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 · 1925

전함 포툠킨 (영화)

Battleship Potemkin (film)

1905년 흑해 함대 수병 반란을 다룬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1925년 소련 무성영화. 썩은 고기에서 시작한 반란과 오데사 계단의 학살 장면으로 몽타주의 힘을 세계에 보여 주었고, 여러 차례 역대 최고의 영화로 꼽혔다. 다만 유모차가 구르는 그 계단의 학살은 기록에 없는 영화적 창작이다.

상세

무슨 이야기인가?

1905년 6월, 흑해 함대의 전함 포툠킨호. 수병들이 매달린 고기를 들여다보니 구더기가 끓는다. 군의관 스미르노프는 안경을 들이대고 벌레가 아니라 씻으면 되는 곤충이라고 선언한다. 수병들은 보르시를 거부하고 빵과 물로 끼니를 때운다. 설거지를 하던 한 수병이 접시에 새겨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를 읽다가 접시를 박살 낸다.

부장 길랴롭스키는 거부자들을 앞갑판에 꿇리고 천막 천을 덮어씌운 뒤 총살대를 세운다. 발사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바쿨렌추크가 호소하고, 총구가 내려가며 반란이 터진다. 장교들은 바다로 던져지고 군의관은 “벌레 밥”이 된다. 그러나 반란을 이끈 바쿨렌추크가 죽는다.

배는 오데사로 간다. 항구의 천막에 눕힌 바쿨렌추크의 가슴에는 “보르시 한 숟가락 때문에”라는 글이 붙어 있고, 시민들이 줄지어 찾아온다. 유대인에게 분노를 돌리려는 사내는 군중에게 얻어맞는다. 이어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수병들을 응원하러 나온 사람들이 모인 계단 위에 말에서 내린 카자크 부대가 줄지어 나타나, 기계처럼 내려오며 일제 사격을 하고 총검으로 밀어붙인다. 코안경을 쓴 여인, 어머니와 소년, 제복 입은 학생이 쓰러지고, 죽어 가는 어머니의 손을 떠난 유모차가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로 계단을 굴러 내려간다.

수병들은 함포로 군 수뇌부가 모인 오페라 극장을 쏜다. 진압 함대가 다가오고 포툠킨호는 붉은 깃발에 “우리와 함께하라”는 신호를 올린 채 그 사이로 나아간다. 함대의 수병들이 사격을 거부하고 환호하는 가운데, 배는 함대 사이를 빠져나간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다섯 부의 제목은 〈사람과 구더기〉, 〈갑판 위의 드라마〉, 〈죽은 이가 부른다〉, 〈오데사 계단〉, 〈함대와의 만남〉이다.

어떻게 이 영화가 나왔나?

1905년 혁명 20주년을 맞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기념 위원회가 대형 영화를 주문했다. 시나리오는 니나 아가자노바가 썼고, 연출은 스물일곱 살의 예이젠시테인에게 돌아갔다. 대본은 러일전쟁, 아르메니아인 학살,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봉기까지 1905년 전체를 담으려 했다. 그런데 레닌그라드에서 촬영을 시작하자 안개가 끼기 시작했고, 시나리오가 6월 4일에야 승인되었는데도 영화는 연내에 끝내야 했다. 그는 대본에서 몇 쪽(41컷)에 불과한 포툠킨호 반란 하나로 영화 전체를 다시 짰다.

진짜 포툠킨호는 해체를 기다리는 처지여서 다른 배로 대신했다. 흔히 〈12사도〉호라고 하지만 화면이 전함 로스티슬라프호에 더 가깝다는 지적도 있다. 내부 장면은 순양함 코민테른호에서 찍었다. 전문 배우 대신 얼굴이 맞는 비전문가를 많이 썼다. 당시 흑백 필름에는 빨강이 검게 나와서 흰 깃발로 찍은 뒤, 볼쇼이 극장 초연용 필름의 108개 프레임에 손으로 붉은 물을 들였다. 1925년 12월 볼쇼이 극장의 기념식에서 먼저 상영했고, 1926년 1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정식 개봉했다.

