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PeopleJoseph Stalin, Vyacheslav Molotov, Andrei Zhdanov, Emelyan Yaroslavsky, Pyotr Pospelov, Vladimir Lenin, Karl Marx, Friedrich Engels TermsShort Course of the History of the All-Union Communist Party (Bolsheviks), Dialectical Materialism, Historical Materialism
제4장 스톨리핀 반동 시기의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볼셰비키가 독자적인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형성되다 (1908~1912년)
1. 스톨리핀 반동. 인텔리겐치야 반대파 계층의 해체. 퇴폐주의. 당 인텔리겐치야 일부가 마르크스주의의 적 진영으로 넘어간 것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수정하려는 시도. 레닌이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수정주의자들에게 가한 반박과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이론적 기초 옹호.
제2차 국가 두마는 1907년 6월 3일 차르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 날을 역사에서는 6월 3일 쿠데타의 날이라 부르는 것이 관례이다. 차르 정부는 제3차 국가 두마 선거에 관한 새 법을 공포함으로써 1905년 10월 17일의 자기 자신의 선언을 위반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차르 정부는 두마의 동의가 있어야만 새 법을 공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2차 두마의 사회민주당 의원단은 재판에 회부되었고, 노동계급의 대표들은 징역형과 유형(流刑) 정착지 유배형에 처해졌다.
새 선거법은 두마에서 지주와 상공업 부르주아지의 대표 수를 크게 늘리도록 만들어졌다. 동시에 그전에도 적었던 농민과 노동자의 대표 수는 몇 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제3차 두마는 그 구성에서 흑색백인단·카데트적이었다. 전체 의원 442명 가운데 우파(흑색백인단원)가 171명, 10월당원과 그에 가까운 집단의 구성원이 113명, 카데트와 그에 가까운 집단의 구성원이 101명, 트루도비키가 13명, 사회민주당원이 18명이었다.
우파(두마에서 오른쪽에 앉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로 대표된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가장 악독한 적, 곧 농민 운동을 진압할 때 농민에 대한 집단 태형과 총살을 벌인 흑색백인단 지주-농노주, 유대인 학살을 조직한 자, 노동자 시위를 습격해 구타한 자, 혁명 시기에 집회가 열리던 건물을 잔인하게 불태운 자들이었다. 우파는 근로 대중에 대한 가장 가혹한 탄압과 무제한의 차르 권력을 주장했고, 1905년 10월 17일의 차르 선언에 반대했다.
두마에서 우파에 가까운 정당으로는 옥토브리스트당, 즉 「10월 17일 동맹」이 있었다. 옥토브리스트는 대공업 자본과 자본주의적으로 경영하던 대지주의 이익을 대표했다(1905년 혁명 초기에 대지주 출신 카데트의 상당 부분이 옥토브리스트로 넘어갔다). 옥토브리스트를 우파와 구별해 주는 것은 10월 17일 선언을 인정한다는 점뿐이었고, 그것도 말로만 인정했다. 옥토브리스트는 차르 정부의 내정과 외교를 모두 전적으로 지지했다.
카데트, 즉 「입헌민주당」은 제3두마에서 제1두마와 제2두마 때보다 의석이 적었다. 이는 카데트에게 갔던 지주 표의 일부가 옥토브리스트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제3두마에는 이른바 트루도비키(노동단)라 불리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의 소수 집단이 대표를 내고 있었다. 트루도비키는 두마에서 카데트와 노동자 민주주의(볼셰비키) 사이에서 동요했다. 레닌은 트루도비키가 두마에서는 몹시 약하지만 대중, 곧 농민 대중을 대표한다고 지적했다. 트루도비키가 카데트와 노동자 민주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은 소경영자의 계급적 처지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레닌은 볼셰비키 의원들과 노동자 민주주의 앞에 “약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을 도와 자유주의자의 영향에서 그들을 떼어내고, 우파에 맞서서만이 아니라 반혁명적인 카데트에 맞서는 민주주의 진영을 결집시키라…”(레닌, 제15권, 486쪽)는 과제를 내세웠다.
1905년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특히 혁명이 패배한 뒤에는 카데트는 점점 더 반혁명 세력으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데트는 「민주주의적」 가면을 갈수록 벗어 던지고 진짜 군주제주의자, 차르 체제의 옹호자로 나섰다. 1909년 가장 저명한 카데트 문필가 집단이 논문집 『베히』를 펴냈는데, 여기서 카데트는 부르주아지의 이름으로 혁명을 진압해 준 차르 체제에 감사했다. 채찍과 교수대의 차르 정부 앞에서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카데트는 “오직 자신의 총검과 감옥으로 우리(곧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아직 지켜 주고 있는 이 권력을 찬양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썼다.
제2차 국가 두마를 해산하고 국가 두마의 사회민주당 의원단을 처단한 뒤, 차르 정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경제 조직을 맹렬히 짓부수기 시작했다. 징역형 감옥, 요새, 유형지가 혁명가들로 넘쳐났다. 혁명가들은 감옥에서 잔인하게 구타당했고 고문과 학대를 받았다. 흑색 백인단의 테러가 극성을 부렸다. 차르의 장관 스톨리핀은 온 나라를 교수대로 뒤덮었다. 수천 명의 혁명가가 처형되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고 불렀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 운동을 진압하면서, 차르 정부는 탄압, 토벌대, 총살, 감옥, 징역만으로 그칠 수는 없었다. 차르 정부는 「아버지 차르」에 대한 농민층의 순진한 믿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그래서 큰 술책을 쓰기로 하고, 농촌 부르주아지, 곧 쿨라크라는 수많은 계급을 만들어 농촌에서 자기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삼으려 했다.
1906년 11월 9일 스톨리핀은 농민을 공동체에서 분리해 개별 농장(후토르)으로 내보내는 새 토지법을 공포했다. 스톨리핀 토지법에 따라 토지의 공동체적 이용은 파괴되었다. 각 농민은 자기 분여지를 개인 소유로 가져가 공동체에서 나오라는 권유를 받았다. 농민은 전에는 그럴 권리가 없던 자기 분여지의 매각도 할 수 있었다. 공동체는 공동체에서 나가는 농민에게 한 곳에 모아 토지를 떼어 줄 의무가 있었다(후토르, 오트루프).
부유한 농민—쿨라크는 이때 힘없는 농민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법이 반포된 뒤 몇 년 사이에 백만 명이 넘는 힘없는 농민이 토지를 완전히 잃고 몰락했다. 힘없는 농민이 토지를 잃은 만큼 쿨라크의 독립 농장과 분할지가 늘어났다. 때로는 이것이 임노동, 즉 고농 노동을 널리 쓰는 진짜 영지인 경우도 있었다. 정부는 농민에게 공동체에서 가장 좋은 토지를 쿨라크 독립 농장주에게 떼어 주도록 강요했다.
농민 「해방」 때 지주가 농민의 토지를 약탈했다면, 이제는 쿨라크가 공동체의 토지를 약탈하여 가장 좋은 구획지를 받고 빈농층의 분배지를 헐값에 사들였다.
차르 정부는 쿨라크에게 토지를 사고 독립 농장을 세우도록 상당한 대부를 해 주었다. 스톨리핀은 쿨라크를 작은 지주로 만들어 차르 전제정치의 충실한 수호자로 삼으려 했다.
9년 동안(1906년부터 1915년까지) 모두 200만이 넘는 가구주가 공동체에서 빠져나왔다.
스톨리핀 체제는 토지가 적은 농민과 농촌 빈농층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농민층의 계층 분화가 심해졌다. 농민과 쿨라크 독립 농장주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농민층은 차르 정부와 지주·카데트 국가 두마가 존재하는 한 지주의 토지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독립 농장으로의 분리가 심해지던 시기(1907~1909년)에 농민 운동은 처음에는 줄어들었으나, 곧 1910~1911년과 그 이후에는 공동체 농민과 독립 농장주의 충돌을 토대로 지주와 쿨라크 독립 농장주에 반대하는 농민 운동이 강화되었다.
산업 분야에서도 혁명 이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의 집중, 즉 산업이 점점 더 큰 자본가 집단의 수중으로 확대·집적되는 일이 크게 강화되었다. 1905년 혁명 이전에도 자본가들은 국내에서 상품 값을 올리고, 그로써 얻은 초과 이윤을 수출 장려 기금으로 돌려 상품을 헐값에 해외 시장에 내다 팔고 해외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동맹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의 이러한 동맹, 이러한 연합(독점)을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라고 불렀다. 혁명 이후 부르주아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의 수는 더욱 늘었다. 대형 은행의 수도 늘고 산업에서의 역할도 커졌다. 러시아로 외국 자본이 유입되는 일도 늘었다.
이처럼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점점 더 독점 자본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가 되어 갔다. 여러 해의 침체 끝에 산업은 다시 살아났다. 석탄 채굴, 금속 생산, 석유 채굴이 늘고 직물과 설탕 생산이 늘었다. 국외로의 곡물 수출도 크게 늘었다.
이 시기 러시아는 자기 산업에서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었지만, 서유럽에 비해 여전히 뒤처진 나라로 남아 외국 자본가에게 의존했다. 러시아에서는 기계와 공작 기계 생산이 확립되지 못했고, 이것들은 국외에서 들여왔다. 자동차 공업도, 화학 공업도, 광물 비료 생산도 없었다. 무기 생산에서도 러시아는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에 뒤처졌다.
러시아의 낮은 금속 소비 수준을 후진성의 징표로 지적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썼다.
“농민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러시아의 철 소비는 다섯 배로 늘었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여전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유례없이 뒤떨어진 나라, 가난하고 반(半)야만적인 나라로 남아 있다. 현대적 생산 도구를 갖춘 정도가 영국의 4분의 1, 독일의 5분의 1, 미국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레닌, 제16권, 543쪽).
