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PeopleJoseph Stalin, Vyacheslav Molotov, Andrei Zhdanov, Emelyan Yaroslavsky, Pyotr Pospelov, Vladimir Lenin, Karl Marx, Friedrich Engels TermsShort Course of the History of the All-Union Communist Party (Bolsheviks), Dialectical Materialism, Historical Materialism
제11장 농업 집단화를 위한 투쟁에서의 볼셰비키당 (1930~1934년)
1. 1930~1934년의 국제 정세.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위기. 일본의 만주 점령. 독일에서 파시스트들의 집권. 두 개의 전쟁 발원지.
소련이 나라의 사회주의적 공업화에서 중대한 성과를 거두고 공업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키고 있던 때에,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1929년 말에 파괴력에서 일찍이 유례가 없는 세계 경제 위기가 터져 이후 3년 동안 더욱 심화되었다. 공업 위기는 농업 위기, 곧 농업공황과 뒤얽혔고,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소련에서는 위기의 3년(1930~1933년) 동안 공업이 두 배 이상 성장하여 1933년에 1929년 수준의 201퍼센트에 이르렀던 반면, 미국의 공업은 1933년 말에 1929년 수준의 65퍼센트로, 영국의 공업은 86퍼센트로, 독일의 공업은 66퍼센트로, 프랑스의 공업은 77퍼센트로 떨어졌다.
이 사실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보다 우월함을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가 세계에서 경제 위기를 겪지 않는 유일한 나라임을 보여 주었다.
세계 경제 위기의 결과 2,400만 명의 실업자가 굶주림과 궁핍과 고통에 내던져졌다. 농업 위기로 수천만 명의 농민이 고통을 겪었다.
세계 경제 위기는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승전국들과 패전국들 사이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식민지 및 종속 국가들 사이의,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농민들과 지주들 사이의 모순을 더욱 격화시켰다.
스탈린 동지는 제16차 당대회 보고에서, 부르주아지가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길을 한편으로는 파시스트 독재, 즉 자본주의의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쇼비니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요소들의 독재를 수립하여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데서, 다른 한편으로는 방어가 취약한 나라들의 이익을 희생시켜 식민지와 세력권을 재분할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는 데서 찾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1932년에는 일본 쪽에서 오는 전쟁 위협이 커졌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유럽 열강과 미국이 경제 위기 때문에 전적으로 자국 내부 문제에 몰두하고 있음을 보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방어가 취약한 중국을 압박하고 복종시켜 그곳에서 주인 행세를 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고, 자기들이 만들어 낸 "지방 사건"을 사기적으로 이용하여 도둑처럼 만주에 군대를 들여보냈다. 일본 군대는 만주를 완전히 점령하고, 중국 북부를 점령하고 소련을 공격하기에 유리한 진지를 마련했다. 일본은 손발이 묶이지 않도록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군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정은 미국, 영국, 프랑스로 하여금 극동에서 해군 군비를 강화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중국을 복종시키고 유럽·미국 제국주의 열강을 그곳에서 몰아내려는 목적을 분명히 추구하고 있었다. 이 열강들은 이에 군비 강화로 응수했다.
그러나 일본은 또 다른 목적도 세우고 있었다. 소련의 극동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소련이 그러한 위험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극동 지방의 방위 능력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하여 파시스트화된 일본 제국주의자들 때문에 극동에 최초의 전쟁 발원지가 생겨났다.
경제 위기는 극동에서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격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모순을 격화시켰다. 장기화된 공업과 농업의 위기, 막대한 실업, 무산 계급의 생활 불안이 커진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을 키웠다. 불만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분노로 번져 갔다. 불만은 특히 독일에서 커졌다. 독일은 전쟁과 영국·프랑스 승전국들에 바친 배상금과 경제 위기로 경제가 고갈된 나라였고, 노동계급이 자국 부르주아지와 외국 부르주아지, 곧 영국·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멍에 아래에서 신음해야 하는 나라였다.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잡기 직전의 마지막 국회(라이히스탁) 선거에서 독일 공산당이 얻은 600만 표가 이를 웅변으로 말해 주었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독일에 남아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자유가 자기들에게 화근이 될 수 있으며, 노동계급이 이 자유를 혁명 운동을 펼치는 데 이용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독일에서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고 판단했다. 부르주아적 자유를 없애고, 의회(라이히스탁)를 유명무실하게 만들며, 노동계급을 탄압할 수 있고 보복주의 성향의 소부르주아 대중 속에서 기반을 찾을 수 있는 테러적 부르주아 민족주의 독재를 세우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인민을 속이려고 스스로 민족사회주의자당이라 일컫는 파시스트당을 권력에 불러들였다. 파시스트당이 첫째,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가운데 가장 반동적이며 노동계급에 가장 적대적인 부분이고, 둘째, 민족주의 성향의 소부르주아지 수백만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보복주의적인 당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을 노동계급의 배신자들, 곧 타협주의 정책으로 파시즘에 길을 닦아 준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 도왔다.
1933년 독일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조건은 이러했다.
스탈린 동지는 독일의 사태를 분석하면서 제17차 당대회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에서 파시즘이 승리한 것은 노동계급이 약하다는 징후나 파시즘에 길을 닦아 준 사회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을 배신한 결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부르주아지가 약하다는 징후, 곧 부르주아지가 이미 의회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낡은 방법으로는 지배할 힘이 없으며, 그 때문에 국내 정책에서 테러적 통치 방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징후로도 보아야 한다…” (스탈린, 『레닌주의의 제문제』, 545쪽).
독일 파시스트들은 국내 정책에서는 국회 의사당 방화, 노동계급에 대한 야만적 탄압, 노동계급 조직의 파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자유의 말살로 자신을 드러냈다. 대외 정책에서는 국제연맹 탈퇴와, 독일에 유리하도록 유럽 국가들의 국경을 폭력으로 고치려는 전쟁의 공공연한 준비로 자신을 드러냈다.
이렇게 독일 파시스트들 때문에 유럽 한복판에 두 번째 전쟁 발원지가 생겨났다.
소련이 이처럼 중대한 사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소련은 서방의 사태 진전을 예의주시하면서 서부 국경에서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했다.
2. 쿨라크 요소를 제한하는 정책에서 계급으로서의 쿨라크층을 청산하는 정책으로. 콜호스 운동에서 당 정책의 왜곡과의 투쟁. 전 전선에 걸친 자본주의 요소에 대한 공세. 제16차 당대회.
1929~1930년에 전개된 농민들의 콜호스 대량 가입은 당과 정부가 그 이전에 해온 모든 사업의 결과였다. 농업용 트랙터와 기계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공업의 성장, 1928년과 1929년의 곡물 조달 운동 기간에 벌인 쿨라크층과의 단호한 투쟁, 농민을 점차 집단 경영에 익숙하게 만든 농업 협동조합의 성장, 최초의 콜호스와 소프호스의 좋은 경험, 이 모든 것이 전면적 집단화로의 이행, 곧 농민들이 마을 전체, 지구 전체, 관구 전체 단위로 콜호스에 가입하는 일을 준비했다.
전면적 집단화로의 이행은 농민층의 기본 대중이 콜호스에 단순하고 평화적으로 가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쿨라크층에 맞서 대중적으로 투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전면적 집단화는 마을 관할 지역의 모든 토지가 콜호스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 토지의 상당 부분은 쿨라크의 손에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쿨라크를 토지에서 몰아내고, 쿨라크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축과 기계를 빼앗았으며, 소비에트 정권에 쿨라크의 체포와 추방을 요구했다.
이처럼 전면적 집단화는 쿨라크층의 청산을 의미했다.
이것은 전면적 집단화를 기초로 쿨라크층을 계급으로서 청산하는 정책이었다.
이 무렵 소련에는 이미 쿨라크층을 끝장내고, 그들의 저항을 꺾고, 계급으로서 청산하며, 그들의 생산을 콜호스와 소프호스의 생산으로 대체하기에 충분한 물질적 기반이 있었다.
1927년에도 쿨라크는 6억 푸드 이상의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중 상품 곡물은 약 1억 3천만 푸드를 내놓았다. 반면 콜호스와 소프호스는 1927년에 상품 곡물을 3천 5백만 푸드밖에 내놓을 수 없었다. 1929년에는 소프호스와 콜호스를 발전시키려는 볼셰비키당의 확고한 방침과, 농촌에 트랙터와 농업 기계를 공급한 사회주의 공업의 성공 덕분에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미 이 해에 콜호스와 소프호스는 4억 푸드 이상의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중 상품 곡물은 이미 1억 3천만 푸드가 넘어, 1927년의 쿨라크보다 많았다. 그리고 1930년에는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4억 푸드 이상의 상품 곡물을 내놓아야 했고 실제로 내놓았으며, 이는 1927년에 쿨라크층이 내놓은 것보다 비할 바 없이 많은 양이었다.
