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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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리야 사모일로브나 제믈랴치카

Розалия Самойловна Землячк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76–1947 ○ 자연사

지하 암호명 '데몬', 유일한 여성 소브나르콤 부의장

지하 활동 시절 스스로 택한 암호명 '데몬(Демон)'은 레르몬토프의 시를 암호표로 삼았다는 설과 함께 평생 그녀의 혁명적 인격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남았다.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의 볼셰비키 핵심 조직가로, 1903년 중앙위원회에 협력되고 1905년·1917년 모스크바 봉기를 지도했다. 내전기 제8군·제13군 정치부장으로 복무하며 여성 최초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0-21년 크림 지방 당 서기 시절 조직한 적색 테러는 오늘날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1939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라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고, 스탈린 시기 숙청을 피한 극소수 구볼셰비키 여성 가운데 하나로 194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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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RSDRP 가입, 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901이스크라 대리인 — 오데사·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활동
  • 1903–1904중앙위원회 협력, '다수파 위원회 국' 구성원
  • 1905모스크바 위원회 서기, 12월 봉기 지도
  • 1917모스크바 합법 위원회 서기, 10월 로고슈스코-시모놉스키 봉기 지휘
  • 1918–1920제8군·제13군 정치부장, 루간스크 방어전 참가, 최초의 여성 적기훈장 수훈
  • 1920–1921크림 당 책임서기, 혁명위원회 위원 — 적색 테러 조직
  • 1924–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교통인민위원부 간부, 페름·모스크바 지구당 서기
  • 1939–1940소비에트 통제 위원회 의장
  • 1939–1943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
  • 1943–1947당 통제 위원회 부의장

얀 세라다

Ян Серада

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를 이끌고 라다 의장으로 독립 선포를 주재한 수의사

1879년 민스크현 자즈베야에서 태어나 1903년 바르샤바 수의학교를 마쳤고, 수의사이자 마리나호르카 농업학교 교사로 일했다. 러일전쟁에 종군했고 벨라루스 사회주의 흐라마다에서 활동했다. 1917년 12월 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 의장으로 뽑혔고 대회가 해산될 때 체포되었다. 1918년 2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회담에 벨라루스 대표로 갔고, 3월 라다 의장이 되어 독립을 선포한 3월 24~25일 회의를 이끌었으며, 7~11월에는 인민서기국 의장을 지냈다. 1920년대 소비에트 벨로루시의 농업 부문에서 일하다 1930년 「벨라루스 해방동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유형과 굴라크를 거쳤고, 1943년 석방된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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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1민스크현 수의사, 마리나호르카 농업학교 교사
  • 1917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 의장
  • 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회담 벨라루스 대표단원
  • 1918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라다 의장
  • 1918벨라루스 인민공화국 인민서기국 의장·외무 서기
  • 1925–1929벨로루시 농업 아카데미 강사

피오트라 크레체우스키

Пётра Крэчэўскі
벨라루스 국가기관 민족주의 벨라루스 벨라루스 1879–1928 → 망명지에서 사망

1919년부터 죽을 때까지 망명지 프라하에서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라다를 이끈 의장

1879년 그로드노현의 시골 교회 보제 집안에서 태어나 빌뉴스 신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일했으며, 1909년부터 빌뉴스 국립은행에서 근무했다. 1917년 보리소프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의장으로 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에 대의원으로 참석해 집행위원회에 들어갔다. 1918년 인민서기국의 국가감사관, 재무·통상 서기를 지냈고 사회주의 연방주의자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9년 12월 13일 라다 의장이 되었고, 1920년 망명해 카우나스와 베를린을 거쳐 1923년부터 프라하에서 라다를 대표했다. 1921년 리가 조약을 규탄한 프라하 회의를 열었고, 1925년 망명 정부의 자진 해산 결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1928년 프라하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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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빌뉴스 신학교 졸업, 교사
  • 1909빌뉴스 국립은행 근무
  • 1917보리소프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의장
  • 1918인민서기국 국가감사관, 재무·통상 서기
  • 1918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라다 서기
  • 1919–1928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라다 의장
  • 1926연감 『해외 벨라루스』 편집

아브람 야코블레비치 벨렌키

Абрам Яковлевич Белень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2–1941 ✕ 처형

레닌의 개인 경호를 맡은 체카 창립 멤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당시 벨렌키는 제르진스키와 함께 체포되었다. 양측 서술은 이 사건을 7월 6일로도, 8월로도 기록한다.

