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PeopleJoseph Stalin, Vyacheslav Molotov, Andrei Zhdanov, Emelyan Yaroslavsky, Pyotr Pospelov, Vladimir Lenin, Karl Marx, Friedrich Engels TermsShort Course of the History of the All-Union Communist Party (Bolsheviks), Dialectical Materialism, Historical Materialism

제1장 러시아에서 사회민주노동당을 창건하기 위한 투쟁 (1883~1901년)

1. 농노제의 폐지와 러시아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 근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출현. 노동운동의 첫걸음.

차르 러시아는 다른 나라들보다 늦게 자본주의 발전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 세기 60년대까지 러시아에는 공장이 매우 적었다. 귀족 지주의 농노제 경제가 지배적이었다. 농노제 아래에서는 공업이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 예속적인 농노 노동은 농업에서 낮은 노동생산성을 낳았다. 경제 발전의 전체 과정이 농노제 폐지로 몰아갔다. 크림 전쟁 때의 군사적 패배로 약해지고 지주에 맞선 농민의 "폭동"에 겁먹은 차르 정부는 1861년에 농노제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노제가 폐지된 뒤에도 지주들은 계속 농민을 억압했다. 지주들은 "해방" 때 농민이 이전에 사용하던 토지의 상당 부분을 떼어 빼앗아 농민을 약탈했다. 농민들은 이 토지를 "절취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자신의 "해방"에 대한 대가로 지주에게 약 20억 루블의 보상금을 내야 했다.

농노제가 폐지된 뒤 농민들은 가장 가혹한 조건으로 지주의 토지를 임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주는 임차료를 돈으로 받는 것 외에도, 농민에게 농민 자신의 농기구와 말로 지주 소유지의 일정한 면적을 무상으로 경작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많았다. 이것을 "노역", "부역"이라고 불렀다. 가장 흔한 경우, 농민은 토지 임차료를 수확물의 절반에 해당하는 현물로 지주에게 내야 했다. 이것을 "반타작" 소작이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농노제 아래에서와 거의 같은 상태가 남아 있었으며, 다른 점은 다만 이제 농민이 인신의 자유를 얻어 물건처럼 팔리거나 사들여질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지주들은 갖가지 약탈적 방법(임차, 벌금)으로 낙후한 농민 경영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냈다. 농민층의 대다수는 지주의 압제 때문에 자기 경영을 개선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혁명 전 러시아 농업의 극심한 낙후가 비롯되었고, 이것이 잦은 흉작과 기근을 낳았다.

농노제적 경영의 잔재와 막대한 세금, 지주에게 내는 상환금은 농민 경영의 수익을 넘어서는 일이 많았고, 농민 대중을 파산과 궁핍으로 몰아넣어 농민들이 돈벌이를 찾아 농촌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들은 공장으로 갔다. 공장주들은 값싼 노동력을 얻었다.

노동자와 농민 위에는 군 경찰서장, 경찰관, 헌병, 순경, 순찰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리가 버티고 서서 차르와 자본가, 지주를 근로 대중과 피착취자에 맞서 지켰다. 1903년까지 체형이 있었다. 농노제가 폐지되었는데도 농민들은 사소한 잘못이나 세금 미납으로 회초리를 맞았다. 노동자들은 경찰과 카자크에게 구타당했다. 특히 공장주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일을 멈추는 파업 때 그러했다. 차르 러시아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없었다. 차르 전제정치는 인민의 가장 악랄한 적이었다.

차르 러시아는 민족들의 감옥이었다. 차르 러시아의 수많은 비러시아계 민족들은 전혀 권리가 없었고, 끊임없이 온갖 굴욕과 모욕을 당했다. 차르 정부는 러시아 주민들이 민족 지역의 토착 민족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도록 길들였고, 그들을 공식적으로 "이민족"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에 대한 멸시와 증오를 키웠다. 차르 정부는 일부러 민족 간 불화를 부채질하고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 부추겼으며, 유대인 포그롬과 자캅카지예의 타타르-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조직했다.

민족 지역에서는 모든 국가 관직, 또는 거의 모든 관직을 러시아인 관리가 차지했다. 관청과 법원의 모든 업무는 러시아어로 처리되었다. 민족어로 신문과 책을 출판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학교에서 모국어로 가르치는 것도 금지되었다. 차르 정부는 민족 문화의 온갖 표현을 질식시키려 했고, 비러시아계 민족을 강제로 "러시아화"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차르정은 비러시아계 민족들의 사형집행인이자 박해자로 행세했다.

농노제 폐지 후 러시아에서 산업 자본주의는 아직 그 발전을 지연시키던 농노제 잔재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르게 발전했다. 1865년부터 1890년까지 25년 동안 대규모 공장과 철도에서만 노동자 수가 70만 6천 명에서 143만 3천 명으로, 즉 두 배 이상 늘어났다.

1890년대에는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대공업이 더욱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 말까지 대규모 공장, 광산업, 철도의 노동자 수는 유럽 러시아의 50개 현만 보아도 220만 7천 명으로, 러시아 전체로는 279만 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근대적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였으며, 대규모 자본주의 기업에서의 단결력에서도, 전투적·혁명적 자질에서도 농노제 시기 공장의 노동자와 소규모·가내공업을 비롯한 온갖 산업의 노동자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1890년대의 산업 상승은 무엇보다 철도 건설의 강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10년 동안(1890~1900년) 2만 1천 베르스타 이상의 새로운 철도 선로가 건설되었다. 철도에는 막대한 양의 금속(레일, 기관차, 객차·화차용)이 필요했고, 연료인 석탄과 석유도 갈수록 더 많이 필요했다. 이것이 야금업과 연료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혁명 전 러시아에서도 산업 상승기는 산업 공황과 산업 침체기로 바뀌었고, 이것은 노동계급에게 심한 타격을 주어 수십만 노동자를 실업과 궁핍으로 내몰았다.