러시아의 경제적·정치적 후진성이 낳은 직접적 결과는 러시아 자본주의와 차리즘 자체가 서유럽 자본주의에 종속된 것이었다.
이것은 석탄, 석유, 전기 공업, 야금과 같은 국민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문들이 외국 자본의 수중에 있었고, 거의 모든 기계와 모든 설비를 제정 러시아가 외국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는 데서 나타났다.
이것은 속박적인 외채에서 나타났다. 차리즘은 그 이자를 갚기 위해 해마다 주민으로부터 수억 루블을 쥐어짜야 했다.
이것은 ‘동맹국’과 맺은 비밀 협정에서 나타났다. 이 협정에 따라 차리즘은 전쟁이 일어나면 ‘동맹국’을 지원하고 영국·프랑스 자본가들의 엄청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수백만 러시아 병사를 제국주의 전선에 내보내기로 약속했다.
스톨리핀 반동기는 특히 헌병과 경찰, 차르의 밀정과 흑백인조 폭력배들이 노동계급을 상대로 벌인 강도 같은 습격으로 두드러졌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탄압으로 괴롭힌 것은 차르의 친위대만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 공장주들도 그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이들은 공업의 침체와 실업 증가기에 노동계급에 대한 공세를 특히 강화했다. 공장주들은 노동자 대량 해고(직장 폐쇄)를 선언하고, 파업에 적극 참가한 의식 있는 노동자들을 적어 넣는 ‘검은 장부’를 만들었다. 이 ‘검은 장부’, 즉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은 해당 공업 부문의 공장주 동맹에 속한 어느 기업에서도 채용되지 못했다. 임금 단가는 이미 1908년에 10~15퍼센트 인하되었다. 노동일은 곳곳에서 10~12시간으로 늘어났다. 약탈적인 벌금 제도가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1905년 혁명의 패배는 혁명의 동반자들 사이에 분열과 와해를 낳았다. 특히 인텔리겐치야 사이에서 와해와 퇴폐주의가 심해졌다. 혁명이 거세게 고양되던 시기에 부르주아 계층에서 혁명 대열로 들어왔던 동반자들은 반동기에 당에서 떠나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혁명의 공공연한 적의 진영으로 넘어갔고, 일부는 살아남은 노동계급의 합법 단체에 눌러앉아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당의 신망을 떨어뜨리려 했다. 혁명에서 멀어지면서 동반자들은 반동에 적응하고 차리즘과 타협하여 살아가려 했다.
차르 정부는 혁명의 패배를 이용하여 혁명의 동반자 가운데 가장 겁 많고 제 몸 챙기기에 급급한 자들을 끌어들여 자기 앞잡이, 즉 밀정으로 삼았다. 차르의 오흐란카가 노동자 조직과 당 조직에 들여보낸 비열한 유다 같은 밀정들은 내부에서 염탐하고 혁명가들을 배신했다.
반혁명의 공세는 이데올로기 전선에서도 벌어졌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매도’하며, 혁명에 침을 뱉고 조롱하며, 배신을 찬미하고 ‘개성 숭배’라는 구실로 성적 방종을 찬미하는 유행 작가들이 떼를 지어 나타났다.
철학 분야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수정하려는 시도가 강화되었고, 이른바 ‘과학적’ 논거로 포장된 온갖 종교적 조류도 나타났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유행이 되었다.
이 모든 나리들은 그 잡다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된 목적, 곧 대중을 혁명에서 떼어 놓는다는 목적을 추구했다.
퇴폐와 불신은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여기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 확고히 선 적이 한 번도 없는 당 인텔리겐치야의 일부에도 번졌다. 그들 중에는 보그다노프, 바자로프, 루나차르스키(1905년에 볼셰비키에 접근했던 자들), 유시케비치, 발렌티노프(멘셰비키) 같은 문필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이론적 기초, 곧 변증법적 유물론과, 그 과학적·역사적 기초, 곧 사적 유물론에 맞서 동시에 “비판”을 벌였다. 이 비판이 여느 비판과 다른 점은 공개적이고 정직하게 진행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입장을 “옹호”한다는 깃발 아래 위장된 채 위선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마르크스주의를 “개선”하여 몇몇 기본 명제에서 그것을 해방시키고 싶다고. 실제로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말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적대를 위선적으로 부인하고 양면분자처럼 계속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허물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이런 위선적 비판의 위험은 그것이 당의 일반 활동가들을 속이려는 계산에 따른 것이어서 그들을 미혹에 빠뜨릴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허무는 이 비판이 위선적일수록 당에는 더욱 위험해졌다. 그만큼 이 비판은 당과 혁명에 맞선 반동의 총공세와 더욱 긴밀히 결합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한 인텔리겐치야의 일부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설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이른바 “신을 찾는 자들”과 “신을 만드는 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앞에는 시급한 과제가 놓여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분야의 이 변질자들에게 마땅한 반격을 가하고, 그들의 가면을 벗기고, 끝까지 폭로하여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이론적 기초를 지켜내는 일이었다.
이 과제를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를 자처하던 플레하노프와 그의 멘셰비키 친구들이 맡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평(時評) 비판 성격의 하찮은 글 두어 편으로 대충 때우고는 슬그머니 발을 뺐다.
이 과제를 수행한 사람은 레닌이었고, 1909년에 나온 그의 유명한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그것이다.
“반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주로,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공격에 바쳐진 책이 네 권이나 나왔다고 레닌은 이 책에서 썼다. 여기에는 우선 바자로프, 보그다노프, 루나차르스키, 베르만, 겔폰트, 유시케비치, 수보로프의 논문집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관한(? ‘반대하는’이라고 했어야 한다) 논집』(상트페테르부르크, 1908년)이 속하고, 다음으로 유시케비치의 『유물론과 비판적 실재론』, 베르만의 『현대 인식론에 비춰 본 변증법』, 발렌티노프의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구성』이 있다…… 정치적 견해는 뚜렷이 다르면서도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적대로 뭉친 이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철학에서는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한다! 엥겔스의 변증법은 ‘신비주의’라고 베르만은 말하고, 엥겔스의 견해는 ‘낡았다’고 바자로프는 지나가는 말로, 자명한 일인 듯 던진다. 유물론은 ‘현대 인식론’, ‘최신 철학’(또는 ‘최신 실증주의’), ‘현대 자연과학의 철학’, 심지어 ‘20세기 자연과학의 철학’까지 거만하게 끌어대는 우리의 용감한 전사들에게 논파된 셈이 되어 버렸다”(레닌, 제13권, 11쪽).
철학에서 수정주의자인 자기 친구들을 변호하여 “어쩌면 우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탐구하고 있다”고 말한 루나차르스키에게 답하여 레닌은 이렇게 썼다.
“나로 말하면, 나 역시 철학에서 ‘탐구하는’ 사람이다. 곧 이 글(『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두고 한 말이다.— 편집자)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며 반동적인 것을 내놓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를 찾아내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같은 책, 12쪽).
그러나 실제로 레닌의 책은 이 소박한 과제의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레닌의 책은 보그다노프, 유시케비치, 바자로프, 발렌티노프와 그들의 철학적 스승인 아베나리우스와 마흐에 대한 비판일 뿐만이 아니다. 아베나리우스와 마흐는 자신들의 저작에서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에 맞서 세련되고 매끄럽게 다듬은 관념론을 내놓으려 했다. 레닌의 책은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초, 즉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옹호하는 것이며, 한 역사적 시기, 즉 엥겔스가 죽은 때부터 레닌의 책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의 시기에 과학,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자연과학이 얻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모든 것을 유물론적으로 일반화한 것이다.
러시아 경험비판론자들과 그들의 외국 스승들을 제대로 비판한 뒤, 레닌은 자신의 책에서 철학적·이론적 수정주의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1) “마르크스주의를 갈수록 더 교묘하게 위조하고, 반유물론적 학설을 갈수록 더 교묘하게 마르크스주의로 위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경제학에서도, 전술 문제에서도, 일반적으로 철학에서도 현대 수정주의의 특징이다”(같은 책, 270쪽);
2)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의 학파 전체는 관념론으로 나아간다”(같은 책, 291쪽);
3) “우리의 마흐주의자들은 모두 관념론에 빠져 있다”(같은 책, 282쪽);
4) “경험비판론의 인식론적 스콜라주의 뒤에는 철학에서의 당파 투쟁, 결국은 현대 사회의 적대적 계급들의 경향과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투쟁을 보지 않을 수 없다”(같은 책, 292쪽); 5) “경험비판론의 객관적, 계급적 역할은 전적으로 신앙주의자들(과학보다 신앙을 우선시하는 반동분자들— 편집자)이 일반적으로 유물론에 반대하고 특히 사적 유물론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같은 책, 292쪽); 6) “철학적 관념론은…… 성직자주의로 가는 길이다”(같은 책, 304쪽).
우리 당의 역사에서 레닌의 책이 지닌 거대한 의의를 평가하고, 스톨리핀 반동 시기의 온갖 수정주의자와 변절자들에 맞서 레닌이 어떤 이론적 부를 지켜냈는지를 이해하려면,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기초를 적어도 간략하게나마 알 필요가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은 공산주의의 이론적 토대, 마르크스주의 당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며, 이 기초를 아는 것, 따라서 이를 습득하는 것이 우리 당의 모든 활동가의 의무이므로 이는 더욱 필요하다.
그러면:
1)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2) 사적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2.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 대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의 세계관이다. 그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것은, 자연 현상에 대한 접근, 자연 현상을 연구하는 방법, 이 현상들을 인식하는 방법이 변증법적이고, 자연 현상에 대한 해석, 자연 현상에 대한 이해, 곧 그 이론이 유물론적이기 때문이다.
