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PeopleJoseph Stalin, Vyacheslav Molotov, Andrei Zhdanov, Emelyan Yaroslavsky, Pyotr Pospelov, Vladimir Lenin, Karl Marx, Friedrich Engels TermsShort Course of the History of the All-Union Communist Party (Bolsheviks), Dialectical Materialism, Historical Materialism

제10장 나라의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한 투쟁에서의 볼셰비키당 (1926~1929년)

1. 사회주의 공업화 시기의 어려움과 그에 대한 투쟁.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파 반당 블록의 형성. 블록의 반소비에트적 행동. 블록의 패배.

제14차 당대회 후 당은 나라의 사회주의 공업화라는 소비에트 정권의 총노선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복구 시기의 과제는 무엇보다 먼저 농업을 되살려 농업에서 원료와 식량을 얻고, 공업을 가동시키는 것, 곧 공업을 복구하고 기존의 공장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이 과제들을 비교적 쉽게 해결했다.

그러나 복구 시기에는 세 가지 큰 결함이 있었다.

첫째, 복구 시기에는 낡은 공장들과, 머지않아 못 쓰게 될 수 있는 그 낡고 뒤떨어진 기술을 상대했다. 과제는 이 공장들을 새로운 기술에 기초하여 다시 설비하는 것이었다.

둘째, 복구 시기에는 기반이 너무나 협소한 공업을 상대했다. 현존하는 공장들 가운데 나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십, 수백 개의 기계 제작 공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장은 당시 우리에게 없었고 새로 건설해야 했다. 그런 공장이 없으면 공업을 진정한 공업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제는 이 공장들을 세우고 현대적 기술로 무장시키는 것이었다.

셋째, 복구 시기에는 주로 경공업을 상대했고, 이를 발전시켜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경공업 자체의 발전이 이후 중공업의 취약함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발달한 중공업으로만 충족시킬 수 있는 나라의 다른 수요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과제는 이제 중공업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었다.

이 모든 새로운 과제는 사회주의 공업화 정책이 해결해야 했다.

차르 러시아에 없던 여러 공업 부문을 새로 건설해야 했다. 새로운 기계 제작, 공작 기계 제작, 자동차, 화학, 야금 공장을 세우고, 발전소용 발동기와 설비를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하며, 금속과 석탄 채굴을 늘려야 했다.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려면 이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방 공업을 창설해야 했다. 새로운 대포, 포탄, 항공기, 탱크, 기관총 공장을 세워야 했다. 자본주의 포위 속에서 소련을 방위하려면 이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트랙터 공장과 현대적 농기계 공장을 세우고 그 생산물을 농업에 공급하여, 수백만의 영세한 개인 농민 경영이 대규모 콜호스 생산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야 했다. 농촌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려면 이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공업화 정책이 주어야 했다. 나라의 사회주의 공업화는 바로 이 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자본 건설이 수십억 루블의 자금 투입 없이는 불가능했음은 분명하다. 외국 차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차관 제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외부의 도움 없이 자체 자금으로 건설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부유하지 못했다.

이것이 이제 주요한 어려움 가운데 하나였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개 외부로부터 자금이 흘러들어 오는 덕분에, 즉 식민지 약탈, 패전국 인민들에게서 받은 배상금, 외국 차관 덕분에 중공업을 건설했다. 소비에트 국가는 식민지 인민이나 패전국 인민을 약탈하는 것과 같은 더러운 방법으로 공업화 자금을 얻을 수는 원칙적으로 없었다. 외국 차관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소련에 차관 제공을 거부했으므로 이 원천이 막혀 있었다. 자금을 국내에서 찾아야 했다.

그리고 소련에서는 그런 자금이 발견되었다. 소련에는 어떤 자본주의 국가도 알지 못하는 축적의 원천이 있었다. 소비에트 국가는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자본가와 지주에게서 빼앗은 모든 공장과 토지, 운송 수단, 은행, 대외 무역과 대내 무역을 자기 수중에 넣었다. 국영 공장, 운송 수단, 무역, 은행에서 나오는 이윤은 이제 기생 계급인 자본가들의 소비에 쓰이지 않고 공업을 더욱 확장하는 데 쓰였다.

소비에트 정권은 차르 시대의 채무를 무효로 했다. 인민은 이 채무의 이자만으로도 해마다 수억 루블의 금을 지불해 왔다. 소비에트 정권은 지주의 토지 소유를 폐지하여, 농민층이 해마다 지주에게 토지 임대료로 지불하던 약 5억 루블의 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 모든 짐에서 벗어난 농민층은 국가가 새롭고 강력한 공업을 건설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농민들은 트랙터와 농업 기계를 얻는 데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수입원은 소비에트 국가의 수중에 있었다. 이것들은 중공업을 건설하는 데 수억, 수십억 루블을 댈 수 있었다. 다만 사업을 주인답게 처리하고, 자금 지출에서 가장 엄격하게 절약하고, 생산을 합리화하고, 생산 원가를 낮추고, 비생산적 지출을 없애는 일 따위가 필요했을 뿐이다.

소비에트 정권은 바로 그렇게 했다.

절약 체제 덕분에 해마다 자본 건설을 위한 자금이 점점 더 많이 모였다. 드네프르 수력 발전소, 투르케스탄-시베리아 철도,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공작 기계 공장, 자동차 공장 「아모」(「지스」) 등과 같은 거대한 기업의 건설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1926~27년에 공업에 약 10억 루블을 투입했다면, 3년 뒤에는 이미 약 50억 루블을 투입할 수 있었다.