농노제 폐지 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기는 했지만, 러시아는 경제 발전에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뒤처져 있었다. 주민의 압도적 다수는 아직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레닌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1897년에 실시된 전국 인구조사의 중요한 수치를 제시했다. 조사 결과, 농업에는 전체 주민의 약 6분의 5가 종사했고, 대공업과 소공업, 상업, 철도 및 수운, 건설, 삼림 벌채 등에 종사한 사람은 전체 주민의 약 6분의 1에 불과했다.

이는 러시아가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었는데도 농업국이며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 소부르주아적 나라, 즉 영세한 소유자의 생산성 낮은 개인 농민 경제가 아직 우세한 나라였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도시에서만이 아니라 농촌에서도 진행되었다. 혁명 전 러시아에서 가장 수가 많은 계급인 농민층은 분해되고 계층으로 갈라졌다. 농촌에서는 가장 부유한 농민들 가운데서 쿨라크 상층, 즉 농촌 부르주아지가 갈라져 나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농민이 몰락하여 빈농층,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와 반(半)프롤레타리아트의 수가 늘어났다. 반면 중농의 수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1903년 러시아에는 약 1천만 농가가 있었다. 레닌은 소책자 『농촌 빈농에게』에서 이 가운데 350만 농가 이상이 말이 없는 농가라고 계산했다. 이 가장 가난한 농가는 대개 얼마 되지 않는 땅 한 조각만 경작하고 나머지 땅은 쿨라크에게 소작으로 내주었으며, 자신들은 품팔이를 나갔다. 처지로 보아 최빈농은 프롤레타리아트에 가장 가까웠다. 레닌은 이들을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또는 반(半)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 150만의 부유한 쿨라크 농가(전체 1천만 농가 가운데)가 농민 경작지의 절반을 손에 넣었다. 이 농민 부르주아지는 빈농과 중농을 억압하고, 고농과 날품팔이의 노동으로 치부하며 농업 자본가로 변해 가면서 부유해졌다.

지난 세기의 70년대에, 특히 80년대에 이미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각성하기 시작하여 자본가들과 투쟁을 벌였다. 차르 러시아에서 노동자의 처지는 유난히 고달팠다. 80년대에 공장의 노동일은 12시간 반 이상이었고, 섬유 공업에서는 14~15시간에 이르렀다. 여성과 아동의 노동 착취가 널리 행해졌다. 아동은 어른과 같은 시간을 일했으나 여성과 마찬가지로 임금은 훨씬 적게 받았다.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았다. 노동자의 대다수는 한 달에 7~8루블을 받았다. 금속 가공 공장과 주물 공장에서 임금이 가장 높은 노동자도 한 달에 35루블을 넘지 못했다. 노동 보호는 전혀 없었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불구가 되거나 죽었다. 노동자 보험도 없었고, 의료 지원은 돈을 내야만 받을 수 있었다. 주거 조건은 유난히 열악했다. 작은 "쪽방"과 노동자 합숙소에서 노동자들이 10~12명씩 살았다. 공장주들은 걸핏하면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덜 주었고, 주인 상점에서 식료품을 몇 배나 비싸게 사도록 강요했으며, 벌금으로 노동자들을 수탈했다.

노동자들은 서로 뜻을 모아 공동으로 공장주에게 견딜 수 없는 처지를 개선해 달라는 요구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손을 놓았다. 즉 스트라이크, 파업을 선언했다. 70~80년대의 첫 파업들은 보통 터무니없는 벌금, 임금 지불 때의 속임수와 기만, 임금 단가 인하 때문에 일어났다.

첫 파업 때 참다못한 노동자들은 이따금 기계를 부수고, 공장 건물의 유리창을 깨고, 주인 상점과 사무실을 때려 부수었다.

선진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성공적으로 싸우려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노동자 동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75년 오데사에서 "남러시아 노동자 동맹"이 조직되었다. 이 최초의 노동자 조직은 8~9개월 존속하다가 차르 정부에 의해 분쇄되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1878년에 「러시아 노동자 북부 동맹」이 조직되었는데, 그 지도자는 목수 할투린과 자물쇠공 오브노르스키였다. 이 동맹의 강령에는 그 임무로 보아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에 가깝다고 적혀 있었다. 동맹의 최종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 즉 “국가의 현존 정치·경제 체제를 극도로 부당한 체제로서 전복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동맹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브노르스키는 한동안 외국에 살면서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마르크스가 이끄는 제1인터내셔널의 활동을 알게 되었다. 이는 「러시아 노동자 북부 동맹」의 강령에 흔적을 남겼다. 이 동맹은 당면 과제로 민중을 위한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언론·출판의 자유, 집회의 권리 등)의 쟁취를 내걸었다. 당면 요구 가운데에는 노동일 제한도 들어 있었다.

동맹의 성원은 200명에 달했고, 동조자도 그만큼 있었다. 동맹은 노동자 파업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파업을 지도했다. 차르 정부는 이 노동자 동맹도 분쇄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더욱더 새로운 지역을 포괄하면서 계속 성장했고, 80년대에는 많은 파업이 일어났다. 5년 동안(1881~1886년) 파업은 48건이 넘었고, 파업 참가 노동자는 8만 명이었다.

혁명운동사에서 특히 큰 의의를 지닌 것은 1885년 오레호보-주예보의 모로조프 공장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업이었다.

이 공장에서는 약 8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노동 조건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1882년부터 1884년까지 임금이 다섯 차례 삭감되었으며, 1884년에는 단가가 한꺼번에 4분의 1, 즉 25퍼센트나 인하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장주 모로조프는 벌금으로 노동자들을 괴롭혔다. 파업 후 재판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노동자가 번 1루블마다 벌금이라는 명목으로 30~50코페이카가 공장주의 몫으로 빼앗겼다. 노동자들은 이 약탈을 견디지 못하고 1885년 1월에 파업을 선언했다. 파업은 미리 조직되었다. 파업을 지도한 것은 이전에 「러시아 노동자 북부 동맹」의 성원이었고 이미 혁명 경험을 지닌 선진 노동자 표트르 모이세옌코였다. 파업 전날 모이세옌코는 가장 의식 있는 다른 직조공들과 함께 공장주에게 제시할 여러 요구를 작성했고, 이 요구는 노동자들의 비밀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은 약탈적인 벌금의 폐지를 요구했다.