사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들을 사회생활 연구에 확장한 것,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들을 사회의 생활 현상에, 사회 연구에, 사회 역사 연구에 적용한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변증법적 방법을 설명할 때 흔히 헤겔을 언급하는데, 헤겔은 변증법의 기본 특징을 정식화한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이 헤겔의 변증법과 같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그 “합리적 핵심”만을 취하고 헤겔의 관념론적 껍질은 버렸으며, 변증법에 현대적인 과학적 모습을 부여하기 위해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근본에서 헤겔의 방법과 다를 뿐 아니라 그것과 정반대이다. 헤겔에게는 사유 과정이 — 그는 이것을 관념이라는 이름으로 심지어 독립된 주체로까지 만든다 — 현실적인 것의 데미우르고스(창조자)이며, 현실적인 것은 그 외적 현상일 뿐이다. 나에게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이란 인간의 머릿속에 옮겨져 그 안에서 변형된 물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독일어 제2판 후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유물론을 설명할 때 흔히 포이어바흐를 언급하는데, 포이어바흐는 유물론의 권리를 회복시킨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이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같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서 그 “기본 핵심”을 취하여 이를 유물론의 과학적·철학적 이론으로 더욱 발전시켰고, 그의 관념론적이고 종교적·윤리적인 찌꺼기는 내던져 버렸다. 포이어바흐가 기본적으로는 유물론자이면서도 유물론이라는 명칭에는 반대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엥겔스는 포이어바흐가 “유물론적 기초에도 불구하고 아직 낡은 관념론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포이어바흐의 실제 관념론은 그의 윤리학과 종교철학에 접근하자마자 곧바로 드러난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카. 마르크스와 프. 엥겔스, 제14권, 652~654쪽).
변증법이라는 말은 “대화하다”, 즉 담화를 하다, 논쟁을 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알레고”에서 나왔다. 고대에는 변증법을 상대편 판단 속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 모순을 극복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기술로 이해했다. 고대의 일부 철학자들은 사유 속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과 상반된 의견들의 충돌이 진리를 발견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 변증법적 사유 방식은 나중에 자연현상에까지 확대되어 자연 인식의 변증법적 방법이 되었으며, 이 방법은 자연현상을 영원히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자연의 발전을 자연 속 모순의 발전의 결과로, 자연 속 상반된 힘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보았다.
변증법은 그 근본에서 형이상학과 정반대이다.
1)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방법은 다음과 같은 기본 특징으로 설명된다.
가) 변증법은 형이상학과 달리, 자연을 서로 떨어지고 서로 격리되고 서로 의존하지 않는 사물과 현상의 우연한 집합으로 보지 않고, 사물과 현상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서로 의존하며 서로를 제약하는 하나의 연관된 통일적 전체로 본다.
따라서 변증법적 방법은 자연의 어떤 현상도 주위 현상들과의 연관에서 떼어내어 고립된 형태로 파악하면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자연의 어떤 영역에서든 어떤 현상이나 주위 조건과의 연관 밖에서, 그것과 떨어뜨려 고찰하면 무의미한 것으로 바뀔 수 있으며, 반대로 어떤 현상이든 주위 현상들과의 불가분의 연관 속에서, 주위 현상들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것으로 고찰하면 이해하고 근거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형이상학과 반대로, 변증법은 자연을 정지와 부동, 침체와 불변의 상태로 보지 않고,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 끊임없는 갱신과 발전의 상태로 본다. 이 상태에서는 언제나 무엇인가가 발생하고 발전하며, 무엇인가가 파괴되고 수명을 다해 간다.
따라서 변증법적 방법은 현상을 상호 연관과 조건성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그 운동, 그 변화, 그 발전의 관점에서, 그 발생과 소멸의 관점에서 고찰할 것을 요구한다.
변증법적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지금 견고해 보이지만 이미 소멸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견고하지 않아 보이더라도 발생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방법에게 불가항력적인 것, 곧 막을 수 없는 것은 오직 발생하고 발전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자연은, 엥겔스가 말하기를, 가장 작은 입자로부터 가장 큰 물체에 이르기까지, 모래알로부터 태양에 이르기까지, 원생생물(원시적인 살아 있는 세포.— 편집자)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발생과 소멸 속에, 흐름 속에, 쉼 없는 운동과 변화 속에 있다”(같은 책, 484쪽).
따라서 엥겔스가 말하기를, 변증법은 “사물과 그 관념적 반영을 주로 그 상호 연관 속에서, 그 결합 속에서, 그 운동 속에서, 그 발생과 소멸 속에서 파악한다”(카. 마르크스와 프. 엥겔스, 제14권, 23쪽).
다) 형이상학과 반대로, 변증법은 발전 과정을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단순한 성장 과정으로 보지 않고, 미미하고 숨겨진 양적 변화에서 공공연한 변화, 근본적 변화, 질적 변화로 넘어가는 그러한 발전으로 본다. 이 발전에서 질적 변화는 점진적으로가 아니라 빠르게, 갑작스럽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도약적 이행의 형태로 일어나며, 우연히가 아니라 합법칙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점진적 양적 변화가 축적된 결과로 일어난다.
따라서 변증법적 방법은 발전 과정을 원을 그리는 운동으로, 이미 지나간 것의 단순한 반복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전진 운동으로, 상승선을 따라가는 운동으로, 낡은 질적 상태에서 새로운 질적 상태로의 이행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의 발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자연은, 엥겔스가 말하기를, 변증법의 시금석이며, 이 시험을 위해 매우 풍부하고 날마다 늘어나는 자료를 제공한 현대 자연과학은, 자연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형이상학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이루어지며, 자연은 영원히 동일하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원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역사를 겪는다는 것을 그로써 증명했다. 여기서 우선 다윈을 들어야 한다. 그는 현대의 유기적 세계 전체, 곧 식물과 동물, 따라서 인간도 수백만 년 동안 계속된 발전 과정의 산물임을 증명하여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견해에 가장 강한 타격을 가했다”(같은 책, 23쪽).
변증법적 발전을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의 이행으로 설명하면서,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물리학에서… 모든 변화는 양이 질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물체에 내재하거나 물체에 전달된, 어떤 형태의 운동량의 양적 변화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물의 온도는 처음에는 물의 액체 상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액체 상태의 물의 온도를 높이거나 낮추면, 이 응집 상태가 변하여 물이 한 경우에는 증기로, 다른 경우에는 얼음으로 변하는 순간이 온다… 또 백금선이 빛을 내려면 전류의 세기가 일정한 최소한도에 이르러야 하고, 모든 금속에는 저마다의 용해열이 있으며, 모든 액체에는 주어진 압력 아래에서 저마다의 일정한 어는점과 끓는점이 있다. 우리의 수단으로 해당 온도에 도달할 수 있는 한에서 그렇다. 끝으로 모든 기체에는 임계점이 있어, 해당 압력과 냉각으로 그것을 액체 상태로 만들 수 있다… 이른바 물리학의 상수(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점 — 편집자)는 대부분 결절점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결절점에서는 운동의 양적 (변화) 증가나 감소가 해당 물체의 상태에 질적 변화를 일으키며, 따라서 양이 질로 이행한다”(같은 책, 527~528쪽).
이어서 화학으로 넘어가 엥겔스는 계속한다.
“화학은 양적 조성의 변화의 영향 아래 일어나는 물체의 질적 변화에 관한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헤겔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산소를 보자. 분자에 보통처럼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의 원자가 결합하면 오존이 된다. 오존은 냄새와 작용에서 보통 산소와 뚜렷이 구별되는 물체이다. 또 산소가 질소나 황과 결합하는 여러 비율은 어떠한가. 그 각각이 다른 모든 물체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물체를 낳는다!”(같은 책, 528쪽).
끝으로 엥겔스는 뒤링을 비판한다. 뒤링은 헤겔을 마구 욕하면서도 슬그머니 헤겔에게서, 무감각한 세계의 영역에서 감각의 영역으로, 무기적 세계의 영역에서 유기적 생명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은 새로운 상태로의 도약이라는 잘 알려진 명제를 빌려왔다. 엥겔스는 말한다.
“이것은 바로 헤겔의 척도 관계의 결절선이다. 여기서는 순전히 양적인 증가나 감소가 일정한 결절점에서 질적 도약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물을 가열하거나 냉각하는 경우에 끓는점과 어는점이 바로 그 결절점으로, 여기서 정상 압력 아래 새로운 응집 상태로의 도약이 일어나며, 따라서 양이 질로 이행한다”(같은 책, 45~46쪽).
라) 형이상학과 달리 변증법은 자연의 사물과 현상에 내적 모순이 고유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 과거와 미래, 사멸해 가는 것과 발전해 가는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대립물의 투쟁, 곧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죽어 가는 것과 태어나는 것 사이의, 사멸해 가는 것과 발전해 가는 것 사이의 투쟁이 발전 과정의 내적 내용,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전화하는 과정의 내적 내용을 이룬다고 본다.
따라서 변증법적 방법은 저급한 것에서 고급한 것으로 나아가는 발전 과정이 현상들의 조화로운 전개의 방식이 아니라, 사물과 현상에 고유한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 이 모순에 기초하여 작용하는 대립적 경향들이 "투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본다.
"엄밀한 의미에서 변증법은, 레닌이 말하듯이, 사물의 본질 자체에 있는 모순을 연구하는 것이다"(레닌, 『철학 노트』, 263쪽).
그리고 또한: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이다"(레닌, 제13권, 301쪽).
이상이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방법의 기본 특징이다.
