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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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라살레

Ferdinand Lassalle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25–1864 ✕ 결투 중 총상

독일 최초의 노동자 정당 ADAV의 창립자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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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라인란트에서 혁명 선동, 무력 저항 선동 혐의로 6개월 금고
  • 1862「노동자 강령」 강연 — 노동자 계급을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호명
  • 1863.05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 창립, 5년 임기 회장 취임
  • 1863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동·서신 —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
  • 1864.08제네바 근교 결투에서 총상, 사흘 뒤 사망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Wilhelm Liebknecht

아이제나흐파 창립자, 고타 통합강령의 기초자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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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바덴 봉기 참가, 패배 후 스위스로 망명
  • 1850–1862런던 망명 — 마르크스·엥겔스와 교유하며 공산주의자동맹에 가담
  • 1869베벨과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전쟁공채 반대로 체포,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통합강령을 기초해 라살레파와 합당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제국의회 의원으로 당을 지키다
  • 1890–1900당 기관지 『전진(Vorwärts)』 편집장
  • 1900샤를로텐부르크에서 사망

아우구스트 베벨

August Bebel

40년간 독일 노동운동을 이끈 SPD 공동 창립자, '그림자 황제'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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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 1867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으로 첫 당선 — 이후 1913년까지 의원직 유지
  • 1869리프크네히트와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보불전쟁 전쟁공채 반대, 파리코뮌 옹호 연설로 반역죄 유죄 —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라살레파와 합당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D) 출범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취리히에서 『사회민주주의자』 발행, 지하 조직 지휘
  • 1891에르푸르트 강령 채택 주도 — 유럽 사민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준 확립
  • 1899–1906수정주의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에 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어, 정치적 총파업 논쟁 중재

수정주의의 창시자, 진화적 사회주의 이론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저자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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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카를 레기엔

Carl Legien
독립 활동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61–1920 ○ 자연사

1918년 슈티네스와 노사 협정을 맺고 1920년 카프 폭동에 총파업으로 맞선 독일 자유노조 지도자

마리엔부르크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고 선반공이 되었다. 188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890년부터 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 1893~1898년과 1903~1920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1913년 국제노동조합연맹 초대 회장이 되었다. 당의 우파를 이끌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는 성내 평화와 파업 포기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15일 후고 슈티네스와 협정을 맺어 고용주가 처음으로 노조를 노동자 대표로 인정하고 8시간 노동제와 사업장 노동자위원회를 받아들이게 했으나, 노조는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1919년 독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되었고, 1920년 3월 카프 폭동에 맞서 총파업을 조직했다. 같은 해 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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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사회민주당 입당
  • 1890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
  • 1893제국의회 의원
  • 1913국제노동조합연맹 초대 회장
  • 1918.11.15슈티네스-레기엔 협정
  • 1919독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 1920.03카프 폭동에 맞선 총파업

후고 하제

Hugo Haase

전쟁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을 세우고 1918년 에베르트와 함께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끈 법률가

1918년 12월 에베르트 정부가 혁명 수병대를 유혈 진압하자, 하제는 USPD 대표들과 항의해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사임했다.

동프로이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사회주의자 재판을 변호하며 이름을 알렸고, 1911년 베벨과 함께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전쟁공채에 반대했으나 당의 결정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 성명을 읽어야 했다. 1917년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세웠다. 1918년 11월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에베르트와 공동의장을 맡았지만 크리스마스 위기 뒤 정부를 떠났다. 1919년 10월 제국의회 앞에서 총격을 받고 11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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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변호사로 개업해 노동자·농민과 사회주의 활동가를 변호했다.
  • 1911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사회민주당(SPD) 의장이 되었다.
  • 1914전쟁공채에 반대했지만 당 규율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지고 당의 찬성 입장을 변호했다.
  •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다.
  • 191811월부터 에베르트와 인민대표평의회 공동의장을 맡았고, 12월 정부의 수병대 진압에 항의해 사임했다.
  • 191910월 8일 제국의회에 들어가다 총격을 당했고, 총상으로 인한 혈액중독으로 11월 7일 사망했다.

필리프 샤이데만

Philipp Scheidemann
독일 국가기관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65–1939 → 망명지에서 사망

1918년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첫 총리가 된 SPD 정치가

1918년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독일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며 총리직을 사임했다.

