Übermensch · 1883–1885

위버멘쉬

Übermensch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에서 내세운 인간의 목표상. 신이 죽은 뒤 주어진 가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만들며 삶을 끝까지 긍정하는 존재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라고 가르친다. 흔히 ‘초인’으로 옮기지만 생물학적 초인종이나 지배 인종을 뜻하지 않으며, 나치가 쓴 반대말 ‘운터멘쉬’(열등 인간)는 니체의 저작 어디에도 없다.

상세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어떻게 소개했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머리말에서 열 해 동안 산에 있던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누려고 내려온다. 그가 처음 들른 도시의 장터에는 줄타기 광대를 보려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너희는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느냐?”

Ich lehre euch den Übermenschen. Der Mensch ist etwas, das überwunden werden soll. Was habt ihr getan, ihn zu überwinden?

그는 비유를 이어 간다. “원숭이는 인간에게 무엇인가? 웃음거리이거나 고통스러운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인간은 위버멘쉬에게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에 매인 밧줄, 심연 위에 걸린 밧줄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 다리이기 때문이며, 몰락하며 건너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중은 이 말을 줄타기 광대에 대한 이야기로 알아듣고 비웃는다.

Der Mensch ist ein Seil, geknüpft zwischen Tier und Übermensch – ein Seil über einem Abgrunde.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의 반대편에 ‘마지막 인간’을 세운다. 마지막 인간은 더는 무엇도 동경하지 않고 작은 쾌락과 안락, 건강에 만족하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눈을 깜빡이는 사람들이다. 니체가 보기에 신이 죽은 뒤 인류 앞에는 두 길이 있었다. 모든 높이를 포기하고 평준화된 안락에 머무는 마지막 인간의 길과,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위버멘쉬의 길이다.

니체는 이 말로 무엇을 뜻하지 않았나?

‘위버멘쉬’라는 낱말 자체는 니체가 처음 쓴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휘페란트로포스’에서 중세 신학, 그리고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에서 땅의 정령이 파우스트를 조롱하며 부르는 말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쓰임이 있다. 니체는 이 말에 정해진 정의를 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처음부터 오해가 따랐다. 1888년 『이 사람을 보라』에서 그는 이 말이 “거의 어디서나 아주 순진하게도”,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반대한 가치의 뜻으로, 곧 반은 ‘성자’이고 반은 ‘천재’인 ‘이상주의적’ 인간형으로 이해되었다고 불평했다. “또 다른 학식 있는 뿔 달린 짐승”은 이 말 때문에 그를 다윈주의자로 의심했다고도 썼다.

ist fast überall mit voller Unschuld im Sinn derjenigen Werte verstanden worden, deren Gegensatz in der Figur Zarathustras zur Erscheinung gebracht worden ist

20세기에는 훨씬 위험한 오해가 퍼졌다. 나치는 위버멘쉬를 아리아인 지배 인종의 이상으로 내세우고, 그 반대말로 열등한 ‘운터멘쉬’를 만들어 유대인과 슬라브인을 비인간화했다. 그러나 운터멘쉬라는 말은 니체의 저작 어디에도 없고, 니체는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경멸했다. 이 전유에는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의 몫이 컸다. 그는 반유대주의자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해 민족주의 진영과 가까웠고, 니체 문서보관소를 이끌며 오빠를 민족주의 사상가로 꾸몄다. 다만 연구자들은 니체의 귀족주의와 반민주주의, 사육과 도태를 말하는 일부 문장이 이런 전유에 빌미를 주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한다.

왜 ‘초인’이 아니라 ‘위버멘쉬’라고 쓰나?

한국어에서는 오랫동안 ‘초인’이라는 번역이 쓰였고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초인’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일상어의 뜻이 강하고, 영어 번역어 ‘superman’도 같은 문제가 있다. 미국의 제리 시겔과 조 슈스터는 1933년 1월 단편 「슈퍼맨의 지배」를 발표했고, 이것이 1938년부터 나온 만화 영웅 슈퍼맨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만화 주인공은 니체의 개념과 아무 관계가 없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초능력이 아니라 가치를 창조하는 태도에 관한 말이다.

그래서 한국의 니체 연구와 최근 번역은 대체로 독일어를 음역한 ‘위버멘쉬’를 쓰고, 영어권에서도 ‘overman’이나 원어 ‘Übermensch’를 쓰는 경우가 많다. 외래어 표기법대로 적으면 ‘위버멘슈’이지만 학계와 출판계에서는 ‘위버멘쉬’가 굳어졌다. 이 사전도 그 관용을 따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위버멘쉬를 어떻게 읽었나?

러시아에서 니체는 1890년대부터 크게 유행했고, 젊은 막심 고리키도 그 영향을 받았다. 고리키가 그린 떠돌이와 밑바닥 인생들은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면서도 자기 의지로 세상을 경멸하는 강한 개인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러시아 비평가들은 여러 번 고리키를 니체와 견주었다. 1900년 시베리아 유형 중이던 젊은 레프 트로츠키는 니체가 죽은 직후 이르쿠츠크의 신문 『동방 평론』에 「‘초인’의 철학에 관하여」를 연재해 이 비교를 다루었다.

트로츠키는 니체 철학의 사회적 축을 계급의 눈으로 읽었다. 그에 따르면 위버멘쉬의 이상은 생산과 분배의 유기적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사회의 몫을 약탈하며 사는 집단, 곧 금융 투기꾼과 모험가들의 이데올로기였다. “니체에게서 이데올로그를 찾은 것은, 역시 사회를 약탈하며 살지만 비참한 룸펜프롤레타리아트보다 더 행복한 조건에 있는 집단, 곧 고급 기생 프롤레타리아트다.”

В Ницше нашла себе идеолога группа, тоже хищнически живущая на счет общества, но при более счастливых условиях, чем жалкий люмпен-пролетариат: это - паразитенпролетариат высшего калибра.

그러면서도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이라는 꿈 자체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매력이 있었다. 1905년 혁명 뒤의 신건설론자들은 집단적 인류가 스스로를 창조한다는 사상을 펼쳤고, 트로츠키 자신도 1923년 『문학과 혁명』 끝에서 사회주의 아래에서 평균적인 인간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괴테, 마르크스의 수준으로 올라설 것이라고 썼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인간의 극복은 소수의 귀족적 개인이 아니라 계급 없는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과제였다는 점에서 니체와 갈라졌다.

관련 인물

출처

  1. zeno.org
  2. zeno.org
  3. de.wikipedia.org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5.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