변증법적 방법의 원리를 사회생활의 연구와 사회사의 연구에 확대 적용하는 것, 이 원리를 사회사와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실천 활동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의를 가지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세계에 고립된 현상이란 없고 모든 현상이 서로 연결되어 서로를 조건 짓는다면, 역사상의 모든 사회 체제와 모든 사회 운동은 역사가들이 흔히 그렇게 하듯이 "영원한 정의"나 그 밖의 어떤 선입견적 관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체제와 사회 운동을 낳았고 그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조건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노예제는 현대의 조건에서는 무의미하며 부자연스러운 어리석음이다. 노예제는 해체되어 가는 원시공동체 체제의 조건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합법칙적인 현상이다. 원시공동체 체제에 비해 한 걸음 전진을 뜻하기 때문이다.
1905년 러시아처럼 차리즘과 부르주아 사회가 존재하던 조건에서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의 요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정당하며 혁명적인 요구였다. 그때에는 부르주아 공화국이 전진을 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련의 조건에서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의 요구는 무의미하고 반혁명적인 요구이다. 소비에트 공화국에 비해 부르주아 공화국은 후퇴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조건과 장소와 시간에 달려 있다.
사회 현상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접근이 없으면 역사 과학의 존재와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오직 이러한 접근만이 역사 과학이 우연들의 혼돈과 터무니없는 오류의 더미로 변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세계가 끊임없는 운동과 발전 속에 있고 낡은 것의 소멸과 새로운 것의 성장이 발전의 법칙이라면, 더 이상 "불변의" 사회 질서도, 사유재산과 착취의 "영원한 원리"도, 농민이 지주에게 복종하고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영원한 관념"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가 한때 봉건 체제를 대체했듯이, 자본주의 체제도 사회주의 체제로 대체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우세한 힘을 이루고 있더라도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사회 계층이 아니라, 현재는 우세한 힘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발전하고 미래를 가진 사회 계층에 의거해야 한다.
지난 세기 80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나로드니키와 투쟁하던 시대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던 개인 경영 농민층에 비하면 미미한 소수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으로서 발전하고 있었던 반면, 농민층은 계급으로서 분해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으로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후 미미한 힘에서 으뜸가는 역사적·정치적 힘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에서 틀리지 않으려면 뒤가 아니라 앞을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느린 양적 변화가 빠르고 갑작스러운 질적 변화로 넘어가는 것이 발전의 법칙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이 수행하는 혁명적 변혁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자본주의적 억압으로부터의 노동계급 해방은 느린 변화나 개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본주의 체제의 질적 변화를 통해서, 혁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정치에서 틀리지 않으려면 개량주의자가 아니라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발전이 내부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곧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이 모순에 기초한 대립하는 힘들이 충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자본주의 질서의 모순을 덮어 감출 것이 아니라 폭로하고 풀어헤쳐야 하며, 계급투쟁을 꺼뜨릴 것이 아니라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따라서 정치에서 틀리지 않으려면 타협을 모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정치를 수행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이해 조화를 꾀하는 개량주의 정치나,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성장해 들어간다’고 보는 타협주의 정치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방법을 사회생활과 사회의 역사에 적용해 보면 이러하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은 그 근본에서 철학적 관념론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2)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은 다음과 같은 기본 특징을 지닌다.
가) 세계를 ‘절대 관념’, ‘세계 정신’, ‘의식’의 구현으로 보는 관념론과 달리, 마르크스의 철학적 유물론은 세계가 본성상 물질적이며, 세계의 다양한 현상은 운동하는 물질의 여러 형태이며, 변증법적 방법이 밝혀내는 현상들의 상호 연관과 상호 제약은 운동하는 물질의 발전 법칙성이며, 세계는 물질의 운동 법칙에 따라 발전하고 어떤 ‘세계 정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유물론적 세계관은, 엥겔스가 말하기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어떠한 외래의 덧붙임도 없이 이해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제14권, 651쪽).
“세계는 모든 것에서 하나이며 신들 중 누구도 인간들 중 누구도 창조하지 않았고, 법칙에 따라 타오르고 법칙에 따라 꺼지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로서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라고 한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물론적 견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초에 대한 아주 훌륭한 서술이다”(레닌, 『철학 노트』, 318쪽).
나) 관념론은 우리의 의식만이 실제로 존재하며 물질적 세계, 존재, 자연은 오직 우리의 의식 속에, 곧 우리의 감각, 표상, 개념 속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은 물질, 자연, 존재가 의식 밖에서 의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며, 물질은 감각·표상·의식의 원천이므로 일차적이고, 의식은 물질의 반영, 존재의 반영이므로 이차적이고 파생적이라고 본다. 또 사고는 발전 과정에서 높은 정도의 완성에 도달한 물질의 산물, 곧 뇌의 산물이며 뇌는 사고의 기관이라고 보고, 따라서 조야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사고를 물질로부터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모든 철학의 최고 문제는, 엥겔스가 말하기를, 사고와 존재의 관계, 정신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했는가에 따라 두 개의 큰 진영으로 갈라졌다. 정신이 자연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주장한 자들은… 관념론 진영을 이루었다. 자연을 근본 원리로 여긴 자들은 여러 유물론 학파에 합류했다”(카를 마르크스, 『선집』, 제1권, 329쪽).
그리고 이어서: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세계는 유일한 현실적 세계이다… 우리의 의식과 사고는 아무리 초감각적으로 보일지라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기관, 즉 뇌의 산물이다.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 아니며, 정신 자체가 물질의 최고 산물일 뿐이다”(같은 책, 332쪽).
물질과 사고의 문제에 관하여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고하는 물질로부터 사고를 분리할 수 없다. 물질은 모든 변화의 주체이다”(같은 책, 302쪽).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을 설명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유물론은 일반적으로 의식, 감각, 경험과 독립적인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존재(물질)를 인정한다… 의식은… 존재의 반영일 뿐이며, 기껏해야 대략 올바른(적합한, 이상적으로 정확한) 반영이다”(레닌, 제13권, 266~267쪽).
그리고 이어서:
가) “물질은 우리의 감각 기관에 작용하여 감각을 산출하는 것이다. 물질은 감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객관적 실재이다… 물질, 자연, 존재, 물리적인 것은 일차적이며, 정신, 의식, 감각, 심리적인 것은 이차적이다”(같은 책, 119~120쪽). 나) “세계의 그림은 물질이 어떻게 운동하며 ‘물질이 어떻게 사고하는가’에 대한 그림이다”(같은 책, 288쪽).
다) “뇌는 사고의 기관이다”(같은 책, 125쪽).
다) 관념론은 세계와 그 합법칙성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하고, 우리 지식의 신뢰성을 믿지 않으며, 객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세계가 과학으로는 결코 인식될 수 없는 “물자체”로 가득 차 있다고 여긴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은 세계와 그 합법칙성이 충분히 인식 가능하며, 경험과 실천으로 검증된 자연 법칙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객관적 진리의 의미를 지니는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이며, 세계에 인식 불가능한 사물은 없고 다만 아직 인식되지 않은 사물만이 있을 뿐이어서 이것들이 과학과 실천의 힘으로 밝혀지고 인식될 것이라고 본다.
세계의 인식 불가능성과 인식 불가능한 “물자체”에 관한 칸트와 다른 관념론자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우리 지식의 신뢰성에 관한 유물론의 잘 알려진 주장을 옹호하면서 엥겔스는 이렇게 쓴다:
“이러한 철학적 억지와 다른 모든 철학적 억지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반박은 실천, 곧 실험과 공업에 있다. 우리가 자연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옳음을, 우리 스스로 그 현상을 만들어내고 그 조건으로부터 불러일으키며 더욱이 우리의 목적에 봉사하게 만든다는 사실로 증명할 수 있다면, 칸트의 포착할 수 없는 ‘물자체’는 끝장이다. 동식물의 몸속에서 생성되는 화학 물질들은 유기화학이 그것들을 하나씩 만들어내기 시작할 때까지 ‘물자체’와 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물자체’는 우리를 위한 물건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꼭두서니의 염료인 알리자린이 그러하다. 우리는 이제 이것을 밭에서 키운 꼭두서니 뿌리에서가 아니라, 훨씬 더 싸고 간단하게 석탄 타르에서 얻는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는 300년 동안 가설로, 극히 개연성이 높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르베리에가 이 체계의 자료에 근거하여,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행성이 존재해야 함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계산으로 그 행성이 천체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까지 정했고, 그 뒤 갈레가 실제로 이 행성을 발견했을 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증명되었다”(카. 마르크스, 『선집』, 제1권, 330쪽).
레닌은 보그다노프, 바자로프, 유시케비치 및 마하의 다른 추종자들을 신앙주의라고 비난하고, 자연의 법칙성에 관한 우리의 과학적 지식은 확실하며 과학의 법칙은 객관적 진리를 이룬다는 유물론의 널리 알려진 명제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 신앙주의는 결코 과학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의 ‘지나친 요구’, 곧 객관적 진리에 대한 요구만을 부정한다. 만약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고(유물론자들이 생각하듯이), 자연과학이 인간의 ‘경험’ 속에 외부 세계를 반영함으로써 오직 자연과학만이 우리에게 객관적 진리를 줄 수 있다면, 모든 신앙주의는 무조건 부정된다”(레닌, 제13권, 102쪽).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의 특징은 간략히 말하면 이러하다.