이 파업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6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수십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와 비슷한 파업이 1885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의 공장들에서도 일어났다.

이듬해 차르 정부는 노동운동의 성장에 겁을 먹고 벌금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법률에는 벌금이 공장주의 주머니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필요를 위해 쓰여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모로조프 파업과 다른 파업들의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은 조직적인 투쟁으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운동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굳건히 옹호하는 유능한 지도자와 조직자를 자기 대열에서 내놓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동운동의 성장을 토대로, 또 서유럽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 러시아의 나로드니키와 마르크스주의. 플레하노프와 그의 「노동해방단」. 플레하노프의 나로드니키 비판 투쟁.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전파.

마르크스주의 서클이 나타나기 전까지 러시아에서 혁명 활동을 벌인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반대자였던 나로드니키였다.

최초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서클은 1883년에 나타났다. 그것은 게. 브. 플레하노프가 해외 제네바에서 조직한 「노동해방단」이었다. 플레하노프는 혁명 활동 때문에 차르 정부의 박해를 받아 제네바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레하노프 자신도 그전에는 나로드니키였다. 망명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알게 되자 그는 나로드니키주의와 결별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뛰어난 선전가가 되었다.

「노동해방단」은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는 데 큰 일을 해냈다. 이 단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공산당 선언』, 『임금노동과 자본』,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등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해외에서 인쇄하고, 러시아에 비밀리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게. 브. 플레하노프, 자술리치, 악셀로드와 이 단체의 다른 구성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학설을 해명하고 과학적 사회주의의 사상을 해명하는 여러 저작도 썼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스승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사회주의가 몽상가(공상가)들의 발명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 발전의 필연적 결과임을 처음으로 해명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농노제가 몰락했듯이 몰락하리라는 것, 자본주의가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신의 무덤 파는 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만이, 오직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만이 인류를 자본주의로부터, 착취로부터 구해낼 것임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자각하며, 부르주아지와의 결전을 위해 단결하도록 가르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법칙을 발견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그 안의 계급투쟁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몰락,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의 권력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바꾸는 일은 평화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노동계급이 이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오직 부르주아지에 대한 혁명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지배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확립하는 것뿐이라고 가르쳤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누르고 새로운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업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혁명적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선진적인 계급이라는 것, 프롤레타리아트 같은 계급만이 자본주의에 불만을 품은 모든 세력을 자기 주위에 결집시켜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낡은 세계를 이기고 새로운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고유한 노동자 정당을 가져야 하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정당을 공산당이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전파하는 일에 착수한 것이 최초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서클인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단」이었다.

「노동해방단」은 러시아에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아직 없던 때에 러시아어 해외 출판물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론적으로, 사상적으로 이 운동의 길을 닦아야 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퍼져 나가는 길을 가로막은 주된 사상적 장애물은 선진 노동자와 혁명적 성향의 인텔리겐치야 사이에 우세하던 나로드니키적 견해였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계급은 조직적인 혁명 투쟁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선진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나로드니키는 노동계급의 선진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다. 러시아 나로드니키는 주요 혁명 세력이 노동계급이 아니라 농민층이며, 차르와 지주의 권력은 농민의 “반란”만으로도 전복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나로드니키는 노동계급을 알지 못했고, 노동계급과의 동맹과 그 지도 없이는 농민만으로 차리즘과 지주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는 노동계급이 사회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가장 선진적인 계급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는 처음에 농민을 일으켜 차르 정부에 맞서 투쟁하게 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혁명적 인텔리겐치야 청년들이 농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농촌으로—당시 말대로 “민중 속으로”—들어갔다. “나로드니키”라는 명칭은 여기서 생겨났다. 그러나 농민층은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이 농민을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로드니키 대다수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자 나로드니키는 민중 없이 자기들 힘만으로 차르 전제정에 맞서 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더욱 심각한 오류로 이어졌다.

나로드니키의 비밀 결사 「민의 의지」는 차르 암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81년 3월 1일, 민의 의지파는 폭탄을 던져 차르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민중에게 아무런 이익도 가져오지 않았다. 개별 인물을 암살해서는 차르 전제정을 전복할 수 없었고, 지주 계급을 없앨 수도 없었다. 살해된 차르 자리에는 다른 차르—알렉산드르 3세—가 나타났고, 그의 치하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더욱 살기 어려워졌다.

나로드니키가 개별 암살, 개인 테러로 차리즘과 싸우는 길을 선택한 것은 잘못이었고 혁명에 해로웠다. 개인 테러 정책은 능동적인 “영웅”과, “영웅”에게서 위업을 기대하는 수동적인 “군중”에 관한 나로드니키의 그릇된 이론에서 나왔다. 이 그릇된 이론은 오직 뛰어난 개인들만이 역사를 만들며, 대중, 민중, 계급, 곧 나로드니키 문필가들이 경멸적으로 일컬은 “군중”은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을 할 능력이 없고 “영웅”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만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로드니키는 농민층과 노동계급 속에서 하는 대중적 혁명 활동을 포기하고 개인 테러로 넘어갔다. 나로드니키는 당시 가장 위대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인 스테판 할투린에게 혁명적 노동자 동맹을 조직하는 일을 그만두고 전적으로 테러에 매달리도록 만들었다.

나로드니키는 억압자 계급과의 투쟁에서 근로 대중의 관심을 돌려, 혁명에 쓸모없는 그 계급의 개별 대표자 암살로 향하게 했다. 그들은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혁명적 창발성과 활동성이 발전하는 것을 저해했다.

나로드니키는 노동계급이 혁명에서 자신의 지도적 역할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했고,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당 창건을 지연시켰다.

