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PeopleJoseph Stalin, Vyacheslav Molotov, Andrei Zhdanov, Emelyan Yaroslavsky, Pyotr Pospelov, Vladimir Lenin, Karl Marx, Friedrich Engels TermsShort Course of the History of the All-Union Communist Party (Bolsheviks), Dialectical Materialism, Historical Materialism
제9장 인민 경제 복구를 위한 평화적 사업으로 이행한 시기의 볼셰비키당 (1921~1925년)
1. 간섭과 내전이 끝난 뒤의 소비에트 국가. 복구 시기의 어려움.
전쟁을 끝낸 소비에트 국가는 평화적 경제 건설의 궤도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아물게 해야 했다. 파괴된 인민 경제를 복구하고, 공업과 운수, 농업을 정상 상태로 되돌려야 했다.
그러나 평화적 건설로의 이행은 극도로 어려운 조건에서 해야 했다. 내전의 승리는 쉽게 얻은 것이 아니었다. 나라는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과 3년간의 간섭 전쟁으로 황폐해졌다.
1920년 농업 총생산은 전쟁 전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전쟁 전의 수준이라는 것도 차르 러시아 농촌의 궁핍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1920년에는 많은 현이 흉작을 겪었다. 농민 경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공업의 처지는 더욱 나빠, 황폐 상태에 있었다. 1920년 대공업 생산은 전쟁 전보다 거의 일곱 배나 적었다. 대부분의 공장이 멈춰 섰고, 광산과 탄광은 파괴되거나 물에 잠겼다. 특히 야금업의 상태가 심각했다. 1921년 한 해의 선철 제련량은 겨우 11만 6,300톤, 즉 전쟁 전 선철 생산의 약 3퍼센트에 불과했다. 연료가 모자랐다. 운수는 파괴되었다. 나라에 있던 금속과 직물의 비축량은 거의 바닥났다. 나라에는 가장 필요한 것들—빵, 유지, 고기, 신발, 옷, 성냥, 소금, 등유, 비누—이 심하게 부족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이러한 결핍과 부족을 참았고, 때로는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이러한 결핍과 부족을 갑자기 견딜 수 없게 느끼며 즉각 해소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농민들 사이에 불만이 나타났다. 내전의 불길 속에서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군사·정치적 동맹이 만들어지고 굳어졌다. 이 동맹은 일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농민은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토지를 받고 지주와 쿨라크로부터 보호를 받았으며, 노동자는 농민층으로부터 식량 징발제에 따라 식량을 받았다.
이제 이 토대는 이미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비에트 국가는 국가 방위의 필요를 위해 식량 징발제에 따라 농민에게서 모든 잉여 농산물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전의 승리는 식량 징발제 없이는, 군사 공산주의 정책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군사 공산주의 정책은 전쟁과 간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것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농민층은 식량 징발제를 받아들였고 상품이 부족한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지주가 돌아올 위협이 사라지자, 농민은 모든 잉여를 징발하는 데 대한 불만, 식량 징발제 체제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충분한 양의 상품을 공급해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레닌이 지적했듯이, 군사 공산주의 체제 전체가 농민층의 이해와 충돌하게 되었다.
불만의 자연발생적 분출은 노동계급에도 미쳤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전의 주요한 고난을 몸소 짊어졌으며, 백위군과 간섭군의 무리에 맞서, 또 경제 파탄과 기아에 맞서 영웅적이고 헌신적으로 투쟁했다. 가장 우수하고 의식이 높으며 헌신적이고 규율 있는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적 열정의 불길로 타올랐다. 그러나 극심한 경제 파탄은 노동계급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직 가동되던 얼마 안 되는 공장도 작업에 큰 차질을 겪었다. 노동자들은 수공업과 라이터 제조, 보따리장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계급적 기반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노동계급은 흩어져 갔으며, 일부 노동자는 농촌으로 떠나 더는 노동자가 아니게 되어 계급적 성격을 잃었다. 기아와 피로를 배경으로 일부 노동자의 불만이 나타났다.
당 앞에는 나라의 경제 생활 전반에 관해 새로운 정세에 조응하는 당의 새로운 방침을 마련해야 할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당은 경제 건설 문제에 관한 새로운 방침의 마련에 착수했다.
그러나 계급의 적은 잠자코 있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경제 상황을 이용하려 했고, 농민의 불만을 이용하려 했다.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탐보프 현(안토노프 반란)에서 백위군과 사회혁명당원이 조직한 쿨라크 반란이 일어났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 아나키스트, 백위군,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등 온갖 반혁명 분자의 활동이 되살아났다. 적은 소비에트 권력에 맞서는 새로운 투쟁 전술로 넘어갔다. 그는 소비에트의 색깔로 위장하기 시작했고, 이미 실패한 옛 구호 “소비에트를 타도하라”가 아니라 새로운 구호 “소비에트는 좋으나 공산주의자는 안 된다”를 내걸었다.
계급의 적이 쓴 새로운 전술이 뚜렷이 드러난 것이 반혁명적인 크론시타트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제10차 당대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인 1921년 3월에 시작되었다. 반란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사회혁명당원, 멘셰비키, 외국 국가의 대표들과 연결된 백위군이었다.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과 소유를 되살리려는 자신들의 기도를 반란자들은 처음에는 “소비에트”의 간판으로 가리려 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 없는 소비에트”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반혁명은 소부르주아 대중의 불만을 이용하여, 겉으로만 소비에트적인 구호 아래 소비에트 권력을 뒤엎으려 했다.
크론시타트 반란이 일어나기 쉽게 한 것은 두 가지 사정이었다. 군함 수병 구성의 악화와 크론시타트 볼셰비키 조직의 약화였다. 10월 혁명에 참가했던 옛 수병들은 거의 모두 전선으로 나가 붉은 군대 대열에서 영웅적으로 싸웠다. 함대에는 혁명 속에서 단련되지 않은 새 보충병이 들어왔다. 이 보충병은 아직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농민 대중으로, 식량 징발제에 대한 농민층의 불만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시기 크론시타트의 볼셰비키 조직은 잇따른 전선 동원으로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와 백위군이 크론시타트에 숨어들어 그곳을 장악할 수 있었다.
반란자들은 일급 요새와 함대, 막대한 양의 무기와 탄약을 빼앗았다. 국제 반혁명은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적들은 너무 일찍 환호했다. 반란은 소비에트 군대에 의해 신속히 진압되었다. 당은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에 맞서 자신의 가장 훌륭한 아들들, 곧 보로실로프 동지가 이끄는 제10차 당대회 대표자들을 보냈다. 붉은 군대 병사들은 얇은 얼음 위를 걸어 크론시타트로 진격했다. 얼음이 꺼져 많은 이들이 빠져 죽었다. 거의 공략할 수 없는 크론시타트의 요새들을 향해 돌격해야 했다. 혁명에 대한 헌신과 용기,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각오가 승리했다. 크론시타트 요새는 붉은 군대의 돌격으로 함락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은 진압되었다.
2. 당 안에서 벌어진 노동조합 논쟁. 제10차 당대회. 반대파의 패배. 신경제정책(네프)으로의 이행.
당 중앙위원회와 그 레닌주의적 다수파에게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적 경제 건설로 넘어간 뒤에는 전쟁과 봉쇄의 상황이 낳은 군사공산주의의 엄격한 체제를 더 이상 유지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중앙위원회는 식량 징발제가 필요 없어졌으며, 이를 현물세로 바꾸어 농민들이 생산 잉여의 대부분을 자기 뜻대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앙위원회는 이러한 조치가 농업을 되살리고, 공업 발전에 필요한 곡물과 공업 원료 작물의 생산을 늘리며, 나라 안의 상품 유통을 활성화하고, 도시 공급을 개선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에 새로운 경제적 기초를 마련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앙위원회는 또한 공업을 되살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임을 알고 있었지만, 노동계급과 그 노동조합을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공업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을 이 일에 끌어들이려면 경제 파탄이 간섭과 봉쇄만큼이나 인민에게 위험한 적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납득시켜야 하며, 당과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에 대해 군사적 명령이 아니라 — 명령은 전선에서나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 설득으로, 설득의 방법으로 행동한다면 반드시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원 모두가 중앙위원회와 같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트로츠키주의자, 「노동자 반대파」, 「좌파 공산주의자」, 「민주주의적 중립파」 등의 반대파 그룹들은 분열 상태에 있었고, 평화적 경제 건설의 궤도로 넘어가는 데 따르는 난관 앞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당 안에는 옛 멘셰비키, 옛 사회혁명당원, 옛 분트파, 옛 보로트비스트와 러시아 변방 출신의 온갖 반(半)민족주의자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이런저런 반대파 그룹에 가담했다. 이 사람들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고, 경제 발전의 법칙을 알지 못했으며, 당과 레닌주의의 단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반대파 그룹들의 분열과 동요를 부채질할 뿐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군사공산주의의 강경한 체제를 완화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나사를 더 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부는 당과 국가가 국민경제 복구 사업에서 물러나야 하며 이 사업은 전적으로 노동조합의 손에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의 일부 층에 이러한 분열이 있는 이상, 토론을 좋아하는 사람들, 갖가지 반대파 “지도자”들이 나타나 당에 토론을 강요하려 들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과연 그렇게 되었다.
