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The Apollonian and the Dionysian
니체가 1872년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예술을 설명하려고 내세운 두 충동. 아폴론적인 것은 꿈처럼 또렷한 형상과 절제, 개체의 경계를 지키는 힘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도취 속에서 개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힘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이 두 힘의 결합으로 보았고, 뒤에는 디오니소스를 삶 전체를 긍정하는 자기 철학의 상징으로 삼았다.
상세
『비극의 탄생』은 무엇을 주장했나?
니체는 스물네 살에 바젤 대학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고, 1872년 첫 책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을 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묶여 있다”는 것을 논리적 통찰만이 아니라 직관의 확실성으로 알게 된다면 미학은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탄생이 두 성의 끊임없는 투쟁과 이따금 찾아오는 화해에 달려 있는 것과 같다고 니체는 비유했다.
daß die Fortentwickelung der Kunst an die Duplizität des Apollinischen und des Dionysischen gebunden ist: in ähnlicher Weise, wie die Generation von der Zweiheit der Geschlechter, bei fortwährendem Kampfe und nur periodisch eintretender Versöhnung, abhängt.
니체는 이 두 충동을 먼저 “꿈과 도취라는 분리된 예술 세계”로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빛의 신 아폴론은 꿈속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형상, 조각과 서사시처럼 윤곽이 또렷한 예술을 다스린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려 아폴론을 ‘개별화의 원리’의 찬란한 신상이라고 불렀다. 개체가 저마다의 경계를 지니고 아름다운 겉모습 속에서 평온하게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술과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는 그 경계가 무너질 때 찾아오는 공포와 황홀을 다스린다. 봄의 축제나 마취 음료 속에서 개체는 자기를 잊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연 전체와 하나가 된다. 음악과 춤이 그 예술이다.
그리스 비극은 왜 두 힘의 결합인가?
니체는 아테네 비극이 디오니소스 축제의 합창에서 태어났다고 보았다. 합창대의 음악은 관객을 디오니소스적 도취로 끌어들여 삶의 밑바닥에 있는 고통과 모순을 느끼게 하고, 무대 위의 영웅과 대사는 그 체험을 아폴론적 형상으로 보여 준다. 그리스인은 삶이 무섭고 덧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깊이 알았기에 이 두 힘을 결합한 예술로 그것을 견뎠다는 것이다. 니체의 유명한 문장대로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존재와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된다.”
니체에 따르면 비극은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에서 죽었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 따지고 설명하려는 소크라테스적 낙관주의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무대에서 몰아냈다는 것이다. 니체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비극의 부활을 기대했고, 책을 바그너에게 바쳤다. 이 책은 문헌학계에서 혹평을 받았는데, 젊은 고전학자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는 공개 비판문을 써서 니체가 학문적 방법을 저버렸다고 공격했다.
니체는 이 개념을 어떻게 고쳐 썼나?
14년 뒤인 1886년 니체는 새 판에 「자기비판의 시도」를 붙였다. 그는 자기가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공식으로, 그들의 정신과 취향에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낯설고 새로운 가치 평가를 힘들게 표현하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쇼펜하우어는 비극에서 체념을 보았지만, 니체가 디오니소스에게서 본 것은 체념이 아니라 고통까지 포함한 삶 전체의 긍정이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또 “희망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희망을 걸었다”며, 독일 음악과 바그너에게 기대를 건 일을 후회했다. 그 사이에 그는 바그너와 결별했다.
daß ich mühselig mit Schopenhauerischen und Kantischen Formeln fremde und neue Wertschätzungen auszudrücken suchte
후기의 니체에게 디오니소스는 예술의 한 충동이 아니라 자기 철학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짝 대신 디오니소스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대립이 앞에 나선다. 1888년 『이 사람을 보라』는 이 한 줄로 끝난다. “나를 이해했는가?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고통을 삶의 일부로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와 고통 때문에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를 맞세운 것이다.
이 개념짝 자체는 니체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미술사에서는 요한 요아힘 빙켈만, 문학사에서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비슷한 대비를 썼고, 철학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이 처음 세웠다. 그러나 셸링까지는 아폴론적인 맑은 정신을 더 높게 쳤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앞세운 것은 니체였다. 20세기에 이 대비는 문학과 예술 비평, 인류학에서 질서와 도취, 형식과 생명력을 가리키는 관용어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나?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비밀을 묻기 몇 년 전, 마르크스도 같은 물음 앞에 서 있었다. 1857년에 쓰고 1903년에야 출간된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그리스 예술과 서사시가 특정한 사회적 발전 형태와 묶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썼다. 그리고 이렇게 이었다. “어려운 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여전히 예술적 즐거움을 주며, 어떤 점에서는 규범이자 다다를 수 없는 본보기로 통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그 답을 인류의 어린 시절이 지닌 다시 오지 않을 매력에서 찾았다.
Die Schwierigkeit ist, daß sie für uns noch Kunstgenuß gewähren und in gewisser Beziehung als Norm und unerreichbare Muster gelten.
두 사람의 길은 여기서 갈린다. 마르크스는 그리스 예술을 그것을 낳은 사회적 조건에서 출발해 설명하려 했고, 니체는 사회적 조건보다 삶 자체에 놓인 충동의 형이상학으로 설명했다. 죄르지 루카치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미학자들은 대체로 니체의 디오니소스 숭배를 이성 대신 도취와 신화를 내세운 비합리주의로 비판했다. 반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예술이 질서와 합리화에 저항하는 힘을 지닌다는 문제의식에서 니체의 미학을 진지하게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