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tzsche-Archiv (Weimar, Villa Silberblick) · 1894.02–1945.12

니체 문서보관소

Nietzsche Archive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가 1894년 나움부르크에 세우고 1896년 바이마르로 옮긴 니체 유고와 기록의 보관·출판 기관. 1897년부터 병든 니체가 살던 질버블리크 별장에 자리 잡았다. 유고를 독점하며 『권력의지』 같은 편집본을 니체의 주저로 내세우고 편지를 위조해 니체를 민족주의자로 꾸몄으며, 1920년대부터 무솔리니와 나치에 다가가 1932년 이후 히틀러가 여러 차례 찾았다. 1945년 소련 점령군이 닫았고, 그 장서는 뒤에 콜리·몬티나리 비판 전집의 바탕이 되었다.

상세

왜 한 기록보관소가 니체 수용사의 중심이 되었나?

니체는 1889년 1월 토리노에서 정신이 무너진 뒤 1900년 죽을 때까지 글을 쓰지 못했다. 그 11년 동안 그의 이름은 독일어권에서 갑자기 유명해졌다. 누가 그의 유고를 갖고, 무엇을 어떤 순서로 출판하고, 그의 생애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곧 ‘니체가 누구인가’를 정하게 된 것이다. 그 권한을 거의 독점한 사람이 여동생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였고, 그 도구가 니체 문서보관소였다.

엘리자베트는 반유대주의 운동가인 남편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함께 파라과이에 순수 게르만 정착촌을 세우려다 실패하고 1893년 가을 독일로 돌아왔다. 니체 자신은 생전에 이 매제와 반유대주의를 경멸했다. 그녀는 바이마르의 괴테·실러 문서보관소와 코지마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운동을 본보기 삼아, 오빠의 기록을 모아 해석의 주도권을 쥐려 했다.

문서보관소는 어떻게 세워지고 운영되었나?

엘리자베트는 1894년 2월 2일 어머니의 68번째 생일에 나움부르크의 집에 꾸며 놓은 문서보관소 방을 선보였다. 그녀는 그때까지 하인리히 쾨젤리츠(페터 가스트)와 프란츠 오버베크가 맡던 유고 관리를 넘겨받고, 남의 손에 있던 원고를 거둬들였으며, 오빠의 편지들을 거액에 사들였다. 1895년 12월에는 어머니와 후견인에게서 오빠 저작의 모든 권리를 사들였다. 문서보관소는 1896년 바이마르로 옮겼고, 1897년 7월 니체 숭배자 메타 폰 잘리스가 사들인 질버블리크 별장에 자리 잡았다. 그해 여름 간호가 필요한 니체도 이곳으로 옮겨져 1900년 8월 여기서 죽었다.

엘리자베트는 벨기에 예술가 앙리 판 데 펠데에게 별장 개조를 맡겼고, 1903년 니체의 생일에 유겐트슈틸 양식의 새 건물을 선보였다. 문서보관소는 하리 그라프 케슬러 등이 꿈꾼 ‘새로운 바이마르’ 예술 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병든 니체를 손님에게 보여 주거나 그의 초상과 흉상을 팔며 일종의 숭배를 조직했다. 1908년 스웨덴 은행가 에르네스트 틸의 큰 기부로 ‘니체 문서보관소 재단’이 세워졌지만, 실권은 끝까지 엘리자베트에게 있었다.

문서보관소는 니체를 어떻게 바꿔 놓았나?

가장 큰 문제는 편집이었다. 문서보관소는 1901년 호르네퍼 형제와 쾨젤리츠를 시켜 니체의 유고 메모를 엮은 『권력의지』를 냈고, 1906년 엘리자베트와 쾨젤리츠가 이를 크게 바꾸고 늘린 판을 냈다. 니체가 한때 구상했다가 버린 책 제목을 붙여 유고 단편 1,067개를 주제별로 늘어놓은 이 편집본을 문서보관소는 니체의 ‘주저’라고 선전했고, 독일어판 위키백과의 표현대로 이 책은 오늘날 보기에 의심스럽고 니체의 작품을 일그러뜨리는 영향을 끼쳤다. 니체가 쓴 책이 아니라 문서보관소가 만든 책인 셈이다.

