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t der Volksbeauftragten · 1918.11.10–1919.02.13

인민대표평의회

Council of the People's Deputies

1918년 11월 10일부터 1919년 2월 13일까지 독일을 다스린 혁명 임시정부. 11월 혁명 중 다수파 사회민주당(MSPD)과 독립사회민주당(USPD)이 세 사람씩 내어 꾸렸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사실상 의장이었다. 휴전을 맺고 남녀 보통선거와 비례대표제, 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으며, 노동자·병사 평의회 대신 국민의회 선거로 새 국가의 틀을 정하는 길을 택했다. 12월 29일 독립사회민주당 위원들이 물러난 뒤 다수파 사회민주당만의 정부가 되었고, 바이마르 국민의회가 꾸린 샤이데만 내각에 자리를 넘겼다.

상세

혁명 속에서 생긴 「여섯 머리의 총리」

1918년 11월 9일 막스 폰 바덴은 황제의 퇴위를 독단으로 발표하고 총리직을 다수파 사회민주당 의장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혁명을 일으킨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두 노동자 정당의 단결을 요구했으므로, 다수파 사회민주당은 독립사회민주당과 연립해야 했다. 11월 10일 오후 두 당은 세 사람씩 내어 임시 혁명정부를 꾸렸다. 독립사회민주당은 러시아식으로 「인민위원평의회」라 부르려 했으나 독일어로 바꾸어 「인민대표평의회」가 되었다.

처음 위원은 다수파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 필리프 샤이데만, 오토 란츠베르크와 독립사회민주당의 후고 하제, 빌헬름 디트만, 에밀 바르트였고, 에베르트와 하제가 공동 의장이었다. 샤이데만은 이 평의회를 「여섯 머리의 총리」라 불렀지만, 마지막 제국 총리에게서 직을 넘겨받은 에베르트가 관료와 군의 신뢰를 받아 사실상 의장 노릇을 했다. 같은 날 저녁 베를린 부슈 서커스장에 모인 노동자·병사 평의회 대의원 약 3000명이 이 정부를 추인하고, 정부를 감독할 집행위원회를 세웠다.

호소문과 개혁, 그리고 옛 국가기구

평의회는 11월 11일 휴전을 맺었다. 11월 12일 「독일 국민에게」 호소문으로 계엄 해제, 결사·집회의 자유, 검열 폐지를 곧바로 시행하고, 남녀 20세 이상의 평등·비밀·직접·보통선거와 비례대표제를 모든 선거에 적용한다고 밝혔으며, 1919년 1월 1일부터 8시간 노동제를 약속했다. 그러나 제국 시대의 국무장관과 관료는 대부분 자리를 지켰고, 군 개혁도 거의 하지 않았다. 에베르트는 정부 수립 전부터 최고사령부의 빌헬름 그뢰너에게 이를 약속했고, 군은 그 대가로 새 정부를 지지하기로 했다(에베르트-그뢰너 협약). 평의회가 더 과감하게 행동했어야 했느냐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평의회냐 국민의회냐

두 당은 사회주의 개조를 정부가 먼저 시작할지, 제헌 국민의회에 맡길지에서 달랐다. 12월 16~21일의 독일 노동자·병사 평의회 대회는 국민의회 선거를 1919년 1월 19일에 치르기로 결정해 다수파 사회민주당의 노선을 뒷받침했다. 12월 24일 정부군이 베를린 왕궁의 인민해군사단을 공격한 성탄절 전투에 항의해 독립사회민주당 위원 세 사람이 12월 29일 물러났고, 다수파 사회민주당의 구스타프 노스케와 루돌프 비셀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때부터 평의회는 스스로를 제국 정부라 불렀다.

노스케가 지휘한 정부군과 자유군단은 1919년 1월 베를린 봉기를 진압했다. 1월 19일 선거로 뽑힌 바이마르 국민의회는 2월 11일 에베르트를 대통령으로 뽑았고, 2월 13일 다수파 사회민주당·중앙당·독일민주당의 샤이데만 내각이 인민대표평의회를 대신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de.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영문)
  4.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