이처럼 나라 경제에서 계급 세력이 이동하고, 쿨라크의 곡물 생산을 콜호스와 소프호스의 생산으로 대체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기반이 존재했기 때문에, 볼셰비키당은 쿨라크층을 제한하는 정책에서 새로운 정책, 곧 전면적 집단화를 기초로 쿨라크층을 계급으로서 청산하는 정책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1929년까지 소비에트 권력은 쿨라크를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쿨라크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국가에 곡물을 고정 가격으로 팔도록 요구했으며, 토지 임대에 관한 법률로 쿨라크의 토지 이용을 일정한 범위까지 제한하고, 개인 농민 경영에서 고용 노동의 사용에 관한 법률로 쿨라크 경영의 규모를 제한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은 아직 쿨라크를 청산하는 정책은 시행하지 않았다. 토지 임대와 노동 고용에 관한 법률이 쿨라크의 존재를 허용했고, 쿨라크 재산 몰수(탈쿨라크화)의 금지가 이 점에 대해 일정한 보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쿨라크의 성장이 지체되었고, 이러한 제한을 견디지 못한 쿨라크층의 일부는 밀려나 몰락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계급으로서의 쿨라크의 경제적 기초를 파괴하지는 못했고, 쿨라크의 청산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이것은 쿨라크를 제한하는 정책이었지 청산하는 정책이 아니었다. 이 정책은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아직 약해서 자기 생산으로 쿨라크의 곡물 생산을 대체할 수 없었던 일정한 시기까지는 필요했다.
1929년 말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성장하자 소비에트 권력은 이러한 정책에서 급격히 방향을 바꾸었다. 소비에트 권력은 계급으로서의 쿨라크를 청산하는 정책, 쿨라크를 없애는 정책으로 넘어갔다. 토지 임대와 노동 고용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여 쿨라크에게서 토지와 고용 노동자를 함께 빼앗았다. 쿨라크 재산 몰수의 금지를 풀었다. 농민들이 쿨라크의 가축과 기계, 그 밖의 농기구를 몰수하여 콜호스에 넘기는 것을 허용했다. 쿨라크는 수탈당했다. 쿨라크는 1918년에 공업 분야에서 자본가들이 수탈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탈당했다. 다만 이번에는 쿨라크의 생산수단이 국가의 손이 아니라 연합한 농민의 손, 곧 콜호스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가장 심원한 혁명적 변혁이었고, 낡은 질적 상태의 사회에서 새로운 질적 상태의 사회로의 도약이었으며, 그 결과에서 1917년 10월의 혁명적 변혁과 맞먹는 것이었다.
이 혁명의 독특한 점은 혁명이 위로부터, 국가 권력의 발의로, 쿨라크의 예속에 맞서 자유로운 콜호스 생활을 위해 싸운 수백만 농민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직접적 지지 속에서 수행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 혁명은 단번에 사회주의 건설의 세 가지 근본 문제를 해결했다.
가) 이 혁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가 많은 착취 계급인 쿨라크 계급, 곧 자본주의 복귀의 버팀목을 청산했다.
나) 이 혁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가 많은 근로 계급인 농민 계급을, 자본주의를 낳는 개인 경영의 길에서 공동의 콜호스적, 사회주의적 경영의 길로 옮겨 놓았다.
다) 이 혁명은 국민경제에서 가장 광범하고 생활에 꼭 필요하면서도 가장 뒤떨어진 분야인 농업에서 소비에트 권력에게 사회주의적 토대를 주었다.
그리하여 나라 안에서 자본주의 복귀의 마지막 원천이 제거되었고, 동시에 사회주의적 국민경제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결정적 조건이 창출되었다.
계급으로서의 쿨라크를 청산하는 정책의 근거를 밝히고 전면적 집단화를 위한 농민의 대중 운동의 결과를 지적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1929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소련에서 자본주의의 복원을 꿈꾸는 모든 나라 자본가들의 마지막 희망—‘사유 재산의 신성한 원칙’이 무너져 먼지로 변하고 있다. 자본가들이 자본주의를 위해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으로 여기는 농민들이 대거 그 칭송받던 ‘사유 재산’의 기치를 버리고 집단주의의 궤도, 사회주의의 궤도로 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 복원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고 있다”(스탈린, 『레닌주의의 제문제』, 296쪽).
계급으로서의 쿨라크층을 말살하는 정책은 1930년 1월 5일자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역사적 결정 「집단화의 속도와 콜호스 건설에 대한 국가 지원 조치에 관하여」에서 확정되었다. 이 결정은 소련 각 지역의 다양한 조건과 소련 각 주(州)의 집단화 준비 정도가 같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했다.
집단화의 속도는 지역마다 다르게 정해졌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집단화 속도의 관점에서 소련의 주(州)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었다.
첫째 집단에는 집단화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고, 트랙터와 소프호스가 더 많으며, 지난 곡물 조달 운동에서 쿨라크층과 싸운 경험이 더 많은 주요 곡물 지대—북캅카스(쿠반, 돈, 테레크), 중부 볼가, 하류 볼가—가 들어갔다. 이 곡물 지대 집단에 대해 중앙위원회는 1931년 봄까지 집단화를 대체로 끝낼 것을 제안했다.
우크라이나, 중앙 흑토 지대, 시베리아, 우랄, 카자흐스탄 및 기타 곡물 지대가 들어간 둘째 곡물 지대 집단은 1932년 봄까지 집단화를 대체로 끝낼 수 있었다.
나머지 주, 변강(邊疆) 및 공화국(모스크바 주, 자캅카지예, 중앙아시아 공화국 등)은 집단화 기한을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 즉 1933년까지 늘릴 수 있었다.
당 중앙위원회는 집단화 속도가 높아지는 데 맞추어 트랙터, 콤바인, 트랙터용 견인 농기구 등을 생산하는 공장의 건설을 한층 더 서둘러야 한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중앙위원회는 “콜호스 운동의 현 단계에서 말의 견인력이 하는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 말을 낭비하고 팔아 치우는 데 이르는 경향에 단호한 반격을 가할 것”을 요구했다.
1929~30년도 콜호스 대출은 두 배로 늘어났다(5억 루블까지).
국가 비용으로 콜호스에 토지 정리를 해 줄 것이 제안되었다.
결정에는 현 단계에서 콜호스 운동의 주된 형태는 기본 생산수단만 집단화하는 농업 아르텔이라는 가장 중요한 지시가 담겨 있었다.
중앙위원회는 당 조직들에게 “콜호스 운동을 위에서 ‘법령으로 정하는’ 어떤 시도에도 반대하라. 그런 시도는 콜호스 조직을 둘러싼 진정한 사회주의적 경쟁을 집단화 놀이로 바꿔치는 위험을 낳을 수 있다”고 엄중히 경고했다(『결의안에 나타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2부, 662쪽).
중앙위원회의 이 결정은 농촌에서 당의 새 정책을 실행하는 일에 명확성을 가져왔다.
쿨라크층을 말살하는 정책과 전면적 집단화를 확립하는 정책을 기초로 강력한 콜호스 운동이 전개되었다. 농민들은 마을 전체, 군(郡) 전체가 콜호스에 가입했고, 쿨라크층을 길에서 쓸어내며 쿨라크의 예속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집단화가 거둔 거대한 성과와 나란히, 곧 당 일꾼들의 실천에서 결함이, 콜호스 건설에 관한 당 정책의 왜곡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앙위원회가 집단화의 성과에 지나치게 도취하는 것을 경고했음에도, 많은 당 일꾼들은 장소와 시기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농민들이 콜호스에 가입할 준비가 된 정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집단화를 인위적으로 재촉하기 시작했다.
콜호스 건설에서 자발성 원칙이 위반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여러 지역에서 자발성은 “쿨라크 청산”, 선거권 박탈 등의 위협 아래 콜호스 가입을 강요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여러 지역에서 준비 작업과 집단화 분야의 당 정책 기초에 대한 끈기 있는 설명은, 이른바 조직되었다는 콜호스에 관한 부풀려진 수치를 위에서 관료적이고 관리식으로 명령하는 것, 집단화 비율을 인위적으로 부풀리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콜호스 운동의 기본 고리는 기본 생산수단만을 공동화하는 농업 아르텔이라는 중앙위원회의 지시를 어기고, 여러 곳에서 아르텔을 건너뛰어 코뮨으로 넘어가는 무모한 짓이 저질러졌으며, 주거용 건물, 상품이 되지 않는 젖소와 소가축, 가금 등을 공동화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일부 주의 지도 일꾼들은 집단화의 첫 성과에 도취하여 집단화의 속도와 기한에 관한 중앙위원회의 직접적 지시를 위반했다. 모스크바 주는 부풀려진 수치를 쫓아 자기 일꾼들에게 1930년 봄에 집단화를 끝내도록 방향을 잡아 주었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3년(1932년 말까지)의 여유가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더욱 노골적인 위반은 자캅카지예와 중앙아시아에서 저질러졌다.
