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1941년 10월, 밀시테인은 베리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쟁 발발 이후 특별부가 지연·탈주 군인 65만 7천여 명을 억류했고 그중 1만 201명을 총살했으며 "3,321명은 부대 앞에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그루지야에서 당 경력을 쌓은 뒤, 1939년 NKVD 수송총국장에 올라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의 철도 기구를 운영했다. 그의 총국은 폴란드인,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등 전체 민족 집단의 추방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이 공로로 전투공로훈장인 수보로프 훈장 2급을 받았으나 소비에트 국가는 1962년 이를 취소했다. 1953년 베리야의 체포 직후 함께 체포되어 별도 재판으로 1955년 총살됐다.
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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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체카(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입부, 서부전선 사단 특별부 정찰 요원
1922모스크바 주 GPU 비밀정치부 근무, 불라노프의 보좌관
1925–1927외무인민위원부 암호부와 소프키노에서 근무
1930–1931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 군관구 OGPU 전권대표부 근무
1931–1933히비노고르스크 GPU 국장, 이후 타타르 자치공화국 OGPU 근무·카잔 형사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