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동맹
Union of Liberation
1904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창립된 러시아 최초의 주요 자유주의 정치 조직. 스트루베가 편집한 망명 잡지 《오스보보즈데니예》(해방)를 중심으로 모인 입헌주의자들이 22개 도시의 지하 서클을 하나의 전국적 운동으로 묶었으며, 전제정을 대중 캠페인으로 ‘포위’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1904년 11월 제1차 전국 젬스트보 대회 소집, 사법개혁 40주년을 빌미로 삼은 ‘연회 캠페인’, 그리고 전문직별 노동조합을 결성해 ‘연맹동맹’으로 통합하는 3대 전략을 추진했다. 1905년 10월 선언 이후 입헌민주당(카데트)이 창당되면서 해산했고, 그 핵심 인물 대부분은 카데트에 합류했다.
상세
결성 이전: 《오스보보즈데니예》와 샤프하우젠 회의
해방동맹의 기원은 19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이 망명지에서 입헌군주제 등의 강령을 담은 잡지 《오스보보즈데니예》(해방)를 창간하면서, 이 잡지를 둘러싼 지지자 집단이 조직의 핵심을 이루었다. 1903년 8월 2일부터 4일까지 스위스 샤프하우젠에서 열린 창립 회의에는 베르댜예프, 불가코프, 베르나츠키, 페트룬케비치, 밀류코프, 스트루베 등 훗날 러시아 자유주의 진영을 이끌 인물들이 참가해 정당을 만들 것인가 운동을 만들 것인가를 두고 논의했다. 스트루베의 견해가 승리해, 합법적 수단으로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광범한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노선이 채택되었다. 다만 같은 해 9월 하르키우에서 한 차례 협의가 더 필요했다.
창립과 강령
제1차 대회는 1904년 1월 3일부터 5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개인 주택들에서 비합법적으로 열렸다. 강령은 입헌군주제의 수립, 선거권, 민족의 자기결정권, 사유지 강제 몰수를 내걸었고, 비합법 젬스트보 대회 개최를 주장했다. 조직의 전술은 대중적 공개 캠페인으로 전제정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지도 기관인 평의회에는 페트룬케비치(트베리)가 의장으로, 안넨스키(페테르부르크)가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불가코프(키예프), 페셰호노프(페테르부르크), 표트르 돌고루코프(쿠르스크), 프로코포비치(페테르부르크), 니콜라이 리보프(사라토프), 샤홉스코이(야로슬라블), 코발레프스키(하르키우), 보구차르스키-야코블레프(페테르부르크) 등이 참여했다.
1904년: 전쟁, 회합, 연회 캠페인
조직은 22개 도시로 흩어져 있던 '해방' 서클들을 하나의 전국적 운동으로 묶었다.
창립 직후 러시아-일본 전쟁이 시작되자 애국적 동기에서 반전제정 캠페인을 벌이지 않았고, 활동은 대체로 잡지 배포에 그쳤다. 전선에서의 잇따른 참패로 여론이 바뀌고 내무상 플레베가 암살된 뒤 스뱌토폴크-미르스키가 취임해 사회에 대한 '신뢰의 시대'가 열리면서 움직임이 재개되었다. 같은 해 9월 17일(구력 30일)부터 9일간 파리에서 열린 '러시아 제국의 반대파 및 혁명 조직 회의'에 참가해 전제정을 입헌적·민주적 통치로 대체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2차 대회는 지하에서 나와 자체 언론으로 존재를 알리기로 하고 세 가지 방침을 정했다. 첫째, 다가올 젬스트보 대회에서 입헌적 결의를 채택하도록 이끌 것, 둘째, 사법개혁 기념일인 11월 20일에 자유·민중대표·헌법을 요구하는 연회 캠페인을 조직할 것, 셋째, 전문직 정치 조직을 만들고 이를 '연맹동맹'으로 통합해 위의 요구를 관철할 것.
연회 캠페인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 대도시에서 사법개혁 40주년을 빌미로 연회를 가장해 열린 집회였다. 자유주의 반대파 인사들이 자유와 헌법 도입을 연설하고,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러시아 전역의 34개 대도시에서 120회 이상의 집회가 열려 약 5만 명이 참여했다. 국내 합법 언론에는 보고가 거의 실리지 않았으나, 해외 언론과 특히 《오스보보즈데니예》에는 결의문 전문과 연설 기록이 실렸다.
