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자본과 가변자본
Constant and Variable Capital
마르크스가 『자본』 1권 6장에서 생산에 투하된 자본을 가치 형성에서 맡는 역할에 따라 나눈 두 부분. 원료·보조재료·기계·건물 같은 생산수단에 들어간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자기 가치를 생산물에 옮길 뿐 크기가 바뀌지 않으므로 불변자본(c), 노동력을 사는 데 들어간 부분은 자기 가치를 재생산하고 그 위에 잉여가치를 덧붙여 크기가 바뀌므로 가변자본(v)이라 부른다. 새 가치를 만드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노동이라는 주장을 담은 구분으로, 잉여가치율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바탕이 된다.
상세
왜 자본을 둘로 나누나?
공장을 차린 자본가는 돈을 두 종류의 물건에 쓴다. 하나는 원료, 보조재료, 기계, 건물 같은 생산수단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를 일정 시간 부릴 권리, 곧 노동력이다. 회계 장부에서는 둘 다 똑같이 「비용」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물었다. 생산이 끝나고 처음에 쓴 돈보다 많은 가치가 돌아왔다면, 그 늘어난 부분은 어느 쪽에서 나왔는가?
작은 계산으로 보자(숫자는 설명을 위한 가정이다). 어느 셔츠 공장이 하루에 원단·실·전기에 70만 원을 쓰고, 재봉틀이 닳는 몫이 10만 원어치라고 하자. 생산수단에 든 돈은 80만 원이다. 노동자 임금으로는 20만 원을 쓴다. 노동자들이 하루 동안 일하며 새로 보태는 가치가 40만 원이라면, 그날 만든 셔츠의 가치는 옮겨 온 80만 원과 새로 보탠 40만 원을 합친 120만 원이다. 자본가는 100만 원을 내놓고 120만 원어치를 손에 쥔다. 마르크스의 기호로 쓰면 이렇다.
c(불변자본) 80 + v(가변자본) 20 + s(잉여가치) 20 = 생산물 가치 120
생산수단에 쓴 80만 원은 셔츠 속에 80만 원으로 다시 나타났을 뿐이다. 늘어난 20만 원은 임금으로 나간 20만 원 쪽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보다 많은 가치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겼다. 이 차이를 드러내려고 마르크스는 자본을 「불변」과 「가변」으로 나누었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어떻게 생산물로 옮겨 가나?
옷감의 가치가 셔츠의 가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마르크스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따졌다. 노동자는 새 가치를 덧붙이는 일과 원료의 옛 가치를 지키는 일을 따로 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같은 시간에 두 번 일하지 않는다. … 그는 새 가치를 덧붙이기만 함으로써 옛 가치를 보존한다.”
Sondern durch bloßes Zusetzen von neuem Wert erhält er den alten Wert.
마르크스는 이 이중의 결과를 노동의 이중성으로 설명했다. 실을 잣는 노동은 특정한 쓸모 있는 노동(구체노동)으로서 솜과 방추를 실이라는 새 사용가치의 재료로 만들면서 그 가치를 실로 옮긴다. 같은 노동이 인간 노동력의 지출 일반(추상노동)으로서는 일한 시간만큼 새 가치를 보탠다. 그래서 같은 시간에 한 번 일하면서도 옛 가치는 보존되고 새 가치는 덧붙는다.
기계나 건물처럼 여러 해 쓰는 생산수단은 조금씩 닳는 만큼만 가치를 넘겨준다. 1,000만 원짜리 재봉틀을 1,000일 동안 쓰고 버린다면(가정), 하루 생산물에는 1만 원어치씩 옮겨 간다. 마르크스는 기계가 생산과정에서 “이 과정과 상관없이 자기가 지닌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결코 내주지 않는다”고 썼다.
In diesem Prozeß gibt sie nie mehr Wert ab, als sie unabhängig von diesem Prozeß besitzt.
왜 「불변」이고 왜 「가변」인가?
마르크스는 6장 끝에서 두 이름을 이렇게 정의했다. “자본 가운데 생산수단, 곧 원료·보조재료·노동수단으로 바뀌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 크기를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불변자본 부분, 줄여서 불변자본이라 부른다.”
Der Teil des Kapitals also, der sich in Produktionsmittel, d.h. in Rohmaterial, Hilfsstoffe und Arbeitsmittel umsetzt, verändert seine Wertgröße nicht im Produktionsprozeß. Ich nenne ihn daher konstanten Kapitalteil, oder kürzer: konstantes Kapital.
“이와 달리 노동력으로 바뀐 자본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를 바꾼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과 그것을 넘는 초과분, 곧 잉여가치를 재생산한다.” 이 부분은 생산과정 안에서 일정한 크기에서 변하는 크기로 바뀌므로 가변자본이다.