공업화 사업은 전진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가 강화되는 데서 자본주의 체제의 존립에 대한 위협을 보았다. 그래서 제국주의 정부들은 소련에 새로운 압력을 가하고, 혼란을 일으키고, 소련의 공업화 사업을 깨뜨리거나 적어도 지연시키려고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1927년 5월 정부에 앉아 있던 영국 보수당원들(“강경파”)이 『아르코스』(영국과의 무역을 담당하는 소비에트 회사)에 대한 도발적 습격을 조직했다. 1927년 5월 26일 영국 보수당 정부는 영국이 소련과의 외교 관계와 통상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했다.

1927년 6월 7일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국적을 가진 러시아 백위군에게 소련 대사 보이코프 동지가 살해당했다.

같은 시기에 소련 영토에서는 영국 간첩과 파괴 공작원들이 레닌그라드의 당 클럽에 폭탄을 던져 약 30명이 부상당했고, 그중 여러 명은 중상을 입었다.

1927년 여름에는 베를린, 베이징, 상하이, 톈진의 소련 대표부와 통상 대표부에 대한 습격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는 소비에트 정권에 새로운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소련은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의 도발적인 공세를 손쉽게 물리쳤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그 밖의 반대파 분자들도 파괴 활동으로 당과 소비에트 국가에 못지않은 어려움을 끼쳤다. 당시 스탈린 동지가 소비에트 정권에 맞서 “체임벌린에서 트로츠키에 이르는 일종의 단일 전선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제14차 당대회의 결정과 반대파가 선언한 충성에도 불구하고 반대파 분자들은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1926년 여름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지노비예프파는 반당 블록으로 결합하여 패배한 모든 반대파 집단의 잔당을 블록 주위에 결집시키고, 반레닌주의 지하당의 기초를 놓았다. 이로써 그들은 분파 결성을 금지하는 당 규약과 당대회 결정을 노골적으로 위반했다. 중앙위원회는 유명한 멘셰비키 8월 블록과 비슷한 이 반당 블록이 해산되지 않으면 그 지지자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블록의 지지자들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같은 해 가을 제15차 당 협의회를 앞두고 그들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공장 당 회의에서 당에 새로운 토론을 강요하려고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그들은 당원들의 토의에 자신들의 강령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통상적인 트로츠키주의-멘셰비키적 반레닌주의 강령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당원들은 반대파 분자들에게 가차 없이 반격을 가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그들을 회의장에서 아예 쫓아냈다. 중앙위원회는 당이 그들의 파괴 활동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블록 지지자들에게 다시 경고했다.

반대파 분자들은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소콜니코프의 서명으로 중앙위원회에 성명서를 제출하여 자신들의 분파 활동을 규탄하고 앞으로 충성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블록은 실제로는 계속 존재했고, 그 지지자들은 지하 반당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반레닌주의 당을 규합하고, 비합법 인쇄소를 차리고, 지지자들에게서 당비를 거두고, 자신들의 강령을 배포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지노비예프파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제15차 당 협의회(1926년 11월)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확대 전원회의(1926년 12월)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 문제를 토의에 부쳤고, 결정에서 블록 지지자들을 강령상 멘셰비키 입장으로 굴러떨어진 분열주의자라고 낙인찍었다.

그러나 이것도 블록 지지자들에게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했다. 1927년, 영국 보수파가 소련과의 외교 및 통상 관계를 단절한 때에 그들은 다시 당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그들은 새로운 반레닌주의 강령, 이른바 「83인 강령」을 조작해 당원들 사이에 퍼뜨리기 시작했고, 중앙위원회에 새로운 전당 토론을 요구했다.

모든 반대파 강령 가운데 이 강령은 아마도 가장 거짓되고 위선적인 것이었다.

말로는, 즉 강령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와 지노비예프파가 당의 결정을 준수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고 충성을 표명했으나, 실제로는 당의 결정을 가장 난폭하게 위반했으며 당과 중앙위원회에 대한 온갖 충성을 조롱했다.

말로는, 즉 강령에서는 그들이 당의 통일에 반대하지 않았고 분열에 반대한다고 표명했으나, 실제로는 당의 통일을 가장 난폭하게 깨뜨렸고, 분열 노선을 밀고 나갔으며, 이미 자신들만의 특별한 비합법적 반레닌주의 당을 갖고 있었다. 이 당은 반소비에트적·반혁명적 당으로 변질될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말로는, 즉 강령에서는 그들이 공업화 정책을 지지한다고 표명했고 심지어 중앙위원회가 공업화를 충분히 빠른 속도로 추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나, 실제로는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한다는 당의 결정을 헐뜯었고, 사회주의 공업화 정책을 조롱했으며, 여러 공장을 외국인에게 조차(租借)로 넘길 것을 요구했고, 소련 내 외국 자본주의 조차에 주된 희망을 걸었다.

말로는, 즉 강령에서는 그들이 콜호스 운동을 지지한다고 표명했고 심지어 중앙위원회가 집단화를 충분히 빠른 속도로 추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나, 실제로는 농민을 사회주의 건설에 끌어들이는 정책을 조롱했고, 노동계급과 농민층 사이의 「해결할 수 없는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설교했으며, 농촌의 「문명화된 소작 농업가」, 즉 쿨라크 농가에 희망을 걸었다.

이것은 반대파의 모든 거짓된 강령 가운데 가장 거짓된 강령이었다.

그것은 당을 속이려는 것이었다.

중앙위원회는 즉각적인 토론 개시를 거부하면서, 반대파에게 토론은 당 규약에 따라서만, 즉 당대회 두 달 전에야 열 수 있다고 밝혔다.

