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 인민공화국
Belarusian People’s Republic
1918년 독일군 점령 아래 민스크에서 라다가 선포한 벨라루스의 국가. 「벨라루스 민주공화국」으로도 불린다. 3월 9일 제2헌장으로 수립되고 3월 25일 제3헌장으로 독립을 선포했으나 벨라루스 전역을 다스린 적은 없었다. 1918년 12월 붉은 군대가 민스크에 들어오자 정부는 리투아니아로 옮겨 1919년부터 망명했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끝에 벨라루스 땅이 나뉘면서 국가로서는 사라졌다. 그 라다는 지금도 망명 정부로 남아 있다.
상세
2월 혁명 뒤 벨라루스에서는 러시아 공화국 안의 자치냐 독립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새 국가 구상은 1917년 12월 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에서 나왔으나 대회는 볼셰비키에게 해산되었다. 1918년 2월 21일 독일군이 민스크를 점령하기 몇 시간 전, 대회 라다의 집행위원회는 제1헌장으로 스스로를 이 지역의 권력으로 선언하고 이반 바론카를 의장으로 인민서기국을 세웠다.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맺어진 뒤 라다는 제2헌장으로 인민공화국을 세웠고, 3월 25일 제3헌장으로 모길료프현 전체와 민스크·그로드노·빌뉴스·비텝스크·스몰렌스크현의 벨라루스인 지역을 영토로 내세우며 독립을 선포했다. 이때 라다 위원은 77명으로, 대회에서 뽑힌 36명에 빌뉴스 벨라루스인 대표, 러시아인·폴란드인·유대인 소수민족 대표, 지방자치체와 도시 대표가 더해졌다. 같은 날 라다는 빌헬름 2세에게 「독일 제국과의 동맹 속에서」 독립을 굳히도록 도와 달라는 전보를 보냈고, 이 전보는 라다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려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인민서기국을 떠났다. 독일은 끝내 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다. 흰색·빨간색·흰색의 삼색기와 리투아니아 대공국 문장에서 온 「파호냐」가 상징이었고, 영어 출처에 따르면 150~350개 학교가 세워졌다.
1918년 12월 독일군이 물러나고 붉은 군대가 민스크에 들어오자 라다는 빌뉴스와 그로드노를 거쳐 카우나스로 옮겼다. 안톤 루츠케비치 총리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단을 이끌었고, 영어 출처는 에스토니아(1919년 10월)와 핀란드(1919년 12월)가 공식 승인했다고 적지만, 러시아어 출처는 각지의 대표부가 어떤 법적 승인도 받지 못했다고 본다. 역사가 올레크 와티쇼네크에 따르면 공화국 군대에서 약 1만 1천 명이 복무했다. 1920년 11월 11일 바츨라우 라스토우스키의 정부는 리투아니아와 협력 조약을 맺었고, 같은 해 말 슬루츠크 봉기가 일어났다. 1925년 10월 베를린의 전벨라루스 정치 회의에서 망명 정부는 권한을 소비에트 벨로루시 정부에 넘기고 해산하기로 했지만, 라다 의장 피오트라 크레체우스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라다는 소비에트 벨로루시를 공식 인정하지 않은 채 망명지에 남았다. 소비에트 벨로루시로 돌아간 라스토우스키 등 여러 지도자는 1930년대에 탄압받았다. 라다는 1945년 서독으로 옮겼고, 2026년 현재 가장 오래된 망명 정부다. 1980년대 말부터 벨라루스 민족민주 야당은 3월 25일을 「자유의 날」로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