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 국민은 라치라카를 다음 7년 동안 선출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마다가스카르 남부 안탄드로이족의 민족주의 정치가다. 1943년 비밀결사 지니를 조직하고 1947년 반란에 가담해 식민 당국에 투옥된 뒤, 1958년 MONIMA를 창당해 빈곤한 남부 농민을 대변하며 프랑스에 종속된 치라나나 체제에 맞서 1971~72년 로타카 시위를 이끌었다. 라치라카의 혁명전선에 합류했다가 1977년 지방선거를 부정으로 규탄하고 탈퇴해 제2공화국의 대표적 야당 지도자가 됐다.
MFM이 마침내 혁명전선에 들어오자 라치라카는 '더 이상 MFM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몽자 자오나의 모니마에서 정치에 입문한 농학대 교수 라코토니리나는 1972년 5월 시위를 조직해 치라나나 정권의 퇴진을 이끈 학생세대의 지도자였다. 1972년 12월 마오쩌둥주의 좌파 정당 소민 권력 투사(MFM)를 창당했으나 1976년 라치라카 정권에 해산·연금되었다가, 이듬해 6월 혁명전선(FNDR)에 합류해 혁명최고평의회 경제위원장으로 국유기업을 맡았다. 이후 자유주의로 돌아서 1991년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2009년 망명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72년 4월 24일부터 1960년 협력협정 폐기와 말가시화를 '제2의 독립'으로 내걸었으나 1972~1975년 군정은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란자노로는 이를 '제3의 독립'으로 부르며, FAEM 사무총장직을 둘러싼 사료도 엇갈린다.
마다가스카르에서 태어나 자란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다. 정치를 남성의 영역으로 여긴 소시민 가정 출신으로, 학생기독교운동(SCM-MPIKRIMA)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정치화되었다. 1972년 마다가스카르 문학·언어학과 3학년이던 그는 FAEM 사무총장으로 4월 24일 시작된 전국 학생운동을 이끌며 1960년 협력협정 폐기와 말가시화를 '제2의 독립'으로 내걸었고, 5월 12일 밤 체포되어 노시라바에 수감되었다. 나이로비에서 WSCF '해방' 프로그램을 맡았고, 1975년 제네바를 거쳐 1978년 나이로비로 돌아왔으며 남편 체포·석방 뒤 캐나다로 건너갔다. 1991년 영국으로 이주해 유엔여성기금(UNIFEM) 아프리카 부서장을 지내며 2010년 퇴직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72마다가스카르 문학·언어학과 3학년, FAEM 사무총장, 파업위원회 위원
19725월 12일 밤 체포되어 노시라바에 수감
1972 이후나이로비 WSCF 아프리카 지역사무소 프로그램 담당자로 '해방' 프로그램 지도, 세계교회협의회 인종차별 반대 프로그램 위원, 개발협력연구기구 설립 및 서아프리카 담당
1975–1991제네바를 거쳐 1978년 나이로비로 복귀, 캐나다에서 여성학 대학원 수학 및 프랑스어 강의 후 영국으로 이주
2010유엔여성기금(UNIFEM) 아프리카 부서장(Head of the Africa section)으로 퇴직, 이후 독립 전문 컨설턴트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