철학적 유물론의 명제들을 사회생활의 연구, 사회 역사의 연구로 넓히는 것이 얼마나 큰 의의를 가지는지, 이 명제들을 사회의 역사와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실천 활동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의를 가지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연 현상의 연관과 그 상호 제약이 자연 발전의 법칙성을 이룬다면, 거기에서 사회생활 현상의 연관과 상호 제약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법칙성을 이룬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사회생활, 사회의 역사는 더 이상 ‘우연’의 집적이 아니다. 사회의 역사는 사회의 합법칙적 발전이 되고, 사회 역사의 연구는 과학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실천 활동은 ‘뛰어난 인물들’의 선한 소망이나 ‘이성’, ‘보편적 도덕’ 등의 요구에 기초해서는 안 되고, 사회 발전의 법칙성과 이 법칙성의 연구에 기초해야 한다.
더 나아가, 세계가 인식 가능하고 자연 발전 법칙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객관적 진리의 의의를 지니는 확실한 지식이라면, 거기에서 사회생활, 사회의 발전도 인식 가능하며 사회 발전 법칙에 관한 과학의 자료도 객관적 진리의 의의를 지니는 확실한 자료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사회 역사에 관한 과학은 사회생활 현상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예컨대 생물학만큼 정확한 과학이 될 수 있으며, 사회 발전 법칙을 실천에 이용할 수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실천 활동에서 어떤 우연한 동기가 아니라 사회 발전 법칙과 이 법칙에서 나오는 실천적 결론을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인류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에서 과학으로 바뀐다.
따라서 과학과 실천 활동의 연결, 이론과 실천의 연결, 곧 그 통일이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길잡이 별이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자연, 존재, 물질적 세계가 일차적인 것이고 의식, 사유가 이차적인 것, 파생적인 것이라면, 또 물질적 세계가 사람들의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고 의식은 이 객관적 실재의 반영이라면, 여기에서 사회의 물질적 생활, 곧 사회의 존재 역시 일차적인 것이고 사회의 정신적 생활은 이차적인 것, 파생적인 것이며, 사회의 물질적 생활은 사람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고 사회의 정신적 생활은 이 객관적 실재의 반영, 곧 존재의 반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사회의 정신적 생활이 형성되는 원천, 사회적 사상·사회적 이론·정치적 견해·정치적 제도가 생겨나는 원천은 이 사상, 이론, 견해, 정치적 제도 자체가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 곧 사회적 존재에서 찾아야 한다. 이 사상, 이론, 견해 등은 사회적 존재의 반영이다.
따라서 사회 역사의 여러 시기에 사회적 사상, 이론, 견해, 정치적 제도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면, 노예제 아래에서는 어떤 사회적 사상, 이론, 견해, 정치적 제도를 만나고 봉건제 아래에서는 다른 것을,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또 다른 것을 만난다면, 이는 사상, 이론, 견해, 정치적 제도 자체의 “본성”이나 “속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여러 시기에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의 존재가 어떠하고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회의 사상, 이론, 정치적 견해, 정치적 제도도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말한다.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칼 마르크스, 『선집』, 제1권, 269쪽).
따라서 정치에서 실수하지 않고 공허한 몽상가의 처지에 빠지지 않으려면,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활동에서 추상적인 “인간 이성의 원리”가 아니라 사회 발전의 결정적 힘인 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구체적 조건에서 출발해야 하며, “위대한 인물들”의 선한 염원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 생활 발전의 실제적 요구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로드니키, 아나키스트, 사회혁명당원을 비롯한 유토피아주의자들이 몰락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사회 발전에서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맡는 으뜸가는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관념론에 빠져, 자신들의 실천 활동을 사회의 물질적 생활 발전의 요구에 기초하여 세우지 않고 그 요구와 상관없이, 그 요구에 거슬러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의 실제 생활과 동떨어진 “이상적 계획”과 “전면적 구상”에 기초하여 활동을 세웠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힘과 생명력은 그것이 실천 활동에서 바로 사회의 물질적 생활 발전의 요구에 의거하며 결코 사회의 실제 생활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말에서, 사회적 사상·이론·정치적 견해·정치 제도가 사회 생활에서 의의를 갖지 않는다거나, 사회적 존재와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의 발전에 반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적 사상, 이론, 견해, 정치 제도의 기원과 발생에 대해서, 곧 사회의 정신적 생활이 그 물질적 생활 조건의 반영이라는 점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사회적 사상, 이론, 견해, 정치 제도의 의의와 역사에서 그것들이 하는 역할에 관해서라면, 사적 유물론은 이를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 생활과 사회의 역사에서 그것들이 갖는 중대한 역할과 의의를 강조한다.
사회적 사상과 이론은 여러 가지다. 자기 시대를 다 살아 낡아버린 채 사회의 몰락해 가는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낡은 사상과 이론이 있다. 그것들의 의의는 사회의 발전과 전진을 저해한다는 데 있다. 사회의 선진적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새롭고 선진적인 사상과 이론도 있다. 그것들의 의의는 사회의 발전과 전진을 쉽게 한다는 데 있으며, 사회의 물질적 생활 발전의 요구를 더 정확히 반영할수록 그것들은 더 큰 의의를 얻는다.
새로운 사회적 사상과 이론은 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발전이 사회 앞에 새로운 과제를 제기한 뒤에야 비로소 발생한다. 그러나 일단 발생하고 나면 그것들은 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발전이 제기한 새로운 과제의 해결을 쉽게 하고 사회의 전진을 쉽게 하는 가장 중대한 힘이 된다.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사상, 새로운 이론, 새로운 정치적 견해, 새로운 정치 제도가 갖는 거대한 조직적·동원적·개조적 의의가 드러난다. 새로운 사회적 사상과 이론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그것들이 사회에 필요하기 때문이며, 그것들의 조직적·동원적·개조적 작업 없이는 사회의 물질적 생활 발전의 무르익은 과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발전이 제기한 새로운 과제를 토대로 발생한 새로운 사회적 사상과 이론은 자기 길을 개척하여 인민 대중의 것이 되며, 인민 대중을 동원하고 사회의 몰락해 가는 세력에 맞서 그들을 조직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발전을 가로막는 몰락해 가는 세력을 쉽게 전복하게 한다.
이렇게 사회적 사상, 이론, 정치 제도는 사회의 물질적 생활, 곧 사회적 존재의 발전에서 무르익은 과제를 토대로 발생한 뒤에, 이번에는 스스로 사회적 존재와 사회의 물질적 생활에 작용하여, 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무르익은 과제의 해결을 끝까지 이끌어 가고 그 이후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말한다.
“이론은 대중을 장악하자마자 물질적 힘이 된다”(K. 마르크스와 F. 엥겔스, 제1권, 406쪽).
따라서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에 작용하여 그 발전과 개선을 앞당기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사회의 물질적 생활 발전의 요구를 올바르게 반영하는 사회적 이론, 사회적 사상에 의거해야 한다. 그런 이론과 사상이라야 광범한 인민 대중을 움직이게 할 수 있고, 그들을 동원하여 반동 세력을 격파하고 사회의 선진적 세력에게 길을 열어 줄 태세가 된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거대한 군대로 조직할 수 있다.
「경제주의자」와 멘셰비키의 몰락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선진 이론과 선진 사상이 가진 동원하고 조직하고 개조하는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속류 유물론에 빠져 그 역할을 거의 영(零)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데서 설명된다. 그들은 결국 당을 수동성과 무기력한 연명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힘과 생명력은, 사회의 물질적 생활 발전의 요구를 올바르게 반영하는 선진 이론에 의거하고, 이론을 그에 걸맞은 높이로 끌어올리며, 이론의 동원하고 조직하고 개조하는 힘을 남김없이 이용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는 데 있다.
사적 유물론은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관계, 물질적 생활 발전의 조건과 사회의 정신적 생활 발전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해결한다.
3) 사적 유물론
사회의 면모, 그 사상, 견해, 정치 제도 등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는 문제가 남아 있다.
실로 이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란 무엇이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라는 개념에는 무엇보다 먼저 사회를 둘러싼 자연, 곧 지리적 환경이 들어간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지리적 환경은 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필요불가결하고 항구적인 조건의 하나이며, 물론 사회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 발전에서 지리적 환경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지리적 환경이야말로 사회의 면모와 사람들의 사회 제도의 성격, 한 제도에서 다른 제도로의 이행을 규정하는 주요한 힘이 아닌가?
사적 유물론은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한다.
지리적 환경은 사회 발전의 항구적이고 필요불가결한 조건의 하나이며, 물론 사회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사회 발전의 진행을 가속하거나 지연시킨다. 그러나 그 영향은 규정적인 영향이 아니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은 지리적 환경의 변화와 발전보다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3천 년 동안 유럽에서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사회 제도, 곧 원시 공동체 제도, 노예제 제도, 봉건 제도가 교체되었고, 유럽 동부, 곧 소련에서는 네 가지 사회 제도가 교체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같은 기간에 유럽의 지리적 조건은 전혀 변하지 않았거나, 지리학이 그것을 언급하기조차 거부할 만큼 아주 조금밖에 변하지 않았다. 이는 당연하다. 지리적 환경에 얼마간이라도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수백만 년이 필요하지만, 사람들의 사회 제도에 가장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는 데는 수백 년이나 2천 년 남짓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이로부터, 지리적 환경은 사회 발전의 주요한 원인, 규정적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수만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수백 년 사이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 것의 발전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인구 증가와 이러저러한 인구 밀도 역시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라는 개념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사람들은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의 필요불가결한 요소를 이루며, 일정한 최소한의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어떤 물질적 생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야말로 사람들의 사회 제도의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한 힘이 아닌가?
사적 유물론은 이 질문에도 역시 부정적으로 답한다.