나로드니키의 비밀 조직은 차르 정부에 의해 분쇄되었지만, 나로드니키적 견해는 혁명적 성향의 인텔리겐치야 사이에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나로드니키의 잔당은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퍼지는 것에 완강히 저항했고, 노동계급의 조직을 방해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나로드니키와의 투쟁 속에서만 성장하고 공고해질 수 있었다.

「노동해방단」은 나로드니키의 잘못된 견해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고, 나로드니키의 학설과 그들의 투쟁 방식이 노동운동에 어떤 해를 끼치는지 보여주었다.

나로드니키에 맞서 쓴 저작들에서 플레하노프는, 나로드니키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그들의 견해는 과학적 사회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음을 보여주었다.

플레하노프는 나로드니키의 잘못된 견해에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가했다. 나로드니키의 견해에 날카로운 타격을 가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훌륭하게 옹호했다.

플레하노프가 결정적 타격을 가한 나로드니키의 기본적인 오류는 무엇이었는가?

첫째, 나로드니키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는 "우연한" 현상이며 러시아에서 발전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도 성장하고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나로드니키는 노동계급을 혁명의 선진 계급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사회주의에 도달하기를 꿈꾸었다. 나로드니키는 인텔리겐치야가 이끄는 농민층을 주요 혁명 역량으로 여겼고, 농촌 공동체를 사회주의의 싹이자 기초로 보았다.

셋째, 나로드니키는 인류 역사의 전체 과정에 대해 잘못되고 해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발전 법칙을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완전히 뒤떨어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역사를 만드는 것은 계급도 계급투쟁도 아니고 오직 개별적인 뛰어난 인물, 곧 "영웅"이며, 대중과 "군중", 민중, 계급은 그 뒤를 맹목적으로 따라갈 뿐이었다.

플레하노프는 나로드니키에 맞서 싸우고 그들을 폭로하면서 일련의 마르크스주의 저작을 썼고,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저작들로 배우고 자랐다. 「사회주의와 정치투쟁」, 「우리의 의견 차이」, 「역사에 대한 일원론적 견해의 발전 문제에 대하여」 같은 플레하노프의 저작은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승리하는 데 필요한 터를 닦았다.

플레하노프는 자신의 저작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문제들을 서술했다. 특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은 1895년에 출간된 그의 책 「역사에 대한 일원론적 견해의 발전 문제에 대하여」였다. 레닌은 이 책으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의 한 세대 전체가 교육되었다"고 지적했다(레닌, 제14권, 347쪽).

나로드니키에 맞서 쓴 저작들에서 플레하노프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는 발전해야 하는가 발전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나로드니키식 문제 설정이 터무니없음을 증명했다. 플레하노프가 사실로 이를 증명하며 말했듯이, 문제는 러시아가 이미 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섰고 러시아를 이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혁명가들의 과제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었다—그들은 어차피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혁명가들의 과제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낳는 강력한 혁명 역량인 노동계급에 의지하여,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노동계급을 조직하며, 노동계급이 자신의 노동자당을 창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플레하노프는 나로드니키의 두 번째 기본 오류, 곧 혁명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맡은 선진적 역할을 그들이 부정한 것도 분쇄했다. 나로드니키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나타난 것을 일종의 "역사적 불행"으로 여겼고,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종기"를 두고 글을 썼다.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주의 학설과 그 학설이 러시아에 완전히 적용될 수 있음을 옹호하면서, 농민층이 수적으로 우세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비교적 소수이지만—바로 프롤레타리아트에, 그 성장에 혁명가들은 주된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증명했다.

왜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인가?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재 그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진적인 경제 형태인 대규모 생산과 결부되어 있는 근로 계급이며, 따라서 큰 장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으로서 해마다 성장하고 정치적으로 발전하며, 대규모 생산에서의 노동 조건 덕분에 쉽게 조직되고, 프롤레타리아적 처지 덕분에 가장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쇠사슬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농민층은 사정이 다르다.

농민층(개별 농민층을 두고 한 말이다— 편집자)은 그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뒤떨어진 경제 형태인 소규모 생산과 결부되어 있는 근로 계급이며, 그 때문에 큰 장래성을 지니지 못하고 지닐 수도 없다.

농민층은 계급으로서 성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마다 부르주아지(쿨라크)와 빈농층(프롤레타리아, 반(半)프롤레타리아)으로 분해된다. 게다가 농민층은 흩어져 있기 때문에 조직되기 더 어렵고, 소유자적 처지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보다 혁명 운동에 덜 적극적으로 나선다.

나로드니키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농민 공동체를 통해서 올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공동체를 사회주의의 싹이자 토대로 여겼다. 그러나 공동체는 사회주의의 토대도 싹도 아니었고 될 수도 없었다. 공동체 안에서는 빈농, 고농, 힘없는 중농을 착취하는 쿨라크, 곧 "미로예드"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상 존재하던 공동체적 토지 소유와 때때로 이루어지던 인구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는 사태를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토지는 공동체 성원 가운데 역축, 농기구, 종자를 가진 자들, 즉 유복한 중농과 쿨라크가 이용했다. 말이 없는 농민, 빈농, 그리고 대체로 힘없는 농민은 토지를 쿨라크에게 넘기고 머슴살이, 고농살이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농민 공동체는 사실상 쿨라크의 횡포를 가리기에 편리한 형태였고, 차리즘이 연대 책임 원칙에 따라 농민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값싼 수단이었다. 그래서 차리즘은 농민 공동체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한 공동체를 사회주의의 싹이나 토대로 여기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플레하노프는 사회 발전에서 "영웅", 곧 걸출한 개인과 그들의 사상이 으뜸가는 역할을 하고 대중, "군중", 인민, 계급은 보잘것없는 역할을 한다는 나로드니키의 세 번째 기본적인 오류도 분쇄했다. 플레하노프는 나로드니키가 관념론에 빠져 있다고 비난하면서, 진리는 관념론 편이 아니라 마르크스—엥겔스의 유물론 편에 있음을 증명했다.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관점을 발전시키고 그 근거를 밝혔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에 따라, 사회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걸출한 개인의 소망과 사상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 존재 조건의 발전, 사회의 존립에 필요한 물질적 재화의 생산 방식의 변화, 물질적 재화 생산 영역에서 계급 간 관계의 변화,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위치를 둘러싼 계급 투쟁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상이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그들의 사상을 규정한다. 걸출한 개인은 그의 사상과 소망이 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어긋나고 선진 계급의 요구와 어긋난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할 수 있으며, 거꾸로 걸출한 사람은 그의 사상과 소망이 사회의 경제적 발전의 요구, 선진 계급의 요구를 올바르게 표현한다면 참으로 걸출한 인물이 될 수 있다.