왜 영화사의 전환점이라 하나?

이 영화의 인물은 단순하다. 누구에게 공감해야 하는지 관객이 바로 알게 한 선전 영화다. 그러나 예이젠시테인은 이것을 몽타주 이론의 실험장으로 삼았다. 잠든 사자, 깨어나는 사자, 일어서는 사자의 석상 세 컷을 이어 붙여 돌사자가 일어나는 듯 보이게 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관객의 감정을 편집으로 조직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예이젠시테인은 이 영화가 대중을 끌어모으지 못한 데 실망했지만 비평의 평가는 달랐다. 1958년 브뤼셀 세계박람회 투표에서 117표 가운데 110표로 1위에 올랐고, 영국 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평론가 투표에서도 여러 차례 10위 안에 들었다(2022년 54위). 유모차 장면은 《언터처블》(1987)과 《브라질》(1985)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가 인용하고 패러디했다. 민족사회주의 선전장관 괴벨스도 1933년 영화인들 앞에서 이 영화를 격찬하며 “신념이 굳지 못한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볼셰비키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힘러는 친위대원의 관람을 금지했다.

실제 반란과 얼마나 같은가?

출발은 사실이다. 1905년 6월 14일(신력 27일) 수병들은 썩은 고기로 끓인 보르시를 거부했고, 군의관 스미르노프는 먹을 만하다고 판정했다. 부장이 천막 천을 가져오라고 하자 수병들은 처형을 준비한다고 받아들여 총기를 꺼냈다. 바쿨렌추크는 부상으로 죽었고, 시신은 오데사 항구의 천막에 놓였다. 영화는 수병들의 “총살 직전” 장면을 극적으로 만들었지만 그 공포 자체는 기록에 있다.

계단은 다르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포툠킨 계단〉 항목은 계단의 사격이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의 창작”이라는 오데사 연구자의 주장을 전한다. 로저 이버트도 “오데사 계단에서 차르의 학살은 실제로 없었다”며, 너무 잘 찍어서 실제 사건처럼 인용된다고 썼다. 그렇다고 오데사에 유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타임스》와 현지 영국 영사는 포툠킨호 도착으로 번진 폭동에 군대가 총을 쏘았다고 보고했다. 소련 역사학은 희생자를 1260명, 1500명으로 부풀렸고, 러시아 정부 공식 집계는 사상자를 123명으로 줄였으며, 실제 피해는 수백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본다. 영화는 도시 곳곳의 참사를 계단 위로 옮겨 한 장면에 응축한 셈이다.

결말도 다르다. 포툠킨호가 함대 사이를 통과한 “침묵의 전투”는 실제로 있었고 전함 게오르기 포베도노세츠호가 합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합류한 배는 그날로 당국에 항복했고, 포툠킨호는 콘스탄차와 페오도시야를 오간 끝에 열하루 만에 루마니아 콘스탄차항에서 항복했다. 영화는 승리의 순간에서 끝낸다. 마스트의 붉은 깃발도 실제로는 전투 준비를 알리는 신호기였는데, 뒤에 혁명의 붉은 깃발로 읽혔다.

왜 잘리고 다시 붙었나?

원본 네거티브가 독일 회사 프로메테우스에 팔린 뒤 필 유치가 다시 편집해, 총살 미수 장면을 끝으로 옮긴 판본이 세계에 나갔다. 영국에서는 1954년까지 금지되었다. 소련 안에서도 컷과 자막이 잘려 나갔다. 머리글로 쓴 트로츠키의 문장은 1935년 레닌의 인용문으로 바뀌었다. 음악 역시 판본마다 달라서 소련 개봉 때는 베토벤 교향곡 일부가 쓰였고, 유럽 개봉 때는 에드문트 마이젤의 격렬한 곡이, 1976년 판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붙었다. 2005년 독일과 러시아 기관이 함께 복원한 판본이 예이젠시테인의 구성과 마이젤의 음악을 되살렸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러시아어)
  4.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