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
First All-Belarusian Congress
1917년 12월 18~31일(구력 5~18일) 대벨라루스 라다가 민스크에 소집한 벨라루스 정치 단체들의 대회. 1,872명의 대의원이 모여 벨라루스 민족의 자결권과 민주공화정을 인정했으나, 결의안의 첫 항만 채택한 채 서부 주 볼셰비키 당국에 해산되었다. 대회가 뽑은 라다와 집행위원회는 지하에서 활동을 이어 가 1918년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라다가 되었다.
상세
대회를 열자는 생각은 1917년 봄부터 여러 벨라루스 정치 조직 사이에서 나왔고, 11월 대벨라루스 라다와 중앙 벨라루스 군사 라다, 서부 전선의 벨라루스 집행위원회가 「벨라루스 민족 전체에게」 호소문을 내 12월 5일(신력 18일) 민스크 대회를 소집했다. 첫 회의에는 1,872명의 대의원이 나왔고 그 가운데 1,167명이 의결권을 가졌다. 민스크·모길료프·비텝스크·그로드노·스몰렌스크·빌뉴스의 향우회, 우파와 좌파 사회혁명당,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흐라마다, 젬스트보와 시의회, 노동조합, 병사와 피란민, 소비에트 대표까지 모였고, 대의원 다수는 농민 출신이었다. 핵심 쟁점은 러시아와의 관계였다. 우파 성향과 서부 출신 대의원은 즉시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고, 좌파와 동부 출신은 민주적 러시아 연방 안에 남자고 했다. 러시아어 출처는 넓은 자치나 독립을 주장한 벨라루스 사회주의 흐라마다와, 동부 출신이 많고 러시아와의 연합을 고수한 「지역주의자」의 대립을 강조한다. 대회는 얀 세라다를 의장으로 71명의 라다와 그 집행위원회를 뽑았다.
12월 18일(구력) 새벽 1시 15분, 15개 항의 타협적 결의안이 낭독되었다. 결의안은 「자치」라는 말조차 쓰지 않고 지역 통치와 러시아 연방과의 관계를 다루었으며, 임시 지역 권력이 벨라루스 제헌 회의를 서둘러 소집하도록 했다. 대의원들은 첫 항만 만장일치로 채택할 수 있었다. 그때 볼셰비키 병력이 건물을 에워쌌고, 서부 주 내무위원 류드비크 레자프스키가 들어와 대회 해산과 의장단 체포를 선언했다. 대의원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주먹다짐까지 벌였지만 세라다를 포함한 의장단 27명이 체포되고 대의원들은 쫓겨났다. 대회 라다는 다음 날 비밀리에 모였고, 1918년 1월 2일(구력 1917년 12월 20일) 17명의 집행위원회를 뽑았다. 서부 주 정부 의장 카를 란데르는 소브나르콤과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대회를 크게 왜곡해 보고했다. 러시아어 출처는 해산의 주된 이유를 권력을 나누기 싫어한 서부 주 당국에서 찾고 법적 근거는 없었다고 보며, 현장에 있던 알렉산드르 체르뱌코프, 즈미체르 질루노비치, 빌헬름 크노린도 뒤에 해산이 꼭 필요했는지 의문을 나타냈다. 벨라루스 측 저자들에 따르면 대회는 벨라루스 문제를 국제 의제로 올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회담에서 소비에트 측이 해산을 이유로 비판받았다. 1919년 2월 볼셰비키는 같은 장소에서 이름이 거의 같은 제1차 전벨로루시 소비에트 대회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