토론은 노동조합의 역할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노동조합 문제는 당시 당 정책의 주요 문제가 아니었다.
토론과 레닌 및 중앙위원회의 레닌주의적 다수파에 반대하는 투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람은 트로츠키였다. 그는 정세를 첨예하게 만들려고 1920년 11월 초 제5차 전러시아 노동조합 협의회의 공산당원 대표 회의에서 “나사 죄기”와 “노동조합 뒤흔들기”라는 의심스러운 구호를 내걸고 나섰다. 트로츠키는 노동조합의 즉각적인 “국가기관화”를 요구했다. 그는 노동자 대중을 설득하는 방법에 반대했다. 그는 군사적 방법을 노동조합에 옮겨 놓자는 편이었다. 트로츠키는 노동조합 안에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데 반대했고, 노동조합 기관의 선거제에도 반대했다.
노동자 조직의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설득의 방법 대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골적인 강제, 노골적인 명령의 방법을 내놓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조합 사업의 지도부에 들어간 곳마다 자신들의 정책으로 노동조합에 갈등과 분열과 붕괴를 끌어들였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으로 비당원 노동자 대중을 당에 맞서게 했고 노동계급을 분열시켰다.
노동조합에 관한 토론은 실제로는 노동조합 문제보다 훨씬 더 넓은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후에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의(1925년 1월 17일)에서 지적했듯이, 실제로 논쟁은 “군사공산주의에 맞서 일어나던 농민층에 대한 태도, 비당원 노동자 대중에 대한 태도, 대체로 내전이 이미 끝나 가던 시기에 당이 대중에게 접근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결의에 나타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1부, 651쪽).
트로츠키에 뒤이어 다른 반당 그룹들도 나섰다. 「노동자 반대파」(실랴프니코프, 메드베데프, 콜론타이 등), 「민주중앙집권파」(사프로노프, 드로브니스, 보구슬랍스키, 오신스키, 브. 스미르노프 등), 「좌파 공산주의자」(부하린, 프레오브라젠스키)가 그들이다.
「노동자 반대파」는 모든 국민경제의 관리를 “전러시아 생산자 대회”에 넘기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들은 당의 역할을 무로 돌리고 경제 건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의의를 부정했다.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조합을 소비에트 국가 및 공산당과 맞세웠다. 이들은 노동계급 조직의 최고 형태를 당이 아니라 노동조합이라고 보았다. 「노동자 반대파」는 사실상 아나키·생디칼리스트적 반당 그룹이었다.
「민주중앙집권파」(민주중앙집권파 구성원)는 분파와 그룹의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다. 민주중앙집권파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와 노동조합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훼손하려 애썼다. 레닌은 민주중앙집권파를 “누구보다도 요란하게 떠드는 자들”의 분파라고 불렀고, 그 강령을 사회혁명당·멘셰비키적 강령이라고 불렀다.
트로츠키가 레닌과 당에 맞서 벌인 투쟁을 부하린이 도왔다. 부하린은 프레오브라젠스키, 세레브랴코프, 소콜니코프와 함께 “완충” 그룹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가장 악질적인 분파주의자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옹호하고 감싸 주었다. 레닌은 부하린의 행동을 “사상적 붕괴의 극치”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린파는 레닌에 맞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공공연히 손을 잡았다.
레닌과 레닌주의자들은 반당 그룹들의 주력인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주된 타격을 가했다. 그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군사 조직과 뒤섞고 있다고 폭로하면서, 군사 조직의 방법을 노동조합에 옮겨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레닌과 레닌주의자들은 반대파 그룹들의 강령에 맞서 자신들의 강령을 작성했다. 이 강령에서는 노동조합이 관리의 학교, 경영의 학교, 공산주의의 학교라고 지적했다. 노동조합은 모든 사업을 설득의 방법 위에 세워야 한다. 이 조건이 갖춰질 때에만 노동조합은 모든 노동자를 경제 파탄과의 투쟁에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사회주의 건설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반대파 그룹들과의 투쟁에서 당 조직들은 레닌 주위로 단결했다. 특히 모스크바에서 투쟁은 매우 긴박한 성격을 띠었다. 반대파는 수도 조직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이곳에 주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볼셰비키들은 분파주의자들의 이러한 음모에 단호한 반격을 가했다. 우크라이나 당 조직에서도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당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였던 몰로토프 동지의 지도 아래 우크라이나의 볼셰비키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실랴프니코프파를 격파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레닌의 당을 떠받치는 충실한 버팀목으로 남았다. 바쿠에서는 오르조니키제 동지의 지도 아래 반대파 격파가 조직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엘. 카가노비치 동지가 반당 그룹들과의 투쟁을 지도했다.
모든 주요 지방 당 조직들이 레닌의 강령을 지지했다.
1921년 3월 8일 제10차 당대회가 개막했다. 대회에는 당원 732,521명을 대표하는 결정권 대의원 694명이 참석했다. 발언권만 있는 대의원은 296명이었다.
대회는 노동조합에 관한 논쟁을 총괄하고 압도적 다수의 표로 레닌의 강령을 승인했다.
대회를 개막하면서 레닌은 이 논쟁이 허용될 수 없는 사치였다고 선언했다. 그는 적들이 공산당 내부의 투쟁과 분열에 승부를 걸고 있다고 지적했다.
분파 그룹의 존재가 볼셰비키당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얼마나 큰 위험이 되는가를 고려하여, 제10차 대회는 당의 단결 문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문제에 관한 보고는 레닌이 했다. 대회는 모든 반대파 그룹을 규탄하고, 그들이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계급의 적들을 돕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회는 모든 분파 그룹을 즉시 해산하라고 지시하고, 모든 조직이 어떠한 분파적 행동도 허용되지 않도록 엄격히 감시할 것을 맡겼으며, 대회 결정을 이행하지 않으면 무조건 즉시 당에서 제명된다고 규정했다. 대회는 중앙위원회 위원이 규율을 위반할 경우, 그리고 분파주의가 되살아나거나 허용될 경우, 중앙위원회와 당에서 제명하는 데 이르기까지 모든 당 차원의 징계 조치를 취할 권한을 중앙위원회에 주었다.
이 모든 결정은 레닌이 제안하고 대회가 채택한 특별 결의 「당의 통일에 대하여」에 기록되었다.
이 결의에서 대회는 모든 당원에게, 제10차 대회 시기의 여러 사정으로 나라의 소(小)부르주아 주민층 속에서 동요가 커진 지금과 같은 때에는 당 대열의 통일과 결속,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의지 통일이 특히 필요하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했다.
결의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런데 노동조합에 관한 전당 토론 이전에도 당 안에서는 분파주의의 몇몇 징후, 즉 특별한 강령을 가진 그룹이 생겨나 어느 정도 폐쇄적이 되고 자기 그룹의 규율을 만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는 어떤 분파주의든 해롭고 용납될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분파주의는 실제로 필연적으로 단합된 사업을 약화시키고, 집권당에 달라붙은 적들이 당의 분열을 더 깊게 하고 이를 반혁명의 목적에 이용하려는 시도를 거듭 강화하게 만든다.”
대회는 이 결의에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적들이 엄격하게 견지된 공산주의 노선에서 벗어난 온갖 일탈을 이용한다는 것은 크론시타트 반란의 예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때 전 세계의 부르주아 반혁명과 백위군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소비에트 체제의 구호까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곧바로 드러냈고, 사회혁명당원과 부르주아 반혁명 일반은 크론시타트에서 러시아의 소비에트 정부에 맞서 이른바 소비에트 권력의 이름으로 봉기하자는 구호를 이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백위군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보루를 약화시키고 무너뜨리기만 할 수 있다면 공산주의자로, 심지어 공산주의자보다 ‘더 좌익’으로까지 변신하려 하고 또 변신할 줄 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크론시타트 반란 전날 페트로그라드에서 나온 멘셰비키의 전단도 마찬가지로, 멘셰비키가 러시아 공산당 안의 의견 차이를 이용하여, 말로는 반란에 반대하고 약간의 수정만 요구할 뿐인 소비에트 권력의 지지자인 체하면서 실제로는 크론시타트 반란자들과 사회혁명당원, 백위군을 부추기고 지지했음을 보여준다.”