카셀의 인쇄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8년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들어갔다. 11월 9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먼저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해 에베르트의 노여움을 샀다. 인민대표평의회 위원을 거쳐 1919년 2월 총리가 되었으나, 베르사유 조약 수락을 거부하며 6월 사임했다. 1920년대 카셀 시장을 지냈고 1922년 극우의 청산가리 테러를 피했다. 1933년 망명해 코펜하겐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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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제국의회에 진출해 사회민주당(SPD) 의원단 지도부에서 활동했다.
  • 1917SPD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186월 제국의회 부의장이 되었고,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의 사회민주당 장관이 되었다.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혁명기 과도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에 참여했다.
  • 19192월 13일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 수반에 임명되었다. 6월 20일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고 내각과 함께 사임했다.

1918년 11월 뮌헨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했다가 이듬해 암살된 언론인

1918년 11월 바이에른 혁명을 조직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인민국을 선포했으며, 1919년 2월 사임하러 가던 중 암살되었다.

베를린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연극 평론가와 SPD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고, 뒤에 뮌헨으로 옮겼다. 전쟁에 반대해 USPD에 들어갔고, 1918년 1월 군수 파업을 이끌다 투옥되었다. 11월 7일 테레지엔비제 집회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병영을 돌아 이튿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하고 총리가 되었다. 독일의 전쟁 책임을 보여 주는 외교 문서를 공개해 우파의 증오를 샀다. 1919년 1월 선거에서 참패한 뒤 사임하러 가던 2월 21일 아르코발라이 백작에게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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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5『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고 편집자로 활동했다.
  • 1898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 1900–1905『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다.
  • 1907–1910뉘른베르크의 『프랭키셰 타게스포스트』 편집장을 지냈다.
  • 1917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가입했다.
  • 1918군수 노동자 파업을 선동한 혐의로 반역죄 유죄 판결을 받고 슈타델하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 1918–1919바이에른 인민국 초대 공화파 총리를 지냈다.

구스타프 노스케

Gustav Noske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키워 1919년 좌파 봉기를 진압한 SPD 국방장관

1919년 베를린 봉기 진압을 지휘해 자유군단과 군대를 투입하고, 3월 사격 명령으로 군의 즉결 처형을 허용했다.

브란덴부르크의 바구니 제조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1906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군사 문제 전문가로 알려졌다. 1918년 11월 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 봉기를 수습하고 총독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위기 뒤 USPD가 떠난 인민대표평의회에 들어가 군사를 맡았고,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조직해 1월 봉기와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19년 2월 초대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1920년 카프 폭동 뒤 물러났다. 하노버 주지사를 지냈고 1944년 7월 음모 뒤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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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사회민주주의 운동과 바구니 제조공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브란덴부르크 사회민주협회 의장을 지냈다.
  • 1906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해군·육군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 1918.11–12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들과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이끌었고, 12월 28일 군·해군 전국위원이 되었다.
  • 1919.02–1920라이히스베어 장관으로 임명되어 자유군단과 군대를 동원해 1월 봉기 및 베를린의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20년 카프 폭동 뒤 사임했다.
  • 1920–1933프로이센 하노버 주의 고등행정관을 지냈으며, 1933년 9월 직업공무원 복구법에 따라 해임되었다.

구스타프 바우어

Gustav Bauer

연합국의 최후통첩 아래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인 사회민주당 총리

동프로이센 다르케멘에서 태어나 변호사 사무원으로 일하다 사무직 노동조합을 세웠고, 1908~1918년 자유노동조합 총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1912년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8년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의 노동장관이 되었다. 1919년 6월 샤이데만이 베르사유 조약에 항의해 사임하자, 조약을 비판해 왔으면서도 후임 총리를 맡아 조약 비준을 이끌었다. 재정 개혁과 사회보험 확대를 펼쳤으나, 1920년 3월 카프 폭동 때 반란군과 협상한 일로 정부가 물러났다. 뒤에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고, 바르마트 부패 사건으로 1925년 의원직을 내놓았다. 1944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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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8노동조합 총위원회 부의장
  • 1912제국의회 의원(사회민주당)
  • 1918노동장관
  • 1919–1920독일 총리
  • 1921–1922부총리 겸 재무장관

11월 혁명의 혁명정부를 이끌며 평의회 운동을 의회 민주주의로 돌리고 초대 대통령이 된 SPD 지도자

1918년 11월 혁명 때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고 국민의회 선거를 추진했다. 1919년 초대 독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25년까지 재임했다.