물론 인구 증가는 사회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 발전을 촉진하거나 지연시키지만, 사회 발전의 주요한 힘이 될 수는 없으며 사회 발전에 미치는 영향도 결정적인 영향일 수 없다. 인구 증가 그 자체는 어떤 사회제도가 왜 다른 제도가 아닌 바로 그런 새 제도로 교체되는지, 왜 원시공동체 제도가 바로 노예제 사회로, 노예제 사회가 봉건제로, 봉건제가 부르주아 제도로 교체되고 다른 어떤 제도로 교체되지 않는지를 설명할 열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인구 증가가 사회 발전을 결정하는 힘이라면, 인구 밀도가 더 높은 곳에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여 더 높은 유형의 사회제도가 생겨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중국의 인구 밀도는 미국보다 네 배 높지만, 사회 발전의 관점에서는 미국이 중국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반(半)봉건 제도가 지배하고 있는 반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벨기에의 인구 밀도는 미국보다 19배, 소련보다 26배 높지만, 사회 발전의 관점에서는 미국이 벨기에보다 높은 위치에 있고, 벨기에는 소련에 비해 한 역사적 시대만큼 뒤처져 있다. 벨기에에서는 자본주의 제도가 지배하고 있는 반면, 소련은 이미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자국에 사회주의 제도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인구 증가는 사회제도의 성격과 사회의 면모를 규정하는 사회 발전의 주요한 힘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 체계 안에서, 사회의 면모와 사회제도의 성격, 한 제도에서 다른 제도로의 사회 발전을 규정하는 주요한 힘은 무엇인가?
사적 유물론은 그러한 힘을 사람들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을 얻는 방식, 곧 사회가 살고 발전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재화 — 식량, 의복, 신발, 주거, 연료, 생산 도구 등 — 를 생산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살기 위해서는 식량, 의복, 신발, 주거, 연료 등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물질적 재화를 가지려면 그것을 생산해야 하며, 그것을 생산하려면 사람들이 식량, 의복, 신발, 주거, 연료 등을 생산하는 데 쓰는 생산 도구가 있어야 하고, 이 도구를 만들 줄 알아야 하며, 이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데 쓰이는 생산 도구, 그리고 일정한 생산 경험과 노동 숙련을 바탕으로 생산 도구를 움직여 물질적 재화의 생산을 수행하는 사람들 — 이 모든 요소가 함께 사회의 생산력을 이룬다.
그러나 생산력은 생산의 한 측면, 곧 물질적 재화의 생산에 이용되는 자연물과 자연력에 대한 사람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생산방식의 한 측면을 이룰 뿐이다. 생산의 다른 측면, 생산방식의 다른 측면은 생산 과정에서 사람들이 서로 맺는 관계, 곧 사람들의 생산관계가 이룬다. 사람들은 자연과 싸우고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할 때, 서로 고립된 채 따로 떨어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으로, 집단으로, 사회로 나선다. 그러므로 생산은 언제나 모든 조건에서 사회적 생산이다.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면서 사람들은 생산 내부에서 서로 이런저런 관계, 곧 이런저런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관계는 착취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협력과 상호 원조의 관계일 수도 있고, 지배와 예속의 관계일 수도 있으며, 마지막으로 생산관계의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넘어가는 과도적 관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산관계가 어떤 성격을 띠든, 생산관계는 언제나 모든 체제에서 사회의 생산력과 마찬가지로 생산의 필수적인 요소를 이룬다.
“생산에서 사람들은 자연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도 작용한다. 사람들은 공동 활동과 자기 활동의 상호 교환을 위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하지 않고서는 생산할 수 없다. 생산하기 위해 사람들은 일정한 연결과 관계에 들어가며, 이러한 사회적 연결과 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자연에 대한 그들의 관계가 존재하고 생산이 이루어진다”(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제5권, 429쪽).
따라서 생산, 곧 생산방식은 사회의 생산력과 사람들의 생산관계를 모두 포괄하며, 그리하여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 둘의 통일을 구현한다.
생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생산이 결코 오랫동안 한 지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언제나 변화와 발전의 상태에 있다는 점이며, 이때 생산방식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사회 체제 전체, 사회적 관념, 정치적 견해, 정치 제도의 변화를 — 곧 사회적·정치적 체제 전체의 개조를 — 불러일으킨다.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산방식을 이용하며, 좀 더 거칠게 말하면 서로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간다. 원시 공동체에서는 하나의 생산방식이 존재하고, 노예제에서는 다른 생산방식이, 봉건제에서는 세 번째 생산방식이 존재하는 식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사회 체제, 그들의 정신생활, 그들의 견해, 그들의 정치 제도도 서로 달라진다.
사회의 생산방식이 어떠하면 사회 자체도 기본적으로 그러하고, 그 사회의 관념과 이론, 정치적 견해와 제도도 그러하다.
좀 더 거칠게 말하면,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어떠하면 그들의 사고방식도 그러하다.
이것은 사회 발전의 역사가 무엇보다도 생산 발전의 역사이며, 여러 세기에 걸쳐 서로 교체되는 생산방식의 역사, 사람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발전해 온 역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 발전의 역사는 동시에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들 자신의 역사이며, 생산 과정의 기본 역량으로서 사회의 존재에 필요한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근로 대중의 역사이다.
따라서 역사학이 참된 학문이 되려면, 사회 발전의 역사를 더 이상 왕과 장군들의 행동, 국가의 “정복자”와 “침략자”들의 행동으로 환원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도 물질적 재화 생산자들의 역사, 근로 대중의 역사, 인민들의 역사를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사회 역사의 법칙을 연구하는 열쇠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회의 견해와 사상에서가 아니라, 사회가 각각의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 실천하는 생산방식에서, 즉 사회의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산의 법칙,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발전 법칙, 사회의 경제적 발전 법칙을 연구하고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 참된 당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생산 발전의 법칙에 대한 지식, 사회의 경제적 발전 법칙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정치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강령을 세울 때에도, 실천 활동에서도 무엇보다도 생산 발전의 법칙, 사회의 경제적 발전 법칙에서 출발해야 한다.
생산의 두 번째 특징은 생산의 변화와 발전이 언제나 생산력의 변화와 발전, 무엇보다도 생산도구의 변화와 발전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은 생산에서 가장 유동적이고 혁명적인 요소이다. 먼저 사회의 생산력이 변화하고 발전하며, 그다음에 이러한 변화에 따라 그리고 그에 조응하여 사람들의 생산관계, 사람들의 경제관계가 변화한다. 그러나 이것이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생산력이 생산관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발전하면서, 이번에는 거꾸로 생산력의 발전에 작용하여 그것을 촉진하거나 지연시킨다. 이때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성장에 너무 오래 뒤처져 그것과 모순된 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생산력은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성격과 상태에 조응하고 생산력의 발전에 여지를 줄 때에만 충분히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아무리 뒤처지더라도, 조만간 생산력의 발전 수준과 생산력의 성격에 조응하게 되어야 하며, 실제로 조응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 체계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이 근본적으로 깨지고, 생산 전체가 단절되며, 생산의 위기가 닥치고, 생산력이 파괴될 것이다.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성격에 조응하지 않는 예,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예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위기이다. 그곳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자본주의적 소유가 생산 과정의 사회적 성격, 곧 생산력의 성격과 극심하게 어긋나 있다. 이러한 부조응의 결과가 생산력의 파괴로 이어지는 경제 위기이며, 이 부조응 자체가 사회혁명의 경제적 기초를 이룬다. 사회혁명의 사명은 현존하는 생산관계를 파괴하고 생산력의 성격에 조응하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출하는 데 있다.
반대로,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성격에 완전히 조응하는 예는 소련의 사회주의 국민경제이다. 그곳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가 생산 과정의 사회적 성격과 완전히 조응하며, 따라서 경제 위기도, 생산력의 파괴도 없다.
따라서 생산력은 생산에서 가장 유동적이고 혁명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생산 발전을 규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생산력이 어떠하면 생산관계도 그러해야 한다.
생산력의 상태가 사람들이 필요한 물질적 재화를 어떤 생산 도구로 생산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한다면, 생산관계의 상태는 또 다른 물음, 즉 생산수단(토지, 삼림, 수역, 지하자원, 원료, 생산 도구, 생산 건물, 교통·통신 수단 등)이 누구의 소유인가, 생산수단을 누가 처분하는가, 전체 사회가 처분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 집단, 계급을 착취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 개인, 집단, 계급이 처분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한다.
다음은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생산력이 발전해 온 모습을 도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조잡한 석기에서 활과 화살로의 이행, 이와 관련하여 수렵 생활에서 동물 사육과 원시 목축으로의 이행, 석기에서 금속 도구(철 도끼, 철제 보습을 단 쟁기 등)로의 이행, 이에 따른 식물 재배와 농경으로의 이행, 재료 가공용 금속 도구의 추가적 개량, 풀무로의 이행, 도자기 생산으로의 이행, 이에 따른 수공업의 발전, 농업에서 수공업의 분리, 독립적인 수공업 생산과 그 뒤 매뉴팩처 생산의 발전, 수공업 생산 도구에서 기계로의 이행과 수공업·매뉴팩처 생산의 기계제 공업으로의 전환, 기계 체계로의 이행과 현대의 대규모 기계화 공업의 출현 — 이것이 인류 역사 전체에 걸친 사회적 생산력 발전의 일반적인, 결코 완전하지는 않은 모습이다. 이때 생산 도구의 발전과 개량은 생산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이룬 것이지 사람들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따라서 생산 도구가 변하고 발전함에 따라 생산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람들도 변하고 발전했으며, 그들의 생산 경험, 노동 숙련, 생산 도구를 다루는 능력도 변하고 발전했다.
역사의 전 과정에서 사회의 생산력이 변화하고 발전함에 조응하여 사람들의 생산관계, 즉 경제관계도 변화하고 발전했다.