결의는 당의 선전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성공을 위한 기본 조건인 당의 통일과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의지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분파주의의 해악과 위험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대회 결의에서는 당의 선전이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이 쓰는 최신 전술 수법의 특징을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이 적들은,” 결의는 이렇게 지적했다. “공공연한 백위군 깃발 아래에서는 반혁명이 가망 없음을 확인하고, 지금은 러시아 공산당 안의 의견 차이를 이용하여 겉보기에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는 데 가장 가까운 정치 집단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식으로든 어떻게든 반혁명을 전진시키려고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다”(『결의로 본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1부, 373~374쪽).
결의는 또한 당의 선전이 “이전 혁명들의 경험도 밝혀야 한다. 그때 반혁명은 혁명적 독재를 흔들어 무너뜨리려고 극단적 혁명 정당에 가장 가까운 소부르주아 집단들을 지원했고, 그렇게 하여 반혁명과 자본가·지주의 완전한 최종 승리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지적했다.
「당의 통일」에 관한 결의에는 「우리 당 내의 생디칼리스트 및 아나키스트 경향에 관하여」라는 또 하나의 결의가 긴밀하게 이어졌는데, 이 결의 역시 레닌이 제안하고 당대회가 채택한 것이었다. 이 결의에서 제10차 당대회는 이른바 「노동자 반대파」를 규탄했다. 당대회는 아나키즘적·생디칼리스트적 경향의 사상을 선전하는 것은 공산당 당원이 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당에 이 경향과 단호히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제10차 당대회는 식량 징발제에서 현물세로 이행하는 것, 곧 새로운 경제정책(네프)으로 이행하는 것에 관한 매우 중요한 결정을 채택했다.
전시 공산주의에서 네프로 이렇게 방향을 바꾼 데에는 레닌 정책의 온갖 지혜와 선견지명이 나타나 있었다.
당대회의 결정은 식량 징발제를 현물세로 바꾸는 것을 다루었다. 현물 식량세는 식량 징발제보다 적었다. 세액은 봄 파종 전에 공표해야 했다. 세금 납부 기한은 정확히 정해졌다. 세금을 내고 남는 것은 모두 농민이 완전히 마음대로 처분하게 되었으며, 농민에게는 이 잉여물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레닌은 보고에서, 거래의 자유가 처음에는 나라 안에서 자본주의를 얼마간 되살아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적 거래를 허용하고 사적 기업가들이 소규모 기업을 열도록 허가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레닌은 상품 유통에 어느 정도 자유를 주면 농민에게 경제적 이해관심이 생겨 노동생산성이 높아지고 농업이 빠르게 부흥하리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국영 공업이 복구되고 사적 자본이 밀려날 것이며, 힘과 수단을 축적하면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인 강력한 공업을 건설하고, 그런 다음 결정적인 공세로 넘어가 나라 안의 자본주의 잔재를 없앨 수 있다고 보았다.
전시 공산주의는 도시와 농촌에 있는 자본주의적 요소의 요새를 강습, 곧 정면 공격으로 점령하려는 시도였다. 이 공세에서 당은 자기 기지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을 무릅쓰고 너무 멀리 앞서 나갔다. 이제 레닌은 조금 물러나서 한동안 자기 후방에 더 가까이 후퇴하고, 강습에서 요새를 더 오래 포위하는 쪽으로 넘어가서, 힘을 축적한 뒤 다시 공세를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반대파들은 네프가 후퇴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그들에게 유리했는데, 그들이 자본주의를 복구하는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프에 대한 매우 해로운 반(反)레닌적 해석이었다. 실제로 네프를 도입한 지 겨우 1년 뒤인 제11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후퇴가 끝났다고 선언하고 “사적 경영 자본에 대한 공세 준비”라는 구호를 내놓았다(레닌, 제27권, 213쪽).
반대파는 형편없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볼셰비키 정책 문제에는 완전한 문외한이었으므로, 네프의 본질도, 네프 초기에 취한 후퇴의 성격도 이해하지 못했다. 네프의 본질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했다. 후퇴의 성격을 말하자면, 후퇴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당이나 군대가 패배했기 때문에 후퇴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당이나 군대는 자신을 보존하고 새로운 전투를 위해 간부를 보존하려고 후퇴한다. 레닌은 네프를 도입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후퇴를 제안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당은 패배하지도 격파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내전 때 간섭군과 백위군을 스스로 격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한 당이나 군대가 공세를 펴다가 후방 기지를 확보하지 않은 채 너무 멀리 앞서 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심각한 위험을 낳는다. 그런 경우 경험 많은 당이나 군대는 보통 자신의 기지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고 조금 뒤로, 후방 가까이 물러나서 후방 기지와 더욱 단단히 연결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뒤에 다시 더 확신을 가지고 성공을 보장받으며 공세에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레닌이 네프에서 수행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일시적 후퇴였다. 레닌은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네프 도입의 원인을 보고하며 “우리는 경제 공세에서 너무 멀리 앞으로 나아갔고, 충분한 기지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직접 말했으며, 따라서 확보된 후방으로 일시적으로 후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파의 불행은, 그들이 무지 탓에 네프 때 후퇴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생애가 끝날 때까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네프에 관한 제10차 당대회의 결정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견고한 경제적 동맹을 보장했다.
이 기본 과제에 이바지한 것이 당대회의 또 다른 결정인 민족 문제에 관한 결정이었다. 민족 문제에 관한 보고는 스탈린 동지가 했다. 스탈린 동지는 우리가 민족 압박을 없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과제는 과거의 무거운 유산, 즉 이전에 억압받던 민족들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후진성을 없애는 데 있다. 이 점에서 그들이 중부 러시아를 따라잡도록 도와야 한다.
스탈린 동지는 이어서 민족 문제에서 두 가지 반당적 편향, 즉 대국주의적(대러시아적) 쇼비니즘과 지방 민족주의를 지적했다. 당대회는 두 편향을 모두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해롭고 위험한 것으로 규탄했다. 아울러 당대회는 주된 위험인 대국주의, 즉 차르제 아래에서 대러시아 쇼비니스트들이 비러시아 민족들에게 보인 그러한 태도의 잔재와 유물에 주된 타격을 겨냥했다.
3. 네프의 첫 결과. 제11차 당대회. 소련의 성립. 레닌의 병. 레닌의 협동조합 계획. 제12차 당대회.
네프의 실시는 당 내 불안정한 분자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저항은 두 방향에서 나왔다. 한편에서는 로미나제, 샤츠킨 같은 「좌파」 떠버리들, 정치적 기형아들이 나서서, 네프란 10월 혁명의 성과를 포기하는 것이며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소비에트 권력의 파멸이라고 「증명」했다. 이 사람들은 정치에 무지하고 경제 발전 법칙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당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황에 빠져 주위에 패배주의적 분위기를 퍼뜨렸다. 다른 한편에서는 트로츠키, 라데크, 지노비예프, 소콜니코프, 카메네프, 실랴프니코프, 부하린, 리코프 같은 노골적인 투항주의자들이 나서서,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적 발전 가능성을 믿지 않고 자본주의의 「위력」 앞에 머리를 숙이며, 소비에트 나라에서 자본주의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애쓰면서 국내외의 사적 자본에 대한 대폭적인 양보를 요구했다. 또 인민 경제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쥔 여러 지휘 고지를 양허나 사적 자본이 참여하는 혼합 주식회사의 형태로 사적 자본에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이쪽도 저쪽도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은 이쪽도 저쪽도 폭로하고 고립시켰다. 당은 공황에 빠진 자들과 투항주의자들에게 단호한 반격을 가했다.
이러한 당 정책에 대한 저항은 불안정한 분자들로부터 당을 정화할 필요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중앙위원회는 1921년에 당 정화를 조직하여 당을 강화하는 큰 사업을 수행했다. 정화는 비당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공개 집회에서 진행되었다. 레닌은 당을 철저히 정화하라고 권고했다. “…사기꾼들로부터, 관료화된 자들로부터, 부정직한 자들로부터, 흔들리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그리고 ‘겉모습’만 다시 칠했을 뿐 속으로는 여전히 멘셰비키인 멘셰비키들로부터” (레닌, 제27권, 13쪽).
정화의 결과 당에서 모두 17만 명가량, 즉 당 전체 인원의 약 25퍼센트가 제명되었다.
정화는 당을 크게 강화했고, 당의 사회적 구성을 개선했으며, 당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높이고 당의 권위를 높였다. 당의 단결과 규율은 한층 강화되었다.
