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ktat ryski; ru. Риж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1921) · 1921.03.18

리가 조약 (1921)

Peace of Riga (1921)

1921년 3월 18일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소비에트 벨로루시의 위임 포함)·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맺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끝낸 평화조약. 국경은 커즌선보다 약 250킬로미터 동쪽에 그어져 서벨라루스와 서우크라이나가 폴란드에 넘어갔다. 1920년 10월 12일의 예비 강화·휴전 협정을 이은 것으로, 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 때까지 두 나라의 국경을 정했다.

상세

강화 회담은 1920년 8월 17일 민스크에서 시작해 9월 21일 중립지 리가로 옮겨졌고, 폴란드 쪽은 얀 돔프스키, 소비에트 쪽은 아돌프 이오페가 대표를 이끌었다. 10월 12일 예비 강화와 휴전이 서명되어 18일 자정 발효했다. 바르샤바 전투에서 진 소비에트 쪽은 민스크까지 넘기는 큰 양보를 내놓았지만, 민족민주당이 주도한 폴란드 대표단은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의 주장에 따라 비폴란드계 주민을 줄이려고 약 100킬로미터의 땅을 거절했다. 소비에트 쪽은 비공산계 우크라이나 대표를 회담에서 빼는 데 성공했다. 탐보프와 크론시타트 등 국내 위기가 깊어지자 레닌은 대표단에 조약을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조약은 26개 조로 이루어졌고, 폴란드는 1920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맺은 바르샤바 조약을 버리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를 인정했다. 러시아 쪽은 금화 3천만 루블을 치르고 1772년 이후 가져간 미술품과 문화재, 문서를 돌려주기로 했으며, 이 밖에 영어 출처는 2,900만 금 루블어치의 철도 차량을, 러시아어 출처는 1,800만 금 루블어치의 재산을 넘긴다고 적는다. 제6조와 제7조는 국적 선택과 소수민족의 권리를 정했다. 소비에트 쪽은 4월 14일, 폴란드 의회는 15일 비준했다.

연합국은 처음에 자신들이 빠진 이 조약을 인정하기를 꺼렸고, 1923년 3월에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이, 4월에 미국이 국경을 인정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조약을 “비겁한 행위”라 부르며 1921년 5월 15일 칼리시의 수용소에서 우크라이나 병사들에게 사과했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레닌도 서쪽으로의 혁명 확산을 미뤄야 했기에 조약을 만족스럽지 않게 여겼다. 트로츠키는 『나의 생애』에서 바르샤바 패배 뒤 다시 폴란드와 싸우자는 분위기에 맞서 “이미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면 열 배는 더 비싸게 치를 것”이라며 강화를 요구했고, 전선을 다녀온 뒤 정치국이 “거의 만장일치로” 즉각 강화를 결정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리가 조약으로 정해진 국경은 소비에트 공화국을 독일로부터 끊어 놓았고, 이는 뒤에 두 나라의 삶에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고 썼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독립운동은 이 조약을 큰 좌절로 받아들였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pl.wikipedia.org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