Оборона Петрограда (1919); Наступление Северо-Западной армии осенью 1919 года · 1919.09.28–11.14

페트로그라드 방어 (1919)

Defence of Petrograd (1919)

1919년 가을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에스토니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해 오자 붉은 군대 제7군과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이 도시를 지켜 내고 반격한 싸움. 백군은 10월 중순 얌부르크, 루가, 크라스노예 셀로, 가치나를 차지하고 20일 무렵 차르스코예 셀로와 풀코보 고지까지 왔지만, 트로츠키가 지휘한 방어와 21일부터의 반격에 밀렸다. 제7군과 제15군의 협공을 받은 북서군은 11월 중순 에스토니아 국경까지 쫓겨 가 무장 해제되었다.

상세

북서군은 9월 28일 프스코프 방면의 견제 공격에 이어 10월 10일 얌부르크 방면에서 본공세를 시작해 11일 얌부르크를, 13일 무렵 루가를, 16~17일 크라스노예 셀로와 가치나를 차지했다. 붉은 군대의 주력은 오룔과 툴라로 다가오던 데니킨에 맞서 남쪽에 있었고, 간부와 부대를 남부전선에 내준 제7군은 사기가 낮았다. 트로츠키는 『나의 생애』에서 레닌이 페트로그라드를 내주고 전선을 줄이자는 쪽으로 기울었고, 자신이 이에 강하게 반대해 결국 레닌이 “그럼 해 봅시다”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크레스틴스키와 페트로그라드 지도부가 자기편에 섰지만, 그곳의 지노비예프는 공황에 빠져 있었다고 적었다. 10월 15일 정치국은 “페트로그라드를 내주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트로츠키가 국방회의에 낸 결정안은 “피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페트로그라드를 지키고, 한 치도 내주지 않으며, 시가지에서도 싸운다”고 했다. 16일 밤 페트로그라드로 가는 열차에서 쓴 글에서 그는 이 거대한 도시를 뚫고 들어온 백군은 “돌로 된 미로”에 갇힐 것이라며 시가전 준비를 촉구했다. 도시는 11개 구의 내부 방어 참모부로 나뉘었고, 바리케이드와 철조망, 광장과 교차로의 포 진지로 요새가 되었으며, 노동자와 공산당원, 청년 동맹원이 잇달아 동원되었다. 트로츠키는 에스토니아나 핀란드가 개입할 경우에 대비해 군대와 노동자를 남동쪽으로 물릴 계획도 세워 두게 했다.

백군 제3사단은 니콜라옙스카야 철도의 토스노역을 끊으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파블롭스크로 향했고, 붉은 군대는 이 철도로 모스크바에서 증원을 실어 왔다. 제7군은 21일 풀코보 선에서 버텼고 22일 반격에 나서 23일 저녁 차르스코예 셀로와 파블롭스크를 되찾았으며, 24일에는 남쪽의 제15군도 공세에 나서 31일 루가를 차지했다. 백군은 11월 3일 밤 가치나를 싸움 없이 버렸고, 붉은 군대는 14일 얌부르크에 들어갔다. 트로츠키는 10월 18일 명령으로 “지독한 공황이 있었던 곳을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지 말라”고 했고, 24일 명령에서는 “무기 없는 포로나 투항자에게 칼을 치켜드는 못난 병사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경고했다. 그는 알렉산드롭카에서 물러나던 연대를 직접 말을 타고 돌려세운 일도 회고했다. 강화 협상 중이던 에스토니아는 물러난 북서군을 무장 해제해 수용했고, 그곳에서 발진티푸스로 많은 이가 죽었다. 트로츠키와 그의 열차 전체는 이 방어로 붉은 기 훈장을 받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러시아어)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5.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