신경제정책 첫해는 곧 그 정당성을 보여 주었다. 네프로의 이행은 새로운 토대 위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크게 강화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힘과 견고함은 더욱 커졌다. 쿨라크의 비적 행위는 거의 완전히 근절되었다. 중농들은 식량 징발제가 폐지된 뒤 소비에트 권력이 쿨라크 무리와 싸우는 것을 도왔다. 소비에트 권력은 인민 경제의 모든 지휘 거점, 즉 대공업, 운수, 은행, 토지, 국내 무역, 대외 무역을 손에 쥐고 있었다. 당은 경제 전선에서 전환을 이룩했다. 농업은 머지않아 전진하기 시작했다. 공업과 운수는 첫 성과를 거두었다. 아직은 매우 느리지만 확실한 경제 상승이 시작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당이 올바른 길에 서 있음을 느끼고 보았다.
1922년 3월 제11차 당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53만 2천 명의 당원을 대표하는 결정권 대의원 522명이 참석했는데, 이는 이전 대회보다 적은 수였다. 발언권만 있는 대의원은 165명이었다. 당원 수의 감소는 시작된 당 대열의 정화로 설명된다.
대회에서 당은 신경제정책 첫해의 결산을 했다. 이 결산 덕분에 레닌은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었다.
“우리는 1년 동안 후퇴했다. 이제 우리는 당의 이름으로 말해야 한다. — 충분하다! 후퇴로 추구했던 목적은 달성되었다. 이 시기는 끝나 가고 있거나 끝났다. 이제는 다른 목적, 즉 역량의 재편성이 제기된다”(레닌, 제27권, 238쪽).
레닌은 네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필사적인 사생결단의 투쟁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누가 누구를 이기는가” — 문제는 이렇게 제기된다. 승리하려면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상품 유통을 온 힘을 다해 발전시킴으로써 노동계급과 농민층 사이, 사회주의 공업과 농민 경제 사이의 결합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영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문화적으로 장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시기에 상업은 당 앞에 놓인 과제의 사슬에서 기본 고리였다. 이 과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상품 유통을 전개할 수 없었고, 노동자와 농민의 경제적 동맹을 강화할 수 없었으며, 농업을 끌어올리고 공업을 파탄에서 건져 낼 수 없었다.
그 당시 소비에트 상업은 아직 매우 약했다. 상업 기구는 매우 약했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아직 장사 경험이 없었으며, 적인 네프만을 아직 연구하지 못했고 그와 싸우는 법도 아직 배우지 못했다. 민간 상인인 네프만들은 소비에트 상업의 약점을 이용하여 직물과 그 밖의 잘 팔리는 상품의 상업을 자기 손에 장악했다. 국가 상업과 협동조합 상업을 조직하는 문제는 막대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제11차 당대회 후 경제 사업은 새로운 힘으로 활기를 띠었다. 나라를 덮친 흉작의 후과는 성공적으로 극복되었다. 농민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철도는 더 잘 돌아가게 되었다. 새로 가동을 시작한 공장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1922년 10월, 소비에트 공화국은 큰 승리를 축하했다. 붉은 군대와 극동의 빨치산에 의해 일본 간섭군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가 해방된 것이다. 이곳은 간섭군의 손에 남아 있던 소비에트 땅의 마지막 지역이었다.
이제 소비에트 나라의 전 영토에서 간섭군이 쓸려 나갔고, 사회주의 건설과 국방의 과제가 소비에트 나라 인민들의 동맹을 더욱 강화할 것을 요구하게 되자, 소비에트 공화국들을 단일한 국가 연방으로 더 긴밀히 통합하는 문제가 당면 과제로 제기되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모든 인민의 역량을 통합해야 했다. 튼튼한 국방을 조직해야 했다. 우리 조국의 모든 민족의 전면적 발전을 보장해야 했다. 이를 위해 소비에트 나라의 모든 인민을 더욱 가깝게 결합시켜야 했다.
1922년 12월,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레닌과 스탈린의 제안에 따라 소비에트 인민들의 자발적 국가 통합체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창설되었다. 처음에 소련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연방), 자캅카지예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 있었다. 얼마 후 중앙아시아에서 세 개의 독자적인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즉 우즈베크, 투르크멘, 타지크 공화국이 조직되었다. 이제 이 모든 공화국은 자발성과 평등의 원칙에 기초하여, 각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자유롭게 탈퇴할 권리를 보유한 채, 단일한 소비에트 국가 연방, 즉 소련으로 통합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창설은 소비에트 권력의 강화를, 그리고 민족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당의 레닌-스탈린 정책이 거둔 큰 승리를 의미했다.
1922년 11월 레닌은 모스크바 소비에트 전원회의에서 연설했다. 소비에트 권력 존재 5주년을 결산하면서 레닌은 “네프의 러시아로부터 사회주의 러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확고한 확신을 표명했다. 이것이 그가 나라 앞에서 한 마지막 연설이었다. 1922년 가을, 당에 큰 불행이 닥쳤다. 레닌이 중병에 걸린 것이다. 당 전체와 모든 근로 대중은 레닌의 병을 자신의 큰 슬픔으로 받아들였다. 모두가 사랑하는 레닌의 생명을 걱정하며 불안 속에 지냈다. 그러나 레닌은 병중에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중병을 앓으면서도 레닌은 매우 중요한 논문을 여러 편 썼다. 이 마지막 논문들에서 그는 지금까지 해온 사업을 결산하고, 농민층을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나라에 사회주의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서 레닌은 농민층을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참여시키기 위한 자신의 협동조합 계획을 제시했다.
레닌은 협동조합 일반에서, 특히 농업 협동조합에서, 수백만 농민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길, 곧 소규모 개인 경영에서 대규모 공동 생산 결합체인 콜호스로 넘어가는 길을 보았다. 레닌은 우리나라 농업의 발전이 협동조합을 통해 농민을 사회주의 건설에 끌어들이는 길, 농업에 집단주의 원칙을 점차 도입하는 길, 곧 처음에는 판매 분야에서, 그다음에는 농산물 생산 분야에서 도입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동맹이 있고, 농민층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가 보장되며, 사회주의 공업이 존재하는 조건에서는, 올바르게 조직되어 수백만 농민층을 포괄하는 생산 협동조합이야말로 우리나라에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1923년 4월 제12차 당대회가 열렸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뒤 레닌이 참석할 수 없었던 첫 당대회였다. 당대회에는 당원 38만 6천 명을 대표하는 결정권 대의원 408명이 참석했다. 즉 이전 당대회보다 적었다. 여기에는 계속된 당 대열의 정화로 상당한 비율의 당원이 제명된 결과가 나타나 있었다.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은 417명이었다.
제12차 당대회는 레닌이 마지막 논문과 편지에서 준 모든 지침을 결정에 반영했다.
당대회는 네프를 사회주의 입장으로부터의 후퇴로,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의 양도로 이해하는 모든 사람,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자고 제안하는 모든 사람에게 단호한 반격을 가했다. 그러한 제안은 당대회에서 트로츠키 지지자들과 라데크, 크라신이 내놓았다. 그들은 외국 자본가들의 자비에 몸을 맡기고, 소비에트 국가에 꼭 필요한 공업 부문을 그들에게 조차(租借)로 내주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10월 혁명이 폐기한 차르 정부의 채무를 갚자고 제안했다. 당은 이러한 투항적 제안을 배신적인 것으로 낙인찍었다. 당은 조차 정책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으나, 소비에트 국가에 유리한 부문에서 유리한 규모로만 이용하고자 했다.
부하린과 소콜니코프는 대회에 앞서 대외무역 독점을 폐지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 역시 네프를 자본주의에 대한 자기 입장의 양도로 이해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레닌은 그때 부하린을 투기꾼, 네프만, 쿨라크의 옹호자라고 낙인찍었다. 제12차 당대회는 대외무역 독점의 불가침성을 침해하려는 기도를 단호히 물리쳤다.
대회는 또한 농민층에 대해 파멸적인 정책을 당에 강요하려는 트로츠키의 시도도 물리쳤다. 대회는 나라에서 소농민경제가 우세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대회는 중공업을 포함한 공업의 발전이 농민 대중의 이익에 어긋나서는 안 되며, 그들과의 연계 속에서 전체 근로 대중의 이익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결정은 농민경제를 착취하여 공업을 건설하자고 제안한 트로츠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동맹 정책을 실제로는 인정하지 않은 트로츠키를 겨냥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동시에, 이윤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푸틸로프 공장, 브랸스크 공장 등 국방상 의의가 있는 대규모 공장들을 폐쇄하자고 제안했다. 대회는 분노하여 트로츠키의 제안을 물리쳤다.
