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고 국제연맹에서 트리아농 국경 수정을 호소한 귀족 정치인
빈에서 태어난 백작으로, 1877년 의회에 들어가 반세기 동안 활동한 웅변가였다. 1906~1910년 교육장관으로 비헝가리계 학교에 헝가리어 교육을 강제한 1907년의 「어포니법」을 만들었다. 1920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어 1월 16일 연설했으나 조건은 바뀌지 않았고, 3월 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졌다. 이후 합스부르크 정통주의 야당 의원이자 국제연맹 대표로 트리아농 국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1933년 군축회의 참석차 머물던 제네바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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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7의회 진출
- 1906–1910교육장관, 1907년 어포니법
- 1920파리 강화 대표단장
- 1920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패배
- 1923–1933국제연맹 대표
인도 총독을 지내고 외무장관으로 커즌선과 로잔 조약 협상을 이끈 보수당 정치가
더비셔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튼과 옥스퍼드를 거쳐 1885년 하원에 들어갔고, 러시아의 인도 위협을 경고하는 여행기를 썼다. 1899~1905년 인도 총독으로 행정 개혁을 폈지만, 1905년 벵골 분할로 민족주의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재임 중 대기근이 겹쳤다. 1차 세계대전 중 로이드 조지의 전시 내각에 들어갔고, 1919년 10월 외무장관이 되어 소련-폴란드 경계안인 커즌선에 이름을 남겼다. 세브르 조약을 설계했고, 1922년 로잔 회의에서 연합국 수석 협상자로 튀르키예의 국경을 정했다. 1923년 총리 자리를 놓쳤고 1925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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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5하원 의원
- 1899–1905인도 총독
- 1916전시 내각, 상원 원내대표
- 1919–1924외무장관
- 1922–1923로잔 회의 연합국 수석 협상자
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은 핀란드의 현실주의 외교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스탈린에게서 빌려와 평생의 외교 원칙으로 삼은 말.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 시절부터 시작해 핀란드 독립·내전·겨울전쟁·계속전쟁·냉전을 모두 통과한 정치가다. 독립 직후인 1918년 첫 총리를 지내며 친독일·군주제 노선을 밀었고,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다. 1939년 가을 스톡홀름 주재 공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직접 협상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임소장관으로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46년 대통령에 오른 뒤로는 '현실 인정이 지혜의 시작'이라며 소련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추구했고, 이 파시키비 독트린은 냉전기 핀란드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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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1913핀란드 의회 의원 (핀란드당)
- 1908–1909원로원 재무분과장
- 1918.05–11핀란드 총리
- 1914–1934KOP 은행 총재
- 1936–1939주스웨덴 공사
- 1940–1941주모스크바 공사
- 1944–1946핀란드 총리
- 1946–1956핀란드 대통령
1919년 세게드 반혁명 정부를 세우고 1931~1932년 헝가리 총리를 지낸 보수 귀족
니르바크터의 오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카로이 미하이의 사촌이다. 상원 의원이 되었고 1906~1910년 아라드 주지사를 지냈다. 1919년 5월 평의회 공화국에 맞서 아라드에서 반혁명 정부를 세웠으나 루마니아군에 억류되었고, 풀려난 뒤 5월 30일 프랑스군이 점령한 세게드에서 정부를 다시 꾸렸다. 이때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국방장관으로서 국민군을 세워 달라고 청했고, 두 사람은 평생의 벗이 되었다. 1930~1931년 베틀렌 정부의 외무장관을 거쳐 1931년 8월 총리가 되었고, 비어토르바지 고가교 폭파 뒤 계엄을 선포해 공산주의자를 가두었다. 1932년 9월 사임했고, 1939년 제2차 유대인법에 항의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1947년 부다페스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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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1910아라드 주지사
- 1919아라드·세게드 반혁명 정부 총리
- 1930–1931베틀렌 정부 외무장관
- 1931–1932헝가리 총리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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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1944년 8~10월 총리로서 유대인 이송을 멈추고 휴전을 준비했으나 화살십자당 쿠데타로 물러난 장군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10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헝가리 적군 사령부에서 복무하다 호르티의 국민군에 들어갔다. 1928~1934년 프라하 주재 무관을 지냈고 1943년 제2군, 1944년 4월 제1군 사령관이 되었다. 베틀렌 이슈트반의 천거로 1944년 8월 29일 스토여이의 후임 총리가 되어 은밀히 휴전 준비를 맡았고, 그의 정부는 유대인 이송을 멈추고 책임 차관들을 갈아치웠다. 10월 15일 판처파우스트 작전과 화살십자당 쿠데타로 휴전이 무산되자 밤새 페젠마이어와 협상한 끝에 호르티에게 항복을 권했고, 사임을 강요받고 독일 측에 갇혔다. 전후 기소되지 않았으나 연금과 땅을 빼앗겼고, 1965년 딸이 사는 애들레이드로 건너가 1967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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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루도비카 사관학교 졸업
- 1915–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장교
- 1928–1934프라하 주재 무관
- 1943–1944제2군 사령관
- 1944제1군 사령관
- 1944총리(8월 29일~10월 15일)
- 1965–1967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거주, 사망
레이건 곁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밀어붙여 냉전 종식을 이끈 국무장관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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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뉴욕시 출생,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성장
- 1942–1945해병대 장교, 앙가우르 전투 참전
- 1969–1974노동장관 → OMB 국장 → 재무장관, 브레턴우즈 체제 종료
- 1974–1982벡텔 사장, 중동 건설 사업 확장
- 1982–1989국무장관,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INF 조약
- 1989–2021스탠퍼드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핵군축 및 탄소세 운동
- 1993회고록 『격랑과 승리』(Turmoil and Triumph) 출간
철의 장막을 가른 오스트리아 유럽주의자
1989년 6월 27일, 모크와 호른 줄러가 쇼프론 인근 철조망을 절단하며 국경 개방을 세계에 알렸다.
알로이스 모크는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정치가로, 유럽 통합을 오스트리아 외교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외무장관으로서 헝가리의 국경 개방과 오스트리아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추진하며 냉전 종식기의 중부 유럽 재편에 관여했다. 1989년 6월 27일 호른 줄러와 국경 철조망을 상징적으로 절단한 장면은 동독 주민들의 탈출과 동구권 붕괴로 이어진 국경 개방의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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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빈대학교 법학 박사
- 1961–1966연방수상실 유럽경제공동체·유럽자유무역연합 담당관, 파리 OECD 대표부
- 1966–1969요제프 클라우스 수상 비서실장
- 1969–1970교육·과학·연구·예술·문화·체육 연방장관
- 1979–1989오스트리아 국민당 연방당수
- 1987–1989오스트리아 부총리
- 1987–1995오스트리아 외무장관
- 1990국방 행정 임시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