Чапанная война · 1919

차파니 전쟁

Chapan War

1919년 3~4월 볼가 강 중류의 심비르스크주와 사마라주에서 곡물 할당 징발과 강제 징집에 맞서 일어난 농민 봉기.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맞선 가장 큰 농민 봉기 가운데 하나로, 도시를 점령하고 일관된 요구를 내세운 첫 「봉기(보스스타니예)」로 꼽힌다. 이름은 이 지역 농민이 겨울에 입던 양가죽 외투 「차판」에서 왔다.

상세

1919년 초 심비르스크주에는 중앙에서 온 식량 부대원 3,500명과 식량군 병사 1,700명이 있었고, 2월까지 이 주에서만 300만 푸드가 넘는 곡물이 징발되었다. 같은 시기 1918년 12월에 도입된 비상세 징수도 시작되어, 농민들 사이에는 자신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는 생각이 퍼졌다. 1919년 3월 3일 센길레이군 노보데비치예 마을 주민들이 곡물과 가축을 거두러 온 위원들에 맞서 경종을 울리고 공산당원과 위원들을 체포했으며 붉은 군대 분견대를 무장 해제했다. 진압하러 온 부대는 오히려 농민 편에 섰고, 봉기는 이웃 마을로 번졌다. 3월 7일 봉기군은 싸움 없이 스타브로폴을 차지하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장교 알렉세이 돌리닌을 지도자로 세웠으며, 「모든 권력을 근로 인민에게! 공산주의자의 전횡을 타도하라!」는 호소문을 냈다. 영어 출처는 봉기군이 징발 폐지와 소비에트 자유선거, 「볼셰비키 코미사르 지배」의 종식을 요구했다고 쓴다. 참가자 수는 최소 3만 명에서 10만~15만 명까지 추정이 엇갈린다.

사마라에서는 주당위원회 의장 발레리안 쿠이비셰프와 제4군 사령관 미하일 프룬제의 주도로 혁명 야전 참모부가 꾸려졌고, 정규군과 노동자 연대, 헝가리인 국제주의자 중대 등이 투입되었다. 영어 출처는 프룬제 휘하 병력을 약 1만 3천 명으로 적는다. 붉은 군대는 3월 14일 스타브로폴을, 같은 날 또는 15일 노보데비치예를 되찾았고, 봉기는 3월 말~4월 초까지 흩어진 거점에서 이어지다 4월 중순 끝났다. 프룬제는 레닌에게 진압 과정에서 적어도 1천 명이 죽고 600명이 넘는 「주모자와 쿨라크」가 총살되었으며 우신스코예 마을을 불태웠다고 보고했다. 진압 뒤에는 대량 체포와 처형, 수용소 수감이 뒤따랐고, 봉기의 인명 피해는 농민 약 1만 명으로 추산된다. 4월 체카 보고는 봉기 마을 농민 대부분이 중농이고 쿨라크는 마을마다 5~10명을 넘지 않았다고 적었으며, 레프 트로츠키는 4월 6일 사마라에서 볼가 농민 봉기를 「무서운 경고」라고 불렀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참가자와 그 자녀는 1991년 10월 정치 탄압 희생자 복권법으로 탄압 희생자로 인정되었고, 영어 출처는 1996년 보리스 옐친의 대통령령으로 복권되었다고 쓴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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