레닌이 대회에 서면으로 보낸 제안에 따라, 제12차 당대회는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동자농민감찰원의 통합 기관을 창설했다. 이 기관에는 우리 당의 통일 수호, 당 규율과 국가 규율의 강화, 소비에트 국가 기구의 전면적 개선이라는 중대한 과제가 부여되었다.
대회는 민족 문제에 진지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문제에 관한 보고자는 스탈린 동지였다. 스탈린 동지는 민족 문제에 관한 우리 정책의 국제적 의의를 강조했다. 서방과 동방의 억압받는 민족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민족 문제 해결과 민족적 억압 청산의 본보기로 보고 있다. 스탈린 동지는 소비에트 연방 민족들 사이의 경제적·문화적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정력적인 사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체 당에 민족 문제에서의 편향, 곧 대러시아 쇼비니즘과 지방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맞서 단호히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대회에서 민족 편향 분자들과 소수 민족에 대한 그들의 대국주의적 정책이 폭로되었다. 그때 당에 맞서 그루지야의 민족 편향 분자 므디바니 등이 나섰다. 민족 편향 분자들은 자캅카지예 연방의 창설에 반대했고, 자캅카지예 민족들의 우호를 강화하는 데에도 반대했다. 편향 분자들은 그루지야 내 다른 민족들에 대해 진짜 대국주의적 쇼비니스트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트빌리시에서 그루지야인이 아닌 모든 사람, 특히 아르메니아인을 추방했고, 그루지야 여성이 그루지야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면 그루지야 시민권을 잃는다는 법을 공포했다. 그루지야 민족 편향 분자들을 트로츠키, 라데크, 부하린, 스크리프니크, 라콥스키가 지지했다.
대회 직후 민족 문제에 관한 민족 공화국 활동가들의 특별 협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협의회에서 술탄-갈리예프 등의 타타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집단과 파이줄라 호자예프 등의 우즈베크 민족 편향 분자 집단이 폭로되었다.
제12차 당대회는 2년간의 신경제정책의 결과를 총괄했다. 이 총괄은 최종 승리에 대한 용기와 확신을 북돋아 주었다.
“우리 당은 결속을 유지했고 단결했으며, 가장 큰 전환을 견뎌냈고, 활짝 펼친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라고 스탈린 동지는 대회에서 선언했다.
4. 국민경제 복구의 어려움과의 투쟁. 레닌의 병과 관련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 강화. 당내 새로운 논쟁.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패배. 레닌의 죽음. 레닌의 호소. 제13차 당대회.
인민경제 복구를 위한 투쟁의 첫 몇 해는 상당한 성과를 가져왔다. 1924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분야에서 상승이 나타났다. 파종 면적은 1921년 이래 크게 늘어났으며, 농민 경제는 갈수록 튼튼해졌다. 사회주의 공업은 성장하고 발전했다. 노동계급의 수도 크게 늘었다. 임금이 올랐다. 노동자와 농민은 1920~1921년보다 살기가 한결 수월하고 나아졌다.
그러나 아직 청산되지 않은 경제 파탄의 결과는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 공업은 아직 전쟁 전 수준에 미치지 못했고, 그 성장은 나라의 수요 증가에 크게 뒤처졌다. 1923년 말까지 약 100만 명의 실업자가 있었다. 인민경제의 더딘 성장으로는 실업을 해소할 수 없었다. 네프만과 우리 상업 기관 안의 네프만적 분자들이 나라에 강요한 도시 공산품의 지나치게 높은 가격 때문에 상업은 순조롭지 못하게 발전했다. 그 때문에 소비에트 루블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가치가 떨어졌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 개선을 가로막았다.
1923년 가을에 이르러 우리 공업 기관과 상업 기관이 소비에트의 가격 정책을 어긴 탓에 경제적 어려움이 다소 심해졌다. 공산품 가격과 농산물 가격 사이에 뚜렷한 격차가 생겼다. 곡물 가격은 낮고 공산품 가격은 터무니없이 높았다. 공업에서는 간접비가 높았고, 이것이 상품 값을 올렸다. 농민층이 곡물을 팔아 얻은 돈은 빠르게 가치가 떨어졌다. 게다가 당시 최고국민경제회의에 앉아 있던 트로츠키주의자 퍄타코프는 경제 일꾼들에게 범죄적인 지령을 내렸다. 공업을 발전시킨다는 구실로 공산품을 팔아 되도록 많은 이윤을 뽑아내고 가격을 한없이 올리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 네프만적 구호는 공업 생산의 토대를 좁히고 공업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농민층은 도시 상품을 사는 것이 불리해져 구매를 그만두었다. 판매 위기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공업에 영향을 미쳤다. 임금 지급에 어려움이 생겼다. 이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공장에서는 가장 뒤떨어진 노동자들이 일을 내던지기도 했다.
당 중앙위원회는 이 모든 어려움과 결함을 없앨 길을 정했다. 판매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일반 소비품의 가격이 인하되었다.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견고하고 안정된 화폐, 즉 체르보네츠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노동자 임금 지급 문제도 정돈되었다. 소비에트 기관과 협동조합 기관을 통한 상업을 확대하고, 온갖 사적 상인과 투기꾼을 상업에서 몰아내기 위한 조치들이 마련되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에 착수해야 했다. 당에 충실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레닌이 중병으로 전열에서 이탈한 틈을 이용하여 당과 당 지도부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당을 분쇄하고 그 지도부를 뒤엎을 유리한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당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이용했다. 1923년 가을 독일과 불가리아에서 혁명이 패배한 것도, 국내의 경제적 곤란도, 레닌의 병도 이용했다. 바로 소비에트 국가에 어려운 이 시기, 당의 영도자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트로츠키는 볼셰비키당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당내의 모든 반(反)레닌적 분자를 자기 주위에 모아, 당에 반대하고 당 지도부에 반대하고 당 정책에 반대하는 반대파 강령을 조작해냈다. 이 강령은 46인 반대파 성명이라고 불렸다. 레닌의 당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모든 반대파 집단, 즉 트로츠키주의자, 민주중앙집권파, 「좌파 공산주의자」와 「노동자 반대파」의 잔당이 결합했다. 그들은 성명에서 심각한 경제 위기와 소비에트 정권의 멸망을 예언했으며, 이 상황에서 벗어날 유일한 출구로서 분파와 그룹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는 레닌의 제안에 따라 제10차 당대회에서 금지된 분파를 부활시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공업이나 농업의 개선, 국내 상품 유통의 개선, 근로 대중의 처지 개선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하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레닌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당내에 분파를 부활시키고 당의 토대를, 당 중앙위원회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46인 강령에 뒤이어 트로츠키의 편지가 나왔는데, 그는 이 편지에서 당 간부들에게 먼지를 끼얹었으며 당에 대한 일련의 새로운 중상적 비난을 내놓았다. 이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당이 그에게서 처음 듣는 것이 아닌 낡은 멘셰비키식 되풀이를 늘어놓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당 기구를 공격했다. 그들은 당이 튼튼한 당 기구 없이는 살 수도 일할 수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반대파는 이 기구를 뒤흔들고 파괴하려 했으며, 당원들을 당 기구에 대립시키고 청년들을 당의 노간부에 대립시키려 했다. 트로츠키는 편지에서 학생 청년들, 당과 트로츠키주의의 투쟁 역사를 알지 못하는 젊은 당원들에게 승부를 걸었다. 학생 청년들을 얻기 위해 트로츠키는 그들을 「당의 가장 믿을 만한 기압계」라고 부르며 아첨하는 한편, 낡은 레닌 근위대가 변질했다고 선언했다. 그는 변질한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을 곁눈질하며, 낡은 볼셰비키 근위대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비열하게 암시했다. 트로츠키는 당이 변질한다고 외쳐서 자신의 변질과 반당적 흉계를 가리려 했다.
반대파의 두 문서, 즉 46인 강령과 트로츠키의 편지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지구와 세포에 발송되어 당원들의 토의에 부쳐졌다.
당은 토론에 불려 나왔다.
이렇게 해서 제10차 당대회 전 노동조합 토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당 전체의 토론을 당에 강요했다.
당은 더 중요한 경제 문제들로 바빴지만 도전을 받아들여 토론을 개시했다.
토론은 당 전체를 휩쓸었다. 투쟁은 격렬했다. 특히 모스크바에서 투쟁이 첨예하게 벌어졌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수도 조직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토론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체면만 깎아내렸을 뿐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모스크바에서도, 소련 전역에서도 완전히 참패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표를 던진 것은 소수의 대학 세포와 관청 세포뿐이었다.