하이델베르크의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마구공으로 일하다 브레멘에서 당 활동가가 되었고, 1913년 베벨의 뒤를 이어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전쟁 중 전쟁공채와 「성내 평화」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9일 재상직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고, 그날 밤 그뢰너 장군과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2월 국민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좌우의 봉기를 군과 자유군단, 헌법 제48조의 긴급명령으로 눌렀다. 1925년 임기 중 맹장염 수술 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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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
  • 1905SPD 당 집행부에 선출되었다.
  • 1912독일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 1913SPD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1811월 혁명 때 국가수상 막스 폰 바덴에게서 국정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다.
  • 1919국민의회에서 독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19252월 28일 맹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블라디미르 구스타보비치 그로만

Владимир Густавович Гром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74–1940 → 옥사

멘셰비키 출신 통계학자로서 고스플란 초기 통제숫자·균형법을 설계한 유전적 계획론의 대표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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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908모스크바대학 입학, 혁명운동으로 제적 후 1908년 통신졸업
  • 1898–1905RSDLP 입당, 제2차 대회 후 멘셰비키 잔류, 농업강령 공동 기초; 뱟카·예니세이 유형 중 통계 작업 시작
  • 1909–1914펜자 주통계국장, 다단계 표본추출법 개발·농가조사 적용
  • 1917–1918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식량위원장·중앙식량관리국장, 10월혁명 후 북부지역 식량관리국장
  • 1921–1926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 최초 '국민경제 통제숫자'·균형법 설계, '회복적 성장' 개념 정식화
  • 1926–1929고스플란 농업분과위원장, 바자로프와 유전적 계획 방법론 주창; 스탈린의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공개 비판
  • 1930–1940'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 1931년 재판에서 10년형; 수즈달 교정노동수용소에서 1940년 사망, 1991년 복권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를 지냈다.

화가와 언론인으로 일했으며, 1917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쟁 지지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18~1919년 뷔르템베르크 임시정부에서 내무장관을 맡았고, 1919년부터 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당 대표단으로 참석했으나 코민테른 가입 조건과 독일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했다. 1922년 독립사회민주당 다수가 독일사회민주당에 재통합된 뒤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1933년 나치 집권 후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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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뷔르템베르크 임시정부 내무장관
  • 1919–1922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
  • 1920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독립사회민주당 대표로 참석
  • 1922–1933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공동대표

헤르만 뮐러

Hermann Müller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민주당 정치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189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당 지도부에 올랐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외무장관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1920년 처음 총리가 되어 좌파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장애인 고용, 초등교육, 실업급여와 노동자 사회보호를 확대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1928년 다시 총리가 되어 대연정을 이끌었으며, 대공황과 실업보험 재정 분담을 둘러싼 갈등 속에 연정이 붕괴하자 1930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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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 1916독일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 1919–1920외무장관을 지내고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 1920총리로 재임했다.
  • 1928–1930대연정 총리로 재임했다.

파울 레비

Paul Levi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3–1930 ○ 폐렴 중 추락사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KPD 지도자로, '반푸치즘'으로 코민테른 좌경모험주의를 비판하다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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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 1918.12KPD 창립대회에서 '국민의회' 의제 발제
  • 1919.03–1921.02KPD 의장 —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요기헤스 사후 당 재건
  • 1920USPD 좌파 통합으로 KPD 대중정당화, '공개서한' 전술 주도
  • 19213월 행동을 비판한 『우리의 길: 반푸치즘』으로 KPD 제명
  • 1922USPD 거쳐 SPD 합류, 룩셈부르크의 『러시아 혁명』 유고 출간
  • 1924–1930제국의회 SPD 의원,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살해 진상규명·반나치 투쟁

에른스트 로이터

Ernst Reuter

분단 베를린의 목소리가 된 사회민주주의자

“세계의 민족들이여, 이 도시를 보십시오. 이 도시와 이 민족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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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18–1919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 초대 의장
  • 1921독일 공산당 베를린 지구 제1서기
  • 1926–1931베를린 교통 담당 시의원
  • 1931–1933마그데부르크 시장
  • 1935–1946앙카라대학교 도시계획 강사·터키 정부 고문
  • 1947베를린 시장 당선, 소련 점령당국의 승인 거부
  • 1948–1953서베를린 시장, 1951년부터 통치시장

에른스트 톨러

Ernst Toller

바이에른 혁명에 참여한 독일 유대계 표현주의 극작가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해 베르됭 전투에서 부상한 뒤 1917년 제대했고, 전쟁 경험을 거쳐 평화주의자가 되어 독일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 대통령을 엿새간 맡고 공화국의 무장 저항에 참여했으며, 반역죄로 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대표 희곡들을 썼다. 나치 집권 뒤 망명해 반나치 활동을 이어갔고 1939년 뉴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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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독일군에 자원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 1917전쟁 중 부상과 건강 악화 뒤 군에서 제대하다.
  • 1919독일독립사회민주당원으로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 지도부에 참여하고, 4월 6~12일 대통령을 맡다.
  • 1919공화국의 무장 저항에 참여한 혐의로 반역죄 5년형을 선고받다.
  • 1925석방되어 바이에른에서 추방되고 베를린으로 가다.
  • 1933나치 집권 뒤 독일을 떠나 스위스·프랑스·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