쿨라크와 그 앞잡이들은 이러한 행과 과격을 도발의 목적으로 이용하여, 농업 아르텔 대신 코뮨을 조직하고 주거용 건물, 소가축, 가금을 즉시 공동화하자는 제안을 들고 나왔다. 동시에 쿨라크층은 콜호스에 가입하기 전에 가축을 도살하자는 선동을 벌여, 콜호스에서는 가축을 “어차피 빼앗아 갈 것”이라고 농민들을 설득했다. 계급의 적은 집단화 때 지방 조직들이 저지른 과격과 오류가 농민층을 격분시켜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하리라고 계산했다.
당 조직들이 저지른 오류와 계급의 적이 벌인 노골적인 도발 행위의 결과로, 1930년 2월 하반기에는 집단화의 전반적이고 의심할 여지 없는 성과를 배경으로 여러 지역에서 농민층의 심각한 불만을 보여주는 위험한 징후가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쿨라크와 그 앞잡이들이 농민들을 부추겨 직접적인 반소비에트 행동에 나서게 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당 중앙위원회는 당 노선의 왜곡이 집단화를 좌절시킬 우려가 있다는 일련의 불안한 신호를 받고 즉시 상황을 바로잡기 시작했으며, 당 간부들을 범한 오류를 하루빨리 시정하는 길로 돌려세우기 시작했다. 1930년 3월 2일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스탈린 동지의 글 「성공에 도취하여 현기증이 난다」가 발표되었다. 이 글은 집단화의 성공에 도취되어 중대한 오류에 빠지고 당 노선에서 이탈한 모든 사람, 행정적 압력 수단으로 농민을 콜호스의 길로 끌어들이려 한 모든 사람에게 경고했다. 글에서는 콜호스 건설의 자발성 원칙을 온 힘을 다해 강조했고, 집단화의 속도와 방법을 정할 때 소련 각 지역의 조건이 다양함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스탈린 동지는 콜호스 운동의 기본 고리가 농업 아르텔이며, 아르텔에서는 주로 곡물 경영에 관한 기본 생산수단만 공동화되고 가옥 부속 토지, 주거용 건물, 일부 젖소, 소가축, 가금 등은 공동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스탈린 동지의 글은 더없이 큰 정치적 의의를 지녔다. 이 글은 당 조직들이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도록 도왔고, 지나친 행위(과격)를 틈타 농민층을 소비에트 권력에 맞서게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 광범한 농민 대중은 볼셰비키당의 노선이 지방에서 저질러진 어리석은 “좌경적” 과격과 아무 공통점이 없음을 확신했다. 이 글은 농민 대중을 안정시켰다.
스탈린 동지의 글로 시작된 과격과 오류의 시정을 끝까지 완수하기 위해,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1930년 3월 15일 결의 「콜호스 운동에서의 당 노선 왜곡과의 투쟁에 관하여」를 발표하여 이 오류들을 다시 한 번 강타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의에서는 당의 레닌-스탈린 노선에서 이탈한 결과이자 당 지령을 직접 위반한 결과로 나타난 오류들을 상세히 분석했다.
중앙위원회는 “좌경적” 과격의 관행이 계급의 적에 대한 직접적인 원조라고 지적했다.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당 노선의 왜곡과 단호히 투쟁할 능력이 없거나 투쟁하려 하지 않는 일꾼은 직위에서 해임하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라”(『결의안에 나타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2부, 663쪽).
중앙위원회는 정치적 오류를 범하고도 이를 시정하지 못한 일부 주 및 지방 당 조직(모스크바주, 자캅카지예)의 지도부를 교체했다.
1930년 4월 3일 스탈린 동지의 글 「콜호스 농민 동지들에게 답한다」가 발표되었다. 이 글은 농민 문제에서 오류의 뿌리와 콜호스 운동의 주요 오류를 밝혔다. 그 오류는 중농에 대한 그릇된 접근, 콜호스를 건설할 때 레닌의 자발성 원칙 위반, 소련 각 지역의 조건이 다양함을 고려하라는 레닌의 원칙 위반, 아르텔을 건너뛰어 코뮨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모든 조치의 결과로 당은 여러 지역에서 지방 일꾼들이 저지른 과격을 청산할 수 있었다.
성공에 도취되어 당 노선에서 벗어나 곤두박질치며 아래로 굴러떨어지던 당 간부의 상당 부분을 때맞춰 올바른 길로 돌려세우려면 중앙위원회의 더없는 굳건함과 흐름을 거슬러 나아갈 줄 아는 능력이 필요했다.
당은 콜호스 운동에서 당 노선의 왜곡을 청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토대로 콜호스 운동의 성과가 공고해졌다.
이를 토대로 콜호스 운동이 새롭고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당이 쿨라크를 계급으로서 청산하는 정책으로 넘어가기 전에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청산하려는 본격적인 공세가 주로 도시와 공업 부문에서 진행되었다. 농업과 농촌은 아직 공업과 도시에 뒤져 있었다. 이 때문에 공세는 일면적이고 불완전하며 전면적이지 못한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이제 농촌의 후진성이 과거의 것이 되기 시작하고, 쿨라크를 청산하려는 농민층의 투쟁이 완전히 뚜렷해져서 당이 쿨라크 청산 정책으로 넘어가자,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공세는 전면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일면적 공세는 전 전선에 걸친 공세로 바뀌었다. 제16차 당대회를 소집할 무렵에는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전면적 공세가 이미 전 전선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제16차 당대회는 1930년 6월 26일에 열렸다. 대회에는 표결권이 있는 대의원 1,268명과 발언권만 있는 대의원 891명이 참석했으며, 이들은 당원 1,260,874명과 후보 당원 711,609명을 대표했다.
제16차 당대회는 “전 전선에 걸친 사회주의 공세의 전개, 쿨라크의 계급으로서의 청산, 전면적 집단화 실행의 대회”로서 당의 역사에 기록되었다(스탈린).
스탈린 동지는 중앙위원회 정치 보고에서 볼셰비키당이 사회주의 공세를 전개하면서 얼마나 큰 승리를 거두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사회주의 공업화 분야에서는 국민경제 전체의 총생산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농업의 비중을 앞서게 되었다. 1929~30 경제연도에 공업의 몫은 이미 국민경제 전체 총생산의 53퍼센트 이상이었고, 농업의 몫은 약 47퍼센트였다.
제15차 당대회 무렵인 1926~27년에 전체 공업의 총생산은 전쟁 전 수준의 102.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으나, 제16차 당대회 무렵인 1929~30년에는 전쟁 전 수준의 약 180퍼센트에 이르렀다.
중공업, 곧 생산수단의 생산과 기계 제작이 더욱더 강화되었다.
“…우리는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바뀌기 직전에 있다”고 스탈린 동지는 대회 전체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선언했다.
그러나 스탈린 동지는 공업 발전의 높은 속도를 공업 발전의 수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사회주의 공업이 전례 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도, 공업 발전 수준에서 우리는 아직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크게 뒤져 있었다. 소련에서 전기화가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는데도 전력 생산이 그러했다. 금속 생산도 그러했다. 소련의 선철 생산량은 계획에 따르면 1929~30년 말에 550만 톤이 되어야 했으나, 독일에서는 1929년 선철 제련량이 1,340만 톤, 프랑스에서는 1,045만 톤이었다. 우리의 기술적·경제적 후진성을 가장 짧은 기간에 청산하려면 우리 공업의 발전 속도를 더욱 높여야 했고, 사회주의 공업의 발전 속도를 낮추려고 애쓰는 기회주의자들과 가장 단호하게 투쟁해야 했다.
“…우리 공업의 발전 속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고 떠드는 자들은 사회주의의 적이며 우리 계급의 적들의 대리인이다”라고 스탈린 동지는 지적했다(『레닌주의의 제문제』, 369쪽).
