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국민의회 (1849–1851)
National Legislative Assembly (France, 1849–1851)
1848년 헌법에 따라 1849년 5월 13~14일 남성 보통선거로 뽑혀 5월 28일 문을 연 프랑스 제2공화국의 단원제 의회. 의석의 약 64%를 질서당이 차지했고, 1850년 5월 31일 선거법으로 유권자 약 280만 명의 선거권을 빼앗았다.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맞서다가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로 해산되었다.
상세
1848년 헌법은 750명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의회를 두었다. 의원은 3년 임기로 남성 보통선거로 뽑혔고,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없었다. 1849년 선거에서는 정통왕조파,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를 아우른 보수 연합 질서당이 의석의 약 64%를 얻었다. 온건 공화파는 약 11%에 그쳤고, 사회 개혁을 내건 민주사회파(「데모크-소크」)는 득표와 의석 모두 약 25%를 얻었다. 대통령은 질서당 지도자 오딜롱 바로를 내각 수반으로 다시 앉혀야 했다.
의회는 먼저 공화파를 꺾었다. 1849년 6월 3일 프랑스 원정군이 로마 공화국을 공격하자, 민주사회파는 다른 민족의 자유를 무력으로 치지 않는다는 헌법 제5조를 들어 대통령과 정부를 탄핵하자고 했으나 361대 202로 졌다. 6월 13일 이들의 평화 시위는 샹가르니에의 군대에 흩어졌고, 르드뤼롤랭, 펠릭스 피아, 들레클뤼즈, 콩시데랑 등은 망명했다. 의회는 언론과 클럽을 옥죄고, 1850년 3월 15일 교회에 교육을 돌려준 팔루 법을 만들었다. 1850년 3월 보궐선거에서 좌파가 다시 이기자 5월 31일 3년 거주 요건을 둔 새 선거법을 433대 241로 통과시켰다. 떠돌며 일하던 노동자들이 대거 빠져 유권자는 960만 명에서 680만 명으로 줄었다.
대통령과의 다툼은 갈수록 깊어졌다. 1849년 10월 31일 보나파르트는 바로 내각을 내보내고 의원이 아닌 자기 사람들로 내각을 꾸렸다. 1850년 그는 지방을 돌며 지지를 모았고, 10월 사토리 열병식에서는 보나파르트파 군인들과 샹가르니에 쪽이 부딪쳤다. 1851년 1월 그는 군 지휘권을 쥔 샹가르니에를 해임했다. 1852년 5월에 대통령과 의회의 임기가 함께 끝나는데, 대통령의 재선을 막은 헌법 제45조를 고치려면 의원 4분의 3의 찬성이 필요했고 질서당도 그 미래를 두고 갈라져 있었다. 개정이 무산되자 보나파르트는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했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 3장을 이렇게 열었다. 「1849년 5월 28일 입법국민의회가 열렸다. 1851년 12월 2일 그 의회는 깨부수어졌다. 이 기간이 곧 입헌 공화국 또는 의회 공화국의 수명이다.」 그는 선거권을 빼앗은 「1850년 5월 31일의 법은 부르주아지의 쿠데타였다」고 보았고, 의원들이 의회 안의 승리를 진짜 승리로 착각하는 병을 의회 백치증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