Friedrich Ebert junior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계 1894–1979 ○ 자연사

분단의 현장에서 국가 권력으로 이동한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임시 민주 마기스트라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자로 이동한 독일 정치가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과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겹쳐 있었다. 나치 시대에는 불법 정치활동으로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전후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제적 통합을 거쳐 SED 체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비정상적 시의회를 이끌어 선출된 베를린 정부를 폐위시키고 경쟁적 동베를린 마기스트라트를 세웠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동독 국가기관 운영을 함께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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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자
  • 1927–1933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시의원
  • 1928–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6–1949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의장
  • 1946–1979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위원
  • 1948–1967동베를린 초대 시장
  • 1949–1979동독 인민회의·국가평의회 지도부
  • 1971–1979SED 인민회의 원내단 의장

쿠르트 슈마허

Kurt Schumacher

나치 수용소에서 10년을 버티고 전후 서독 사회민주당을 이끌며 공산당과의 통합을 거부한 지도자

서프로이센 쿨름에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었고, 191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다. 뷔르템베르크 주의회와 제국의회 의원으로 나치에 맞섰다. 1933년 7월 체포되어 활동 포기 서약을 거부하고 10년 동안 여러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1945년 하노버에서 당을 재건했고, 소련 점령지구의 그로테볼이 내세운 공산당과의 통합을 거부하며 공산당을 「붉게 칠한 나치」라 불렀다. 1946년 당 의장, 1949년 연방의회 첫 야당 지도자가 되어 중공업 국유화와 통일 독일을 요구하며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 정책에 맞섰다. 1952년 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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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사회민주당 입당
  • 1930–1933제국의회 의원
  • 1933–1943나치 강제수용소 수감
  • 1946–1952사회민주당 의장
  • 1949–1952연방의회 야당 지도자

에리히 그니프케

Erich Gniffke
독일 사회민주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95–1964 ○ 심장마비

동독 사회민주당을 재건하고 통합에 서명했으나 1948년 사회주의통일당을 탈당해 서쪽으로 간 조직가

엘빙의 조선소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사무직 노조 간부로 브라운슈바이크에서 그로테볼과 함께 일했다. 나치 시기 사회민주당 저항 모임에 가담해 1938년 그로테볼과 함께 투옥되었다. 1945년 5월 그로테볼과 함께 베를린에서 사회민주당을 재건해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공산당과의 합의와 통합 선언에 사회민주당 쪽 첫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다. 1946년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에 뽑혔으나 당의 스탈린화 속에 고립되었고, 1948년 9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10월 「새로운 형태의 당」이 전체주의 독재로 이어질 것이라는 탈당 편지를 쓰고 서쪽으로 도피했다. 1964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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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사회민주당 입당
  • 1938그로테볼과 함께 투옥
  • 1945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46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
  • 1948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고 탈당, 서쪽으로 도피

에리히 올렌하우어

Erich Ollenhauer

망명 사회민주당 간부로 돌아와 슈마허의 뒤를 이어 서독 사회민주당을 이끈 야당 지도자

마그데부르크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을 이끌었다. 1933년 5월 당 집행부와 함께 프라하로 망명해 망명 사회민주당(소파데)을 꾸렸고, 파리와 리스본을 거쳐 런던에서 전쟁을 보냈다. 1946년 2월 귀국해 하노버의 슈마허 사무소에서 일했고, 그해 부의장이 되어 당 조직과 국제 관계를 맡았다. 1952년 슈마허가 죽자 당 의장,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가 되었다. 1953년과 1957년 총리 후보로 아데나워에게 졌고, 1959년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뒷받침했다. 1963년 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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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사회민주당 입당
  • 1928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 의장
  • 1933프라하로 망명, 망명 사회민주당 집행부
  • 1946사회민주당 부의장
  • 1952–1963사회민주당 의장, 연방의회 야당 지도자

분단의 도시에서 화해의 정치를 만든 사회민주주의자

장벽이 세워진 뒤 그는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하지만,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는 살아가야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독재에 맞서 망명과 저항을 거친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였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장벽 건설 뒤 흔들린 도시의 사기를 지키고 서방의 책임을 촉구했으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총리로서는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냉전의 대립을 완화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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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5나치 독재에 맞선 망명·저항 활동가
  • 1948–1953베를린 주재 독일 사회민주당 대표
  • 1957–1966서베를린 정무시장
  • 1964–1987독일 사회민주당 의장
  • 1966–1969외무장관·부총리
  • 1969–1974독일연방공화국 연방총리
  • 1976–1992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