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프랑스 헌법
French Constitution of 1848
1848년 11월 4일 프랑스 제헌국민의회가 채택한 제2공화국 헌법. 남성 보통선거로 뽑는 750명 단원제 의회와 임기 4년의 직선 대통령을 두고 대통령의 연임을 금지했으며, 노예제 폐지와 정치범 사형 폐지를 담았다. 마르크스는 대통령과 의회라는 두 머리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게 짜인 이 헌법을 아킬레우스에 빗대었다.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뒤 1852년 1월 14일 새 헌법으로 대체되었다.
상세
제헌국민의회는 1848년 5월 18명으로 헌법위원회를 뽑았다. 위원장은 온건 공화파 코르므냉, 보고자는 마라스트였고, 토크빌, 오를레앙파 오딜롱 바로와 뒤포르, 사회주의자 콩시데랑도 들어 있었다. 초안은 6월 봉기를 거치며 크게 고쳐졌다. 가장 뜨거운 쟁점은 노동할 권리였다.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헌법에 넣자고 했지만, 티에르는 언제나 일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맞섰고 토크빌은 이를 공산주의의 도입으로 보았다. 결국 노동할 권리는 막연한 「구호받을 권리」로 바뀌었다. 헌법은 11월 4일 반대 30표만으로 채택되었다.
전문은 자유, 평등, 박애와 함께 「가족, 노동, 소유, 공공질서」를 공화국의 바탕으로 내세웠다. 노예제 폐지를 헌법에 담고 정치범 사형을 없앴으며, 언론, 종교, 결사의 자유와 소유권을 밝혔다. 입법권은 25세 이상 의원 750명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의회가 맡았다. 의원 임기는 3년이고 의회는 해산되지 않았다. 행정권은 남성 보통선거로 직접 뽑는 임기 4년의 대통령이 맡았는데, 임기를 마친 뒤 4년이 지나야 다시 나설 수 있었고 연봉은 60만 프랑이었다. 옛 왕가 사람들의 출마를 막자는 수정안은 거부되었다. 헌법을 고치려면 의회 임기 마지막 해에 한 달씩 사이를 둔 세 차례 표결에서 4분의 3의 찬성을 얻어야 했다.
이렇게 두 권력이 모두 보통선거에서 정당성을 얻었지만 둘의 다툼을 평화롭게 풀 길은 없었다. 게다가 대통령의 정당성은 한 사람에게 모인 반면, 의회의 정당성은 정치 성향이 제각각인 750명에게 흩어져 있었다. 1848년 12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압승했고, 1849년 5월 선거로 군주파가 다수인 의회가 들어서면서 헌법은 설계한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1851년 12월 2일 쿠데타가 공화국을 무너뜨렸고, 이 헌법은 1852년 1월 14일 새 헌법으로 대체되었다. 그래도 1870년 공화파가 되돌아갈 때 기억한 것이 이 헌법이었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 2장에서 이 헌법을 아킬레우스에 빗대었다. 「이렇게 기발한 방식으로 불사신이 된 이 헌법도 아킬레우스처럼 한 군데 약점이 있었다. 발뒤꿈치가 아니라 머리, 아니 헌법이 둘로 갈라져 끝나는 두 개의 머리였다. 한쪽은 입법의회, 다른 쪽은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의 재선을 금지한 제45조가 대통령에게 날마다 「형제여, 우리는 죽어야 하오!」라고 외친다고 비꼬았고, 개정을 어렵게 만든 제111조로 공화파가 운명을 속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