1882년 또는 1883년 벨라루스 스베르줸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2년 1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볼셰비키로 활동하다 1904년 12월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에서 구두장이와 인쇄공으로 일하며 롱쥐모 당학교에서 레닌을 만났다. 1917년 5월 귀국해 12월까지 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를 관리했고, 같은 해 12월 체카에 배속되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레닌 경호 책임자로 있었고, 1928년까지 당·정부 지도부 경호를 담당하는 특별부서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OGPU·NKVD 특별전권위원을 지냈으나 1938년 5월 9일 체포되어 1941년 10월 16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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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4볼셰비키 지하운동, 반복 체포
  • 1904–1917파리 망명: 구두장이·인쇄공, 롱쥐모 당학교 수학
  • 1917.05–12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 관리자
  • 1919–1924레닌 경호 책임자
  • 1921–1928ВЧК-ОГПУ 특별부서장 (당·정부 지도부 경호)
  • 1930–1936ОГПУ·НКВД 특별전권위원
  • 1936–1938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 1917.12–체카 배속, 출판 문제 담당 체카 위원
  • 1921–1928체카 위원회 위원, 체카 프레지디움 특별부서장, 이후 GPU·OGPU 특별부서장
  • 1936–1938NKVD 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1956년 복권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크레스틴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рестин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3–1938 ✕ 처형

책임서기에서 피고석으로 간 초기 볼셰비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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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재무인민위원
  • 1919–1921책임서기, 정치국원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후 처형

안톤 루츠케비치

Антон Луцкевіч

흐라마다를 세우고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총리로 파리 강화회의에 승인을 구한 민족운동가

1884년 샤울랴이에서 몰락 귀족 집안에 태어나 1903년 형 이반 등과 벨라루스 혁명 흐라마다(뒤의 사회주의 흐라마다)를 세웠다. 빌뉴스에서 『나샤 니바』 등 첫 벨라루스어 신문들을 냈고, 1915년 독일 점령 아래에서 비밀 조직 벨라루스 민중위원회를 이끌었다. 1918년 빌뉴스 벨라루스 평의회 의장으로 독립 선포에 참여했고, 10월 총리, 이어 외무장관이 되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단을 이끌고 폴란드와 국가 연합을 협상했으나 성과 없이 1920년 2월 사임했다. 서벨라루스에서 출판과 교육에 힘쓰다 1939년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고, 1942년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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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벨라루스 혁명 흐라마다 공동 창립
  • 1915빌뉴스의 비밀 조직 벨라루스 민중위원회 지도
  • 1918빌뉴스 벨라루스 평의회 의장
  • 1918–1920벨라루스 인민공화국 총리·외무장관
  • 1921빌뉴스 벨라루스 민족위원회 의장
  • 1921–1939빌뉴스 벨라루스 박물관장

즈미체르 질루노비치

Зміцер Жылунові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7–1937 구금 중 사망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의 노동자 시인으로 소비에트 벨로루시 첫 정부를 이끈 볼셰비키

1887년 코필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904년 흐라마다에 들어가 『나샤 니바』에 기고했다. 1913년부터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에서 일하며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으로 시를 썼다. 1918년 벨라루스 민족위원부 비서로서 빌헬름 크노린과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에 맞서 벨라루스 공화국 수립을 주장해 레닌과 스탈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1월 1일부터 2월 3일까지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을 지냈다. 뒤에 출판·문화 기관을 이끌고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나 1931년 당에서 제명되었고,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모길료프의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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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페트로그라드 「불칸」 공장 노동자
  • 1918벨라루스 민족위원부 비서
  • 1919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
  • 1920–1931벨로루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 1928벨로루시 과학아카데미 회원

