Оборона Царицына · 1918.07–1919.06.30

차리친 방어 (1918–1919)

Defence of Tsaritsyn (1918–1919)

1918년 7월부터 1919년 초까지 볼가강 하류의 차리친(지금의 볼고그라드)에서 붉은 군대가 표트르 크라스노프의 돈 카자크군의 세 차례 포위를 막아 낸 싸움. 바쿠의 석유와 남부의 곡물이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이자 돈·우랄 카자크의 합류를 막는 요충이었고, 스탈린과 보로실로프가 지휘에 관여한 탓에 소련 역사서술과 선전에서 「붉은 베르됭」으로 크게 기려졌다. 1919년 6월 30일 표트르 브란겔의 군대가 도시를 빼앗았고, 붉은 군대는 1920년 1월 3일 되찾았다.

상세

1918년 6월 모스크바를 위한 곡물 조달 임무로 파견된 스탈린은 곧 현지 지휘에 나섰고, 보로실로프와 함께 북캅카스 군관구를 세워 이 지역의 붉은 부대를 하나로 묶었다. 크라스노프의 돈 군은 7월 말 철도를 끊고 도시를 에워쌌고(제1차 7~9월, 제2차 9~10월), 10월 중순에는 콘스탄틴 마몬토프의 기병까지 가세해 도시를 거의 포위했다. 이 무렵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에게 남부전선 사령관 파벨 시틴의 명령을 무시하라고 부추겨 트로츠키·바치에티스와 충돌했고, 제정 장군 출신 안드레이 스네사레프 등 군사 전문가를 체포했다. 10월 15일 드미트리 즐로바의 「강철 사단」이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북캅카스에서 올라와 크라스노프군을 기습해 포위를 풀었고, 스탈린은 명령 불복으로 11월 소환되었다. 1918년 12월부터 1919년 2월까지의 세 번째 포위도 실패하자, 돈 카자크는 의용군 지휘 아래 들어가 남러시아군의 일부가 되었다.

1919년 여름 백군은 쿠반에서 차리친으로 가는 철도를 복구해 영국이 보낸 전차를 실어 왔고, 6월 30일 브란겔의 군대가 도시에 들어가 붉은 군대 4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7월 3일 데니킨은 차리친의 승전 열병식에서 모스크바 진격을 선언했다. 8월부터 바실리 쇼린의 붉은 군대 타격 집단이 탈환을 노렸으나 브란겔의 방어와 마몬토프의 후방 습격에 막혔고, 1920년 1월 3일에야 붉은 군대가 도시를 되찾았다. 1925년 도시는 스탈린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고, 차리친 방어는 스탈린의 군사적 공적으로 부풀려져 소련의 미술과 선전에서 가장 널리 그려진 내전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