴에서 성장한 독특한 배경을 지녔으며, 10년간의 유엔 대표 재임 중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KAL 007기 격추라는 냉전의 최대 위기에서 냉철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서방 외교가들의 존중을 얻었다. 유엔 대표직은 야코프 말리크의 후임이자 고르바초프 개혁 이전까지 소련의 대서방 외교 연속성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1979년 6월, 호메이니는 비노그라도프를 불러 직접 경고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 무슬림들에게 가하는 일을 보고 있다. 소련은 이슬람에 적대적이다."
무역 외교에서 출발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중동 외교의 핵심 현장을 두루 거친 외교관이다. 주일 대사와 외무차관을 지낸 뒤, 1970년 이집트 대사로 부임하여 나세르 말기부터 사다트의 서방 전환기까지 카이로에 주재했고, 1973년 10월 전쟁 당시 소련의 대응을 현장에서 조율했다. 1977년 이란 대사로 테헤란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을 목격했으며, 호메이니와의 긴장된 대면을 통해 혁명 정권과 소련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으로 8년간 재임하며 소련 외교의 제도적 연속성을 유지했고, 퇴임 후에도 중동 평화정착을 위한 비공식 채널을 이끌었다.
1979년 가을, 코르니옌코는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로미코는 서명을 거부하고 중앙위원회에 올리지 않았다.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40년 넘게 소련의 대미 외교를 실무에서 이끈 외교관으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아래에서 제1차관(1977–1986)을 지내며 1970~80년대 미소 군축 협상의 핵심 의제를 설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으로 냉전의 최전선에 섰으며, 이후 소련 외무부 미국국장으로서 닉슨·카터·레이건 행정부와의 모든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내부 반대했고,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 때는 진실 공개가 국제적 고립보다 낫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냉전 후에는 회고록 『냉전: 한 참여자의 증언』을 남겨 소련 외교정책 결정 과정의 내막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