제1차 5개년 계획 첫해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초과 달성한 뒤, 대중 속에서 “5개년 계획을 4년 안에 수행하자”라는 구호가 생겨났다. 여러 선진 공업 부문(석유, 이탄, 일반 기계 제조, 농업 기계 제조, 전기 공업)에서는 계획 수행이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이 부문들에서는 5개년 계획의 과제를 2년 반~3년 안에 실현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는 “5개년 계획을 4년 안에”라는 구호가 전적으로 현실성이 있음을 입증했고, 그 실현 가능성을 의심한 신념 없는 자들의 기회주의를 폭로했다.
제16차 당대회는 당 중앙위원회에 “앞으로도 사회주의 건설의 전투적인 볼셰비키적 속도를 보장하고, 5개년 계획을 4년 안에 실제로 수행하도록 하라”고 위임했다.
제16차 당대회 무렵 소련 농업 발전에서 가장 위대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광범한 농민층이 사회주의로 돌아섰다. 1930년 5월 1일 현재, 곡물 생산 지역의 주요 곡물 지대에서 집단화는 농민 경리의 40~50퍼센트를 포괄했다(1928년 봄에는 2~3퍼센트였다). 콜호스의 파종 면적은 3,600만 헥타르에 달했다.
이리하여 1930년 1월 5일 중앙위원회 결정에서 정한 상향된 계획(3,000만 헥타르)이 초과 달성되었다. 콜호스 건설의 5개년 계획은 2년 만에 이미 1.5배 이상 초과 달성되었다.
콜호스의 상품 생산물은 3년 동안 40배 이상 늘어났다. 이미 1930년에 국가는 소프호스를 제외하고도 콜호스로부터 전국 곡물 상품 생산물의 절반 이상을 받았다.
이는 이제부터 농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개별 농민 경리가 아니라 콜호스와 소프호스임을 뜻했다.
농민층이 대거 콜호스에 가입하기 전에는 소비에트 정권이 주로 사회주의 공업에 의거했다면, 이제부터는 빠르게 성장하는 농업의 사회주의 부문인 콜호스와 소프호스에도 의거하게 되었다.
제16차 당대회가 결정 가운데 하나에서 지적한 대로, 콜호스 농민은 “소비에트 정권의 실질적이고 견고한 버팀목”이 되었다.
3. 모든 국민경제 부문의 재건 방침. 기술의 역할. 콜호스 운동의 계속된 성장. 기계·트랙터 보급소의 정치부. 5개년 계획을 4년 안에 수행한 결과. 전선 전반에서의 사회주의 승리. 제17차 당대회.
중공업, 특히 기계 제조업이 창설되고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빠른 속도로 계속 발전하고 있음이 밝혀진 뒤, 당 앞에는 모든 국민경제 부문을 새롭고 현대적인 기술의 토대 위에서 재건한다는 다음 과제가 제기되었다. 연료 공업, 야금업, 경공업, 식품 공업, 임업, 군수 공업, 운수, 농업에 새롭고 현대적인 기술과 새로운 공작 기계, 새로운 기계를 주어야 했다. 농산물과 공업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막대하게 늘어난 만큼, 모든 국민경제 부문에서 생산량을 두 배, 세 배로 늘려야 했다. 그러나 공장과 소프호스, 콜호스에 충분한 양의 새롭고 현대적인 설비를 공급하지 않고서는 이를 달성할 수 없었다. 낡은 설비로는 그러한 생산 증가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경제의 기본 부문을 재건하지 않고서는 나라와 그 국민경제의 새롭고 갈수록 커지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재건 없이는 전선 전체에서 사회주의의 공세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었다. 도시와 농촌의 자본주의 요소를 쳐부수고 완전히 끝장내려면 노동과 소유의 새로운 조직만으로는 부족했고, 새로운 기술, 곧 자기 기술의 우월성으로도 그것들을 쳐부수어야 했기 때문이다.
재건 없이는 기술·경제적 측면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고 앞지르는 것도 불가능했다. 공업 발전 속도로 보면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들을 앞질렀지만, 공업 발전 수준으로 보면, 생산되는 제품의 양으로 보면 소련은 여전히 그들보다 크게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뒤처짐을 없애려면 우리 국민경제 전체에 새로운 기술을 공급해야 했고, 국민경제의 모든 부문을 새롭고 현대적인 기술의 토대 위에서 재건해야 했다.
이리하여 기술은 결정적인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 일에서 장애가 된 것은 새로운 기계와 공작 기계의 부족이라기보다는 — 기계 제조업이 새 설비를 공급할 능력이 있었으므로 — 우리 경제 간부들이 기술을 대하는 그릇된 태도, 재건 시기에 기술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 기술을 업신여기는 태도였다. 우리 경제 일꾼들은 기술이란 「전문가들」의 일이고, 「부르주아 전문가들」에게 맡겨진 이차적인 일이며, 공산주의자 경제 간부들은 생산 기술에 간섭할 의무가 없고, 기술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일, 즉 생산에 대한 「일반적」 지도를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리하여 부르주아 「전문가들」에게는 생산 업무를 좌지우지하도록 맡겨졌고, 공산주의자 경제 간부들은 「일반적」 지도와 서류에 서명하는 일만 자기 몫으로 남겼다.
이런 태도 아래에서는 「일반적」 지도가 지도 「일반」에 관한 잡담으로, 공허한 서류 서명으로, 서류를 만지작거리는 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음은 증명할 필요도 없다.
공산주의자 경제 간부들이 기술을 이렇게 업신여기는 태도를 지니고서는 우리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앞지르기는커녕 따라잡지도 결코 못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술에 대한 이런 태도는, 그것도 재건 시기의 이런 태도는 우리나라를 후진성에 빠뜨리고 우리의 발전 속도를 저하시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기술에 대한 이런 태도는 공산주의자 경제 간부 일부가 품고 있던 은밀한 바람 — 공업 발전 속도를 늦추고 낮추며, 생산에 대한 책임을 「전문가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자신들에게 「평온한 환경」을 만들어 내려는 바람 — 을 덮어 가리고 감추고 있었다.
공산주의자 경제 간부들을 기술 쪽으로 돌려세우고, 그들에게 기술에 대한 취향을 길러 주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볼셰비키 경제 간부들 자신의 절실한 일이며,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조국을 후진성과 무기력한 연명 속에 몰아넣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이것은 해결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과제였다.
이와 관련하여 1931년 2월 제1차 산업 일꾼 협의회에서 스탈린 동지가 한 연설은 매우 중대한 역할을 했다.
“때로는 속도를 다소 늦추고 운동을 억제할 수 없겠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스탈린 동지는 연설에서 말했다. 안 된다, 동지들! 속도를 낮출 수는 없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뒤처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뒤처진 자는 얻어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얻어맞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 원하지 않는다! 옛 러시아의 역사에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얻어맞았다는 사실이 들어 있다. 몽골 칸들이 때렸다. 터키 베이들이 때렸다. 스웨덴 봉건영주들이 때렸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때렸다. 영국·프랑스 자본가들이 때렸다. 일본 남작들이 때렸다. 모두가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때렸다... 우리는 선진국들보다 50~100년 뒤떨어졌다. 우리는 이 거리를 10년 안에 달려야 한다. 우리가 이를 해내든가, 아니면 우리가 짓밟힐 것이다... 길어야 10년 안에 우리는 자본주의 선진국들보다 뒤떨어진 그 거리를 달려야 한다. 이를 위한 모든 ‘객관적’ 가능성이 우리에게는 있다. 다만 이 가능성들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오직 우리에게만! 이제 우리가 이 가능성들을 활용하는 법을 배울 때다. 생산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썩어빠진 태도를 끝장낼 때다. 오늘의 시기에 맞는 다른 새로운 태도, 곧 모든 일에 간섭한다는 태도를 익힐 때다. 네가 공장 지배인이라면 모든 일에 간섭하고, 모든 것을 파고들고, 아무것도 놓치지 말고, 배우고 또 배워라. 볼셰비키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이제 볼셰비키 자신이 전문가가 될 때다. 재건 시기에는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스탈린, 『레닌주의의 제문제』, 444~446쪽).
스탈린 동지의 연설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공산주의자 경제 일꾼들의 기술 경시 태도에 종지부를 찍고, 공산주의자 경제 일꾼들을 기술 쪽으로 돌려세웠으며, 볼셰비키 자신의 힘으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투쟁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고, 그리하여 국민경제 재건을 전개하는 일을 수월하게 했다는 데 있었다.
이제부터 기술 문제는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독점물에서 볼셰비키 경제 일꾼들 자신의 절실한 일로 바뀌었고, ‘전문가’라는 경멸적 별명은 기술을 습득한 볼셰비키의 명예로운 칭호로 바뀌었다.
