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
Resist America, Aid Korea
중국이 한국전쟁 참전을 부른 공식 명칭이자 국내 동원 운동. 1950년 10월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유엔군을 38선 남쪽으로 밀어냈고 1953년 정전까지 싸웠다. 국내에서는 「항미원조 보가위국」 운동으로 무기 헌납·증산·반미 선전이 조직되었고 반혁명 진압과 사상 개조가 가속되었다. 중국은 소련과의 동맹을 굳히고 대국의 지위를 주장하게 되었으나 대만 문제는 고착되었다.
상세
참전 결정은 1950년 10월 초 정치국에서 격론 끝에 내려졌다. 인천 상륙 뒤 유엔군의 북진이 만주를 위협한다는 판단, 스탈린의 공군 지원 약속과 그 철회, 김일성의 지원 요청이 얽혔고, 마오는 참전이 신생 정권을 굳히고 소련의 신뢰를 얻는 길이라고 보았다. 「지원군」이라는 명칭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려는 장치였다.
국내 동원은 「항미원조 총회」가 주관했다. 도시와 농촌에서 애국 공약, 증산 절약, 전투기 헌납 운동이 벌어졌고 미국을 「종이호랑이」로 그리는 선전이 대중적 반미 의식을 형성했다. 같은 시기 반혁명 진압운동과 지식인 사상개조가 전쟁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전쟁은 중국에 수십만 명의 인명 손실과 무거운 재정 부담을 남겼으나 신생 정권은 세계 최강국과 맞섰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소련의 원조와 군 현대화가 뒤따랐고, 마오의 아들 마오안잉의 전사는 뒤에 마오의 개인사로 널리 회자되었다. 정전은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