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를 추궁한 두 번의 대선 후보
1962년 10월 25일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통역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라고 몰아붙였고, 그가 답변을 거부하자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미사일 사진을 공개했다.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1900~1965)는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일리노이 주의 정치 명가 출신이며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번 패했다. 일리노이 주지사(1949~1953년, 관행에 따라 31대 또는 33대로 계산)로는 주 경찰 인사에서 정치적 고려를 없애고 실적제를 도입했으며, 적색 공포기에 공직자의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949년 앨저 히스의 인품 증인으로 선서 진술을 했고, 이는 1952년 선거에서 매카시와 닉슨이 그를 공산주의에 무르다며 공격하는 데 쓰였다. 19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했으며, 1965년 7월 14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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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1944해군장관실 수석 법률보좌관
- 1945국무장관 특별보좌관 · 유엔 준비위원회 미국 부대표
- 1948–1953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 1952민주당 대통령 후보
- 1956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
- 1961–1965유엔 주재 미국 대사
디엔비엔푸 패전 뒤 넉 달 안의 휴전을 약속하고 총리가 되어 1954년 제네바 협정을 맺은 프랑스 정치가
1954년 총리가 된 피에르 망데스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제네바에서 베트민과 직접 협상해 7월 휴전 협정을 맺고, 튀니지 자치 협상도 시작했다.
급진당 소속의 유대계 변호사·경제 전문가로, 전쟁 중 자유 프랑스에 가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찍부터 비판했고, 디엔비엔푸 함락 뒤인 1954년 6월 17일 넉 달 안에 휴전을 이루지 못하면 물러나겠다고 약속하고 총리가 되었다. 7월 21일 제네바 협정으로 약속을 지켰다. 여덟 달 재임하는 동안 튀니지 자치를 인정했고, 그해 11월 알제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과의 군사 협력과 프랑스 핵 개발의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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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급진당 소속으로 유르주 로비에의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 1938레옹 블룸 내각에서 재무차관을 지냈다.
- 1943–1945자유 프랑스에서 재정위원, 이어 국민경제장관을 맡았고, 긴축 정책을 둘러싸고 드골과 대립해 1945년 4월 사임했다.
- 1954–1955총리로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을 협상하고 튀니지 자치 협상을 열었다. 유럽방위공동체 구상에 반대했으며 1955년 2월 내각 불신임으로 물러났다.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묶어 데탕트를 흔든 민주당 매파 상원의원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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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1940스노호미시군 검사장
- 1941–1953연방 하원의원
- 1953–1983연방 상원의원
- 1963–1981내무·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 위원장
- 1972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
- 1976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
- 1974잭슨-배닉 수정안 공동 발의
형 대통령의 최측근 법무장관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타결의 실무자가 된 정치인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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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존 F. 케네디 상원 선거 캠프 매니저
- 1953–1955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매카시 위원회) 법률고문
- 1957–1959상원 노동부패조사위원회(매클렐런 위원회) 수석법률고문
- 1961–1964제64대 미국 법무장관
- 1965–1968뉴욕주 상원의원
베냉의 과도정부와 다당제
1991년 결선투표에서 67.7%를 얻어 케레쿠를 꺾고, 프랑스어권 탈식민 아프리카에서 야당 후보가 선거로 정권을 잡은 첫 사례가 되었다.
세계은행에서 일한 경제 관료 출신의 베냉 정치가다. 1990년 국민회의 뒤 과도정부 총리를 맡았고 1991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레쿠를 이겼다. 사회주의 정권의 창건자가 아니라 그 체제에서 다당제와 경제 구조조정으로 이행한 시기의 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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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1967재무 감사관
- 1967–1968재무·경제부 장관
- 1990–1991총리
- 1991–1996대통령
- 1994르네상스당 당수
- 2003–2015코토누 시장
1972년 혁명세대 좌파 정당 MFM의 창당자
MFM이 마침내 혁명전선에 들어오자 라치라카는 '더 이상 MFM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몽자 자오나의 모니마에서 정치에 입문한 농학대 교수 라코토니리나는 1972년 5월 시위를 조직해 치라나나 정권의 퇴진을 이끈 학생세대의 지도자였다. 1972년 12월 마오쩌둥주의 좌파 정당 소민 권력 투사(MFM)를 창당했으나 1976년 라치라카 정권에 해산·연금되었다가, 이듬해 6월 혁명전선(FNDR)에 합류해 혁명최고평의회 경제위원장으로 국유기업을 맡았다. 이후 자유주의로 돌아서 1991년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2009년 망명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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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모니마(MONIMA) 입당
- 1968모니마 안타나나리보 지부 책임자
- 1972MFM 창당(12월 27일)
- 1977–1989혁명최고평의회 위원·경제위원장
- 1989대통령 선거 2위(약 20%)
- 1991–1993경제사회복구위원회 공동위원장
- 1993–1998국회의원(마난드리아나)
- 2009망명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제3의 길을 거부한 시장개혁 정치가
“우리는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시장경제를 원한다.”
바츨라프 클라우스는 체코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1989년 이후 국가사회주의 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급진적 경로를 대표했다. 그는 시민민주당을 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를 이끈 뒤 체코 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정치적 자유에는 공감했지만 경제적 제3의 길은 거부했으며, 이 입장은 전환기의 ‘수식어 없는 시장경제’와 이후 체코 보수주의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대통령으로서는 유럽 통합과 기후변화 정책을 비판하며 주권과 시장의 우위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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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프라하 경제대학교 졸업
- 1971–1986체코슬로바키아 국립은행 근무
- 1987–1989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예측연구소 분석가
- 1989–1991체코슬로바키아 재무장관
- 1991–2002시민민주당 초대 의장
- 1992–1998체코 총리
- 1998–2002체코 하원 의장
- 2003–2013체코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