이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조직을 이끌던 가폰 신부는 노동자들이 다른 계급과 연대해야만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보고 해방동맹과 연락을 취했다. 11월 말 회동에서 해방동맹 대표들은 '러시아 공장 노동자회'에 청원서를 내라고 제안했고, 노동자 청원서 작성에는 동맹이 창간한 신문 《나시 드니》(《조국의 아들》)의 마튜솁스키도 참여했다. 1905년 1월 9일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서를 들고 행진할 것을 결정한 것은 가폰 자신이었다.
1905년: 강령의 급진화와 해산
1904년 12월 해방동맹은 노동자 권리 보호가 아니라 정치 참여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조합 결성을 시작했고, 1905년 2월에는 이들이 수도에서 통합해 '연맹동맹' 중앙위원회를 세웠다.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차 대회는 혁명 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전국민 제헌의회 소집, 8시간 노동제, 사유지 몰수를 요구하는 새 강령을 채택했다. 4월에는 비합법 인쇄소가 세워져 《해방동맹 소보》(1905년 4월 15일-9월 4일, 6호)가 인쇄되었고, 여름에는 《노동자 동맹 규약》과 양원제 의회를 규정한 러시아 제국 헌법 초안 《러시아 제국 기본법》을 펴냈다.
5월 8일부터 9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전러시아 '연맹동맹'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만든 조직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이었다. 해방동맹 평의회 의장 페트룬케비치가 의장을 맡았고, 상임 의장은 그해 5월 말 밀류코프가 선출되었으며 그가 체포된 뒤에는 루투긴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후 총파업까지 약 5개월 동안 '연맹동맹'은 사실상 혁명의 선두에 섰다.
쓰시마 해전 참패 후 니콜라이 2세는 젬스트보 대회 대표단을 접견했다. 대표단은 거의 대부분 해방동맹 소속이었고, 상소문은 '질서와 국내 평화'를 위해 모든 신민이 평등하게 선출한 민중 대표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1905년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대회에서 대표들은 법률자문 기구에 불과한 부лыгин 두마의 보이콧에 반대하고, 선거에 참여할 정당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10월 전국 총파업 시기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세워져 해방동맹 소속 흐루스탈료프-노사리(게오르기 노사르)가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0월 15일부터 18일까지 열린 대회에서 입헌민주당(카데트)이 창당되었고, 이때부터 해방동맹은 존재를 멈추었다. 좌익은 잡지 《베즈 자글라비야》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구성과 규모
조직의 규모를 보여주는 수치는 1905년 3월의 구성원 1,600명뿐이다. 이들은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데사, 키예프, 하르키우를 비롯한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1905년 9월 모스크바에서는 직업별로 변호사, 역사가, 젬스트보 의사, 자연과학자, 배우, 문인, 기술자, 교사, 교수 그룹이 있었고, 폴란드인과 유대인 그룹은 민족별로 조직되었다. 해방동맹의 문서고는 1917년 12월 스트루베가 돈 지역으로 떠나기 전 제국 과학원 문서고에 맡겼다가 1930년 볼셰비키 당국의 심의 과정에서 발견되어 곧 비밀 처리되었다.
역사적 의의
해방동맹은 러시아 최초의 주요 자유주의 정치 조직으로, 합법적 수단과 대중 캠페인으로 전제정을 압박해 입헌 질서를 얻으려 한 최초의 전국적 시도였다. 해방동맹은 1905년 혁명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카데트당 창당과 함께 해소되었지만, 그 조직망과 인적 자원, 전문직 연합 전술은 이후 러시아 자유주의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founding date (January 1904), cities, leadership, banquet campaign details, Gapon link, dissolution into Kadets, membership numbers
- 위키백과 (영문) founding, Struve's role, constitutional monarchy goals, dissolution into Kadets after 1905
- britannica.com first major liberal political group, three-point strategy (zemstvo persuasion, banquet campaign, union of unions)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