역사에는 다섯 가지 기본적 생산관계 유형이 알려져 있다. 원시 공동체적, 노예제적, 봉건적, 자본주의적,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그것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 소유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 시기 생산력의 성격에 조응한다. 석기와 그 뒤에 나타난 활과 화살로는 자연의 힘과 맹수에 홀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숲에서 열매를 따고, 물에서 물고기를 잡고, 어떤 주거를 짓기 위해서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맹수나 이웃 공동체의 희생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함께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동 노동은 생산수단뿐 아니라 생산물에 대한 공동 소유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맹수로부터의 방어 수단이기도 한 일부 생산 도구에 대한 개인 소유를 제외한다면,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라는 개념이 아직 없다. 여기에는 착취도 없고 계급도 없다.
노예제 사회에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에 대한 노예 소유자의 소유, 그리고 생산 노동자, 즉 노예 소유자가 가축처럼 팔고 사고 죽일 수 있는 노예에 대한 소유다. 이러한 생산관계는 기본적으로 이 시기 생산력의 상태에 조응한다. 이제 사람들은 석기 대신 금속 도구를 갖게 되었고, 목축도 농경도 모르던 빈약하고 원시적인 수렵 경제 대신 목축, 농경, 수공업과 이들 생산 부문 사이의 분업이 나타났으며,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생산물을 교환할 가능성, 소수의 손에 부를 축적할 가능성, 소수의 손에 생산수단이 실제로 축적될 가능성, 소수가 다수를 예속시키고 다수의 구성원을 노예로 만들 가능성이 생겨났다. 여기에는 이미 생산 과정에서 사회 모든 구성원의 공동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이 없다. 여기서는 일하지 않는 노예 소유자에게 착취당하는 노예의 강제 노동이 지배한다. 따라서 생산수단뿐 아니라 생산물에 대한 공동 소유도 없다. 그것을 사적 소유가 대체한다. 여기서 노예 소유자는 최초의 기본적이며 완전한 소유자다.
부자와 가난한 자, 착취자와 피착취자, 완전한 권리를 가진 자와 무권리한 자, 이들 사이의 잔혹한 계급투쟁— 이것이 노예제 사회의 모습이다.
봉건제 사회에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에 대한 봉건 영주의 소유와 생산 노동자, 즉 봉건 영주가 이제는 죽일 수 없지만 팔고 살 수는 있는 농노에 대한 불완전한 소유다. 봉건적 소유와 나란히, 개인 노동에 기초한 농민과 수공업자의 생산 도구 및 자기 개별 경영에 대한 단독 소유가 존재한다. 이러한 생산관계는 기본적으로 이 시기 생산력의 상태에 조응한다. 철의 제련과 가공의 추가적 개량, 철제 쟁기와 직조기의 보급, 농경·채소 재배·포도주 양조·버터 제조의 추가적 발전, 수공업 작업장과 함께 매뉴팩처 기업의 출현— 이것이 생산력 상태의 특징적 모습이다.
새로운 생산력은 노동자에게 생산에서 어느 정도의 주도성과 노동에 대한 성향, 노동에 대한 이해관계가 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봉건 영주는 노동에 이해관계가 없고 주도성이 전혀 없는 노동자인 노예를 버리고, 자기 경영과 자기 생산도구를 가졌으며 땅을 경작하고 자기 수확물에서 봉건 영주에게 현물로 바치는 데 필요한 어느 정도의 노동에 대한 이해관계를 가진 농노와 상대하기를 택한다.
사적 소유는 여기서 더욱 발전한다. 착취는 노예제 때와 거의 똑같이 잔혹하다 — 다만 얼마간 완화되었을 뿐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계급투쟁이 봉건제의 기본 특징을 이룬다.
자본주의 제도에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이며, 생산 노동자에 대한 소유는 없다. 이 노동자란 임금 노동자로서, 자본가는 그들을 죽일 수도 팔 수도 없다. 그들은 인신적 예속에서 자유롭지만 생산수단을 빼앗겼으므로, 굶어 죽지 않으려고 자기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고 착취의 멍에를 짊어질 수밖에 없다.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와 나란히, 농노적 예속에서 해방된 농민과 수공업자의, 개인 노동에 기초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존재하며 처음에는 널리 퍼져 있다. 수공업 작업장과 매뉴팩처 기업 대신 기계로 무장한 거대한 공장이 나타났다. 원시적인 농민의 생산도구로 경작되던 귀족의 영지 대신, 농업기술에 기초하여 경영되고 농업 기계를 갖춘 대규모 자본주의적 농장이 나타났다.
새로운 생산력은 생산 노동자가 억눌리고 무지한 농노보다 더 교양 있고 이해력이 있어서, 기계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다룰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자본가는 농노적 속박에서 자유로우며 기계를 올바르게 다룰 만큼 충분히 교양 있는 임금 노동자와 상대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생산력을 거대한 규모로 발전시킨 자본주의는 자신이 풀 수 없는 모순 속에 빠졌다. 자본주의는 점점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상품 가격을 낮추면서 경쟁을 격화시키고, 다수의 중소 사적 소유자를 몰락시켜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들고 그들의 구매력을 떨어뜨리며, 그 결과 생산된 상품의 판매는 불가능해진다. 또 생산을 확대하고 거대한 공장에 수백만의 노동자를 모음으로써 생산과정에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토대를 허물어뜨린다. 생산과정의 사회적 성격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를 요구하는데,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는 여전히 사적 자본주의적이어서 생산과정의 사회적 성격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성격과 생산관계 사이의 이러한 비타협적 모순은 주기적인 과잉생산 공황에서 드러난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대중의 몰락 때문에 지불 능력 있는 수요를 찾지 못하여 생산물을 불태우고, 완성된 상품을 파기하고, 생산을 중단하고, 생산력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주민 수백만이 상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상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실업과 굶주림을 견뎌야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사회의 생산력 상태에 더는 조응하지 않게 되었으며 생산력과 비타협적 모순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생산수단 소유를 사회주의적 소유로 바꿔 놓을 사명을 지닌 혁명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가장 격렬한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특징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소련에서만 실현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이다. 여기에는 이미 착취자도 피착취자도 없다. 생산된 생산물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칙에 따라 노동에 의해 분배된다. 생산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는 여기서 착취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의 동지적 협력과 사회주의적 상호부조의 관계로 규정된다. 여기서 생산관계는 생산력 상태와 완전히 조응하는데, 생산과정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로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련의 사회주의적 생산은 주기적인 과잉생산 공황과 그에 따르는 부조리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생산력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데, 생산력에 조응하는 생산관계가 그러한 발전에 충분한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의 생산관계가 발전해 온 모습은 이러하다.
생산관계의 발전은 사회의 생산력 발전, 그중에서도 먼저 생산도구의 발전에 의존하며, 이 의존 때문에 생산력의 변화와 발전은 조만간 그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다.
“노동수단(‘노동수단’이란 마르크스에게서 주로 생산도구를 뜻한다.— 편집자)의 사용과 창조는, 비록 싹의 형태로는 몇몇 동물 종에게도 있지만, 인간 노동과정의 특유한 특징을 이루며, 그래서 프랭클린은 인간을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사라진 동물 종의 조직을 연구하는 데 유골의 구조가 지니는 것과 같은 중요성을, 사라진 사회경제적 구성체를 연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이 지닌다. 경제적 시대는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산되는가로 구별된다... 노동수단은 인간 노동력 발전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K. 마르크스, 『자본』, 제1권, 1935년판, 121쪽).
그리고 이어서:
가) “사회적 관계는 생산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생산력을 획득하면서 자신의 생산방식을 바꾸고, 생산방식 곧 생활을 보장하는 방식이 바뀜에 따라 자신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바꾼다. 손방아는 종주(봉건 영주.— 편집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사회를 낳고, 증기방아는 산업 자본가를 우두머리로 하는 사회를 낳는다” (K. 마르크스와 F. 엥겔스, 제5권, 364쪽). 나) “생산력의 성장, 사회적 관계의 파괴, 사상의 발생이라는 운동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며, 오직 운동이라는 추상만이 움직이지 않는다” (같은 책, 364쪽).
『공산당 선언』에서 정식화된 사적 유물론을 설명하면서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적 생산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모든 역사적 시대의 사회 구조는 그 시대의 정치적·정신적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 따라서 원시적 공동체적 토지소유가 해체된 이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곧 사회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하는 계급, 예속된 계급과 지배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 이제 이 투쟁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자신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동시에 온 사회를 착취와 억압과 계급투쟁으로부터 영원히 해방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공산당 선언』 독일어판에 붙인 엥겔스의 서문).
생산의 세 번째 특징은 새로운 생산력과 그에 조응하는 생산관계가 생겨나는 것이 낡은 체제와 따로 일어나는 것도, 낡은 체제가 사라진 뒤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 낡은 체제의 품안에서 일어난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의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것이 자연발생적으로, 사람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생산방식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는 저마다 삶에 들어서면서 지난 세대들이 일한 결과로서 이미 마련된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마주하게 되므로, 물질적 재화를 생산할 수 있으려면 처음 한동안은 생산 분야에서 이미 완성된 형태로 마주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생산도구, 생산력의 이러저러한 요소를 개선하면서 그 개선이 어떤 사회적 결과를 가져올지 의식하지도 이해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고, 오직 일상의 이해관계, 곧 자신의 노동을 덜고 자신에게 직접적이고 눈에 보이는 이익을 얻는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돌 도구에서 철 도구로 점차 더듬더듬 넘어갈 때, 그들은 물론 이 새로운 것이 어떤 사회적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금속 도구로의 이행이 생산에서의 변혁을 의미하며 결국 노예제 체제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이해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했다 — 그들은 그저 자신의 노동을 덜고 가장 가까운 눈에 보이는 이익을 얻고자 했을 뿐이며, 그들의 의식적 활동은 이 일상적인 개인적 이익이라는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었다.