이제부터 기술을 습득하고 생산을 지도할 수 있는 붉은 전문가들의 부대, 수천수만의 붉은 전문가들이 나타나야 했고, 실제로 그 뒤에 나타났다.
이들은 노동계급과 농민층에서 나온 새로운 소비에트 생산·기술 인텔리겐치야였으며, 오늘날 우리 경제 지도의 주된 힘을 이루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국민경제 재건의 전개를 수월하게 해야 했고, 실제로 수월하게 했다.
재건의 발전은 공업과 운수 부문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재건은 농업 부문에서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농업은 다른 부문보다 기계가 덜 갖춰져 있었고, 새 기계의 공급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리고 농업에 새 기계를 더욱 늘려 공급하는 일은, 콜호스 건설이 매달, 매주 새롭게 늘어나 수천수만 대의 트랙터와 농업기계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기던 바로 그때 특히 필요했다.
1931년에는 콜호스 운동이 새롭게 성장했다. 주요 곡물 지대에서는 전체 농민 경영의 80퍼센트 이상이 이미 콜호스로 통합되었다. 이곳에서는 전면적 집단화가 이미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 덜 중요한 곡물 지대와 기술작물 지대에서는 경영의 50퍼센트 이상이 콜호스로 통합되었다. 20만 개의 콜호스와 4천 개의 소프호스가 이미 전체 파종 면적의 3분의 2에 파종했고, 개인 농민은 3분의 1에만 파종했다.
이는 농촌에서 사회주의가 거둔 거대한 승리였다.
그러나 콜호스 건설은 아직 깊이가 아니라 넓이로, 즉 콜호스의 작업 질과 그 간부를 개선하는 방향이 아니라 콜호스 수를 늘리고 점점 더 많은 지역을 콜호스로 포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콜호스 활동가와 콜호스 간부의 성장이 콜호스 자체의 양적 성장을 따라가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새 콜호스의 작업은 언제나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콜호스 자체는 아직 약하고 공고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콜호스에 필요한 글을 아는 사람들(회계원, 관리인, 서기)이 농촌에 부족하다는 점과 농민들에게 대규모 콜호스 경영을 운영한 경험이 없다는 점도 콜호스 강화 사업을 지연시켰다. 콜호스에는 어제까지 개인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들에게는 작은 땅뙈기를 경영한 경험은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콜호스 경영을 지도한 경험은 아직 없었다. 그러한 경험을 쌓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처음에는 콜호스 작업에서 심각한 결함이 드러났다. 콜호스에서 노동이 아직 제대로 조직되지 못했고 노동 규율이 약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많은 콜호스에서 수입이 노동일수가 아니라 식구 수에 따라 분배되었다. 게으름뱅이가 부지런하고 정직한 콜호스 성원보다 더 많은 곡식을 받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이러한 콜호스 지도의 결함 탓에 콜호스 성원들의 노동에 대한 관심이 낮아졌고, 가장 바쁜 시기에도 결근이 많았으며, 콜호스 파종지의 일부는 눈이 올 때까지 수확되지 않은 채 남았고, 수확 자체도 허술하게 이루어져 막대한 곡물 손실을 냈다. 기계와 말에 책임자가 없고 작업에서 개인적 책임이 없는 것은 콜호스 사업을 약화시키고 콜호스의 수입을 줄였다.
특히 사정이 나빴던 곳은 이전의 쿨라크와 쿨라크 추종자들이 이런저런 직책을 맡아 콜호스에 기어든 지역이었다. 쿨라크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한 자들이 자기들을 모르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서는 해를 끼치고 망치려고 콜호스에 기어드는 일이 적지 않았다. 때로는 당 및 소비에트 일꾼들의 경계심이 부족한 탓에 쿨라크가 자기 지역의 콜호스에도 침투했다. 이전의 쿨라크가 콜호스에 침투하기 쉬웠던 것은 그들이 콜호스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전술을 급격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쿨라크가 콜호스에 공공연히 반대하여 콜호스 활동가와 선진적인 콜호스 성원들에 맞서 잔혹한 투쟁을 벌이고, 그들을 어두운 구석에서 쏘아 죽이고, 그들의 집과 곡물 창고 등을 불태웠다. 이로써 쿨라크는 농민 대중을 위협하여 콜호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제 콜호스에 대한 공공연한 투쟁이 실패로 끝나자 그들은 전술을 바꾸었다. 그들은 더 이상 총신을 자른 소총을 쏘지 않고, 조용하고 얌전하고 길든, 완전히 소비에트적인 사람인 척했다. 콜호스에 침투한 그들은 은밀하게 콜호스에 해를 끼쳤다. 그들은 어디서나 콜호스를 안으로부터 분해하고, 콜호스의 노동 규율을 무너뜨리고, 수확물과 노동의 계산을 혼란에 빠뜨리려 애썼다. 쿨라크는 콜호스의 말 머릿수를 없애는 데 모든 것을 걸었고 많은 말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쿨라크는 고의로 말에게 비저병과 옴 및 그 밖의 병을 옮기고, 아무런 돌봄도 없이 말을 내버려 두는 짓 따위를 했다. 쿨라크는 트랙터와 기계를 망가뜨렸다.
쿨라크가 콜호스 성원들을 속이고 파괴 활동을 처벌받지 않고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콜호스가 아직 약하고 경험이 없었으며 콜호스 간부가 아직 단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콜호스에서 쿨라크의 파괴 활동을 끝장내고 콜호스 강화 사업을 앞당기려면, 사람과 조언과 지도로써 콜호스에 신속하고도 진지한 원조를 주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원조를 콜호스에 준 것은 볼셰비키당이었다. 1933년 1월 당 중앙위원회는 콜호스를 서비스하는 기계·트랙터 보급소에 정치부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콜호스를 돕기 위해 정치부에서 일할 당 일꾼 1만 7천 명이 농촌에 파견되었다.
이는 중대한 원조였다.
기계·트랙터 보급소 정치부는 2년(1933년과 1934년) 동안 콜호스 사업의 결함을 없애고, 콜호스 활동가를 키우고, 콜호스를 강화하고, 콜호스에서 적대적·쿨라크적·파괴분자적 분자를 청소하는 면에서 큰 사업을 해낼 수 있었다.
정치부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훌륭히 수행했다. 정치부는 조직·경제 면에서 콜호스를 강화하고, 새로운 콜호스 간부를 키우고, 콜호스의 경제 지도를 바로잡고, 콜호스 대중의 정치 수준을 높였다.
콜호스 강화를 위한 투쟁에 콜호스 대중의 적극성을 높이는 데 막대한 의의를 지닌 것은 제1차 전연방 콜호스 우수노동자 대회(1933년 2월)와 이 대회에서 한 스탈린 동지의 연설이었다.
스탈린 동지는 연설에서 농촌의 낡은 콜호스 이전 체제와 새로운 콜호스 체제를 비교하면서 말했다.
“낡은 체제에서 농민들은 홀로 일했고, 낡은 할아버지 적 방식으로, 낡은 노동 도구로 일했으며, 지주와 자본가를 위해, 쿨라크와 투기꾼을 위해 일했고, 굶주리며 살면서 남을 부유하게 해 주며 일했다. 새로운 콜호스 체제에서 농민들은 공동으로, 아르텔 방식으로 일하고, 새로운 도구인 트랙터와 농업기계를 써서 일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 콜호스를 위해 일하고, 자본가와 지주 없이, 쿨라크와 투기꾼 없이 살며, 날마다 자신의 물질적·문화적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일한다.” (『레닌주의의 제문제』, 528쪽)
스탈린 동지는 연설에서 농민층이 콜호스의 길에 들어서서 실제로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여주었다. 볼셰비키당은 수백만의 빈농 대중이 콜호스에 들어가 쿨라크의 예속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빈농 대중은 콜호스에 들어가 더 좋은 땅과 더 좋은 생산도구를 쓰게 되면서, 전에는 굶주리며 살았으나 이제는 콜호스에서 중농 수준으로 올라서서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이 콜호스 건설의 길에서 내디딘 첫걸음, 첫 성과였다.
스탈린 동지는 둘째 걸음은 콜호스원들 — 이전의 빈농과 이전의 중농 — 을 더욱 높이 끌어올려 모든 콜호스원을 부유하게 만들고 모든 콜호스를 볼셰비키적으로 만드는 데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콜호스원이 부유해지려면, 하고 스탈린 동지는 말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콜호스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트랙터와 기계를 바로 쓰고, 역축을 바로 쓰고, 땅을 바로 경작하고, 콜호스 재산을 아끼는 것이다.” (『레닌주의의 제문제』, 532~533쪽)
스탈린 동지의 연설은 수백만 콜호스원의 의식에 깊이 새겨져 콜호스의 실천적이고 전투적인 강령이 되었다.
