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리자베타 쿠셰레바로 태어나 결혼 뒤 토마노프스카야라는 이름을 썼다. 제1인터내셔널 제네바 지부에서 활동하고 1870년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만났다. 1871년 파리 코뮌의 대표로 파리에 가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을 조직했다. 코뮌 진압 때 바리케이드 전투에 참여해 부상당했고, 러시아로 돌아간 뒤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살았다. 사망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며 1916년 이후, 1918년 이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상세 이력 보기
1867미하일 토마노프스키와 결혼해 상속 재산을 얻고 혁명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했다.
1868–1869제네바에서 러시아어 잡지 《나로드노예 델로》를 재정 지원·공동 편집하고 제1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지부 창설에 참여했다.
1870제네바 지부의 사절로 런던에 가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다.
1871파리 코뮌기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과 노동권을 추진했다.
1871–1877코뮌 패배 뒤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반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하고 그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지로 갔다.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72–18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1876–18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1881–18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1900–19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1903–19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1906–19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1917년 12월, 레닌은 파르부스의 귀국 요청을 거부하며 답했다: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독일 사민당(SPD)의 저널리스트로, 1904~1905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공동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 자금으로 러시아 혁명 조직망을 구축했으며, 1917년 4월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집권 후 레닌은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며 그의 귀국을 거부했고, 파르부스는 독일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원칙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논란적인 인물 중 하나다.
10월 혁명을 목도한 포트레소프는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의 살해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세운 체제를 한마디로 규정했다. "바보들의 사회주의."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창립 세대다. 1903년 당 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며 멘셰비키의 지도적 이론가가 되었고,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대중정당을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멘셰비키 방어파를 이끌었으며, 1917년 10월 혁명을 거부했다. 1919년 체카에 체포된 후 1925년 소련을 떠나 베를린과 파리에서 소비에트 체제 비판을 이어갔다.
상세 이력 보기
1892–1896스트루베·마르토프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노동해방' 그룹과 접촉
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결성 참여
1897–1899체포되어 뱟카현으로 유형
1900–1903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 제2차 당대회 이후 멘셰비키 지도부
1905–1907귀국하여 멘셰비키 신문 『나찰로』『넵스키 골로스』 편집
1910–1914멘셰비키 청산파 기관지 『나샤 자랴』 편집, 4권짜리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운동』 공동 편찬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을 목격한 뒤 골드만은 이렇게 썼다. '크론시타트는 나를 볼셰비키에 묶어둔 마지막 실을 끊어놓았다' — 그녀는 1921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작가, 연설가.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눈떠 북미와 유럽에서 아나키즘 정치철학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피임·자유연애·반군국주의를 주제로 수천 명을 끌어모은 연설로 '붉은 에마'라 불렸으며,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전향적인 목소리를 냈고, 《러시아에서의 환멸》(1923)에 그 경험을 기록했다.
시카고 환송연에서 헨리 클레이 프릭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베르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릭은 신에 의해 추방되었다.'
러시아 제국 빌나에서 태어나 1888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작가. 1892년 홈스테드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여 제철소 사장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 14년간 복역했으며 그 경험을 《한 아나키스트의 옥중기》(1912)에 담았다. 출소 후 에마 골드만의 잡지 《마더 어스》 편집자로 활동하며 미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919년 반전 활동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으나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볼셰비키 신화》(1925)에서 초기 소비에트 국가의 권위주의를 기록했으며, 이후 프랑스 망명 중 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1929)를 저술했다.
1943년, 평생의 반볼셰비키 멘셰비키 지도자 단은 『볼셰비즘의 기원』에서 볼셰비즘이 '우리 시대의 핵심 사상인 사회주의의 담지자'로 역사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썼다.
표도르 단은 혁명가·의사이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 분파의 창립 지도자이며 핵심 이론가였다.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 레닌에 맞섰고, 1917년 2월 혁명 후 '혁명적 방어주의'의 주요 이데올로그로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22년 망명 후 1923년 마르토프 사망부터 1940년까지 멘셰비키 해외대표단을 이끌며 볼셰비키 권위주의와 서구 사민주의 타협에 맞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견지했다. 『볼셰비즘의 기원』(1943)에서는 볼셰비즘이 사회주의의 역사적 담지자임을 인정하면서도 소비에트 체제의 정치적 자유화를 주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94–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활동, 체포 후 뱟카로 유형
1901–1903베를린 망명, 이스크라 지원 그룹 참여; RSDLP 제2차 대회에서 마르토프 지지, 멘셰비키 공동 창립
1905–1912멘셰비키 주요 신문 『나찰로』 편집진, RSDLP 제4·5차 대회; 『사회민주주의자의 목소리』 공동 편집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혁명적 방어주의' 이데올로그
1919–1920제7·8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멘셰비키 대표로 연설; 적군 군의관 복무
1922–1923체포·투옥 후 해외 추방;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 창립 참여, 소비에트 시민권 박탈
1923–1940멘셰비키 해외대표단 단장; 베를린·파리에서 망명 활동
1941–1947뉴욕 망명, 잡지 『노비 푸티』 발행; 『볼셰비즘의 기원』(1943)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