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The Birth of Tragedy
프리드리히 니체가 바젤 대학 고전문헌학 교수로 있던 1872년 초에 펴낸 첫 책. 그리스 비극이 형상과 절도의 충동인 아폴론적인 것과 도취와 합일의 충동인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맞물려 태어났으며,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에우리피데스의 극작에 밀려 죽었다고 주장한다. 책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쳐졌고, 그의 음악극에서 비극이 다시 태어나리라는 기대로 끝난다. 학계에서는 혹평을 받았지만, 삶을 도덕이 아니라 예술로 정당화하려는 니체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상세
왜 문헌학 교수의 첫 책이 철학의 고전이 되었나?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연극의 기원을 다룬 학술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니체 철학 전체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책이다. 니체는 1869년 스물네 살에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고, 이 책은 그가 서른이 되기 전에 낸 첫 단행본이다. 그는 여기서 고대 그리스인이 밝고 조화로운 민족이었다는 괴테와 실러 이래의 고전주의적 그림을 뒤집었다. 그리스인은 삶의 끔찍함과 덧없음을 누구보다 깊이 느꼈기 때문에 예술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책의 첫 문장이 그 출발점을 밝힌다. 니체는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묶여 있다”는 것을 논리로만이 아니라 직관으로 확신하게 된다면 미학이 크게 얻는 바가 있으리라고 썼다.
dass die Fortentwickelung der Kunst an die Duplicität des Apollinischen und des Dionysischen gebunden ist
이 두 개념은 뒷날 문학·미술·음악 비평의 일상어가 될 만큼 널리 퍼졌다. 그러나 니체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그 뒤에 놓인 물음, 곧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무엇이 견딜 만하게 만드는가였다. 그의 대답은 제5절의 유명한 문장에 담겨 있다.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현존과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된다.”
denn nur als aesthetisches Phänomen ist das Dasein und die Welt ewig gerechtfertigt
삶의 의미를 신이나 도덕이 아니라 예술적 창조에서 찾는 이 발상은 뒤의 『즐거운 학문』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의 죽음과 삶의 긍정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책은 니체를 읽는 사람이 대개 처음 거쳐 가는 입구가 되었다.
어떻게 쓰였고 어떤 소동을 일으켰나?
독일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책은 니체가 1869년부터 써 온 여러 강연과 원고, 이를테면 「그리스 음악극」,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비극」,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같은 글을 1871년 여름에 엮어 만든 것이다. 책은 1872년 초 라이프치히의 E. W. 프리치 출판사에서 『음악의 정신에서 비롯된 비극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앞머리에는 “1871년 말 바젤”이라고 적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이 붙었다. 당시 니체는 루체른 근교 트립셴의 바그너 집을 자주 드나들었고, 바그너의 음악극을 그리스 비극을 되살릴 새 예술로 보았다. 바그너 부부는 책을 받고 열광했다.
학계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1872년 5월, 뒷날 독일 고전학의 거두가 되는 젊은 문헌학자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가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팸플릿으로 이 책을 공격했다. 바그너의 “미래의 음악”을 비꼰 제목이었다. 그는 니체가 학자로서가 아니라 직관으로 얻은 지혜를 늘어놓는다고 비판하며, 디오니소스의 지팡이를 들고 인도에서 그리스로 행진하든 말든 상관없으니 학문을 가르쳐야 할 강단에서는 내려오라고 요구했다. 니체의 친구 에르빈 로데가 반박문 「사이비 문헌학」을 내고 바그너도 공개서한으로 니체를 감쌌지만, 논쟁은 합의 없이 끝났다. 니체는 문헌학자로서의 평판을 잃었고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도 크게 줄었다. 반면 예술가와 지식인 사이에서는 책이 점점 읽히기 시작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란 무엇이고, 비극은 왜 죽었나?