1934년 말에 콜호스는 견고하고 무적인 힘이 되었다. 이 무렵 콜호스는 이미 소련 전체 농가의 약 4분의 3, 전체 파종 면적의 약 90퍼센트를 결집하고 있었다.
1934년에 소련 농업에서는 이미 28만 1천 대의 트랙터와 3만 2천 대의 콤바인이 일하고 있었다. 1934년 봄 파종은 1933년보다 15~20일, 1932년보다 30~40일 빨리 끝났고, 곡물 조달 계획은 1932년보다 3개월 일찍 완수되었다.
이렇게 해서 2년 동안 당과 노농 국가가 베푼 막대한 원조의 결과로 콜호스는 강화되었다.
콜호스 제도의 확고한 승리와 그에 따른 농업의 발전은 소비에트 정권에게 빵과 기타 식료품의 배급제를 폐지하고 식료품의 자유 거래를 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임시 정치 기관으로 창설된 기계·트랙터 보급소 정치부가 자기 임무를 완수했으므로, 중앙위원회는 기계·트랙터 보급소 정치부를 기존의 군(郡) 당위원회와 합쳐 일반 당 기관으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농업 분야에서든 공업 분야에서든 이 모든 성과는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다.
1933년 초에 이르러 제1차 5개년 계획이 이미 수행되었다는 것, 그것도 기한보다 앞서 4년 3개월 만에 수행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소련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거대한 세계사적 승리였다.
1933년 1월 당 중앙위원회·중앙통제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보고에서 스탈린 동지는 제1차 5개년 계획의 총결산을 했다. 보고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당과 소비에트 정권은 지난 시기, 즉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행한 기간에 다음과 같은 기본적 성과를 거두었다.
가) 소련은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전환되었다. 국민경제 전체 생산에서 공업 생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70퍼센트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나) 사회주의 경영 체계는 공업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청산하고 공업에서 유일한 경영 체계가 되었다.
다) 사회주의 경영 체계는 농업 분야에서 쿨라크층을 계급으로서 청산하고 농업에서 지배적인 힘이 되었다.
라) 콜호스 제도는 농촌의 궁핍과 빈곤을 없앴다. 수천만 명의 빈농이 넉넉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처지로 올라섰다.
마) 공업에서의 사회주의 체계는 실업을 없애고, 여러 생산 부문에서 8시간 노동일을 유지했으며, 대다수 기업에서 7시간 노동일로 이행했고, 건강에 해로운 기업에서 6시간 노동일을 확립했다.
바) 국민경제 모든 분야에서의 사회주의 승리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없앴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이러한 성과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그 성과가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의 멍에에서 완전히 해방하고, 소련의 모든 근로 대중이 풍족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스스로 보장받을 길을 열어 주었다는 데 있었다.
1934년 1월에 제17차 당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당원 187만 4,488명과 후보당원 93만 5,298명을 대표하는, 결정권을 가진 대의원 1,225명과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 736명이 참석했다.
대회는 지난 시기 당의 사업을 총결산하고, 경제와 문화의 모든 부문에서 사회주의가 거둔 결정적 성과를 확인했으며, 당의 총노선이 전선에서 승리했다고 규정했다.
제17차 당대회는 “승리자들의 대회”로 역사에 남았다.
결산 보고에서 스탈린 동지는 결산 기간에 소련에서 일어난 근본적 변혁을 지적했다.
“소련은 이 기간에 근본적으로 변모하여 후진성과 중세의 모습을 벗어던졌다. 농업국에서 공업국이 되었다. 소규모 개인 농업의 나라에서 집단적 대규모 기계화 농업의 나라가 되었다. 어둡고 문맹이며 문화 없는 나라에서 — 더 정확히 말하면 — 소련 여러 민족의 언어로 수업하는 고등·중등·초등 학교의 거대한 망으로 뒤덮인, 글을 알고 문화적인 나라가 되었다, 아니 되어 가고 있다” (스탈린, 『레닌주의의 제문제』, 553쪽).
이 무렵 사회주의 공업은 이미 나라 전체 공업의 99퍼센트를 차지했다. 사회주의 농업, 즉 콜호스와 소프호스는 나라 전체 파종 면적의 약 90퍼센트를 차지했다. 상품 유통에서는 자본주의적 요소가 상업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신경제정책을 도입할 때 레닌은 우리 나라에 다섯 가지 사회·경제 구조의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 구조는 가부장적 경제로, 상당 부분 자연경제, 즉 거의 아무런 거래도 하지 않는 경제이다. 둘째 구조는 소상품 생산으로, 농산물을 판매하는 대다수 농민 경리와 수공업자들이다. 이 경제 구조는 네프 초기 몇 해 동안 주민의 대다수를 포괄했다. 셋째 구조는 사경제적 자본주의로, 네프 초기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넷째 구조는 국가 자본주의, 주로 조차(租借)로서, 이것은 이렇다 할 만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다섯째 구조는 사회주의로, 당시 아직 약했던 사회주의 공업, 네프 초기에 인민경제에서 보잘것없는 자리를 차지했던 소프호스와 콜호스, 역시 네프 초기에는 약했던 국가 상업과 협동조합이다.
레닌은 이 모든 구조 가운데 사회주의 구조가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경제정책은 사회주의적 경제 형태의 완전한 승리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제17차 당대회 무렵에는 이미 달성되었다.
“이제 우리는 첫째, 셋째, 넷째 사회·경제 구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둘째 사회·경제 구조는 부차적인 지위로 밀려났으며, 다섯째 사회·경제 구조, 곧 사회주의 구조가 인민경제 전체에서 완전한 지배력이자 유일한 지휘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이에 관해 스탈린 동지는 말했다 (같은 책, 555쪽).
사상·정치적 지도 문제는 스탈린 동지의 보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당의 적들, 온갖 부류의 기회주의자들, 갖가지 민족적 편향주의자들이 격파되었지만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잔재가 아직 일부 당원들의 머릿속에 살아 있어 곧잘 모습을 드러낸다고 당에 경고했다. 경제에서, 특히 사람들의 의식에서의 자본주의 잔재는 격파된 반(反)레닌주의 집단들의 이데올로기가 되살아나는 데 유리한 토양이다. 사람들의 의식은 그 발전에서 경제적 처지보다 뒤처진다. 따라서 경제에서는 자본주의가 이미 청산되었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부르주아적 견해의 잔재가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이때 화약을 마르게 해 두어야 하는 대상인 자본주의 포위망이 이러한 잔재를 되살리고 부추기려 애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스탈린 동지는 특히 민족 문제 분야에서 사람들의 의식에 남은 자본주의 잔재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분야에서 그것들은 유달리 끈질기다. 볼셰비키당은 대러시아 쇼비니즘으로의 편향과 지방 민족주의로의 편향 양쪽에 맞서 두 전선에서 투쟁했다. 여러 공화국(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에서 당 조직들은 지방 민족주의에 대한 투쟁을 약화시켜, 그것이 적대 세력과 결탁하고 간섭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국가적 위험이 될 만큼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다. 민족 문제에서 어떤 편향이 주요 위험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말했다:
“주요 위험은 사람들이 투쟁을 그만두어 국가적 위험에까지 자라나도록 내버려 둔 그 편향이다”(같은 책, 587쪽).
스탈린 동지는 당에 사상·정치 사업을 강화하고, 적대 계급과 레닌주의에 적대적인 조류의 이데올로기와 그 잔재를 체계적으로 폭로할 것을 촉구했다.
스탈린 동지는 보고에서 계속하여, 올바른 결정을 채택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사업의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업의 성공을 보장하려면 지도 기관의 결정을 실생활에서 관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올바로 배치하고, 이 결정들의 집행을 검사하는 일을 조직해야 한다. 이러한 조직적 조치가 없으면 결정은 생활과 동떨어진 종잇장 결의로 남을 위험이 있다. 여기서 스탈린 동지는 조직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선발과 집행 검사라는 레닌의 잘 알려진 명제를 인용했다. 아울러 스탈린 동지는 채택된 결정과, 결정을 집행하고 그 집행을 검사하는 조직 사업 사이의 단절이 우리 실무 사업의 가장 큰 폐단이라고 강조했다.
