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것 (일리옌코프)
The Ideal (Ilyenkov)
소련 철학자 에발트 일리옌코프가 1962년 『철학 백과사전』 항목 「이상적인 것」과 유고 「이상적인 것의 문제」(1979)에서 정식화한 개념. 말의 의미, 상품의 가치, 규범과 지식처럼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은 개인의 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하는 활동과 그 활동이 만든 사물·기호·제도 속에 객관적으로 있다고 본다. 일리옌코프는 이상적인 것을 “사물의 형태이지만 그 사물 바깥에, 곧 사람 안에서 그의 능동적 활동의 형태로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1968년부터 철학자 다비드 두브롭스키와 벌인 뇌와 의식 논쟁으로 널리 알려졌다.
상세
왜 ‘이상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가?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생각해 보자. 종이와 잉크를 아무리 분석해도 ‘천 원’이라는 가치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가치가 내 머릿속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잊어버려도 가게 주인은 그 종이를 받고 빵을 내준다. 말의 뜻, 법의 효력, 수학 정리의 참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분명히 실재하고 우리 삶을 움직이지만, 물리적 물체처럼 어디 놓여 있지 않다. 철학은 이런 것을 ‘이상적인 것’(러시아어 идеальное, 독일어 das Ideelle)이라고 불렀고, 그것이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있는가를 오래 다퉈 왔다.
여기서 ‘이상적’은 ‘완벽하다’는 일상적 뜻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맞서는 ‘관념의 성질을 띤 것’이라는 철학 용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das Ideelle는 흔히 ‘관념적인 것’으로 옮긴다. 이 항목은 일리옌코프가 쓴 러시아어 идеальное의 직역을 따라 ‘이상적인 것’이라고 쓴다.
전통적인 대답은 크게 둘이었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관념론은 이상적인 것을 물질과 따로 있는 정신이나 이데아의 세계로 보았다. 반대로 많은 유물론자와 자연과학자는 그것을 뇌의 생리 과정, 곧 신경세포의 활동으로 설명하려 했다. 소련의 공식 철학도 의식을 ‘뇌가 외부 세계를 반영한 상’으로 보는 레닌의 반영론을 기본 틀로 삼았다. 일리옌코프는 두 대답 모두 틀렸다고 보고 세 번째 길을 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마르크스주의가 의식·문화·교육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한꺼번에 드러난다.
일리옌코프는 무엇을 주장했나?
일리옌코프는 1962년 『철학 백과사전』 제2권에 실은 항목 「이상적인 것」에서 첫 문단부터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상적인 것은 개인 심리적 사실이 아니고, 더구나 생리적 사실도 아니며, 사회역사적 사실이자 정신적 생산의 산물이며 형식이다.”
Идеальное есть не индивидуально-психологический, тем более не физиологический факт, а факт общественно-исторический, продукт и форма духовного производства.
출발점은 마르크스가 『자본』 제1권 제2판 후기(1873)에서 헤겔을 뒤집으며 쓴 문장이었다. 마르크스에게는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 옮겨지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일 뿐이다.” 일리옌코프는 이 ‘옮겨지고 번역된다’는 말을 머리 안의 화학 반응이 아니라 사람의 실천적 활동이 일으키는 변형으로 읽었다.
das Ideelle nichts andres als das im Menschenkopf umgesetzte und übersetzte Materielle.
목수가 의자를 만든다고 하자. 의자의 모양은 나무 속에 들어 있지 않고, 목수의 뇌세포 모양도 아니다. 목수는 다른 사람들이 만든 의자, 도면, 배운 손놀림을 통해 ‘의자를 만드는 방식’을 익혔고, 그 방식대로 몸을 움직여 나무에 모양을 준다. 그러니 의자의 모양은 먼저 사람들의 활동 방식으로, 그다음 그 활동이 남긴 사물로 존재한다. 일리옌코프는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것은 사물의 형태에 다름 아니되, 그 사물 바깥에, 곧 사람 안에서 그의 능동적 활동의 형태로 있는 것이다.”