대중은 군중이며 오직 영웅만이 역사를 만들고 군중을 인민으로 만든다는 나로드니키의 주장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역사가 영웅을 만든다, 따라서 인민을 창조하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인민이 영웅을 창조하고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영웅, 걸출한 개인은 사회 발전의 조건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만 사회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영웅, 걸출한 개인이 사회 발전의 조건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역사의 "창조자"라고 착각하여 사회의 역사적 요구에 맞서 밀어붙이기 시작한다면, 우스꽝스럽고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실패자의 처지에 빠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영웅-실패자 부류에 나로드니키가 속했다.

플레하노프의 저술과 나로드니키에 맞선 그의 투쟁은 혁명적 인텔리겐치야 사이에서 나로드니키의 영향력을 철저히 무너뜨렸다. 그러나 나로드니키의 사상적 분쇄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의 적인 나로드니키를 끝장내는 과업은 레닌의 몫이 되었다.

나로드니키의 대다수는 「인민의 의지」당이 분쇄된 직후 차르 정부에 맞선 혁명적 투쟁을 포기하고 차르 정부와의 화해와 타협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80년대와 90년대에 나로드니키는 쿨라크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가 되었다.

「노동해방단」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강령 초안을 두 개(첫 번째는 1884년, 두 번째는 1887년) 작성했다. 이는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당을 창건하기 위한 준비에서 매우 중요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노동해방단」에는 심각한 오류도 있었다. 그 첫 번째 강령 초안에는 나로드니키적 견해의 잔재가 남아 있었고 개인 테러 전술이 허용되었다. 플레하노프는 또한 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층을 이끌 수 있고 또 이끌어야 하며, 농민층과 동맹해야만 프롤레타리아트가 차리즘에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플레하노프는 또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혁명에 지원을, 비록 견고하지 못한 지원이기는 하나, 줄 수 있는 힘으로 보았으며, 농민층은 일부 저작에서 아예 계산에서 제외하고 예컨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외에, 우리 나라에서 반대파나 혁명적 연합이 의지할 수 있을 만한 다른 사회적 힘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플레하노프, 제3권, 119쪽).

플레하노프의 이러한 그릇된 견해는 그의 장래 멘셰비키적 견해의 싹이었다.

「노동해방단」과 당시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은 아직 노동운동과 실천적으로 결합하지 못했다. 이때는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상,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적 원칙이 생겨나고 굳어지던 시기였다. 사회민주주의는 1884~1894년의 10년 동안 아직 대중적 노동운동과 결합하지 못했거나 거의 결합하지 못한 소규모 단체와 서클의 형태로 존재했다.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이미 어머니의 태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처럼, 사회민주주의는 레닌이 쓴 대로 “태내 발육 과정”을 겪고 있었다.

「노동해방단」은 “사회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만 창설했을 뿐이며 노동운동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라고 레닌은 지적했다.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노동운동과 결합시키는 과제와 「노동해방단」의 오류를 바로잡는 과제는 레닌이 해결해야 했다.

3. 레닌의 혁명 활동의 시작. 페테르부르크의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

볼셰비즘의 창시자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1870년 심비르스크(현재의 울리야놉스크)에서 태어났다. 1887년 레닌은 카잔 대학에 입학했으나 곧 학생들의 혁명운동에 참가한 이유로 체포되어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카잔에서 레닌은 페도세예프가 조직한 마르크스주의 서클에 가입했다. 레닌이 사마라로 옮겨간 뒤에는 그의 주위에 사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첫 서클이 빠르게 만들어졌다. 그때 이미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식으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1893년 말 레닌은 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갔다. 레닌의 첫 연설은 페테르부르크 마르크스주의 서클의 참가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마르크스에 대한 비범하게 깊은 지식, 당시 러시아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에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하는 능력, 노동계급의 대의가 승리하리라는 뜨겁고 굽힐 줄 모르는 신념, 뛰어난 조직 재능 — 이 모든 것이 레닌을 페테르부르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정하는 지도자로 만들었다.

레닌은 서클에서 함께 공부한 선진 노동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우리의 강의는,” — 노동자 서클에서 한 레닌의 강의를 노동자 바부시킨은 이렇게 회고했다 — “매우 생동감 있고 흥미로웠으며, 우리는 모두 이 강의에 아주 만족했고 강사의 지성에 늘 감탄했다.”

1895년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서클(이미 20개 가량 되었다)을 하나의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으로 통합했다. 이로써 그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노동자당의 창설을 준비했다.

레닌은 「투쟁동맹」에 대중적 노동운동과 더 긴밀히 결합하여 그것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선전 서클에 모인 소수의 선진 노동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던 데서 노동계급의 광범한 대중 속에서 시급한 정치 문제를 다루는 선동으로 넘어가자고 레닌은 제안했다. 대중 선동으로의 이 전환은 러시아 노동운동의 이후 발전에 중대한 의의를 지녔다.

90년대에 공업은 상승기를 맞았다. 노동자의 수가 늘어났다. 노동운동이 강화되었다. 1895년부터 1899년까지 불완전한 통계로도 최소 22만 1천 명의 노동자가 파업했다. 노동운동은 나라의 정치 생활에서 중대한 힘으로 되어갔다. 혁명운동에서 노동계급이 선진적 역할을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나로드니키와 투쟁하면서 옹호한 견해가 삶 자체로 입증되었다.