당과 정부의 결정에 대한 집행 검사 사업을 개선하기 위해, 제17차 당대회는 제12차 당대회 이후 이미 자기 과제를 완수한 중앙검사위원회·노동농민검사원 대신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산하에 당검사위원회를, 소련 인민위원회의 산하에 소비에트검사위원회를 창설했다.
스탈린 동지는 새 단계에서 당의 조직적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1) 우리의 조직 사업을 당의 정치 노선의 요구에 맞추는 것, 2) 조직적 지도를 정치적 지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 3) 조직적 지도가 당의 정치 구호와 결정을 실생활에서 관철하는 것을 완전히 보장하도록 하는 것.
보고를 마치면서 스탈린 동지는, 사회주의의 성과가 크고 그것이 정당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달성한 성과에 도취되어서는 안 되며 “자만해서”도, 스스로를 달래서도 안 된다고 경고했다.
“…당을 달래서는 안 되고 당 안에 경계심을 키워야 하며, 당을 잠재워서는 안 되고 전투 준비 태세로 유지해야 하며, 무장을 해제해서는 안 되고 무장시켜야 하며, 동원을 해제해서는 안 되고 제2차 5개년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스탈린 동지는 지적했다(『레닌주의의 제문제』, 596쪽).
제17차 당대회는 몰로토프 동지와 쿠이비셰프 동지의 국민경제 발전 제2차 5개년 계획에 관한 보고를 청취했다. 제2차 5개년 계획의 과제는 제1차 5개년 계획의 과제보다 더욱 방대했다. 제2차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37년에는 공업 생산이 전쟁 전 수준에 비해 대략 8배로 늘어나야 했다. 국민경제 전체의 기본 건설 사업 규모는 제1차 5개년 계획의 640억 루블 남짓에 비해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에는 1,330억 루블로 계획되었다.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기본 건설 사업은 국민경제 모든 부문의 완전한 기술적 재무장을 보장했다.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에 농업의 기계화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트랙터 보유 대수의 총 출력은 1932년의 225만 마력에서 1937년에는 800만 마력 이상으로 늘어나야 했다. 농업기술 조치 체계(올바른 윤작, 순종 종자 파종, 가을갈이 등)를 널리 도입할 것이 계획되었다.
운수와 통신의 기술적 재건을 위한 방대한 사업이 계획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물질적·문화적 수준을 더욱 높이기 위한 광범위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제17차 당대회는 조직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고, 카가노비치 동지의 보고에 따라 당 건설과 소비에트 건설 문제에 관한 특별 결의를 채택했다. 당의 총노선이 승리하고 당의 정책이 삶과 수백만 노동자·농민의 경험으로 검증되었을 때, 조직 문제는 더욱 큰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제2차 5개년 계획의 새롭고 복잡한 과업은 모든 분야에서 사업의 질을 높일 것을 요구했다.
“제2차 5개년 계획의 기본 과업, 곧 자본주의적 요소의 최종적 청산, 경제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남은 자본주의 잔재의 극복, 최신 기술 기반 위에서 전체 인민경제의 재건 완성,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기업의 습득, 농업의 기계화와 생산성 제고는 모든 분야에서 사업의 질, 그중에서도 우선 조직적·실천적 지도의 질을 높일 문제를 극도로 예리하게 제기한다”라고 조직 문제에 관한 당대회 결의는 말하고 있다(『결의로 본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2부, 591쪽).
제17차 당대회에서는 새 당 규약이 채택되었는데, 이 규약은 무엇보다도 서문이 규약에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옛 규약과 다르다. 규약 서문에는 공산당에 대한 간략한 정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서 공산당이 지니는 의의에 대한 정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기관 체계에서 공산당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정의가 주어져 있다. 새 규약은 당원의 의무를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새 규약에는 입당에 관한 더 엄격한 규칙과 동조자 그룹에 관한 조항이 도입되었다. 규약에서는 당의 조직 구성 문제가 더 상세히 다루어졌고, 제17차 당대회 이후 초급 조직이라고 불리게 된 종전의 당 세포에 관한 조항이 새롭게 정식화되었다. 새 규약에서는 당내 민주주의와 당 규율에 관한 조항도 새롭게 정식화되었다.
4. 부하린파의 정치적 양면분자로의 변질. 트로츠키주의 양면분자의 백위군 살인·간첩 패거리로의 변질. 세. 엠. 키로프의 흉악한 살해. 볼셰비키의 경계심을 강화하기 위한 당의 대책.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거둔 성과는 당만을, 노동자와 콜호스 농민만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소비에트 인텔리겐치야 전체와 소련의 모든 정직한 시민도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쇄된 착취 계급의 잔재들을 기쁘게 하지 못했고, 이들을 점점 더 악에 받치게 했다.
그것은 분쇄된 계급의 앞잡이들, 곧 부하린파와 트로츠키주의자의 가련한 잔당을 격분시켰다.
이 양반들은 노동자와 콜호스 농민의 성과를, 그러한 성과 하나하나를 환영한 인민의 이익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생활에서 동떨어지고 속속들이 썩어빠진 자신들의 가련한 분파 집단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했다.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거둔 성과는 당 정책의 승리와 이 양반들 정책의 최종적 파산을 의미했으므로, 그들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고 공동 사업에 참여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실패와 파산에 대해 당과 인민에게 복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동자와 콜호스 농민의 사업을 더럽히고 해치기 시작했으며, 광산을 폭파하고 공장에 불을 지르고 콜호스와 소프호스에서 파괴 활동을 벌였다. 노동자와 콜호스 농민의 성과를 좌절시키고 인민 사이에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불만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가련한 집단이 폭로되고 분쇄되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그들은 당에 충실한 사람들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당에 점점 더 아첨하고 당을 찬양하고 당 앞에 굽실거리기 시작했으며, 실제로는 노동자와 농민에 맞선 눈에 띄지 않는 자신들의 파괴 활동을 계속했다.
제17차 당대회에서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는 참회의 연설을 하면서 당을 찬양하고 당의 성과를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그러나 당대회는 그들의 연설에 불성실과 양면 행위의 낙인이 찍혀 있음을 느꼈다. 당이 당원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의 성과에 대한 찬양과 아첨이 아니라 사회주의 전선에서의 정직한 노동인데, 부하린파에게서는 그런 노동이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은 이 양반들이 거짓 연설로 당대회 밖의 자기 지지자들과 서로 호응하고, 그들에게 양면 행위를 가르치며, 무기를 내려놓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제17차 당대회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인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연설에 나서, 자신들의 잘못을 지나칠 만큼 자책하고 당의 성과를 지나칠 만큼 찬양했다. 그러나 당대회는 구역질 나는 자책도, 역겨울 만큼 달콤한 당 찬양도 이 양반들의 불결하고 불안한 양심의 이면임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은 아직 알지 못했고 짐작하지도 못했다. 이 양반들이 당대회에서 달콤한 연설을 하면서 동시에 에스. 엠. 키로프의 흉악한 살해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의 스몰니에서 에스. 엠. 키로프가 권총 사격으로 흉악하게 살해되었다.
범행 현장에서 체포된 살인자는 레닌그라드의 반소비에트 지노비예프 집단 참가자들 가운데서 조직된 반혁명 지하 집단의 성원으로 드러났다.
당이 사랑하고 노동계급이 사랑한 에스. 엠. 키로프의 살해는 우리 나라 근로 대중에게 더없이 큰 분노와 깊은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수사 결과, 1933~34년 레닌그라드에서 지노비예프 반대파의 옛 참가자들 가운데서 이른바 「레닌그라드 중앙」을 우두머리로 하는 지하 반혁명 테러 집단이 조직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집단은 공산당 지도자들의 살해를 목적으로 삼았다. 첫 희생자로 에스. 엠. 키로프가 지목되었다. 이 반혁명 집단 성원들의 진술에서, 그들이 외국 자본주의 국가 대표자들과 연계되어 있었고 그들에게서 돈을 받았음이 드러났다.
폭로된 이 조직의 성원들은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최고형인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얼마 뒤 지하 반혁명 「모스크바 중앙」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수사와 재판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예브도키모프를 비롯한 이 조직의 지도자들이 자기 동조자들 사이에 테러 심리를 길러내고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 성원의 살해를 준비하는 데서 한 비열한 역할을 밝혀냈다.
이자들의 양면 행위와 비열함은 극단에 이르러, 에스. 엠. 키로프 살해의 조직자이자 고무자의 한 사람이며 살인자를 재촉해 그 범행을 하루빨리 실행하게 한 지노비예프가 키로프의 죽음에 대한 찬양조의 추도문을 써서 그것을 게재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지노비예프파는 재판에서 뉘우치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순간에도 양면 행위를 계속했다. 그들은 트로츠키와의 연계를 숨겼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함께 파시스트 첩보기관에 몸을 팔았다는 사실을 숨겼고, 자신들의 간첩·파괴 활동을 숨겼다. 지노비예프파는 재판에서 부하린파와의 연계, 파시즘의 고용된 앞잡이인 트로츠키-부하린 통합 패거리의 존재를 숨겼다.