1927년 10월, 즉 제15차 당대회 두 달 전에 당 중앙위원회는 전당 토론을 선언했다. 토론회가 시작되었다. 토론 결과는 트로츠키주의-지노비예프 블록에게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중앙위원회의 정책에 72만 4천 명의 당원이 투표했다. 트로츠키주의자와 지노비예프파의 블록에는 4천 명, 즉 1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수가 투표했다. 반당 블록은 완전히 격파되었다. 당은 압도적 다수로 블록의 강령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블록 지지자들 자신이 그 의견에 호소했던 당의 의지가 이렇게 분명하게 표명되었다.

그러나 이 교훈도 블록 지지자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당의 의지에 복종하는 대신 당의 의지를 꺾어 놓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토론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패배가 불가피함을 알아차리고, 당과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하는 보다 격렬한 투쟁 형태에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공개적인 항의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시위 날짜로 10월 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 곧 소련의 근로 대중이 혁명적인 전 인민 시위를 벌이는 날을 골랐다. 이리하여 트로츠키주의자와 지노비예프파는 이른바 병행 시위를 벌이려 했다. 예상한 대로 블록 지지자들이 거리로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추종자들의 초라한 무리뿐이었다. 그 추종자들과 그들의 우두머리는 전 인민의 시위에 짓밟혀 내던져졌다.

이제 트로츠키주의자와 지노비예프파가 반(反)소비에트의 수렁에 굴러떨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전당 토론에서는 중앙위원회에 맞서 당에 호소했지만, 이 초라한 시위에서는 당과 소비에트 국가에 맞서 적대 계급에 호소하는 길로 들어섰다. 볼셰비키당의 파괴를 목표로 삼은 그들은 필연적으로 소비에트 국가를 파괴하는 길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 나라에서는 볼셰비키당과 국가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트로츠키주의-지노비예프 블록의 우두머리들은 스스로를 당 밖에 놓았다. 반소비에트의 수렁에 굴러떨어진 자들을 볼셰비키당의 대열에 더 이상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7년 11월 14일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사위원회의 연합 회의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를 당에서 제명했다.

2. 사회주의 공업화의 성과. 농업의 낙후. 제15차 당대회. 농업 집단화 노선. 트로츠키주의-지노비예프 블록의 격파. 정치적 양면성.

이미 1927년 말에는 사회주의 공업화 정책의 결정적인 성과가 뚜렷해졌다. 네프 조건에서의 공업화는 짧은 기간에 상당한 전진을 이룰 수 있었다. 공업과 농업은 전체적으로(임업과 어업을 포함하여) 총생산에서 전쟁 전 수준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준을 넘어섰다. 국민경제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2퍼센트로 높아져 전쟁 전의 해당 수준에 이르렀다.

사회주의적 공업 부문은 사적 부문을 밀어내면서 빠르게 성장하여 1924~1925년의 81퍼센트에서 1926~1927년의 86퍼센트로 올라섰고, 같은 기간에 사적 부문의 비중은 19퍼센트에서 14퍼센트로 떨어졌다.

이는 소련의 공업화가 뚜렷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 소련의 공업이 사회주의적 생산 체계의 승리를 향해 발전하고 있다는 것, 공업 분야에서 “누가 누구를 이기는가”라는 문제가 이미 사회주의에 유리하게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적 상인도 마찬가지로 빠르게 상업에서 밀려났다. 소매에서 사적 상인의 몫은 1924~1925년의 42퍼센트에서 1926~1927년의 32퍼센트로 떨어졌고, 도매에서는 같은 기간에 9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떨어졌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대규모 사회주의 공업은 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복구 시기가 끝난 첫해인 1927년에 전년 대비 생산 증가율 18퍼센트를 기록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가장 선진적인 나라들의 대공업으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기록적인 증가율이었다.

농업, 특히 곡물 농업은 사정이 달랐다. 농업 전체는 전쟁 전 수준을 넘어섰으나, 그 주요 부문인 곡물 농업의 총생산량은 전쟁 전 수준의 91퍼센트에 불과했고, 도시에 공급하려고 외부에 판매하는 곡물의 상품 부분은 전쟁 전 수준의 37퍼센트에 겨우 이르렀다. 더욱이 모든 자료가 곡물의 상품 생산이 더 떨어질 위험이 있음을 말해 주었다.

이는 1918년에 시작된 농촌의 대규모 상품 농가가 소규모 농가로, 소규모 농가가 더 영세한 농가로 분할되는 과정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또 소규모 농가와 극소규모 농가가 최소한의 상품 곡물밖에 내지 못하는 반(半)자급 경제로 변해 가고 있으며, 1927년의 곡물 농업이 전쟁 전의 곡물 농업보다 곡물을 조금 적게 생산하면서도 도시에 내다 팔 수 있는 것은 전쟁 전 곡물 농업이 팔 수 있었던 양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했다.

곡물 농업이 이런 상태에서는 소련의 군대와 도시가 만성적 기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것은 곡물 농업의 위기였고, 그 뒤에는 축산업의 위기가 뒤따르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농업에서 트랙터와 농업 기계를 가동하고 곡물 농업의 상품성을 몇 배로 끌어올릴 수 있는 대규모 생산으로 넘어가야 했다. 나라 앞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대규모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는데, 이는 농민 대중의 파산,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동맹의 파멸, 쿨라크층의 강화와 농촌에서의 사회주의의 패배를 뜻했다. 다른 하나는 소규모 농민 경제를 대규모 사회주의 경제, 곧 콜호스로 통합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었는데, 콜호스는 트랙터와 그 밖의 현대적 기계를 이용하여 곡물 농업과 그 상품 생산을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었다.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 국가가 두 번째 길, 곧 농업 발전의 콜호스적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하다.

이때 당은 농업에서 소규모 농민 경제로부터 대규모의, 아르텔의, 집단적 경제로 넘어갈 필요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레닌의 지시에 의거했다.