레닌의 지도 아래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은 노동자들이 경제적 요구 — 노동 조건 개선,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을 위해 벌이는 투쟁 — 를 차르 체제에 반대하는 정치 투쟁과 결합시켰다. 「투쟁동맹」은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교육했다.

레닌의 지도 아래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어느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투쟁동맹」은 서클 참가자들을 통해 공장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전단과 사회주의 선언서를 발행하여 호응했다. 이 전단들은 공장주들이 노동자를 억압하는 사실을 폭로하고, 노동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를 설명했으며,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었다. 전단들은 자본주의의 폐해, 노동자들의 궁핍한 생활, 그들의 지나치게 혹독한 12~14시간 노동, 그들의 무권리 상태에 관한 모든 진실을 말했다. 여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요구도 함께 제시되었다. 1894년 말 레닌은 노동자 바부시킨의 참여 아래 이런 종류의 첫 선동 전단과, 페테르부르크 세먄니코프 공장의 파업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썼다. 1895년 가을 레닌은 토른턴 공장의 파업 중인 남녀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전단을 썼다. 이 공장은 수백만 루블의 이윤을 얻는 영국인 공장주들의 소유였다. 이곳의 노동시간은 14시간이 넘었고, 직공들은 한 달에 약 7루블을 벌었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성공적으로 끝났다. 짧은 기간에 「투쟁동맹」은 여러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이러한 전단과 호소문을 수십 종 인쇄했다. 이러한 전단 하나하나가 노동자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을 돕고 보호한다는 것을 보았다.

1896년 여름 페테르부르크 섬유 노동자 3만 명의 파업은 「투쟁동맹」의 지도 아래 진행되었다. 주요 요구는 노동시간 단축이었다. 이 파업의 압력으로 차르 정부는 노동시간을 11시간 반으로 제한하는 1897년 6월 2일자 법령을 공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법령 이전에는 노동시간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1895년 12월 레닌은 차르 정부에 체포되었다. 레닌은 감옥에서도 혁명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소책자와 전단을 보내, 조언과 지시로 「투쟁동맹」을 도왔다. 감옥에서 레닌은 소책자 「파업에 관하여」와, 차르 정부의 야만적 전횡을 폭로한 전단 「차르 정부에게」를 썼다. 또한 감옥에서 레닌은 당 강령 초안을 썼다(그것은 의학 서적의 행간에 우유로 쓴 것이었다).

페테르부르크 「투쟁동맹」은 러시아의 다른 도시와 지역에서도 노동자 서클들이 같은 동맹으로 통합하도록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90년대 중반 자캅카지예에서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이 생겨났다. 1894년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노동자 동맹」이 결성되었다. 시베리아에서는 90년대 말 시베리아 「사회민주주의 동맹」이 조직되었다. 90년대에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야로슬라블, 코스트로마에서 마르크스주의 그룹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나중에 「사회민주당 북부 동맹」으로 통합되었다. 로스토프나도누, 예카테리노슬라프, 키예프, 니콜라예프, 툴라, 사마라, 카잔, 오레호보주예보 및 그 밖의 도시들에서 90년대 후반 사회민주주의 그룹과 동맹이 창설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의 의의는, 레닌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이 노동운동에 의거한 혁명 정당의 최초의 진지한 맹아였다는 데 있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창설하는 이후의 작업에서 페테르부르크 「투쟁동맹」의 혁명적 경험에 의거했다.

레닌과 그의 가장 가까운 동지들이 체포된 뒤 페테르부르크 「투쟁동맹」 지도부의 구성은 크게 달라졌다. 스스로를 「젊은이들」이라 부르고 레닌과 그의 동지들을 「늙은이들」이라 부르는 새 인물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잘못된 정치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에게는 오직 주인에 맞선 경제투쟁만 호소해야 하며, 정치투쟁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할 일이고 정치투쟁의 지도권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들을 「경제주의자」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내부에 나타난 최초의 타협주의적, 기회주의적 집단이었다.

4. 나로드니키와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한 레닌의 투쟁.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동맹이라는 레닌의 사상.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당대회.

플레하노프가 이미 80년대에 나로드니키적 견해 체계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지만, 90년대 초에도 나로드니키의 견해는 혁명적 청년들 가운데 일부의 공감을 여전히 얻고 있었다. 청년들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가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를 피해 갈 수 있으며 혁명에서 주역을 맡을 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농민층이라고 계속 생각했다. 나로드니키의 잔당은 온갖 수단으로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퍼지는 것을 방해하려 애쓰며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고, 어떻게든 그들을 헐뜯으려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계속 퍼지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창설할 수 있도록 하려면 나로드니키를 사상적으로 끝까지 격파해야 했다.

이 일은 레닌이 해냈다.

레닌은 저서 『「인민의 벗」이란 무엇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어떻게 맞서 싸우는가?』(1894년)에서 나로드니키의 참모습, 곧 실제로는 인민에 맞서 나아가는 거짓 「인민의 벗」임을 끝까지 폭로했다.

90년대의 나로드니키는 본질적으로 오래전에 차르 정부와의 모든 혁명적 투쟁을 포기했다. 자유주의 나로드니키는 차르 정부와의 화해를 설파했다. 당시의 나로드니키에 관해 레닌은 이렇게 썼다. “그들은 이 정부에 잘 부탁하고 다정하게 청하기만 하면 정부가 모든 것을 잘 처리해 줄 수 있다고 단순히 생각한다”(레닌, 제1권, 161쪽).

90년대의 나로드니키는 농촌 빈농층의 처지와 농촌의 계급투쟁, 쿨라크층의 빈농층 착취를 외면하고 쿨라크 농가의 발전을 찬양했다. 그들은 사실상 쿨라크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로 나섰다.

동시에 나로드니키는 자신들의 잡지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중상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를 일부러 왜곡하고 비틀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농촌의 파멸을 바라며 “모든 농부를 공장 솥에 넣어 삶아 버리려” 한다고 장담했다. 이 거짓된 나로드니키적 비판을 폭로하면서 레닌은 문제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희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실제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가 불가피하게 늘어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체제의 무덤을 파는 자가 될 것이다.