키로프 동지의 살해는 나중에 밝혀진 바와 같이 이 트로츠키-부하린 통합 패거리가 저지른 것이었다.
이미 그때, 1935년에 지노비예프 집단이 위장한 백위군 조직이며 그 성원들을 백위군처럼 다루어 마땅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년 뒤, 키로프 살해의 진정한 직접적·실질적 조직자들이자 중앙위원회의 다른 위원들을 살해하기 위한 준비 조치의 조직자들이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그들의 공모자들이었음이 밝혀졌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바카예프, 예브도키모프, 피켈, 이. 니. 스미르노프, 므라치콥스키, 테르-바가냔, 라인골트 등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범죄자들은 자신들이 키로프 살해만 조직한 것이 아니라 당과 정부의 다른 모든 지도자들에 대한 살해도 준비했음을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사는 이어서 이 악당들이 파괴 활동을 조직하는 길, 간첩 행위의 길에 들어섰음을 밝혀냈다. 당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양면분자적 성명으로 가려져 있던 이자들의 극악무도한 도덕적·정치적 타락, 가장 저열한 비열함과 배신이 193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재판에서 드러났다.
이 살인자와 간첩 무리 전체의 주된 사주자이자 조직자는 유다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의 조수이자 그의 반혁명적 지령의 집행자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그들의 트로츠키주의 잔당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자들이 소련을 공격할 경우 소련이 패배하도록 준비했고, 노동자·농민 국가에 대한 패배주의자가 되었으며, 독일·일본 파시스트들의 비열한 하수인이자 첩자가 되었다.
에스. 엠. 키로프 살해라는 극악한 범행에 관한 지난 재판들에서 당 조직들이 끌어내야 했던 기본 교훈은 자신들의 정치적 맹목을 없애고, 정치적 안일함을 없애며, 경계심, 곧 모든 당원의 경계심을 높이는 것이었다.
에스. 엠. 키로프의 극악한 살해와 관련하여 낸 당 조직들에 보내는 편지에서 당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가) “우리의 힘이 커지면 적이 점점 더 길들여지고 무해해진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나온 기회주의적 안일함을 끝장내야 한다. 이러한 가정은 뿌리부터 그릇되었다. 그것은 적들이 슬금슬금 사회주의로 기어들어올 것이며 결국에는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되리라고 모든 사람에게 장담하던 우경 편향의 잔재이다. 월계관 위에서 잠자며 멍하니 있는 것은 볼셰비키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일함이 아니라 경계심, 진정한 볼셰비키적 혁명적 경계심이다. 적의 처지가 절망적일수록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과 싸우는 파멸한 자들의 유일한 수단으로서 ‘극단적 수단’에 더욱 기꺼이 매달리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 나) “당원들 사이의 당 역사 교육을, 우리 당 역사에 나타난 모든 반당 파벌에 대한 연구와 당 노선에 맞선 그들의 투쟁 방법, 그들의 전술에 대한 연구를, 그리고 — 그보다 더 — 반당 파벌들에 맞선 우리 당의 투쟁 전술과 방법, 우리 당이 이 파벌들을 극복하고 완전히 격파할 수 있게 한 전술과 방법에 대한 연구를 마땅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당원들이 당이 카데트, 사회혁명당원, 멘셰비키, 아나키스트와 어떻게 싸우고 극복했는지만이 아니라, 당이 트로츠키주의자, ‘민주중앙집권파’, ‘노동자 반대파’, 지노비예프파, 우경 일탈자, 우익·‘좌익’ 기형아 따위와 어떻게 싸우고 극복했는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 당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당원들의 혁명적 경계심을 완전히 보장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기에 1933년에 시작된 당 대열에서 숨어든 자와 이질적 분자를 숙청하는 일, 특히 에스. 엠. 키로프에 대한 흉악한 암살 이후 착수된 당원증의 철저한 점검과 낡은 당원증을 새 당원증으로 교환하는 일이 막대한 의의를 가졌다.
당원증을 점검하기 전에는 많은 당 조직에서 당원증을 다루는 데 자의와 태만이 판을 쳤다. 여러 지방 당 조직에서 공산당원 등록이 전혀 용납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음이 드러났으며, 적들은 이를 이용해 당원증을 간첩 활동, 파괴 활동 등의 가림막으로 삼아 비열한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입당 사업과 당원증 발급 사업을 당 조직의 많은 지도자들은 삼류 인물들에게, 흔히 전혀 검증되지 않은 당원들에게까지 떠넘겼다.
1935년 5월 13일 당원증의 등록, 발급, 보관에 관해 모든 조직에 보낸 특별 서한에서 중앙위원회는 모든 조직에서 당원증을 철저히 점검하고 "우리 자신의 당 집안에 볼셰비키적 질서를 세울 것"을 지시했다.
당원증 점검은 큰 정치적 의의를 가졌다. 당원증 점검 결과에 관한 중앙위원회 서기 예조프 동지의 보고에 따라[5] 1935년 12월 25일 채택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의에서는, 이 점검이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의 대열을 강화하기 위한 극히 중요한 조직적·정치적 조치였다고 밝혔다.
당원증의 점검과 교환을 마친 뒤 입당 사업이 재개되었다. 이때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당을 무더기로 충원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선진적이고 노동계급의 사업에 참으로 헌신하는 우리 나라의 가장 우수한 사람들, 무엇보다 노동자 가운데서, 또한 농민과 근로 인텔리겐치야 가운데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여러 부문에서 검증된 사람들"을 엄격히 개별적으로 받아들이는 토대 위에서 충원할 것을 요구했다.
새 당원의 입당을 재개하면서 중앙위원회는 당 조직들에 적대 분자들이 앞으로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의 대열에 잠입하려 들 것임을 명심하도록 의무를 지웠다. 따라서:
"모든 당 조직의 임무는 볼셰비키적 경계심을 온갖 방법으로 높이면서 레닌 당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질적이고 적대적이며 우연한 분자들이 당 대열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당을 보장하는 데 있다"(1936년 9월 29일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결정, 『프라우다』 제270호, 1936년).
자기 대열을 정화하고 강화하며, 당의 적들을 박멸하고 당 노선의 왜곡에 맞서 가차없이 투쟁하면서 볼셰비키당은 중앙위원회 주위에 더욱 굳게 단결했으며, 그 지도 아래 당과 소비에트 나라는 새로운 단계, 곧 계급 없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완성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간단한 결론.
1930~1934년에 볼셰비키당은 권력 장악 이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장 어려운 역사적 과제, 곧 수백만 소(小)소유자 농민 경영을 콜호스의 길, 사회주의의 길로 옮겨 놓는 과제를 해결했다.
가장 수가 많은 착취 계급인 쿨라크층을 청산하고 농민의 기본 대중을 콜호스의 길로 옮겨 놓음으로써 나라 안에서 자본주의의 마지막 뿌리가 없어지고, 농업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완성되며, 농촌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최종적으로 굳건해졌다.
조직적 성격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콜호스는 최종적으로 공고해져 풍족한 생활의 길에 들어섰다.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행한 결과 우리나라에는 사회주의 경제의 확고한 기초, 즉 최고 수준의 사회주의 중공업과 집단적 기계화 농업이 건설되었고, 실업이 사라졌으며,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가 없어졌고, 우리 조국 근로 대중의 물질적·문화적 처지를 끊임없이 개선할 조건이 마련되었다.
이 거대한 성과는 당과 정부의 대담하고 혁명적이며 현명한 정책 덕분에 우리나라의 노동계급, 콜호스 농민, 그리고 모든 근로 대중이 이룩한 것이다.
자본주의 포위망은 소련의 위력을 약화시키고 파괴하려고 소련 내부에 살인자, 파괴분자, 간첩의 무리를 조직하는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독일과 일본에서 파시스트들이 집권한 뒤로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 포위망의 적대 활동이 강화되었다. 파시즘은 트로츠키주의자와 지노비예프파에서, 간첩 행위, 파괴, 테러, 파괴 공작에 나서고 자본주의를 복원하려고 소련의 패배를 꾀하는 충실한 하수인을 얻었다.
소비에트 권력은 인류의 이 변종들을 단호한 손으로 응징하며, 인민의 적이자 조국의 반역자로서 가차 없이 처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