가) “소규모 경제로는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다.”(레닌, 제24권, 540쪽)

나) “우리가 소규모 경제에 예전처럼 눌러앉아 있으면, 비록 자유로운 땅 위의 자유로운 시민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멸망이 닥친다.”(제20권, 417쪽) 다) “농민 경제가 더 발전할 수 있으려면 더 나아간 이행도 확고히 보장해야 하며, 더 나아간 이행은 반드시 가장 불리하고 가장 뒤떨어진 소규모의 고립된 농민 경제가 점차 연합하면서 사회적인 대규모 농업 경제를 조직하는 데 있다.”(제26권, 299쪽) 라) “농민들에게 토지를 사회적, 집단적, 협동적, 아르텔적으로 경작하는 것의 이점을 실제로 보여 줄 수 있는 경우에만, 협동적, 아르텔적 경제로 농민을 도울 수 있는 경우에만, 비로소 국가 권력을 손에 쥔 노동계급이 농민에게 자기가 옳음을 참으로 증명하고, 수백만 농민 대중을 참으로 확고하게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제24권, 579쪽)

제15차 당대회를 앞둔 정세는 이러했다.

제15차 당대회는 1927년 12월 2일에 개막했다. 대회에는 결정권을 가진 대의원 898명과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 771명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당원 887,233명과 후보 당원 348,957명을 대표했다.

스탈린 동지는 보고에서 공업화의 성과와 사회주의 공업의 급속한 성장을 지적하면서 당 앞에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기했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우리의 사회주의적 지휘 고지를 확대하고 강화하며, 인민경제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청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

스탈린 동지는 농업을 공업과 비교하면서 농업, 특히 곡물 농업이 뒤떨어져 있음을 지적했다. 이 낙후는 농업이 분산되어 있어 현대적 기술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농업의 이처럼 좋지 못한 상태가 인민경제 전체에 위협적인 상황을 조성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 스탈린 동지는 물었다.

“출구는,” — 스탈린 동지는 대답했다 — “소규모의 분산된 농민 경영이 토지의 공동 경작을 기초로 대규모의 통합된 경영으로 이행하는 데, 새로운 고도의 기술을 토대로 토지의 집단 경작으로 이행하는 데 있다. 출구는 영세 농민 경영과 극소 농민 경영을 점진적이되 확고하게, 압박이 아니라 시범과 설득의 방법으로, 농업 기계와 트랙터를 쓰고 농업 집약화의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면서, 토지의 공동적·협동적·집단적 경작을 기초로 대규모 경영으로 통합하는 데 있다. 다른 출구는 없다.”

제15차 당대회는 농업 집단화를 전면적으로 전개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다. 대회는 콜호스와 소프호스망을 확대·강화할 계획을 세우고, 농업 집단화를 위한 투쟁 방법에 대해 명확한 지침을 주었다.

이와 함께 대회는 다음과 같은 지령을 내렸다.

“쿨라크에 대한 공세를 더욱 발전시키고, 농촌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제한하며 농민 경영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끄는 여러 새로운 조치를 취할 것”(『결의안집에 담긴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2부, 260쪽).

끝으로 대회는 인민경제에서 계획적 원칙이 강화되고 있음에 입각하여, 또 인민경제의 전 전선에서 자본주의 요소에 대한 사회주의의 계획적 공세를 조직할 것을 염두에 두고, 관계 기관들에 인민경제 제1차 5개년 계획을 작성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사회주의 건설 문제를 마친 제15차 당대회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을 청산하는 문제로 넘어갔다.

대회는 “반대파가 사상적으로 레닌주의와 결별하고 멘셰비키 집단으로 변질했으며, 국제 부르주아지와 국내 부르주아지의 세력 앞에 투항하는 길에 들어섰고, 객관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체제에 맞서는 제3의 세력의 도구가 되었다”고 인정했다(『결의안집에 담긴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2부, 232쪽).

대회는 당과 반대파 사이의 견해 차이가 강령상의 차이로 커졌으며 트로츠키주의 반대파가 반(反)소비에트 투쟁의 길에 들어섰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제15차 당대회는 트로츠키주의 반대파에 속하는 것과 그 견해를 선전하는 것은 볼셰비키당의 대열에 머무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대회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를 당에서 제명한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연합회의의 결정을 승인하고, 라데크, 프레오브라젠스키, 라콥스키, 퍄타코프, 세레브랴코프, 이. 스미르노프, 카메네프, 사르키스, 사파로프, 리프시츠, 므디바니, 스밀가 같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의 모든 적극적 활동가와 「민주중앙집권파」 전체(사프로노프, 브. 스미르노프, 보구슬라프스키, 드롭니스 등)를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사상적으로 격파되고 조직적으로 분쇄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의 추종자들은 인민 속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의 마지막 잔재마저 잃었다.

당에서 제명된 반(反)레닌주의자들은 제15차 당대회가 있은 지 얼마 뒤부터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한다고 선언하고 당에 복귀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당은 그때 트로츠키, 라콥스키, 라데크, 크레스틴스키, 소콜니코프 등이 이미 오래전부터 인민의 적이자 외국 정보기관에 매수된 간첩이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퍄타코프 등이 이미 소비에트 인민에 반대하는 “협력”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들에 있는 소련의 적들과 연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은 가장 중대한 순간마다 여러 번 레닌과 레닌의 당에 맞서 나섰던 이 사람들에게서 온갖 추악한 짓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충분히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당은 제명된 자들의 청원을 믿지 않는 태도로 대했다. 청원서를 낸 자들의 진실성을 처음으로 검증하기 위해, 당은 당 복귀를 다음과 같은 요구에 조건으로 걸었다.