Идеальное есть поэтому не что иное, как форма вещи, но вне этой вещи, а именно в человеке, в виде формы его активной деятельности.
이 생각에서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개인은 이상적인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고 이미 사회에 있는 것을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든다. 갓난아기는 숟가락질, 말, 셈, 예절을 어른과 함께 하는 활동 속에서 하나씩 익힌다. 이상적인 것은 개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언어·도구·규범의 형태로 기다리고 있는 ‘문화의 객관적 형식’이다. 의식은 이것을 자기 안으로 들여올 때 생긴다.
왜 돈이 가장 좋은 예인가?
일리옌코프는 마지막 글 「이상적인 것의 문제」에서 마르크스의 가치 분석을 결정적 증거로 내세웠다. 이 원고는 그가 죽은 뒤 1979년 《철학의 문제들》 제6호부터 나뉘어 실렸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상품의 가치형태가 “순전히 이상적인” 형태라고 썼다. 일리옌코프가 강조한 대목도 그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가치형태 일반은(그 화폐형태만이 아니라) ‘순전히 이상적인’ 형태다.”
Маркс, форма стоимости вообще (а не только денежная ее форма) есть форма «чисто идеальная».
그런데 이 이상적인 형태는 누구의 머리 안에도 있지 않다. 상품의 값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노동 생산물을 교환하는 관계 속에서 매겨지고,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작동한다. 일리옌코프의 말로 하면 “가치형태는 사람의 의식 바깥에 있으면서도 이상적이다.” 생리학으로 의식을 설명하려는 사람도 가치를 뇌세포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돈은 이상적인 것이 뇌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가 된다.
форма стоимости идеальна, хотя существует вне сознания человека
여기서 ‘대표’라는 구조가 나온다. 외교관은 한 사람이지만 나라 전체를 대표하고, 돈은 종이 한 장이지만 모든 상품의 가치를 대표하며, 말은 소리의 묶음이지만 사물의 뜻을 대표한다. 한 물체가 자기 자신으로 남으면서 다른 것의 ‘본질’을 대신 나타낼 때, 그 대표 관계가 바로 이상적인 것이다. 일리옌코프는 이상적인 것을 “머리 바깥, 뇌 바깥의 형태와 맞물린, 사람의 실재적·대상적 활동의 도식”이라고도 불렀다.
«Идеальное» — это схема реальной, предметной деятельности человека, согласующаяся с формой вне головы, вне мозга.
이 분석은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성론과 이어진다.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의 성질처럼 보이는 현상을, 일리옌코프는 이상적인 것이 사물 속에 객관화된 한 형태로 설명했다. 다만 물신성이 그런 객관화가 사람을 지배하는 전도된 모습을 비판하는 개념이라면, 이상적인 것은 그보다 넓게 모든 문화적 의미가 존재하는 방식을 다룬다.
두브롭스키와는 무엇을 두고 다퉜나?
이 이론이 학계 밖까지 알려진 것은 1968년 논쟁 덕분이다. 그해 철학자 다비드 두브롭스키는 《철학의 문제들》 제8호에 「뇌와 정신」을 실어, 철학자 펠릭스 미하일로프와 일리옌코프를 비판했다. 미하일로프가 『인간 자아의 수수께끼』에서 정신과 뇌의 관계를 묻는 정신생리학 문제를 ‘속류 유물론의 가짜 문제’로 내친 데 일리옌코프가 동조했다는 것이다. 두브롭스키는 세체노프와 파블로프 이후 신경생리학이 쌓은 성과를 무시하지 말고, 주관적 현상이 뇌의 어떤 ‘신경역학적 부호’로 실현되는지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개인의 능력 형성에서 유전적 요인을 부정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일리옌코프는 같은 해 제11호에 「정신과 뇌(D. I. 두브롭스키에게 답함)」를 실어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사람에게 고유한 뇌의 기능과 구조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활동 방식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며, 그 정도를 “90퍼센트도 99퍼센트도 아니고 100퍼센트”라고 못 박았다.
