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화
Collectivization
소련에서 개별 농민 경영을 콜호스와 솝호스라는 대규모 집단 농장으로 통합한 정책이다. 1927년 곡물 조달 위기에 대응해 1928년부터 강제적으로 추진되었으며, 1929~1930년 '전면 집단화'가 가장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이 정책은 초고속 공업화에 필요한 식량과 자본을 농촌에서 추출하는 제도적 기반이 되었으나, 쿨라크 숙청, 농민 봉기, 1932~1933년 대기근을 초래하여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상세
전환점
1928년의 곡물 위기가 직접적 계기였다. 시장 가격보다 낮은 국가 수매가에 농민이 판매를 거부하자, 당은 우랄-시베리아 방식이라 불린 강제 수매를 되살렸다. 1929년 1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전면적 집단화로 방향을 확정했고, 같은 해 12월 스탈린은 계급으로서의 쿨라크 청산을 공식 과제로 선언했다.
집행 기구는 빠르게 마련되었다. 1930년 1월 30일 정치국 결의와 그에 따른 OGPU 명령 제44/21호는 쿨라크를 세 범주로 나누어 처리하도록 규정했다. 첫째 범주는 체포와 수용소 또는 처형, 둘째 범주는 원격지 추방, 셋째 범주는 거주 구역 내 열등지 재정착이었다. 실제 분류는 지역별 할당 숫자에 맞추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농이 아닌 중농과 저항하는 빈농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진행
1930년 초 몇 달 사이 집단화율은 급등했고, 가축 도살과 파종 거부 형태의 저항이 확산되었다. 1930년 3월 스탈린은 「성공에 도취하여」를 발표해 강제 가입의 책임을 지방 간부에게 돌리고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농민이 대거 콜호스를 떠났으나, 같은 해 가을부터 압박이 다시 강화되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볼가 하류, 북캅카스에서 대규모 기아가 발생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강제 정착화가 유목 경제를 붕괴시켜 인구 손실 비율이 가장 컸다. 기아의 원인을 곡물 수매 할당과 이동 금지 조치의 결과로 볼 것인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의도가 작동했는가는 아카이브 공개 이후에도 계속 논쟁되고 있다.
결과
1937년까지 농가의 90퍼센트를 넘는 비율이 콜호스에 편입되었다. 국가는 파종 계획과 수매 가격을 통제하고, 기계 트랙터 스테이션을 통해 농기계와 정치적 감독을 함께 배치했다. 곡물은 도시 배급과 수출로 배정되어 공업화 재원의 일부가 되었다.
농업 생산성은 오래 회복되지 않았고, 가축 두수는 1930년대 말까지 1928년 수준을 밑돌았다. 텃밭과 개인 부업이 농가 소득과 도시 식량 공급에서 불균형하게 큰 몫을 담당하는 구조가 이때 형성되어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관련 용어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definition, periodization (1928–1937), goals of merging individual farms into kolkhozes and sovkhozes, forced methods, dekulakization, famine
- 위키백과 (영문) launched during first Five-Year Plan, grain procurement crisis of 1927–28 as trigger, 52.7% collectivised by February 1930, peasant resistance, fam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