가) 반볼셰비키적이고 반소비에트적인 이데올로기로서의 트로츠키주의를 공개적으로 규탄할 것.

나) 당의 정책을 유일하게 올바른 정책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할 것.

다) 당과 당 기관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할 것.

라) 시험 기간을 거칠 것. 이 기간에 당은 청원서를 낸 자들을 검증하며, 기간이 끝나면 검증 결과에 따라 제명된 자 각각의 당 복귀 문제를 개별적으로 제기한다.

당은 이때 제명된 자들이 이 조항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도 당에 이로우리라고 계산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대열의 단결을 깨뜨리고 그들 내부에 분열을 가져오며, 당의 옳음과 위력을 다시 한 번 보여 주고, 청원서를 쓴 자들이 진실하다면 당의 옛 일꾼들을 당에 돌려줄 수 있게 하고, 진실하지 않다면 그들을 이제는 잘못을 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상 없는 출세주의자, 노동계급의 기만자, 구제 불능의 양면분자로서 모든 사람 앞에서 폭로할 수 있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명된 자들의 대다수는 당이 내건 입당 조건을 받아들이고 신문에 그에 해당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은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에게 다시 당과 노동계급의 사람이 될 기회를 거부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의 당원 권리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의 “핵심 활동가들”의 성명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속속들이 거짓이며 양면분자적인 성명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작자들은 성명을 내기 전에 이미 인민 앞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옹호할 태세가 된 정치적 조류이기를 그만두고, 사상 없는 출세주의자 도당으로 변해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 견해의 나머지를 짓밟을 태세였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들에게 낯선 당의 견해를 찬양할 태세였으며, 카멜레온처럼 어떤 색으로든 물들 태세였다. 오로지 당 안에, 노동계급 안에 남아서 노동계급과 그 당에 해를 끼칠 수 있기 위해서였다.

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핵심 활동가들”은 정치적 사기꾼, 정치적 양면분자임이 드러났다.

정치적 양면분자는 보통 기만에서 시작하여 인민과 노동계급, 노동계급의 당을 속이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더러운 일을 수행한다. 그러나 정치적 양면분자를 단지 사기꾼으로만 볼 수는 없다. 정치적 양면분자는 사상이 없는 정치적 출세주의자들의 도당이다. 이들은 오래전에 이미 인민의 신뢰를 잃었으며, 정치가라는 이름만은 지키려고 기만으로, 카멜레온 같은 변신으로, 협잡으로, 그 밖에 어떤 수단으로든 다시 신뢰를 얻으려 애쓴다. 정치적 양면분자는 원칙이 없는 정치적 출세주의자들의 도당이다. 이들은 “알맞은 때”에 다시 정치 무대에 기어올라 인민의 “통치자”로서 인민의 목에 올라앉기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든, 곧 범죄 분자에게든, 사회의 찌꺼기에게든, 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에게든 기댈 태세가 되어 있다.

트로츠키-지노비예프파의 “적극적 활동가들”은 바로 그런 정치적 양면분자로 드러났다.

3. 쿨라크층에 대한 공세. 부하린-리코프 반당 그룹. 제1차 5개년 계획의 채택. 사회주의 경쟁. 대중적 콜호스 운동의 시작.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이 당의 정책과 사회주의 건설, 집단화에 반대하여 벌인 선동, 그리고 콜호스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쿨라크는 저절로 사회주의에 “자라 들어갈” 것이므로 건드릴 필요가 없고 부르주아지의 부유화는 사회주의에 위험이 되지 않는다는 부하린파의 선동 — 이 모든 선동은 나라 안의 자본주의적 분자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쿨라크층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쿨라크들은 이제 신문에 실린 반응을 통해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리코프 등이라는 옹호자와 변호인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정이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에 맞선 쿨라크층의 저항 정신을 북돋우지 않을 수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쿨라크들은 갈수록 더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쿨라크들은 자신들에게 적지 않게 쌓인 잉여 곡물을 소비에트 국가에 파는 것을 집단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콜호스 농민과 농촌의 당·소비에트 일꾼에게 테러를 가하고, 콜호스와 국가의 곡물 수납소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당은 쿨라크층의 저항을 꺾지 않는 한, 농민층이 보는 앞에서 쿨라크층을 공개적인 전투로 격파하지 않는 한, 노동계급과 붉은 군대는 곡물 부족에 시달릴 것이며 농민의 콜호스 운동은 대중적 성격을 띨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당은 제15차 당대회의 지령에 따라 쿨라크층에 대한 결정적인 공세로 넘어갔다. 공세에서 당은 빈농층을 굳건히 버팀목으로 삼고 중농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쿨라크층에 맞서 결정적인 투쟁을 벌인다는 구호를 실행에 옮겼다. 쿨라크층이 잉여 곡물을 고정 가격으로 국가에 팔기를 거부하자, 당과 정부는 쿨라크층에 대해 일련의 비상조치를 취했다. 곧 쿨라크와 투기꾼이 잉여 곡물을 고정 가격으로 국가에 팔기를 거부할 경우 재판을 거쳐 그 잉여 곡물을 몰수하도록 한 형법 제107조를 적용했고, 빈농층에게 일련의 특혜를 주어 몰수한 쿨라크 곡물의 25퍼센트를 빈농층이 처분할 수 있게 했다.