레닌은 자본주의적 억압과 지주의 억압을 없애고 차리즘을 없애기를 바라는 진정한 인민의 벗은 나로드니키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임을 보여 주었다.

레닌은 저서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에서 차리즘과 지주,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주된 수단으로서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동맹이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내놓았다.

레닌은 이 시기의 여러 저작에서 나로드니키의 기본 집단인 나로드나야 볼랴 당원들과, 후에 나로드니키의 계승자가 된 사회혁명당원들이 사용한 정치 투쟁 수단, 특히 개인 테러 전술을 비판했다. 레닌은 이 전술이 대중의 투쟁을 고립된 영웅들의 투쟁으로 바꿔 놓기 때문에 혁명 운동에 해롭다고 보았다. 그것은 인민의 혁명 운동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레닌은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에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본 과제를 제시했다. 레닌의 견해에 따르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흩어져 있는 마르크스주의 서클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조직해야 했다. 레닌은 이어서, 차르 전제정을 타도할 것은 농민층과 동맹한 러시아 노동계급이며, 그 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근로 대중 및 피착취 대중과 동맹하고 다른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공개적 정치 투쟁이라는 곧은길을 따라 승리하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40여 년 전에 레닌은 노동계급의 투쟁 길을 올바르게 제시했고, 사회의 선진적 혁명 역량으로서 노동계급의 역할을 규정했으며, 노동계급의 동맹자로서 농민층의 역할을 규정했다.

나로드니키주의에 맞선 레닌과 그 지지자들의 투쟁은 이미 90년대에 나로드니키주의를 사상적으로 완전히 격파하는 결과를 낳았다.

레닌이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벌인 투쟁도 큰 의의를 지녔다. 역사에서 늘 그렇듯이, 큰 사회 운동에는 대개 일시적인 「동반자」들이 달라붙게 마련이다. 이른바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그러한 「동반자」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야가 마르크스주의의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합법적인, 즉 차르 정부가 허가한 신문과 잡지에 논문을 실었다. 그래서 그들을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나로드니키주의와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이 투쟁과 마르크스주의의 깃발을, 노동 운동을 부르주아 사회의 이익,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종속시키고 적응시키는 데 이용하려 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학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학설을 빼 버렸다. 가장 저명한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 표트르 스트루베는 부르주아지를 찬양했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혁명적 투쟁 대신 “우리의 무교양을 인정하고 자본주의에 배우러 가자”고 호소했다.

나로드니키에 맞선 투쟁에서 레닌은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나로드니키에 대항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그들과 일시적으로 협정을 맺는 것, 예컨대 나로드니키에 반대하는 인쇄 문집을 함께 내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레닌은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자유주의적·부르주아적 속내를 폭로하면서 그들을 아주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동반자」들 가운데 다수는 나중에 카데트(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주요 정당)가 되었고, 내전 때에는 지독한 백위군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등의 「투쟁동맹」과 나란히 러시아 서부의 민족 변방에도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이 나타났다. 90년대에 폴란드 민족주의 정당에서 마르크스주의 분자들이 갈라져 나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했다. 90년대 말에는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1897년 10월 러시아 서부 현들에서는 전유대인 사회민주주의 동맹인 번트가 창립되었다.

1898년에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예카테리노슬라프의 여러 「투쟁동맹」과 번트가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통합하려는 첫 시도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당대회에 모였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당대회의 참가자는 모두 9명이었다. 레닌은 당시 시베리아 유형지에 있었으므로 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는 곧 체포되었다. 대회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은 아직 여러 면에서 불충분했다. 「선언」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쟁취해야 할 과업을 비켜 갔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차르 정권과 부르주아지에 맞선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자 문제도 비켜 갔다.

대회는 자신의 결정과 「선언」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창설을 선포했다.

혁명 선전에서 큰 역할을 한 이 형식적 행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당대회의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제1차 당대회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아직 창설되지 않았다. 대회는 개별 마르크스주의 서클과 조직들을 조직적으로 통합하고 연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지방 조직들의 활동에는 아직 단일한 노선이 없었고, 당 강령도, 당 규약도, 단일한 중심의 지도도 없었다.

이 때문에,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원인 때문에 지방 조직들의 사상적 분열은 커져 갔고, 이러한 사정은 노동운동에서 기회주의 조류인 「경제주의」가 강화될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분열을 극복하고 기회주의적 동요를 물리치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창설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레닌의 몇 해에 걸친 긴장된 활동과 그가 조직한 신문 『이스크라』가 필요했다.

5. 「경제주의」에 맞선 레닌의 투쟁. 레닌의 신문 『이스크라』의 출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당대회에 레닌은 없었다. 그는 당시 「투쟁동맹」 사건으로 페테르부르크 감옥에 오래 갇혀 있은 뒤 차르 정부가 그를 몰아넣은 시베리아의 슈셴스코예 마을에 유형 중이었다.

그러나 유형지에서도 레닌은 혁명 활동을 계속했다. 유형지에서 레닌은 나로드니키에 대한 사상적 분쇄를 완결지은 중요한 과학적 저작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완성했다. 그곳에서 그는 널리 알려진 소책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과업」도 썼다.

레닌은 직접적인 혁명 실천 활동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실천가들과 얼마간의 연락을 유지했고, 유형지에서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질문을 보내고 조언을 해주었다. 이 시기에 레닌을 특히 사로잡은 것은 「경제주의자」 문제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경제주의」는 타협주의와 기회주의의 기본 세포이며, 노동운동에서 「경제주의」가 승리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운동이 무너지고 마르크스주의가 패배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레닌은 「경제주의자」들이 나타난 첫날부터 그들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제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오직 경제 투쟁만을 수행해야 하며, 정치 투쟁은 노동자들이 지지해야 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수행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경제주의자」들의 이러한 설교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배신, 노동계급에게 독자적인 정치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부정,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부속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로 보았다.

