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민주동맹
China Democratic League
1941년 충칭에서 중국민주정단동맹으로 결성되어 1944년 이름을 바꾼 중국의 「제3세력」 정당. 약칭 민맹.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중간 노선을 내세워 장보쥔·뤄룽지·량수밍·황옌페이·추안핑·페이샤오퉁 같은 지식인을 모았다. 1947년 국민정부가 불법화하자 공산당과 손잡았고, 1949년 이후 공산당이 영도하는 여덟 민주당파의 하나가 되었다. 1957년 「장뤄 동맹」 비판으로 지도부가 우파로 몰렸다.
상세
민맹은 청년당, 국가사회당(뒤의 민주사회당), 장보쥔의 중화민족해방행동위원회(뒤의 농공민주당) 등 세 정당과 세 단체의 연합으로 1941년 3월 19일 충칭에서 비밀리에 출범했다. 목표는 항일전쟁을 지원하면서 국공 사이의 중도적 「제3세력」이 되는 것이었다. 1945년 10월 보고서는 좌도 우도 아니라며 서구의 「정치적 민주」와 소련의 「경제적 민주」를 결합하자고 했다. 1946년 1월 정치협상회의에서 38석 가운데 9석을 차지해 단일 정당으로는 가장 많았으나, 국민당이 소집한 제헌 국민대회 참가를 둘러싸고 청년당과 민주사회당이 떨어져 나갔고, 1947년 10월 국민정부가 민맹을 불법 조직으로 선포했다. 1948년 1월 민맹은 공산당과의 협력을 공개 선언했다.
1949년 장란·선쥔루·장보쥔·뤄룽지·스량·페이샤오퉁 등이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했고, 장란은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선쥔루는 최고인민법원장, 장보쥔·스량 등은 정무원 부장이 되었다. 민맹은 공산당과의 관계를 「장기공존·상호감독」으로 규정했고, 1956년 8대가 이를 공식 방침으로 확인했다. 기관지 《광명일보》는 지식인을 위한 신문이었다.
1957년 대명대방 때 민맹 지도자들은 장보쥔의 「정치 설계원」, 뤄룽지의 「평반 위원회」, 《광명일보》 총편집 추안핑의 「당천하」 발언으로 비판의 중심에 섰다. 7월 1일 마오가 쓴 《인민일보》 사설은 민맹이 「조직과 계획과 강령과 노선」을 갖고 반공·반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며 그 근원을 「장뤄 동맹」에 돌렸다. 1958년 1월 장보쥔과 뤄룽지는 민맹 부주석에서 해임되었고, 두 사람은 1980년대의 복권에서도 개정되지 않았다. 민맹은 지금 공산당의 영도를 받드는 민주당파로 남아 있으며 회원은 주로 교육·문화·과학계의 중견 지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