니체는 그리스의 두 신에게서 예술의 두 충동을 끌어낸다. 빛과 꿈의 신 아폴론은 개체를 또렷한 윤곽으로 가르고 아름다운 겉모습을 빚는 힘, 곧 조형 예술과 서사시의 원리다. 포도주와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는 도취 속에서 개체의 경계를 허물고 사람을 다른 사람과 자연에 녹아들게 하는 힘, 곧 음악의 원리다. 니체는 여기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빌린다. 개체로 나뉜 세계는 겉모습(표상)이고 그 밑에는 하나의 맹목적인 의지가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구도에서, 아폴론은 개체화의 원리에, 디오니소스는 그 원리가 찢기고 근원적 일자와 하나가 되는 체험에 대응한다. 두 충동을 다루는 개념 자체는 별도 항목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 설명한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아티카 비극은 이 두 충동이 짝을 이룬 정점이었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합창(코로스)이 음악으로 삶의 근원적 고통을 드러내면, 무대 위 영웅의 이야기는 그것을 아폴론적인 형상으로 보여 주어 관객이 고통에 짓눌리지 않고 그것을 긍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우리피데스가 합창을 줄이고 평범한 인물과 논리적 대사로 비극을 채우면서 비극은 쇠퇴했다. 니체는 그 배후에 소크라테스가 있다고 본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원칙을 “모든 것은 아름답기 위해 이해 가능해야 한다”로 요약하고, 이것이 “아는 자만이 덕이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제와 짝을 이루는 “미적 소크라테스주의”라고 불렀다.
alles muss verständig sein, um schön zu sein
니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와 함께 시작된 “이론적 인간”, 곧 세계를 끝까지 알아내고 고칠 수 있다고 믿는 학문적 낙관주의가 비극의 지혜를 죽였다. 책의 후반부(제16~25절)는 이 낙관주의가 근대에 와서 한계에 부딪혔으며,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철학, 그리고 바그너의 음악에서 독일 정신이 비극을 다시 낳으리라는 전망으로 끝난다.
니체는 이 책을 어떻게 다시 읽었나?
니체는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 무렵부터 바그너와 멀어졌고, 뒷날 『바그너의 경우』(1888)에서 그를 데카당스의 예술가로 공격했다. 1886년 그는 이 책을 『비극의 탄생, 또는 그리스 정신과 염세주의』라는 새 제목으로 다시 내면서 앞에 「자기비판의 시도」를 붙였다. 여기서 그는 젊은 시절의 문체와 바그너에 대한 기대, 독일 정신에 대한 희망을 혹독하게 비판했지만, 책의 핵심 물음은 거두지 않았다. 학문의 문제는 학문의 토대 위에서는 알아볼 수 없고 예술의 관점, 다시 삶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이 기독교의 도덕적 세계 해석에 맞서 순수하게 예술적인 세계 해석을 내놓았으며, 그것이 “선악의 저편”에 선 염세주의의 첫 예고였다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반(反)도덕적 가르침에 그리스 신의 이름을 붙였다고 썼다. “나는 그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불렀다.”
ich hiess sie die dionysische.
이렇게 다시 읽은 『비극의 탄생』은 후기 니체의 중심 개념, 곧 삶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와 삶을 부정하는 도덕 및 기독교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20세기의 수용도 대체로 이 노선을 따랐다. 조르주 바타유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위반을 자기 사상의 축으로 삼았고, 질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1962)에서 비극적인 것과 디오니소스를 헤겔식 변증법에 맞서는 긍정의 철학으로 읽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나?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이 책의 미학보다 그 사회적 함의에 주목했다. 니체는 제18절에서 근대의 “알렉산드리아 문화”, 곧 학문과 낙관주의의 문화가 존속하려면 노예 계급이 필요한데도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존엄”을 말하며 그 필요를 부정한다고 비판하고, 이렇게 경고했다. “자기의 존재를 부당한 것으로 여기도록 배우고,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위해 복수하려 드는 야만적 노예 계급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Es giebt nichts Furchtbareres als einen barbarischen Sclavenstand, der seine Existenz als ein Unrecht zu betrachten gelernt hat und sich anschickt, nicht nur für sich, sondern für alle Generationen Rache zu nehmen.
책이 나오기 한 해 전인 1871년에는 파리 코뮌이 있었다. 게오르크 루카치는 『이성의 파괴』(1954)에서 니체를 제국주의 시대 비합리주의의 창시자로 규정하면서, 니체의 철학 전체가 처음부터 사회주의와 노동 운동에 맞서는 귀족주의적 문화 옹호였다고 주장했다. 이 독해에서 『비극의 탄생』의 반(反)소크라테스주의, 곧 이성과 학문에 대한 불신과 신화의 찬양은 뒷날 비합리주의 철학의 씨앗이 된다. 반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적 이성이 신화로 되돌아간다는 문제를 다루며 니체를 계몽의 가차 없는 비판자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비극의 탄생』이 제기한 이성과 신화, 학문과 예술의 관계는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거부와 수용이 갈리는 물음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