비상조치는 효력을 나타냈다. 빈농과 중농이 쿨라크층에 맞선 결정적인 투쟁에 나섰고, 쿨라크층은 고립되었으며, 쿨라크와 투기꾼의 저항은 꺾였다. 1928년 말에 소비에트 국가는 이미 충분한 곡물 비축량을 확보했고, 콜호스 운동은 더욱 확신에 찬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같은 해에 돈바스의 샤흐티 지구에서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대규모 파괴 조직이 적발되었다. 샤흐티 파괴분자들은 기업의 옛 소유주들인 러시아 및 외국 자본가들, 그리고 외국 군사 첩보기관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공업의 성장을 저지하고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되는 것을 쉽게 하려는 목적을 세웠다. 파괴분자들은 석탄 채굴량을 줄이기 위해 탄광 개발을 그릇되게 진행했다. 그들은 기계와 환기 설비를 망가뜨리고, 탄광·공장·발전소에서 붕괴와 폭발과 방화를 일으켰다. 파괴분자들은 노동자들의 물질적 생활 개선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고 노동 보호에 관한 소비에트 법률을 위반했다.

파괴분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법원에서 마땅한 처벌을 받았다.

당 중앙위원회는 모든 당 조직에 샤흐티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것을 제안했다. 스탈린 동지는 볼셰비키 경영 간부들이 직접 생산 기술에 정통해야 하며, 그래야 앞으로 옛 부르주아 전문가 출신 파괴분자들이 그들을 속이지 못한다고 지적했고, 노동계급 출신 사람들로 새로운 기술 간부를 양성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고등 기술 교육기관에서 젊은 전문가를 양성하는 사업이 개선되었다. 수천 명의 당원, 공청동맹원, 노동계급의 대의에 충실한 비당원들이 학업에 동원되었다.

당이 쿨라크층에 대한 공세로 넘어가기 전, 당이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을 청산하는 데 몰두하고 있던 동안 부하린-리코프 집단은 대체로 조용히 처신하며 반당 세력의 예비대로 남아 있었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공공연히 지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때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당과 함께 나서기까지 했다. 당이 쿨라크층에 대한 공세로 넘어가고 쿨라크층에 비상조치를 적용하자, 부하린-리코프 집단은 가면을 벗고 당의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하여 나서기 시작했다. 부하린-리코프 집단의 쿨라크적 본성은 견디지 못했고, 이 집단의 추종자들은 이제 공공연히 쿨라크층을 옹호하며 나섰다. 그들은 비상조치의 철회를 요구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농업의 “퇴화”(하강 운동, 쇠퇴, 붕괴)가 시작될 수 있다고 순진한 사람들을 위협했고, 퇴화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농업의 이 고급 형태인 콜호스와 소프호스의 성장은 보지 못하고 쿨라크 경영의 쇠퇴만 보면서, 쿨라크 경영의 퇴화를 농업 전체의 퇴화로 둔갑시켰다. 이론적으로 자신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계급투쟁 소멸론”을 날조하여, 이 이론에 근거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적 요소들과 싸워 성과를 거둘수록 계급투쟁은 더욱 누그러질 것이며, 계급투쟁은 머지않아 완전히 소멸하고 계급의 적은 저항 없이 모든 진지를 내줄 것이므로 쿨라크층에 대한 공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들은 쿨라크층이 사회주의로 평화롭게 성장해 들어간다는 자신들의 낡아빠진 부르주아적 이론을 되살렸고, 계급의 적이 발밑의 토대를 잃을수록, 사회주의가 성과를 거둘수록 계급의 적의 저항은 더욱 격렬한 형태를 띠게 되며, 계급투쟁은 계급의 적이 절멸된 뒤에야 비로소 “소멸”할 수 있다는 레닌주의의 잘 알려진 명제를 짓밟았다.

부하린-리코프 집단은 당 앞에 선 우경 기회주의 집단이며, 형식에서만 트로츠키주의·지노비예프주의 블록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트로츠키주의자와 지노비예프주의자는 「영구혁명」에 관한 좌경적이고 요란하게 혁명적인 구호로 자신의 항복주의적 본질을 어느 정도 위장할 수 있었다. 반면 당이 쿨라크층에 대한 공세로 넘어가는 데 반대하여 당에 맞선 부하린-리코프 집단은 이미 자신의 항복주의적 얼굴을 위장할 수 없었고, 우리 나라의 반동 세력, 무엇보다 쿨라크층을 공개적으로, 꾸밈없이, 가면 없이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당은 부하린-리코프 집단이 조만간 당에 반대하는 공동 투쟁을 위해 트로츠키주의·지노비예프주의 블록의 잔당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하린-리코프 집단은 정치적 발언과 함께 자기 지지자를 끌어모으는 조직적 「활동」을 벌였다. 부하린을 통해서는 슬레프코프, 마레츠키, 아이헨발트, 골덴베르크 같은 부르주아 청년들을, 톰스키를 통해서는 관료화된 노동조합 상층부(멜니찬스키, 도가도프 등)를, 리코프를 통해서는 타락한 소비에트 상층부(아. 스미르노프, 에이스몬트, 베. 시미트 등)를 규합했다. 정치적으로 타락하고 자신의 항복주의적 기분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이 이 집단에 기꺼이 들어왔다.

이 무렵 부하린-리코프 집단은 모스크바 당 조직 상층부(우글라노프, 코토프, 우하노프, 류틴, 야고다, 폴론스키 등)의 지지를 얻었다. 다만 우파의 일부는 위장한 채 당 노선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모스크바의 당 출판물 지면과 당 회의에서는 쿨라크층에 대한 양보의 필요성, 쿨라크층에 대한 과세의 부적절성, 공업화가 인민에게 지우는 부담, 중공업 건설의 시기상조가 설교되었다. 우글라노프는 드네프르 발전소 건설에 반대하고, 중공업에서 경공업으로 자금을 돌리라고 요구했다. 우글라노프와 다른 우경 항복주의자들은 모스크바는 옛날에도 사라사(옥양목)의 모스크바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므로, 거기에 기계제작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장담했다.

