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로마 원정 (1849)
French expedition to Rome (1849)
1849년 프랑스 제2공화국이 이탈리아에 군대를 보내 로마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교황 비오 9세의 통치를 되살린 원정. 우디노 장군의 원정군은 4월 30일 가리발디에게 한 번 격퇴되었으나 증원을 받아 6월 3일 다시 공격했고, 7월 3일 로마에 들어갔다. 다른 인민의 자유를 무력으로 치지 않는다는 헌법을 어겼다는 비판이 1849년 6월 13일 파리 시위로 이어졌다.
상세
1848년 11월 교황의 총리 로시가 암살되고 비오 9세가 가에타로 피신하자, 1849년 2월 로마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갓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질서당 지도자 오딜롱 바로가 원정을 밀었다. 대통령 당선을 도운 몽탈랑베르 등 가톨릭 세력에게 성의를 보이고,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에 밀리지 않으려는 계산이었다. 원정군은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고 로마 인민의 뜻을 존중하러 가는 「친구」로 소개되었다.
우디노 장군이 이끄는 약 7,000명의 원정군은 1849년 4월 25일 치비타베키아에 상륙했다. 4월 30일 로마 성벽을 공격했지만 가리발디가 이끄는 공화국 군대에 크게 지고 물러났다. 보나파르트는 5월 7일 우디노에게 편지를 보내 증원을 약속했고, 협상을 맡겨 보낸 외교관 레셉스가 마치니와 휴전을 맺는 동안에도 병력을 늘렸다. 5월 선거로 질서당 다수의 의회가 들어서자 대통령은 레셉스를 불러들이고 포위를 명령했다. 3만 명으로 늘어난 원정군은 6월 3일 다시 공격했고, 6월 13일 포격을 시작했다. 7월 2일 가리발디가 약 4,000명을 이끌고 빠져나갔고, 3일 프랑스군이 로마에 들어왔다.
7월 31일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 셋, 이른바 「붉은 삼두」가 통치를 넘겨받아 1848년 11월 이후의 법을 모두 없앴다. 보나파르트는 8월 18일 에드가르 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사면, 세속 행정, 나폴레옹 법전, 자유주의 정부를 요구했지만, 교황은 9월 「자의 교서」로 자문 기구만 약속했다. 비오 9세는 1850년 4월에야 로마로 돌아왔고, 프랑스군은 1870년 보불 전쟁이 터질 때까지 교황의 통치를 떠받쳤다.
나라 안에서 원정은 큰 정치 싸움을 불렀다. 제헌의회는 5월 8일 원정을 처음 내건 목적으로 되돌리라고 결의했고, 산악파는 6월 3일 공격이 헌법 제5조를 어겼다며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다 6월 13일 시위로 무너졌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첫 각료회의에서 곧바로 로마 원정이 결정되었다. 원정은 국민의회 몰래 실행하고, 그 비용은 거짓 구실을 대어 국민의회에게서 뜯어내기로 합의했다”고 쓰고, 보나파르트가 같은 방식, 같은 술책으로 12월 2일 쿠데타를 준비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