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 Stürmer · 1923.04.20–1945.02.22

데어 슈튀르머

Der Stürmer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1923년 4월 뉘른베르크에서 창간해 1945년 2월까지 낸 나치 반유대주의 주간지. 당 기관지가 아니라 슈트라이허의 개인 소유였지만, 선정적인 기사와 ‘핍스’(필리프 루프레히트)의 유대인 풍자화, 독자 투고로 유대인을 ‘인종 오염자’로 그려 나치 대중 선동의 상징이 되었다. 1927년부터 1면 아래에 트라이치케의 말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이다!”를 실었다.

상세

첫 호는 1923년 4월 20일 뉘른베르크에서 나왔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호는 1945년 2월 22일자인데, 폐간 공지나 작별 인사가 없어 역사가들은 그 뒤에도 몇 호가 더 나왔을 가능성을 열어 둔다. 편집은 끝까지 슈트라이허가 쥐었고 에른스트 히머와 카를 홀츠 등이 편집을 맡았다. 1932년부터는 「진실을 위한 투쟁의 독일 주간지」라는 부제를 달았다.

역사가 A. M. 예르마코프는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두 갈래로 나눈다. 교육받은 층과 기술 관료를 겨냥한 ‘지적’ 반유대주의는 1935년 창간된 친위대 주간지 《다스 슈바르체 코어》가 대표했고, ‘평범한’ 독일인을 겨냥해 그럴듯한 논증이나 사실 확인을 따지지 않은 ‘저속한’ 반유대주의는 《슈튀르머》가 대표했다. 신문에는 자체 통신원이 거의 없었으므로 1923년부터 독자에게 소식을 청했고, 독자 편지는 1924년 고정란이 되어 1926년 「우편함」, 1937년 유대인과 어울리는 독일인을 고발하는 「치욕의 기둥에」로 이어졌다. 독자와의 대화가 이 신문의 특징이었다.

정확한 발행 부수는 알 수 없다. 슈트라이허가 뉘른베르크에서 밝힌 수치 등으로는 1927년 1만 4000부, 1933년 2만 5000부였고, 뉘른베르크 재판에 변호인이 낸 문서로는 1935년 1월 11만 3800부에서 10월 48만 6000부로 뛰었다. 국제군사재판소는 1935~1939년 주당 70만 부로 추산했고, 전당대회 특별호는 200만 부를 넘겼다. 정류장과 공장 식당 같은 곳에 세운 수천 개의 공개 게시대가 구매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신문을 읽혔다. 1936년부터는 『독버섯』(1938) 같은 반유대주의 그림책도 펴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1년 신문을 잠시 금지했고, 나치 정권 아래서도 1938년 히틀러의 지시로 괴벨스가 무기한 금지했다가 곧 풀었다.

파리의 망명 일간지 《파리저 타게블라트》는 1935년 이 신문의 전국화를 경고하며 1934~1939년 188편의 기사로 슈트라이허와 《슈튀르머》를 비판했다. 기자들은 신문을 ‘선정적’, ‘포르노적’, ‘선동적’이라는 수식어 없이 부르는 일이 드물었다. 전쟁이 나자 신문은 전선 병사에게 보낼 구독을 팔았고, 폴란드와 소련에 들어간 병사들은 “동유대인”에 관한 편지를 쏟아 보냈다. 예르마코프는 이 편지들이 병사들이 선전의 수신자를 넘어 반유대주의 선전의 생산자였음을 보여 준다고 결론짓는다. 슈트라이허는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반인도 범죄로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관련 인물

출처

  1. А. М. Ермаков, «„Восточные евреи“ в письмах немецких солдат (по материалам еженедельника „Штюрмер“)», Вестник ТвГУ. Серия «История», 2025, № 4(76), с. 114–128. DOI 10.26456/vthistory/2025.4.114–128.
  2. А. Ермаков, «Леволиберальная критика вульгарного нацистского антисемитизма в 1935 г. (по материалам «Ежедневной парижской газеты»)», Голокост і сучасність, 2011, № 1 (9), с. 9–29.
  3. de.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