1924년 1월 제13차 당협의회가 열렸다. 협의회는 토론의 결과를 총괄한 스탈린 동지의 보고를 들었다. 협의회는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를 규탄하고, 이들이 당이 맞서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소부르주아적 편향이라고 선언했다. 협의회의 결정은 뒤에 제13차 당대회와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국제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볼셰비키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파괴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24년 가을 트로츠키는 「10월의 교훈」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바꿔치기하려고 시도했다. 이 글은 우리 당과 당의 지도자 레닌에 대한 철두철미한 중상이었다. 이 중상적인 소책자에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권력의 모든 적이 달라붙었다. 당은 볼셰비즘의 영웅적 역사에 대한 트로츠키의 이 중상을 분노로 맞았다. 스탈린 동지는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바꿔치기하려는 트로츠키의 시도를 폭로했다. 스탈린 동지는 여러 연설에서 “당의 임무는 트로츠키주의를 하나의 사상적 조류로서 매장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트로츠키주의를 사상적으로 격파하고 레닌주의를 옹호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 것은 1924년에 나온 스탈린 동지의 이론적 저작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였다. 이 소책자는 레닌주의를 훌륭하게 서술하고 이론적으로 탄탄하게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이 책은 그때에도, 지금도 전 세계 볼셰비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이라는 예리한 무기를 쥐여 주었다.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스탈린 동지는 당을 중앙위원회 주위로 결집시키고,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다음 투쟁에 당을 동원했다. 스탈린 동지는 트로츠키주의의 사상적 격파가 사회주의를 향한 승리의 전진을 계속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임을 입증해 보였다.
트로츠키주의와 투쟁한 이 시기를 총괄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트로츠키주의를 격파하지 않고서는 네프 조건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으며, 오늘의 러시아를 사회주의 러시아로 바꿔 놓을 수 없다.”
그러나 당의 레닌적 정책이 거둔 성과는 당과 노동계급을 덮친 막대한 불행으로 빛을 잃었다. 1924년 1월 21일 모스크바 근교 고르키에서 우리의 지도자이자 스승이며 볼셰비키당의 창건자인 레닌이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 노동계급은 레닌의 사망 소식을 더없이 비통한 상실로 받아들였다. 레닌의 장례일에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작업을 5분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철도가 멈추고, 공장들의 작업이 멈추었다. 전 세계 근로 대중은 더없이 깊은 슬픔 속에서 자신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이며 가장 좋은 벗이자 옹호자인 레닌을 무덤까지 배웅했다.
레닌의 죽음에 소련 노동계급은 레닌의 당을 중심으로 더욱 굳게 뭉쳐 응답했다. 이 애도의 나날에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저마다 레닌의 유훈을 실현하는 공산당에 대한 자기 태도를 깊이 생각했다. 당 중앙위원회에는 비당원 노동자 수천 명이 입당을 청원하는 신청서를 보내왔다. 중앙위원회는 선진 노동자들의 이 움직임에 호응하여 선진 노동자의 대량 입당을 선언했다. 이것이 레닌 입당 호소였다. 당에는 새로 수만 명의 노동자가 들어왔다. 당의 일을 위해, 레닌의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된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때 24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짧은 기간에 볼셰비키당의 대열에 가입했다. 노동계급의 선진 부분, 가장 의식 있고 혁명적이며 가장 용감하고 규율 있는 부분이 당에 들어왔다. 이것이 레닌 입당이었다.
레닌의 죽음은 우리 당이 노동 대중과 얼마나 가까운지, 노동자들이 레닌의 당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여주었다.
레닌을 애도하던 그 나날, 제2차 소련 소비에트 대회에서 스탈린 동지는 당의 이름으로 위대한 맹세를 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특별한 기질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전략가의 군대, 레닌 동지의 군대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이 군대에 속하는 영예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레닌 동지가 창설자이며 지도자인 당의 당원이라는 칭호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레닌 동지는 우리를 떠나면서 당원이라는 위대한 칭호를 높이 들고 순결하게 지키라고 우리에게 유언했다. 레닌 동지여, 우리는 그대의 이 유언을 영예롭게 이행할 것을 맹세한다!… 레닌 동지는 우리를 떠나면서 우리 당의 단결을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우리에게 유언했다. 레닌 동지여, 우리는 그대의 이 유언도 영예롭게 이행할 것을 맹세한다!… 레닌 동지는 우리를 떠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지키고 강화하라고 우리에게 유언했다. 레닌 동지여, 우리는 그대의 이 유언도 영예롭게 이행하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레닌 동지는 우리를 떠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온 힘을 다해 강화하라고 우리에게 유언했다. 레닌 동지여, 우리는 그대의 이 유언도 영예롭게 이행할 것을 맹세한다!… 레닌 동지는 우리 나라 민족들의 자발적 연합이 필요하며, 공화국 연방의 테두리 안에서 민족들이 형제처럼 협력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레닌 동지는 우리를 떠나면서 공화국 연방을 강화하고 확대하라고 우리에게 유언했다. 레닌 동지여, 우리는 그대의 이 유언도 영예롭게 이행할 것을 맹세한다!… 레닌은 붉은 군대를 강화하고 그 상태를 개선하는 일이 우리 당의 가장 중요한 과업의 하나라고 여러 차례 우리에게 지적했다… 동지들, 우리의 붉은 군대, 우리의 붉은 함대를 강화하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하자… 레닌 동지는 우리를 떠나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원칙에 충실하라고 우리에게 유언했다. 레닌 동지여, 우리는 전 세계 근로 대중의 동맹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이것은 대대로 살아 있을 지도자 레닌에게 바치는 볼셰비키당의 맹세였다.
1924년 5월에 제13차 당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당원 735,881명을 대표하는 결정권 대의원 748명이 참석했다. 앞선 당대회에 비해 당원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레닌 입당으로 새 당원 약 25만 명이 당의 대열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은 416명이었다.
대회는 트로츠키주의자 반대파의 강령을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소부르주아적 편향이자 레닌주의에 대한 수정이라고 규정하여 만장일치로 규탄하고, 제13차 당협의회의 결의 「당 건설에 대하여」와 「토론 총결에 대하여」를 재확인했다.
도시와 농촌의 결합을 강화한다는 과제에서 출발하여, 대회는 공업, 그중에서도 우선 경공업을 더욱 확장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동시에 야금업을 신속히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대회는 국내상업인민위원부의 설치를 승인하고, 모든 상업 기관에 시장을 장악하고 상업 분야에서 사적 자본을 몰아내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대회는 농민층에 대한 국가의 저리 신용을 확대하고 농촌에서 고리대금업자를 몰아내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대회는 농촌 사업의 주요 과제로서 농민 대중을 최대한 협동조합으로 조직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끝으로 대회는 레닌 입당의 거대한 의의를 지적하고, 당의 젊은 당원, 무엇보다 레닌 입당으로 들어온 당원들에게 레닌주의의 기초를 가르치는 사업을 강화하라고 당의 주의를 환기했다.
5. 복구 시기 말의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건설과 우리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에 관한 문제. 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새 반대파」. 제14차 당대회. 국가의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향한 노선.
신경제정책의 길에서 볼셰비키당과 노동계급이 끈질기게 일해 온 지 네 해가 넘었다. 국민경제 복구를 위한 영웅적 사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적·정치적 역량은 갈수록 커졌다.
이 무렵 국제 정세는 달라져 있었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전쟁 이후 대중의 첫 혁명적 공세를 견뎌냈다.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 폴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혁명 운동은 진압되었다. 이 일에서 부르주아지를 도운 것은 타협주의적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었다. 혁명은 일시적으로 퇴조했다. 서유럽에서는 자본주의가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 안정되었으며, 그 지위가 부분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안정은 자본주의 사회를 갈가리 찢는 기본 모순들을 없애지 못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족들 사이의, 여러 나라 제국주의 집단들 사이의 모순을 격화시켰다. 자본주의의 안정은 모순의 새로운 폭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새로운 위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안정과 나란히 소비에트 연방의 안정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두 안정은 근본적으로 서로 달랐다. 자본주의의 안정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위기를 예고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안정은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적·정치적 역량이 새로이 성장함을 뜻했다.
서방에서 혁명이 패배했는데도 소비에트 연방의 국제적 지위는 여전히 강화되고 있었다. 다만 그 속도는 더 느렸다.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은 이탈리아의 도시 제노바에서 열리는 국제 경제회의에 초청되었다. 제노바 회의에서 제국주의 정부들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혁명이 패배한 데 고무되어, 이번에는 외교적 형태로 소비에트 공화국에 새로운 압력을 가하려 했다. 제국주의자들은 소비에트 나라에 뻔뻔스러운 요구를 내놓았다. 그들은 10월 혁명으로 국유화된 공장을 외국 자본가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고, 차르 정부의 모든 채무를 갚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조건 아래 제국주의 국가들은 소비에트 국가에 얼마 되지 않는 차관을 약속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이 요구들을 거부했다.
