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거노믹스
Reaganomics
1981~1989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공급 중시 경제학에 바탕을 두고 연방 소득세와 양도소득세 인하, 정부 지출 증가 억제, 규제 완화, 인플레이션을 줄이기 위한 통화 긴축을 내세웠고, 실제로는 국방비가 크게 늘었다. 반대자들은 「낙수 경제」나 「부두 경제학」이라 불렀다. 지지자들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종식과 성장을, 비판자들은 소득 격차 확대와 8년 만에 세 배로 늘어난 국가 부채를 든다.
상세
레이거노믹스라는 이름은 레이건과 경제학을 합친 말로, 방송인 폴 하비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레이건 이전 미국은 높은 실업과 고질적 인플레이션, 곧 스태그플레이션의 10년을 겪었고 케인스주의 정통과 필립스 곡선에 대한 공격이 커지고 있었다. 1980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레이건과 맞선 조지 H. W. 부시는 그의 구상을 「부두 경제학」이라 비웃었다. 레이건은 세금을 낮추겠다고 공언했다는 점에서 바로 앞 대통령들과 달랐다.
정책의 기둥은 국방비 증액, 정부 지출 증가 억제, 연방 소득세와 양도소득세 인하, 정부 규제 축소, 인플레이션을 줄이기 위한 통화량 긴축이었다. 레이건은 취임 직후인 1981년 1월 28일 남아 있던 국내 석유 가격 통제를 풀었다. 1981년 경제회복세법은 최고 한계 세율을 70%에서 50%로, 최저 세율을 14%에서 11%로 낮추고 5년 동안 기업 세금 1,500억 달러를 깎았다. 감세가 저축과 노동 의욕을 키워 성장과 세수를 늘린다는 공급 중시론, 특히 세율을 낮추면 세수가 오히려 늘 수 있다는 래퍼 곡선이 그 근거였다. 1986년 조세개혁법은 최고 세율을 다시 28%로 낮췄다.
실제 결과는 계획과 달랐다. 1982년 레이건은 기업 감세 상당 부분과 개인 소득세 감세 일부를 되돌리는 데 동의해 첫 감세의 3분의 1을 무르게 되었고, 조세사학자 조지프 손다이크는 1982년과 1984년 법을 「평화 시기 최대의 증세」라 불렀다. 국방비는 1980년 2,671억 달러에서 1988년 3,931억 달러로 늘었다. 연방 적자는 1983년 국내총생산의 6%로 정점에 이르렀고, 미국은 국내외에서 빚을 내 적자를 메워 국가 부채가 9,970억 달러에서 2조 8,500억 달러로 늘었다. 그 결과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에서 최대의 채무국으로 바뀌었다. 연준의 긴축 통화와 확장 재정이 맞물린 이 조합은 금리와 달러 가치를 끌어올리고 큰 적자를 낳았으며, 볼커는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평가는 엇갈린다. 레이건 정부의 경제자문위원이던 윌리엄 니스카넨은 레이건이 네 가지 주요 목표를 모두 이루었지만 바랐던 정도에는 못 미쳤다고 보았고, 가장 큰 변화는 최고 한계 소득세율이 70.1%에서 28.4%로 떨어진 세제였다고 썼다. 프리드먼은 레이거노믹스의 네 원칙을 낮은 한계 세율, 적은 규제, 지출 억제, 인플레이션 없는 통화로 정리하고 레이건이 「좋은 진전」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폴 크루그먼은 레이건 시기의 확장이 주로 경기 순환과 볼커의 통화 정책 덕분이었다고 보고, 레이건의 감세가 전후의 「대압착」을 끝냈다고 비판했다. 레이건의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낸 마틴 펠드스타인도 감세가 세수를 늘린다는 래퍼 곡선 주장을 「공급 중시론 과장의 극치」라 불렀다. 경제학자 라구람 라잔과 루이지 징갈레스는 항공·트럭 운송 규제 완화 같은 시장화가 이미 카터 때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레이거노믹스는 같은 시기 영국의 대처리즘과 자주 나란히 비교되며, 신자유주의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자유지상주의 이론가 머리 로스바드는 거꾸로 「대처리즘은 레이건주의와 너무 닮았다. 자유 시장의 수사가 국가주의의 내용을 가리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