1899년에 "경제주의자" 그룹(프로코포비치, 쿠스코바 등, 후에 카데트가 된 자들)이 자신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여 나섰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 정치 정당 창건을 포기할 것과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 요구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경제주의자"들은 정치 투쟁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일이며, 노동자들은 고용주에 대한 경제 투쟁만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 기회주의적 문서를 접한 레닌은 가까운 곳에 있던 마르크스주의자 정치 유배자들의 협의회를 소집했고, 레닌을 비롯한 17명의 동지가 "경제주의자"들의 견해에 반대하는 격렬한 규탄 항의문을 채택했다.

레닌이 쓴 이 항의문은 러시아 전역의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에 배포되었고,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발전하는 데 매우 큰 의의를 가졌다.

러시아의 "경제주의자"들은 외국 사회민주당들 안의 마르크스주의 반대자들, 이른바 베른슈타인주의자들, 즉 기회주의자 베른슈타인의 추종자들과 같은 견해를 설파했다.

따라서 "경제주의자"들에 대한 레닌의 투쟁은 동시에 국제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이기도 했다.

"경제주의"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 정치 정당을 창건하기 위한 주된 투쟁은 레닌이 조직한 비합법 신문 『이스크라』가 수행했다.

1900년 초에 레닌과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의 다른 성원들이 시베리아 유형에서 러시아로 돌아왔다. 레닌은 전러시아적인 대규모 비합법 마르크스주의 신문을 창간하려고 구상했다. 이미 러시아에 존재하던 수많은 소규모 마르크스주의 서클과 조직들은 아직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스탈린 동지의 표현대로 "수공업적 방식과 서클주의가 위아래 할 것 없이 당을 좀먹고 있고, 사상적 혼란이 당 내부 생활의 특징이던" 이 시기에, 전러시아 비합법 신문의 창간은 러시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오직 그러한 신문만이 흩어져 있는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을 서로 연결하고 진정한 정당의 창건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신문은 차르 러시아에서는 경찰의 박해 때문에 조직할 수 없었다. 한두 달이면 신문은 차르의 밀정들에게 추적당해 박살났을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신문을 외국에서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신문은 외국에서 가장 얇고 질긴 종이에 인쇄되어 러시아로 비밀리에 발송되었다. 『이스크라』의 개별 호들은 러시아에서도 바쿠, 키시네프, 시베리아의 비밀 인쇄소에서 다시 인쇄되었다.

1900년 가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전러시아 정치 신문의 발행에 관해 「노동해방단」의 동지들과 합의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이 구상은 레닌이 유형지에서 모든 세부에 이르기까지 숙고한 것이었다. 유형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레닌은 이 문제와 관련해 우파, 프스코프,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에서 여러 차례 협의를 열었다. 그는 곳곳에서 동지들과 비밀 통신용 암호, 문헌을 보낼 주소 등을 약정하고, 그들과 앞으로의 투쟁 계획을 논의했다.

차르 정부는 레닌이라는 인물이 가장 위험한 적임을 느꼈다. 차르의 오흐란카 요원인 헌병 주바토프는 비밀 서신에서 "지금 혁명에서 울리야노프보다 큰 인물은 없다"라고 썼으며, 그래서 레닌의 암살을 조직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다.

외국에 도착한 레닌은 「노동해방단」, 즉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베. 자술리치와 『이스크라』를 공동으로 발행하기로 합의했다. 발행 계획 전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레닌이 짰다.

1900년 12월, 해외에서 신문 『이스크라』 제1호가 나왔다. 신문 제목 아래에는 “불꽃에서 불길이 타오르리라”라는 제사(題辭)가 붙어 있었다. 이 말은 시베리아 유형지에 있던 데카브리스트들에게 푸시킨이 인사를 보내자 그들이 그에게 한 답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레닌이 지핀 『이스크라』의 불꽃에서 훗날 위대한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고, 그 불길은 귀족·지주의 차르 군주제와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남김없이 태워 버렸다.

간단한 결론.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노동당은 무엇보다도 나로드니키 및 혁명 사업에 그릇되고 해로운 그들의 견해와 투쟁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나로드니키의 견해를 사상적으로 분쇄해야만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노동자당을 창건할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나로드니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지난 세기 80년대의 플레하노프와 그의 「노동해방단」이었다.

레닌은 90년대에 나로드니키에 대한 사상적 분쇄를 완결하여 나로드니키를 끝장냈다.

1883년에 창립된 「노동해방단」은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는 데 큰 일을 했고,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으며, 노동운동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수가 빠르게 늘었다. 80년대 중반에 노동계급은 조직적 투쟁의 길, 조직적인 파업이라는 형태의 대중적 행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서클과 그룹은 선전만 했고, 노동계급 속에서 대중적 선동으로 넘어가는 것이 합목적적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직 노동운동과 실제로 결합하지 못했고 노동운동을 지도하지도 못했다.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1895년)을 조직한 것은 새로운 단계, 즉 노동자들 속에서의 대중적 선동으로의 이행과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을 뜻했다. 이 동맹은 노동자들 속에서 대중적 선동을 벌였고 대중적 파업을 지도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은 러시아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최초의 싹이었다. 페테르부르크 「투쟁동맹」에 이어 모든 주요 공업 중심지와 변방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조직이 생겨났다.

1898년에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려는 최초의, 비록 성공하지는 못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당대회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 당대회는 아직 당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당의 강령도, 규약도, 하나의 중앙에서 나오는 지도부도 없었고, 개별 마르크스주의 서클과 그룹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연계도 없었다.

흩어져 있는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고 서로 연결하기 위해, 레닌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최초의 전러시아 신문 『이스크라』를 창간할 계획을 제기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 시기에 단일한 정치적 노동자당 창건의 주요 반대자는 「경제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당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그들은 개별 그룹들의 분산과 수공업적 방식을 지지했다. 레닌과 그가 조직한 『이스크라』가 타격을 가한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이스크라』 첫 호들의 발행(1900~1901년)은 새로운 시기, 즉 흩어진 그룹과 서클들로부터 단일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실제로 형성되는 시기로 넘어가는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