엘리자베트는 자기 마음에 드는 니체상도 퍼뜨렸다. 문서보관소의 공식 서술에서 니체는 건강한 애국자, 사랑 많은 오빠, 조국을 사랑한 프로이센인으로 그려졌고, 그녀는 이를 위해 니체의 편지를 위조하기도 했다. 니체의 독일 비판은 진정한 애국자의 실망한 사랑으로, ‘권력의지’는 군사적 의미로 풀이되었다. 루돌프 슈타이너 같은 옛 협력자들은 1900년부터 그녀가 오빠의 사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바젤의 오버베크 쪽 사람들은 ‘반(反)문서보관소’를 이루어 맞섰다. 오늘날 니체 연구는 이 비판들이 대체로 옳았다고 본다.

문서보관소는 어떻게 파시즘과 나치에 다가갔나?

제1차 세계대전 뒤 엘리자베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하는 쪽에 섰다. 그녀는 독일국가인민당에 들어가 ‘등 뒤의 비수’ 전설을 옹호했고, 1925년 대통령 선거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 1923년부터 오스발트 슈펭글러를 재단 이사이자 행사의 연사로 모시며 보수 혁명의 흐름을 탔다. 1925년 무렵부터는 니체 숭배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와 관계를 맺어 재정 지원도 받았고, 문서보관소는 파시즘을 니체를 잇는 정신 운동으로 찬양했다.

1932년 초 무솔리니가 공동 집필한 연극 『백일천하』의 독일 초연을 계기로 엘리자베트는 아돌프 히틀러를 처음 만났고, 히틀러는 그 뒤 문서보관소를 여러 차례 찾았다. 엘리자베트는 히틀러의 집권을 열렬히 환영하는 편지를 썼고, 1935년 그녀의 장례식에는 히틀러와 나치 국가의 고관들이 참석했다. 같은 해 슈펭글러는 문서보관소의 정치적 경향 때문에 이사회를 떠났다. 그 뒤 사촌 막스 엘러가 문서보관소를 이끌며 나치식 니체상을 퍼뜨렸고, 나치 정권은 니체 기념관 건립을 지원했다. 그러나 1944년 니체 탄생 100주년에 남은 것은 반쯤 지어진 기념관과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대신 전한 히틀러의 축전뿐이었다. 1937년 무렵 문서보관소 직원 카를 슐레히타 등은 내부적으로 엘리자베트의 위조와 개입을 확인했지만 공개 논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전쟁 뒤 문서보관소는 어떻게 되었나?

1945년 7월 바이마르를 넘겨받은 소련 군정은 문서보관소 계좌를 동결했다. 막스 엘러는 12월 초 체포되었고 곧 건물이 폐쇄·봉인되었으며, 소장품은 이듬해 압수되었다가 되돌려졌다. 동독에서 재단은 형식상 유지되었고, 한때 이사회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1950년부터 소장품은 괴테·실러 문서보관소에 편입되었고, 재단은 1956년 해산되었다.

동독에서 니체는 사실상 금지된 저자였다. 그런데도 그 원고는 정리되어 서방 연구자들에게 열렸고, 동독의 문서보관소 책임자들은 이탈리아의 조르조 콜리와 마치노 몬티나리가 1960년대부터 펴낸 새 비판 전집의 작업을 지원했다. 엘리자베트가 독점하고 일그러뜨린 원고가 바로 그 일그러짐을 바로잡는 전집의 바탕이 된 것이다. 오늘날 질버블리크 별장은 클라시크 재단 바이마르의 박물관이며, 니체의 문학 유고는 202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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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de.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