모스크바 당 조직은 우글라노프와 그 지지자들을 폭로하고 최후 경고를 준 다음, 당 중앙위원회 주위에 더욱 굳게 결속했다. 스탈린 동지는 1928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모스크바 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두 전선에서 투쟁을 벌이되 우경 편향에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탈린 동지는 우파가 당 안에 있는 쿨라크의 앞잡이라고 말했다.

“우리 당에서 우경 편향이 승리하면 자본주의의 힘이 풀려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진지가 무너지며,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라고 스탈린 동지는 말했다(『레닌주의의 제문제』, 234쪽).

1929년 초 부하린이 우경 항복주의자 그룹의 위임을 받아 카메네프를 통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연락을 취하고, 당에 맞서 공동 투쟁을 벌이기 위한 협정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앙위원회는 우경 항복주의자들의 이러한 범죄적 활동을 폭로하고, 이 일이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 및 다른 자들에게 비참한 결과로 끝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우경 항복주의자들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들은 중앙위원회에 새로운 반당 강령인 선언서를 들고 나왔고, 중앙위원회는 이를 규탄했다.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의 운명을 상기시키며 그들에게 다시 경고했다. 그런데도 부하린-리코프 그룹은 반당 활동을 계속했다. 리코프, 톰스키, 부하린은 이것으로 당을 위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중앙위원회에 사퇴서를 제출했다. 중앙위원회는 이러한 사퇴라는 태업 정책을 규탄했다. 마침내 1929년 1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우경 기회주의자들의 견해를 선전하는 일이 당에 남아 있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우경 항복주의자들의 선동자이자 지도자인 부하린을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제명할 것을 제의했으며, 리코프, 톰스키 및 우경 반대파의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엄중한 경고를 했다.

우경 항복주의자들의 두목들은 사태가 비참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고, 자신들의 오류와 당의 정치 노선이 옳음을 인정하는 성명서를 제출했다.

우경 항복주의자들은 자기 간부들을 궤멸에서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당과 우경 항복주의자들의 투쟁은 첫 번째 단계가 끝났다.

당 안의 새로운 의견 차이는 소련의 외부 적들의 눈에도 띄었다. 그들은 당 안의 "새로운 불화"가 당이 약해진 징후라고 생각하고,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이고 아직 튼튼해지지 못한 국가 공업화 사업을 깨뜨리려고 새로이 시도했다. 1929년 여름 제국주의자들은 중국과 소련의 분쟁을 일으키고, 중국 군벌들이 (소련 소유였던) 중동 철도를 점령하게 하고, 백계 중국 군대가 우리 조국의 극동 국경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중국 군벌들의 습격은 짧은 기간에 분쇄되었고, 군벌들은 붉은 군대에 격파되어 물러났으며, 분쟁은 만주 당국과의 평화 협정으로 끝났다.

소련의 평화 정책은 외부 적들의 음모와 당 내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릅쓰고 또 한 번 승리했다.

얼마 후 영국 보수당 정부가 한때 단절했던 소련과 영국의 외교 관계와 무역 관계가 회복되었다.

당은 외부와 내부 적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치면서, 동시에 중공업 건설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경쟁을 조직하고, 소프호스와 콜호스를 건설하고, 끝으로 국민경제 제1차 5개년 계획을 채택하고 실행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마련하는 대규모 작업을 수행했다.

1929년 4월 제16차 당협의회가 열렸다. 협의회의 주요 안건은 제1차 5개년 계획이었다. 협의회는 우경 항복주의자들이 옹호하던 5개년 계획의 "최소" 안을 배격하고, 어떤 조건에서도 반드시 이행해야 할 안으로서 5개년 계획의 "최적" 안을 채택했다.

이리하여 당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유명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채택했다.

5개년 계획에 따라 1928~1933년의 국민경제 기본 투자액은 646억 루블로 정해졌다. 그중 전기화를 포함한 공업에 195억 루블, 운수에 100억 루블, 농업에 232억 루블을 투자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소련의 공업과 농업을 현대 기술로 무장시키는 웅대한 계획이었다.

“5개년 계획의 기본 과업은,— 스탈린 동지가 지적했듯이,— 우리나라에 사회주의를 토대로 하여 공업 전체뿐 아니라 운수와 농업까지도 재무장시키고 재편할 수 있는 그러한 공업을 창설하는 데 있었다”(스탈린, 『레닌주의의 제문제』, 485쪽).

이 계획은 그 모든 웅대함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에게 결코 뜻밖의 것이거나 아찔한 것이 아니었다. 이 계획은 공업화와 집단화의 발전 과정 전체에 의해 준비된 것이었다. 또한 그에 앞서 노동자와 농민을 사로잡았고 사회주의 경쟁에서 그 표현을 찾은 노동의 고양에 의해 준비된 것이었다.

제16차 당협의회는 사회주의 경쟁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모든 근로 대중에게 보냈다.

사회주의 경쟁은 노동의 훌륭한 본보기와 노동에 대한 새로운 태도의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노동자와 콜호스원들은 많은 기업과 콜호스, 소프호스에서 대항 계획을 내놓았다. 그들은 영웅적 노동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당과 정부가 세운 사회주의 건설 계획을 완수했을 뿐 아니라 초과 달성했다. 노동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바뀌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강제된 징역과 같은 의무였던 노동이 “명예의 일, 영광의 일, 용맹과 영웅성의 일”로 바뀌기 시작했다(스탈린).