제노바 회의는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했다.
1923년 영국 외무장관 커즌의 최후통첩 형태로 나타난 새로운 간섭의 위협도 마땅한 반격을 받았다.
소비에트 권력의 견고함을 떠본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 안정성을 확인하고 우리 나라와 차례로 외교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1924년 한 해 동안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와 외교 관계가 회복되었다.
소비에트 나라가 평화적 휴식의 한 시기를 온전히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국내 정세도 달라졌다. 볼셰비키당이 이끄는 노동자와 농민의 헌신적인 노동은 결실을 맺었다. 국민경제는 눈에 띄게 빠르게 성장했다. 1924~25 경제연도에 농업은 이미 전쟁 전 규모에 가까워져 전쟁 전 수준의 87퍼센트에 이르렀다. 소련의 대공업은 1925년에 이미 전쟁 전 공업 생산물의 약 4분의 3을 내놓고 있었다. 1924~25년에 소비에트 나라는 이미 기본 건설에 3억 8,500만 루블을 투입할 수 있었다. 나라의 전력화 계획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국민경제에서 사회주의의 지휘 고지(高地)가 강화되었다. 공업과 상업에서 사적 자본과 벌인 투쟁에서도 중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경제적 상승은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를 한층 더 개선했다. 노동계급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임금이 올랐다. 노동 생산성이 높아졌다. 농민의 물질적 처지는 현저히 나아졌다. 노동자·농민의 국가는 1924~25년에 영세농민층을 돕기 위해 2억 9,000만 루블까지 돌릴 수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가 개선된 것을 토대로 대중의 정치적 활동성이 크게 높아졌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강화되었다. 볼셰비키당의 권위와 영향력이 커졌다.
국민경제의 복구는 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나라,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나라에는 단순한 경제 복구, 단순히 전쟁 전 수준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전쟁 전 수준이란 뒤떨어진 나라의 수준이었다. 더 나아가야 했다. 소비에트 국가가 쟁취한 장기간의 휴식은 계속 건설할 가능성을 보장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발전과 건설의 전망과 성격에 관한 문제,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운명에 관한 문제가 온 힘을 다해 제기되었다. 소련에서 경제 건설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가, 사회주의 방향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향인가? 우리는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해야 하며 또 건설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다른, 자본주의 경제를 위해 토양에 거름을 주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가? 소련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지연되고 자본주의가 안정된 조건에서도 그것을 건설할 수 있는가? 나라 안에서 사회주의의 역량을 온갖 방법으로 강화하고 확대하면서도, 동시에 당분간은 자본주의의 일정한 성장도 낳는 신경제정책의 길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할 수 있는가? 사회주의 국민경제를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가, 이 건설을 어느 쪽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이 모든 문제는 복구 시기가 끝나갈 무렵 당 앞에 이미 이론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서, 일상적인 경제 건설의 문제로서 제기되었다.
이 모든 문제에 직접적이고 명확한 답을 주어야 했다. 공업과 농업을 건설하는 우리의 당·경제 일꾼들도, 온 인민도 일을 어디로 이끌어 가야 하는지 — 사회주의로 가야 하는지 자본주의로 가야 하는지 — 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다면 건설에 관한 우리의 모든 실천 작업은 전망 없는 작업, 눈먼 작업, 헛된 작업이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문제에 당은 명확하고 분명한 답을 주었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할 수 있으며 또 건설해야 한다고 당은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고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1917년 10월에 노동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독재를 수립하여 자본주의를 정치적으로 이겼다. 그때부터 소비에트 정권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힘을 격파하고 사회주의 국민경제를 건설할 조건을 만들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해 왔다. 자본가와 지주에 대한 수탈, 토지·공장·교통로·은행의 전 인민적 소유로의 전환, 신경제정책의 시행, 국영 사회주의 공업의 건설, 레닌의 협동조합 계획의 실시 — 이것이 그 조치들이다. 이제 주요 과제는 전국적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의 건설을 전개하여 자본주의를 경제적으로도 끝장내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실천적 작업, 우리의 모든 행동은 이 주요 과제를 수행하는 데 종속되어야 한다. 노동계급은 이것을 할 수 있으며 또 해낼 것이다. 이 거대한 과제의 수행은 나라의 공업화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라의 사회주의적 공업화 — 이것이 사회주의 국민경제 건설을 펼쳐 나갈 때 출발점이 되어야 할 기본 고리이다. 서방에서 혁명이 지연되는 것도, 비소비에트 국가들에서 자본주의가 부분적으로 안정된 것도 사회주의를 향한 우리의 전진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신경제정책은 이 일을 수월하게 해줄 수 있을 뿐이다. 당이 신경제정책을 도입한 것은 바로 우리 국민경제의 사회주의적 토대를 건설하는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에 관한 문제에 대한 당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당은 이것만으로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승리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환이며 소련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세계사적 승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소련의 내부 문제이며 사회주의 승리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의 다른 부분은 그 국제적 측면이다.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에 관한 명제를 논증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이 문제에서 내부적 측면과 국제적 측면, 두 측면을 구별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지적했다. 문제의 내부적 측면, 즉 나라 안에서의 계급 상호관계에 관해서라면, 소련의 노동계급과 농민층은 자기 나라의 부르주아지를 경제적으로 충분히 이겨내고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에는 아직 국제적 측면, 즉 대외 관계의 영역, 소비에트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 소비에트 인민과 국제 부르주아지 사이의 관계 영역이 있다. 국제 부르주아지는 소비에트 체제를 증오하며,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새로운 무장 간섭을 감행하고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복구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소련이 아직까지는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이고 나머지 국가들은 자본주의 국가로 남아 있으므로, 소련을 둘러싼 자본주의적 포위망이 계속 존재하며 자본주의 간섭의 위험을 낳는다. 자본주의적 포위망이 있는 한 자본주의 간섭의 위험도 있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소비에트 인민이 오직 자기 힘만으로 이 외부적 위험, 즉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 간섭의 위험을 제거할 수 있는가? 아니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것은, 자본주의 간섭의 위험을 제거하려면 자본주의적 포위망을 제거해야 하는데, 자본주의적 포위망은 적어도 몇 개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한 결과로만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청산과 사회주의적 경제체제의 건설로 나타나는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승리도, 무장한 외국 간섭과 자본주의 복구 시도의 위험이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사회주의 국가가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보장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여전히 최종적 승리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외국 자본주의 간섭의 위험을 제거하려면 자본주의적 포위망을 제거해야 한다.
물론 소비에트 인민과 그 붉은 군대는 소비에트 정권의 올바른 정책 아래에서, 1918~1920년에 첫 자본주의 간섭을 물리친 것처럼 새로운 외국 자본주의 간섭에도 적절한 반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새로운 자본주의 간섭의 위험이 제거된다는 뜻은 아니다. 첫 간섭의 패배는 새로운 간섭의 위험을 제거하지 못했다. 간섭 위험의 원천인 자본주의적 포위망이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포위망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새로운 간섭의 패배도 간섭의 위험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이로부터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는 소련 근로 대중에게 사활이 걸린 이익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승리 문제에 관한 당의 입장이었다.
중앙위원회는 이 입장이 곧 열릴 제14차 당 협의회에서 논의되고, 당의 입장으로, 당의 법으로, 모든 당원에게 의무적인 것으로 승인되고 채택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당의 이 방침은 반대파에게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당이 이 방침에 구체적·실천적 성격을 부여하고, 나라의 사회주의 공업화에 관한 실천 계획과 결부시켰으며, 모든 당원에게 구속력을 지니는 당의 법, 곧 제14차 당 협의회 결의의 형식으로 담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당의 방침에 반대하고 나서서, 멘셰비키적 「영구혁명론」을 이에 맞세웠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조롱할 때에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었으며,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승리할 가능성을 부정했다.
부하린파는 당의 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슬그머니 이에 맞서 부르주아지가 사회주의로 평화적으로 성장해 들어간다는 자신들의 「이론」을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부유해져라」라는 「새로운」 구호를 덧붙였다. 부하린파의 논리대로라면 사회주의의 승리는 부르주아지의 청산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를 키우고 부유하게 하는 것을 뜻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한때 소련은 기술적·경제적으로 뒤떨어져 있으므로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고개를 내밀었다가, 곧 덤불 속으로 숨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14차 당 협의회(1925년 4월)는 공공연한 반대파와 숨은 반대파의 이 모든 투항주의적 「이론」을 규탄하고, 이에 상응하는 결의를 채택하여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한다는 당의 방침을 확정했다.
