Пленум ЦК КПСС · 1919–1991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Plenum of the Central Committee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전원회의로, 당 대회와 대회 사이에 중앙위원회가 활동하는 공식 무대였다. 정위원과 후보위원이 함께 참석했으나 후보위원의 표는 자문적 성격이었고, 6개월에 최소 한 번 소집하도록 규약에 정해져 있었다. 당 대회 직후 첫 전원회의에서 서기장, 정치국(1952년 이후 주석단), 서기국을 선출했고, 중앙위원 자격 박탈은 전원회의 3분의 2 다수로 결정했다.

상세

명칭과 기원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회의가 '전원회의(쁠레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19년 9월경이었다. 그전에는 단순히 중앙위원회 회의라고 했다. 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안에 정치국, 조직국, 서기국이 만들어지면서 정위원과 후보위원 전체가 모이는 회의를 정치국·조직국 회의와 구별해 전원회의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명칭은 그때 확정되었다.

1924년 1월 14~15일 전원회의가 처음으로 속기록을 남겼다. 그전까지 회의와 전원회의는 속기되지 않았다. 1989년 1월 11일 정치국 결정으로 대회, 회의, 중앙위 전원회의의 모든 기록과 속기록을 전면 공개하도록 한 것은 그로부터 65년 뒤의 일이었다. 1919년 9월부터 1989년 11월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와 전원회의는 대략 300회였다.

결정의 무대

전원회의는 소련 역사의 주요 정책 결정이 통과된 자리였다. 1954년 2월 23일~3월 2일 전원회의는 곡물 생산 확대와 처녀지·휴경지 개발에 관한 결정을 채택해 처녀지 개간 운동을 시작했다. 1962년 11월 19~23일 전원회의는 당 조직을 산업별과 농업별로 나누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1964년 11월 16일 전원회의에서 뒤집혔다. 1965년 9월 27~29일 전원회의는 경제 개혁 계획을 채택했고, 1977년 5월 24일 전원회의는 소련 헌법 초안과 국가 찬가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켰다. 전원회의는 정책만이 아니라 최고 지도부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1922년 4월 3일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 선출되었고, 1953년 9월 전원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1964년 10월 14일 전원회의는 흐루쇼프를 제1서기와 각료회의 주석직에서 해임하고 두 직을 겸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브레즈네프를 제1서기로, 코시긴을 정부 수반으로 추천했다. 1982년 11월 12일에는 안드로포프가, 1984년 2월 13일에는 체르넨코가, 1985년 3월 13일에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중앙위원회와의 관계

중앙위원회는 당 대회가 선출하고 대회에 책임을 지는, 대회와 대회 사이의 최고 당 기관이었다. 규약상 대회와 대회 사이에 당의 모든 활동과 지방 당 기관을 지도하고, 간부 선발과 배치를 맡고, 당 그룹을 통해 중앙 국가 기관과 사회단체를 지도하며, 중앙 언론의 편집국을 임명하고 당 예산을 관리하는 것이 중앙위원회의 권한이었다. 중앙위원회 안에서는 중앙위원회 부속 당감독위원회가 당 규율을 감독하고 중앙감사위원회가 중앙위원회의 사무와 재정을 감사했다. 중앙위원회가 선출한 정치국과 서기국, 조직국(1952년 해체)과 서기장직에는 실질 권한이 집중되는 경우가 많았고, 19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중앙위원회는 거수기 성격을 띠게 되었다. 레닌은 중앙위원회를 당의 최고 권위로 보았고, 1917년 10월 이후 초기에는 실제로 다수결로 결정하는 핵심 기구였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이어진 표결이 그 예이다.

전원회의와 대회, 그리고 다른 급의 전원회의

당 대회는 당의 최고 기관으로 강령과 규약의 개정, 당 노선의 결정, 중앙위원회 선출을 전담했다. 대회와 대회 사이에 중앙위원회의 지도 기능을 행사하고 중앙위원회의 집행 기구를 선출하는 것이 전원회의이며, 따라서 전원회의는 대회도, 전연합 당 회의도 아니다. 한편 '전원회의'라는 형식은 중앙위원회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규약은 공화국, 지방, 주, 구, 시, 구역 위원회의 전원회의를 최소 4개월에 한 번 열도록 정했고, 해당 위원회 위원의 제명도 그 위원회 전원회의에서 3분의 2 다수로 결정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위계의 맨 위에서 되풀이되는 같은 조직 형식이었다.