на 100 % — а не на 90 и даже не на 99 %
그는 두브롭스키의 입장이 결국 아이마다 ‘유전적 운세표’를 뽑아 진로를 나누는 데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신경생리학은 아이들을 고르는 선별 도구가 되고, 사회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그린 공산주의가 아니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닮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반박에는 정치적 신념이 깔려 있었다. 모든 정상적인 아이는 교육 조건만 갖추면 재능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일리옌코프가 시청각장애 아동 교육, 곧 자고르스크 실험에 깊이 관여한 것도 이 믿음 때문이었다.
논쟁은 곧 이상적인 것의 정의로 옮겨 갔다. 두브롭스키는 「뇌와 정신」에서 ‘주관적 실재’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개인이 직접 겪는 감각과 생각의 세계는 사회적 형식으로 다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실재라는 것이다. 그는 이후 ‘정보’ 개념을 물질과 의식을 잇는 고리로 삼아, 주관적 현상과 그 신경적 담지자의 관계를 연구하는 길을 갔다. 일리옌코프와 그 제자들은 이를 오래 비판했고, 다른 입장의 철학자들도 논쟁에 끼어들었다. 오늘날 이 논쟁은 ‘의식은 뇌 안에 있는가, 사회적 활동 속에 있는가’를 둘러싼 소련 철학의 대표적 대결로 기억된다.
미학자 미하일 리프시츠도 다른 각도에서 일리옌코프와 이상적인 것을 두고 다퉜다. 이상적인 것을 사회적 활동이 사물에 새긴 형식으로만 보면, 자연과 현실 자체가 지닌 완전한 형태와 아름다움의 객관성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지금도 러시아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리옌코프와 리프시츠의 대화’로 다뤄진다.
소련 안팎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나?
일리옌코프의 이론은 소련 공식 철학과 편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의식을 외부 세계의 ‘반영’으로 보는 교과서식 반영론에서 보면, 이상적인 것이 머리 바깥의 사회적 형식 속에 객관적으로 있다는 주장은 관념론, 심지어 플라톤주의로 의심받기 쉬웠다. 실제로 그는 이 때문에 이념적 비판을 받았다. 그는 평생의 연구를 1976년 봄 원고 「이상적인 것의 변증법」으로 정리했지만 러시아어판은 생전에 나오지 못했고, 죽기 얼마 전 편집자가 손대 분량이 거의 반으로 준 영어판만 먼저 나왔다. 그가 1979년 3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에야 《철학의 문제들》이 원고 일부를 「이상적인 것의 문제」로 실었다.
소련 밖에서는 1990년대 이후 재평가가 활발했다. 영어권의 대표 연구자 데이비드 배커스트는 이 개념을 플라톤주의와 견주어 읽었고, 톰 록모어는 칼 포퍼의 ‘세계 3’(객관적 지식의 세계) 이론과 겹치는 점을 지적했다. 배커스트는 이것을 ‘자연 세계 안에서 비물질적인 것이 차지하는 자리’라는 철학의 오래된 문제에 대한 독창적 해법으로 평가했다. 그 영향은 비고츠키 전통의 심리학과 교육학, 핀란드와 북미의 활동 이론으로 이어졌다.
오늘 이 개념을 읽는 의미는 무엇인가?
뇌 영상 기술과 인공지능이 발달한 지금, ‘마음은 뇌 속에 있다’는 생각은 더 당연해 보인다. 일리옌코프의 이론은 그 당연함에 질문을 던진다. 언어 모델이 사람의 글을 학습해 그럴듯한 문장을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와 규범이 개인의 머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만든 언어와 텍스트 속에 퇴적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닌가. 반대로 두브롭스키 쪽의 질문, 곧 개인이 직접 겪는 주관적 체험은 무엇이며 그것이 뇌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물음도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개념은 두 가지를 알려 준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경제학에 그치지 않고 의식과 문화를 이해하는 철학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의 능력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조직하는 활동과 교육에 달려 있다는 믿음이, 교육의 평등과 사회의 책임을 요구하는 정치적 주장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