궁지에 몰린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이 결의에 찬성 투표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나 당은 그들이 당과의 투쟁을 미루었을 뿐이며, 제14차 당대회에서 「당에 결전을 걸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레닌그라드에서 자기 지지자들을 모으고 이른바 「신반대파」를 조직하고 있었다.
1925년 12월, 제14차 당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긴장된 당내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당이 존재한 이래 레닌그라드처럼 당의 거대한 중심지의 대표단 전체가 자기 중앙위원회에 반대하여 나서려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회에는 결정권을 가진 대의원 665명과 자문권을 가진 대의원 641명이 참석했으며, 이들은 당원 64만 3천 명과 후보당원 44만 5천 명을 대표했다. 이는 이전 대회보다 다소 적은 수였다. 여기에는 반당 분자들로 오염된 대학 및 기관 세포에 대한 부분적 숙청의 결과가 나타났다.
중앙위원회의 정치 보고는 스탈린 동지가 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적·경제적 힘이 성장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공업과 농업은 소비에트 경제 체제의 이점 덕분에 비교적 짧은 기간에 복구되어 전쟁 전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동지는 여기에 안주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이 성과가 우리나라가 여전히 뒤떨어진 농업국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없앨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체 생산의 3분의 2는 농업이, 공업은 3분의 1만을 차지했다. 스탈린 동지는 당 앞에 우리나라를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된 공업국으로 전환하는 문제가 전면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한다. 당의 중심 과제는 나라의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한 투쟁,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투쟁이 된다.
“우리나라를 농업국에서, 필요한 설비를 자기 힘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공업국으로 전환하는 것,— 바로 여기에 우리 총노선의 본질, 기초가 있다”라고 스탈린 동지는 지적했다.
나라의 공업화는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고, 국방 능력을 강화하며,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마련했다.
당의 총노선에 반대하여 지노비예프파가 나섰다. 지노비예프파인 소콜니코프는 스탈린의 사회주의 공업화 계획에 맞서, 제국주의의 상어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부르주아적 계획을 내세웠다. 이 계획에 따르면 소련은 주로 원료와 식량을 생산하여 외국에 수출하고,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며 생산해서도 안 되는 기계를 외국에서 수입하는 농업국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1925년의 조건에서 이 계획은 소련을 공업이 발달한 외국에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는 계획, 자본주의 나라들의 제국주의 상어들의 비위를 맞추어 소련의 공업적 후진성을 고착시키는 계획으로 보였다.
이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나라를 자본주의 세계의 무력한 농업적·농경적 부속물로 만들고, 자본주의 포위 속에서 무장도 하지 못한 채 허약한 상태로 내버려 두며, 결국 소련에서 사회주의 사업을 무덤에 묻어 버린다는 것을 뜻했다.
당대회는 지노비예프파의 경제 "계획"을 소련을 예속시키는 계획이라고 낙인찍었다.
"새 반대파"에게는 (레닌에 반하여!) 우리의 국가 공업이 마치 사회주의 공업이 아니라는 주장이나, (이것도 레닌에 반하여!) 중농인 농민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동계급의 동맹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 같은 억지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대회는 "새 반대파"의 이러한 억지를 반(反)레닌적이라고 낙인찍었다.
스탈린 동지는 "새 반대파"의 트로츠키주의적·멘셰비키적 본질을 폭로했다. 그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레닌이 당시에 무자비한 투쟁을 벌였던 당의 적들의 노래를 되풀이해 부르고 있을 뿐임을 보여 주었다.
지노비예프파가 제대로 위장하지도 못한 트로츠키주의자임은 분명했다.
스탈린 동지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동계급과 중농의 굳건한 동맹이 당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 당 안에 있던, 이 동맹 사업에 위험이 되는 농민 문제에 관한 두 가지 편향을 지적했다. 첫째 편향은 쿨라크의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축소하는 것이었고, 둘째 편향은 쿨라크 앞에서 허둥대고 겁먹으며 중농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었다. 어느 편향이 더 나쁘냐는 물음에 스탈린 동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둘 다 나쁘다. 첫째 편향도 둘째 편향도 나쁘다. 이 편향들이 자라나면 당을 해체시키고 망칠 수 있다. 다행히 우리 당 안에는 첫째 편향도 둘째 편향도 잘라 낼 수 있는 힘이 있다.”
당은 실제로 “좌”익 편향과 우익 편향을 모두 분쇄하고 잘라 냈다.
제14차 당대회는 경제 건설에 관한 토론을 총괄하면서 반대파의 투항주의적 계획을 만장일치로 물리치고, 유명한 결정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경제 건설 분야에서 당대회는 우리나라, 곧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나라가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레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당대회는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승리하기 위한 투쟁이 우리 당의 기본 과제라고 본다.”
제14차 당대회는 당의 새 규약을 승인했다.
제14차 당대회부터 우리 당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곧 ВКП(б)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노비예프파는 당대회에서 패배했으나 당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14차 당대회 결정에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제14차 당대회 직후 지노비예프는 공산주의청년동맹 레닌그라드 현 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위원회의 상층부는 지노비예프, 잘루츠키, 바카예프, 예브도키모프, 쿠클린, 사파로프 및 다른 양면분자들에게 레닌의 당 중앙위원회에 대한 증오심을 주입받은 자들이었다. 이 회의에서 공산주의청년동맹 레닌그라드 현 위원회는 전연방레닌공산주의청년동맹 역사상 전례 없는 결정, 즉 제14차 당대회 결정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공산주의청년동맹의 지노비예프파 상층부는 레닌그라드 공산주의청년동맹 대중의 정서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손쉽게 격파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닌그라드 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은 공산주의청년동맹에서 마땅한 자리를 다시 차지했다.
제14차 당대회가 끝날 무렵, 당대회 대의원 일행 — 몰로토프, 키로프, 보로실로프, 칼리닌, 안드레예프 동지 및 다른 이들 — 이 레닌그라드로 파견되었다. 기만적인 방법으로 위임장을 얻어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대표단이 취한 입장이 범죄적이고 반볼셰비키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레닌그라드 당 조직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당대회 보고 집회들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레닌그라드에서 새로 임시 당협의회가 소집되었다. 레닌그라드 당 조직원의 압도적 다수(97퍼센트 이상)가 제14차 당대회 결정을 전적으로 승인하고 반당적인 지노비예프의 “신반대파”를 규탄했다. 후자는 이미 그때 군대 없는 장군들이었다.
레닌그라드 볼셰비키는 레닌-스탈린 당의 선두 대열에 남았다.
제14차 당대회의 작업을 총결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전연방공산당 제14차 당대회의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신반대파의 오류를 뿌리까지 폭로할 수 있었고, 그들의 불신과 울보짓을 내던져 버렸으며, 사회주의를 위한 향후 투쟁의 길을 명확하고 또렷하게 제시했고, 당에 승리의 전망을 주었으며,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에 대한 불굴의 신념으로 무장시켰다는 데 있다”(스탈린, 『레닌주의의 제문제』, 150쪽).
간단한 결론.
인민경제 복구를 위한 평화적 사업으로 이행한 시기는 볼셰비키당 역사에서 가장 책임이 무거운 시기의 하나이다. 긴박한 정세 속에서 당은 전시 공산주의 정책에서 신경제정책으로의 어려운 전환을 이룩할 수 있었다. 당은 새로운 경제적 토대 위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강화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창설되었다.
신경제정책의 길에서 인민경제 복구에 결정적 성과가 달성되었다. 소비에트 나라는 인민경제 발전의 복구 시기를 성공적으로 통과했고, 새로운 시기, 즉 국가의 공업화 시기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내전에서 평화적 사회주의 건설로의 이행은, 특히 초기에 커다란 어려움을 동반했다. 볼셰비즘의 적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대열 내의 반당 요소들은 이 시기 내내 레닌의 당에 반대하는 필사적인 투쟁을 벌였다. 이 반당 요소들의 선두에는 트로츠키가 있었다. 이 투쟁에서 그의 앞잡이는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이었다. 반대파는 레닌 사후 볼셰비키당 대열에 해체를 끌어들이고, 당을 분열시키며,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승리라는 대의에 대한 불신을 당에 감염시키기를 기대했다. 본질상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에 신부르주아지의 정치 조직, 즉 또 다른 당인 자본주의 복고의 당을 창설하려 시도했다.
당은 레닌의 기치 아래 레닌의 중앙위원회 주위, 스탈린 동지 주위에 굳게 결집하여,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레닌그라드에 있는 그들의 새 친구들, 즉 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새로운 반대파에게 패배를 안겼다.
힘과 수단을 축적한 볼셰비키당은 나라를 새로운 역사적 단계, 즉 사회주의 공업화의 단계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