사례: 1957년 6월의 전원회의

1957년 6월 18일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가 셰필로프를 마지막에 끌어들여 주석단에서 흐루쇼프를 제1서기직에서 교체하려 했다. 주석단 정위원 11명 가운데 7대 4로 그 제안이 통과했다. 흐루쇼프와 지지자들은 그를 해임할 수 있는 것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뿐이라고 주장했고, 중앙위원들이 주석단에 소집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6월 22일부터 열린 중앙위원회 비상회의에서 흐루쇼프는 반대파를 「반당 그룹」이라고 규정했고, 6월 29일 전원회의 결정으로 그들은 당과 정부 직위에서 축출되었다. 이 그룹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와 자유화 시도를 거부하고 스탈린주의의 복원을 추구한 인물들이었고, 패배 뒤 몰로토프는 몽골 대사, 말렌코프는 카자흐스탄 수력발전소 소장, 카가노비치는 우랄 지역의 소규모 칼리 공장 소장, 셰필로프는 키르기스 학술원 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좌천되었으며 1961년 당에서 완전히 제명되었다.

인사 교체는 다른 전원회의에서도 이어졌다. 1957년 10월 28~29일 전원회의는 주코프를 직위에서 해임했고, 1956년 2월 27일, 1961년 10월 31일, 1966년 4월 8일, 1971년 4월 9일, 1976년 3월 5일, 1981년 3월 3일, 1986년 3월 6일 전원회의는 주석단·정치국과 서기국의 구성을 선출했다. 소집 빈도는 규약이 정한 최소선을 웃돌았다. 1957년에는 2월 13~14일, 6월 22~27일, 10월 29일, 12월 16~17일의 네 차례가 있었고, 1966년에는 여섯 차례, 1989년에는 여덟 차례가 열렸다. 1953년 7월 2~7일 전원회의는 「베리아의 범죄적 반당·반국가 행위에 관하여」라는 결정을 채택했다.

지도부와의 관계, 그리고 전원회의가 향한 대상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중앙위원회는 집단지도체제가 서기장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가운데 상대적인 부흥기를 맞았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 시도와 1964년 그의 해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정치국이 아니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였다. 브레즈네프 시기로 가면 중앙위원회는 정위원과 후보위원 수백 명 규모로 커지고 의례화되었고, 마지막 시기에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서 국가 기관에 밀려난 끝에 1991년 후반 당 금지와 함께 해산되었다.

1937년 2~3월 전원회의(1937년 2월 23일~3월 5일)는 에이헤가 정치국에 보낸 편지 뒤에 열렸으며, 출처는 이 전원회의를 대숙청의 출발점으로 서술한다. 대숙청을 공식적으로 개시한 전원회의를 소집한 기구 자체도 그 대숙청의 대상이었다. 1936~1938년 사이 중앙위원회 위원 가운데 상당수가 처형되거나 투옥되었다.

종료

1991년 8월 29일 소련 최고소비에트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당의 건물과 재산을 봉인했으며, 1991년 11월 6일 옐친 대통령이 러시아 영토에서 소련 공산당과 그 공화국 조직(러시아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했다. 1992년 11월 30일 러시아 헌법재판소는 1차 당조직 해산은 위법이라고 판결하면서도 당 중앙위원회 해산은 유지했다. 이 때문에 이 항목의 종료 연도는 1991년으로 잡았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full description of the plenum as a plenary session of CC members and candidate members, naming history from September 1919, statutory minimum of one per half-year, election of General Secretary/Politburo/Secretariat at the first post-congress plenum, and enumeration of historically significant plenums including June 1957 (Anti-Party Group)
  2. britannica.com Encyclopaedia Britannica: describes Central Committee as highest party organ between congresses; notes it convened twice a year, functioned as a quasi-parliamentary body, and that rival party leaders had to win control of its membership, which proved decisive in the leadership crises of 1957 and 1964
  3.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confirms the Central Committee's statutory role, composition (full + candidate members), and its pivotal role in the 1957 crisis when Khrushchev appealed from the Presidium to the Central Committee plenum to defeat the Anti-Party Group
  4. istmat.org istmat.org: stenographic record of the July 1953 Plenum of the CPSU Central Committee, opened by Khrushchev on behalf of the Presidium, illustrating the plenum's function as a formal venue for major party decisions (Beria affair)
  5. 위키백과 (러시아어)
  6. ru.wikisour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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