야코프 이사코비치 세레브랸스키

Яков Исаакович Серебря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2–1956 ✕ 심문 중 사망

파리에서 백군 장군을 납치한 소련 특수공작 창시자, 자기 기관에 고문당하다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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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사회혁명당 맥시말리스트; 투옥(1909); 제국군, 동프로이센 중상(1914); 바쿠 전기기사
  • 1917–1923바쿠 소비에트 사회혁명당 활동가; 페르시아; 모스크바 체카; 사회혁명당 혐의 체포
  • 1923–1929OGPU 팔레스타인·벨기에·프랑스 불법체류자; '야샤 그룹' 간첩망 구축
  • 1929–1934OGPU 특수반장; 쿠테포프 장군 파리 납치(1930); 200명 이상 포섭
  • 1934–1938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 트로츠키 기록보관소 탈취; 스페인 무기 밀반입; 상급소령
  • 1938–1941체포·고문·사형 선고; 독소전 발발 후 사면
  • 1941–1946NKVD 제4국 전시 정보작전; 1946년 퇴역
  • 1953–1956베리야 사건 연루 재체포; 부티르카 심문 중 사망

야코프 사울로비치 아그라노프

Яков Саулович Агр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3–1938 ✕ 처형

체카의 정치수사 설계자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과 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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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 1933–1934OGPU 부의장
  •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나움 이사코비치 에이팅곤

Наум Исаакович Эйтинго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9–1981 ○ 자연사, 모스크바

트로츠키 암살과 원자력 첩보를 설계한 소련 최고의 암약 지휘관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에서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공격한 동안 에이팅곤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는 각각 다른 차에서 대기했고, 메르카데르가 붙잡리자 달아났다.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포그롬을 겪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1964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198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으며 1992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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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 1940수도플라토프와 '오리 작전' 공동 지휘 — 멕시코 트로츠키 암살
  • 1941–1945NKVD 제4국 부책임자 — 기만작전 '수도원'·'베레지노' 지휘
  • 1945–1951NKVD/NKGB 'S' 부서 부책임자 — 원자력 첩보; 발트·서우크라이나 반소 파르티잔 제압
  • 1951–1964'MGB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 12년형; 1953년 베리야에 의해 일시 복직 후 재체포
  • 1964–1981석방, 출판사 선임 편집자; 1992년 사후 복권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투르코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Турк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인 1908–1994 ○ 자연사

쿠즈네초프가 야로슬라블에 심은 인물, 사형 대신 15년형을 산 레닌그라드 사건 피고인

“그는 내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내가 쓰러지자 배를 발로 찼다… 나는 의사가 주사기를 든 것을 보았다. 겁이 나서 바로 두 통의 조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계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장과 당 기구를 거쳐 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1946–1949)까지 오른 당 간부로, 전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러시아 공화국 각지에 배치한 지역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월 29~30일 레닌그라드 사건 재판에서 중앙 피고인 6인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 대신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MGB 수사관들에게 구타당해 허위 자백에 서명했고, 1954년 석방·복권된 후 조용히 살다 199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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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7유리 공장 노동자 → 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 기술자·기획생산부장
  • 1937–1940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장
  • 1940–1944레닌그라드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키 구당위 간부서기 → 제1서기
  • 1944–194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45–1946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46–1949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 · 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 1949–1954레닌그라드 사건: 해임·체포·15년형 (MGB 구타로 허위 자백)
  • 1954–1956쿠스타나이 주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56–레닌그라드 주 계획위원회 부의장 → 연방급 개인연금 생활자

니콜라이 니키토비치 슬륀코프

Николай Никитович Слюньк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벨라루스 1929–2022 ○ 자연사

트랙터 공장장 출신 정치국원, '당 중앙위의 디렉터'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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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