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베른하르트

Georg Bernhard
독립 활동 자유주의·공화주의 독일 (1933년 국적 박탈) 유대계 독일인 1875–1944 → 망명지 뉴욕에서 사망

《포시셰 차이퉁》을 좌파 자유주의 신문으로 만들고 파리에서 망명 일간지를 세운 언론인

1875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계 좌파 자유주의 언론인이다. 경제 기자로 출발해 경제지 《플루투스》를 창간했다. 1900년 무렵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수정주의 쪽에 섰다가 1906년 제명되었다. 1918년 독일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당 집행부에 들었고, 1928~1930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1920~1930년 《포시셰 차이퉁》 단독 편집장으로 민주주의 확대와 프랑스와의 화해를 주장해 반유대주의 선동의 표적이 되었다. 1933년 파리로 망명해 첫 국적 박탈 명단에 올랐고, 망명 신문 《파리저 타게블라트》를 창간했다. 그해 5월 분서에서 「불의 구호」는 「민족에 낯선 저널리즘」을 들어 볼프와 함께 그의 저작을 불길에 넘겼다. 1941년 뉴욕으로 피신해 1944년 죽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망명 일간지 《파리저 타게블라트》

1933년 12월 12일 베른하르트가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은 《파리저 타게블라트》가 파리에서 첫 호를 냈다. 발행인이자 아마도 자금을 댄 사람은 러시아 유대계 망명자 블라디미르 폴랴코프로, 반유대주의 연구자 레옹 폴랴코프의 아버지였다. 1936년 6월 두 사람의 갈등으로 신문이 끊기자 베른하르트와 편집부 대부분은 새 신문 《파리저 타게스차이퉁》으로 옮겨 일을 이었다. 같은 뜻의 ‘블라트’를 ‘차이퉁’으로 바꾼 제호는 노선과 독자를 그대로 잇겠다는 뜻이었다. 두 신문은 1940년 2월 18일까지 모두 2148호를 냈다. 편집부에는 《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 편집장이던 쿠르트 미하엘 카로와 카를 미슈, 한스 야코프 등 베를린 자유주의 신문 출신 기자들이 모였다.

베른하르트는 언론을 독자의 세계관을 빚는 정치적 무기로, 목표가 뚜렷한 기자를 정치가로 보았다. 그는 자기 신문의 임무를 독일어 독자에게 히틀러 정권의 범죄적 성격을 사실과 증거로 알리는 데 두었다. 1934년 4월 사설에서는 자유와 정의라는 오랜 자유주의 이념이 낡지 않았다고 쓰면서, 낡은 ‘무정부적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주의’를 윤리와 경제, 자유와 구속, 개인과 사회의 종합으로 그렸다. 파리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독일 인민전선 준비위원회에 협력했다. 독일 유대인 망명자들이 다른 망명 독일인과 운명을 떼어 놓지 말아야 한다는 하인리히 만의 호소에도 동의했다. 역사가 A. M. 예르마코프에 따르면 그의 신문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와 《슈튀르머》의 저속한 반유대주의를 가장 활발히 비판한 망명 매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