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앙 반란
Chouannerie
프랑스 혁명기 브르타뉴·멘·노르망디·앙주 북부 등 루아르강 북쪽 열두 개 도에서 공화국에 맞서 일어난 왕당파 농민 유격전. 1792년 마옌의 장 코트로, 일명 「장 슈앙」이 이끈 저항에서 이름이 왔고, 1794년 봄부터 18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방데의 가톨릭 왕당군과 달리 도시를 장악한 적이 없는 소규모 분산 부대의 싸움이었다.
상세
1791년 반 주변 농민들이 선서를 거부한 주교를 지키려 일어났고, 1792년 여름 마옌의 생투앵데투아에서 장 코트로가 의용병 징모에 맞선 농민을 이끌었다. 올빼미 울음을 신호로 쓴 데서 「슈앙」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1793년 3월 루아르강 북쪽의 징집 반대 봉기는 곧 진압되었으나, 그해 가을 갈레른 행군이 지나간 뒤 푸제르·비트레·라발 주변의 마옌과 일에빌렌 경계에서 장 슈앙, 에메 뒤 부아기, 「은다리」 장루이 트르통이 이끄는 작은 무리가 다시 일어났다. 갈레른에서 살아남은 방데인, 1793년 3월 봉기에 연루된 지도자, 탈영병이 섞였고, 많은 이가 사라진 친척의 복수를 원했다. 수십에서 수백 명 단위로 분견대·전령·공금 수송 마차를 습격하고 공화파 도시를 공격했으며 밀고자·선서 사제·행정관을 처형했다. 공화국군은 요새화한 도시와 영토 수비대로 맞섰다. 1794년 3월 모르비앙으로 번졌고, 사부네에서 살아남은 조르주 카두달이 그곳의 지도자가 되었다. 연방주의 반란에 연루된 옛 장교 조제프 드 퓌자예는 통합 지휘의 필요를 깨닫고 1794년 9월 런던으로 건너가 아르투아 백작과 피트의 지지를 얻어 10월 15일 「브르타뉴 가톨릭 왕당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테르미도르 뒤 공회가 협상에 열리자 퓌자예의 부관 코르마탱이 1795년 4월 라마빌레 조약을 맺었으나 참석한 지도자 121명 가운데 21명만 서명했다. 루이 17세가 죽은 뒤 긴장이 높아졌고, 1795년 6월 23일 영국 함대가 키브롱에 망명군을 상륙시키자 슈앙 1만 5천 명이 합류했으나 오슈에게 궤멸되었다. 유격전은 노르망디의 루이 드 프로테에게까지 번졌다. 1795년 12월 서부 전군을 맡은 오슈는 1796년 초 기동 종대와 항복자 사면, 예배의 자유, 군 기강 회복으로 방데를 먼저 평정하고 슈앙에게 눈을 돌렸다. 세포가 5월 14일, 카두달이 6월 19일, 프로테의 부관들이 6월 23일, 부아기가 6월 26일 차례로 항복했다. 1799년 징집과 인질법으로 세 번째 봉기가 일어났으나 1800년 1월 몽포콩과 보르가르 조약으로 끝났다. 카두달은 1804년 보나파르트 암살 음모로 처형되었고, 1815년 백일천하와 1832년 베리 공작부인의 시도 때 작은 슈앙 봉기가 다시 있었다. 발자크의 『올빼미당원』과 위고의 『93년』이 이 반란을 소재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