Der in Arbeitskraft umgesetzte Teil des Kapitals verändert dagegen seinen Wert im Produktionsprozeß. Er reproduziert sein eignes Äquivalent und einen Überschuß darüber, Mehrwert, der selbst wechseln, größer oder kleiner sein kann.
같은 자본 요소가 노동과정의 관점에서는 객관적 요인(생산수단)과 주관적 요인(노동력)으로, 가치증식 과정의 관점에서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별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정리다. 「불변」은 생산과정에서 새 가치를 낳지 않는다는 뜻이지, 생산수단이 값어치 없는 것이라거나 생산에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기계와 원료 없이 노동은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다만 그것들은 자기 가치를 넘는 가치를 보태지 않는다.
가격이 바뀌어도 불변자본인가?
생산수단의 가격은 바뀔 수 있다. 마르크스 자신이 예를 들었다. 솜 1파운드가 오늘 6펜스인데 흉작으로 내일 1실링으로 오르면, 이미 6펜스에 사서 공장에 쌓아 둔 솜도 이제 1실링의 가치를 생산물에 넘긴다. 그는 “불변자본이라는 개념은 그 구성 부분의 가치 혁명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Der Begriff des konstanten Kapitals schließt eine Wertrevolution seiner Bestandteile in keiner Weise aus.
이 가치 변화는 솜을 재배하는 과정, 곧 그 공장 바깥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바뀌어 생긴 것이지, 솜이 생산수단으로 쓰이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술이 바뀌어 노동자 열 명이 쓰던 값싼 도구가 노동자 한 명이 다루는 비싼 기계로 바뀌어도,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각각 맡는 역할의 차이는 그대로라고 마르크스는 보았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이 어떻게 바뀌는지는 뒤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는 개념으로 따로 다룬다.
고정자본·유동자본과는 무엇이 다른가?
리카도를 비롯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미 자본을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으로 나누었다. 이 구분은 자본이 얼마나 빨리 회수되는가, 곧 회전의 차이를 본다. 기계와 건물은 여러 해에 걸쳐 조금씩 가치를 넘기므로 고정자본, 원료와 임금은 한 번의 생산에서 모두 회수되므로 유동자본이다. 마르크스의 불변·가변 구분은 이와 축이 다르다. 원료는 유동자본이지만 불변자본이고, 임금도 유동자본이지만 가변자본이다. 생산수단이냐 노동력이냐, 곧 가치를 옮기기만 하느냐 새로 만드느냐가 기준이다.
마르크스는 고정·유동의 구분을 『자본』 2권의 유통 과정 분석에서 다루며, 이를 가치 형성의 문제와 섞은 스미스와 리카도를 비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에서 두 구분을 겹쳐 「고정 불변자본」과 「유동 불변자본」이라는 말을 썼다.
이 구분에서 무엇이 나오나?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나누면 『자본』의 핵심 비율들을 정의할 수 있다. 앞의 셔츠 공장 예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 잉여가치율 s/v = 20/20 = 100%. 노동력에 쓴 돈에 견주어 잉여가치가 얼마인지, 곧 착취의 정도다.
- 이윤율 s/(c+v) = 20/100 = 20%. 자본가가 보는 수익률이다. 같은 착취라도 불변자본이 클수록 이윤율은 낮게 나타난다.
- 자본의 유기적 구성 c/v = 80/20 = 4. 기계화가 진전되면 이 값이 커지는 경향이 있고, 마르크스는 여기서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을 끌어냈다.
『자본』 1권 23장에서 마르크스는 축적이 진행되면서 자본 가운데 가변 부분이 불변 부분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고 보았다. 생산이 늘어도 노동력 수요는 그만큼 늘지 않으므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 곧 산업예비군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떤 비판이 있나?
이 구분은 노동만이 새 가치를 만든다는 노동가치론 위에 서 있으므로,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제학자들은 이를 비판한다. 주류 경제학은 기계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생산에 기여하는 「생산요소」이며 각 요소가 제 기여만큼 소득을 얻는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논쟁의 일부가 용어의 차이라고 지적한다. 주류 경제학에서 「가치」는 시대를 가리지 않는 가격이나 효용을 뜻하지만, 마르크스의 가치는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사회관계에 고유한 형태라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경제학자 스티브 킨은 마르크스가 기계가 잃는 가치, 곧 감가상각을 가치 창출과 혼동했다고 주장했다. 기계가 닳아 없어지는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새 생산물에 보탤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쪽은 마르크스 자신이 기계가 생산과정에서 자기가 지닌 것보다 많은 가치를 내주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으며, 기계가 노동생산성을 높여 더 많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것과 더 많은 가치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고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