전국에서 새로운 거대한 공업 건설이 진행되었다.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돈바스에서는 크라마토르스크와 고를로프카 공장의 건설, 루간스크 기관차 제작 공장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탄광과 용광로가 들어섰다. 우랄에서는 우랄마시스트로이, 베레즈니키와 솔리캄스크 화학 콤비나트가 건설되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공장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모스크바와 고리키에서 대규모 자동차 공장의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거대한 트랙터 공장과 콤바인 공장, 로스토프나도누의 거대한 농기계 공장이 건설되었다. 소련의 제2 석탄 기지인 쿠즈바스가 확장되었다. 거대한 트랙터 공장이 스탈린그라드의 초원에 11개월 만에 들어섰다. 드네프르 수력발전소와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건설에서 노동자들은 노동 생산성의 세계 기록을 넘어섰다.

역사는 새로운 공업 건설의 이토록 거대한 규모도, 새로운 건설의 이토록 뜨거운 열정도, 수백만 노동계급 대중의 이토록 훌륭한 노동 영웅주의도 아직 알지 못했다.

이는 사회주의 경쟁을 토대로 전개된 노동계급의 참된 노동의 고양이었다.

농민은 이번에는 노동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농촌에서도 콜호스를 세우는 농민 대중의 노동 열기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농민 대중은 분명하게 콜호스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트랙터와 그 밖의 기계로 무장한 소프호스와 기계·트랙터 보급소가 큰 역할을 했다. 농민들은 무리를 지어 소프호스와 기계·트랙터 보급소에 와서 트랙터와 농업기계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감탄을 나타낸 뒤 그 자리에서 “콜호스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작고 잘게 쪼개진 개인 농가로 갈라져 있고, 그럭저럭 쓸 만한 농기구와 역축조차 없으며, 광대한 처녀지를 갈아엎을 가능성도 없고, 농사를 개선할 전망도 없이, 궁핍에 짓눌린 채 외롭게 스스로에게 내맡겨져 있던 농민들은 마침내 출구를,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다. 그 길은 소규모 농가를 집단으로, 곧 콜호스로 통합하는 데 있었고, 어떤 “단단한 땅”이든 어떤 처녀지든 갈아엎을 수 있는 트랙터에 있었으며, 기계와 돈과 사람과 조언으로 돕는 국가의 원조에 있었고, 얼마 전 소비에트 정부가 쳐부수어 땅에 엎드리게 함으로써 수백만 농민 대중을 기쁘게 했던 쿨라크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었다.

이를 토대로 이후 대규모 콜호스 운동이 시작되어 전개되었으며, 이 운동은 특히 1929년 말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어, 우리의 사회주의 공업조차 아직 알지 못했던 전례 없는 콜호스 성장 속도를 보여 주었다.

콜호스의 파종 면적은 1928년에 139만 헥타르, 1929년에 426만 2천 헥타르였고, 1930년에는 콜호스가 이미 1천 5백만 헥타르의 경작지 개간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 동지는 논문 「대전환의 해」(1929년)에서 콜호스의 성장 속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사회화된 대공업조차 이처럼 폭풍 같은 발전 속도를 알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대공업의 발전 속도는 원래 매우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인데도 그러하다.”

이것은 콜호스 운동 발전의 전환점이었다.

이것은 대규모 콜호스 운동의 시작이었다.

“오늘날의 콜호스 운동에서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하고 스탈린 동지는 논문 「대전환의 해」에서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오늘날의 콜호스 운동에서 새롭고 결정적인 것은, 농민들이 이전처럼 따로따로 몇몇씩 콜호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을, 읍, 구역, 심지어 관구 단위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중농이 콜호스로 들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소비에트 권력의 가장 중요한 성과를 이루는 농업 발전의 근본적 전환의 기초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전면적 집단화를 토대로 쿨라크층을 계급으로서 청산하는 과제가 무르익고 있거나 이미 무르익었음을 뜻했다.

간단한 결론.

국가의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한 투쟁에서 당은 1926~1929년에 국내외의 막대한 난관을 극복했다. 당과 노동계급의 노력은 국가의 사회주의 공업화 정책을 승리로 이끌었다.

공업화의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인 중공업 건설 자금의 축적 과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모든 국민경제를 재무장시킬 수 있는 중공업의 기초가 놓였다.

사회주의 건설의 제1차 5개년 계획이 채택되었다. 새로운 공장, 소프호스, 콜호스의 대규모 건설이 전개되었다.

사회주의 길로 나아가는 이 전진은 국내의 계급투쟁 격화와 당내 투쟁 격화를 동반했다. 이 투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쿨라크층의 저항을 진압한 것,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파의 투항주의 블록이 반소비에트 블록임을 폭로한 것, 우파 투항주의자들이 쿨라크의 앞잡이임을 폭로한 것,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당에서 추방한 것,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우파 기회주의자들의 견해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당원 자격과 양립할 수 없다고 인정한 것.

볼셰비키당에 의해 사상적으로 격파되고 노동계급 내에서 모든 기반을 잃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정치적 조류이기를 그치고, 원칙 없는 출세주의자 도당, 정치적 사기꾼들의 패거리, 정치적 양면분자들의 무리로 변해 버렸다.

중공업의 기초를 놓은 당은 노동계급과 농민층을 소련 사회주의 개조의 제1차 5개년 계획 수행에 동원한다. 나라에서는 수백만 근로 대중의 사회주의 경쟁이 펼쳐지고, 강력한 노동 열기의 고조가 일어나며, 새로운 노동 규율이 만들어진다.

이 시기는 대전환의 해로 끝나는데, 이 해는 공업에서 사회주의가 거둔 최대의 성과, 농업에서의 최초의 중대한 성과, 중농이 콜호스 쪽으로 돌아선 것, 대중적 콜호스 운동의 시작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