봉건제 시기 유럽의 젊은 부르주아지가 소규모 동업조합 작업장 옆에 대규모 매뉴팩처 기업을 세우기 시작하고 이로써 사회의 생산력을 전진시켰을 때, 그들은 물론 이 새로운 것이 어떤 사회적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했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 "작은" 새로운 것이 사회적 힘의 재편성을 가져와, 그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던 왕권에 대한 혁명과,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종종 그 대열에 들어가기를 꿈꾸었던 귀족에 대한 혁명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단지 상품 생산비를 낮추고, 더 많은 상품을 아시아와 막 발견된 아메리카의 시장에 내다 팔고,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했을 뿐이며, 그들의 의식적 활동은 이 일상적 실천이라는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었다.
러시아 자본가들이 외국 자본가들과 함께 러시아에 현대적 대규모 기계제 공업을 열심히 이식하면서 차르 정권은 건드리지 않은 채 두고 농민은 지주에게 먹잇감으로 내주었을 때, 그들은 물론 생산력의 이 중대한 성장이 어떤 사회적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했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회의 생산력 분야에서 일어난 이 중대한 도약이 사회적 힘의 재편성을 가져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층을 자기편에 결합시켜 승리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게 하리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단지 공업 생산을 극도로 확대하고, 거대한 국내 시장을 장악하고, 독점자가 되어 국민경제에서 더 많은 이윤을 짜내고자 했을 뿐이며, 그들의 의식적 활동은 일상적이고 좁은 실무적 이해관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에 상응하여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삶의 사회적 생산(즉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물질적 재화의 생산.— 편집자)에서 사람들은 일정한, 필연적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편집부 강조.) 관계 — 생산관계에 들어가는데, 이 관계는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한다”(K. 마르크스, 『선집』, 제1권, 269쪽).
그러나 이것은 생산관계의 변화와 낡은 생산관계에서 새로운 생산관계로의 이행이 갈등도 없이, 격변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이행은 대개 낡은 생산관계를 혁명적으로 타도하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확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정한 시기까지는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 영역의 변화가 사람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일정한 시점까지, 즉 생겨나 발전하는 생산력이 충분히 성숙할 때까지일 뿐이다. 새로운 생산력이 성숙한 뒤에는 기존 생산관계와 그 담지자인 지배계급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로 변하며, 이 장애물은 새로운 계급의 의식적 활동, 이 계급의 강제적 행동, 곧 혁명에 의해서만 길에서 치울 수 있다. 여기서 낡은 생산관계를 힘으로 폐지하도록 부름받은 새로운 사회적 사상, 새로운 정치 제도, 새로운 정치권력의 막대한 역할이 특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을 토대로, 사회의 새로운 경제적 요구를 토대로 새로운 사회적 사상이 생겨나고, 새로운 사상이 대중을 조직하고 동원하며, 대중은 새로운 정치 군대로 결집하여 새로운 혁명 권력을 창조하고, 이 권력을 이용하여 생산관계 영역의 낡은 질서를 힘으로 폐지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다. 자연발생적 발전 과정은 사람들의 의식적 활동에 자리를 내주고, 평화적 발전은 폭력적 변혁에, 진화는 혁명에 자리를 내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에서 반드시 계급으로 결집하며……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만들고,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힘으로 폐지한다”(『공산당 선언』, 1938년판, 52쪽).
그리고 이어서:
가)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집중시키며, 생산력의 총량을 되도록 빠르게 늘린다”(같은 책, 50쪽). 나) “폭력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한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이다”(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603쪽, 1935년).
이것은 마르크스가 1859년에 자신의 유명한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역사적 「서문」에서 제시한 사적 유물론의 본질에 대한 천재적인 정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일정한, 필연적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관계, 곧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 생산관계는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한다. 이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곧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가 그 위에 세워지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조응하는 현실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조건짓는다.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기존의 생산관계와, 또는 — 이는 그것의 법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데 — 지금까지 생산력이 그 안에서 발전해 온 소유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이 관계들은 생산력의 발전 형태에서 생산력의 족쇄로 바뀐다. 그러면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경제적 기초가 변함에 따라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얼마간 빠르게 뒤집힌다. 이러한 변혁을 고찰할 때에는 언제나 생산의 경제적 조건에서 일어나는, 자연과학적 정확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 변혁과, 사람들이 이 갈등을 의식하고 그것과 싸우는 법률적·정치적·종교적·예술적 또는 철학적 형태, 한마디로 이데올로기적 형태를 구별해야 한다. 한 개인을 그 자신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판단할 수 없듯이, 그러한 변혁의 시대도 그 시대의 의식에 따라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의식은 물질적 생활의 모순으로부터,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현존하는 갈등으로부터 설명해야 한다. 어떤 사회구성체도 그것이 충분한 여지를 주는 모든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에는 멸망하지 않으며, 새로운 더 높은 생산관계도 그 존재의 물질적 조건이 낡은 사회 자체의 품 안에서 성숙하기 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스스로에게 제기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과제 자체는 그것을 해결할 물질적 조건이 이미 존재하거나 적어도 형성되는 과정에 있을 때에만 생겨난다는 것이 언제나 드러나기 때문이다”(칼 마르크스, 『선집』, 제1권, 269~270쪽).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을 사회생활에, 사회의 역사에 적용하면 이러하다.
이상이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 특징이다.
이로부터 레닌이 수정주의자들과 변질자들의 침해로부터 당을 위해 얼마나 큰 이론적 재산을 지켜냈는지, 또 레닌의 책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출간이 우리 당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다.
3. 스톨리핀 반동 시기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청산파와 소환파에 대한 볼셰비키의 투쟁.
반동 시기에 당 조직에서 활동하기는 혁명이 전개되던 이전 시기보다 몇 배나 더 어려웠다. 당원 수는 급격히 줄었다. 당의 소부르주아 동조자 가운데 많은 사람, 특히 인텔리겐치야는 차르 정부의 박해가 두려워 당의 대열을 떠났다.
레닌은 그러한 시기에 혁명 정당들이 다시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혁명이 고양되던 시기에 정당들은 공격하는 법을 배웠으나, 반동기에는 올바르게 후퇴하는 법, 지하로 들어가는 법, 비합법 정당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법, 합법적 가능성과 온갖 합법적 조직, 특히 대중 조직을 이용하여 대중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멘셰비키는 혁명이 새로이 고양될 가능성을 믿지 않고 당황하여 후퇴했으며, 당 강령의 혁명적 요구와 당의 혁명적 구호를 수치스럽게 저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비합법 정당을 청산하고 말살하려 했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멘셰비키를 청산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멘셰비키와 달리 볼셰비키는 가까운 시기에 혁명적 고양이 도래할 것이며 당은 이 새로운 고양을 위해 대중을 준비시켜야 한다고 확신했다. 혁명의 기본 과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농민층은 지주의 토지를 받지 못했고,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일을 얻지 못했으며, 민중이 증오하는 차르 전제정은 타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차르 전제정은 1905년에 민중이 쟁취한 그 작은 정치적 자유마저 다시 짓밟아 버렸다. 이처럼 1905년에 혁명을 낳은 원인들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므로 볼셰비키는 혁명 운동이 새로이 고양되리라고 확신했고, 그것을 준비했으며, 노동계급의 역량을 결집했다.
볼셰비키는 혁명이 새로이 고양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확신을, 1905년 혁명이 노동계급에게 대중적 혁명 투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에서도 얻었다. 반동의 세월, 자본이 공세를 펴던 세월에도 노동자들은 1905년의 이 교훈을 잊을 수 없었다. 레닌은 공장주들의 압제와 모욕이 되살아났다고 이야기하면서 “두고 보자, 1905년이 다시 올 것이다!”라고 말한 노동자들의 편지를 인용했다.
볼셰비키의 기본 정치 목표는 1905년과 같았다 — 차리즘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이 목표를 한순간도 잊지 않았고, 민주공화국, 지주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일이라는 기본 혁명 구호를 대중 앞에 계속 내세웠다.
그러나 당의 전술은 1905년 혁명이 고양되던 시기와 같을 수 없었다. 예컨대 가까운 시기에 대중에게 총정치파업이나 무장봉기를 호소할 수는 없었다. 혁명 운동은 쇠퇴했고, 노동계급은 극심하게 지쳤으며, 반동 계급은 심각하게 강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은 새로운 정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격 전술은 방어 전술, 역량을 모으는 전술, 간부를 지하로 돌리고 지하에서 당이 활동하는 전술, 비합법 활동과 합법적 노동자 조직에서의 활동을 결합하는 전술로 바뀌어야 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이 과제를 수행해 냈다.
“우리는 혁명 전에 오랜 세월 활동할 줄 알았다. 우리가 ‘강철같이 단단하다’는 별명을 얻은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첫 번째 군사적 공세에서 실패해도 낙담하지 않고,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모험에 휩쓸리지 않을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만들어 냈다”라고 레닌은 썼다(레닌, 제12권, 126쪽).
볼셰비키는 비합법 당 조직을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동시에 볼셰비키는 대중과의 유대를 유지하고 보존하여 그로써 당을 강화할 수 있는 모든 합법적 가능성, 온갖 합법적 발판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것은 우리 당이 차르 정권에 맞선 공개적인 혁명 투쟁에서 우회적인 투쟁 방법으로, 산재보험금고에서 두마 연단에 이르기까지 온갖 합법적 가능성을 이용하는 쪽으로 전환한 시기였다. 그것은 1905년 혁명에서 우리가 패배한 뒤의 후퇴기였다. 이 전환은 우리에게 새로운 투쟁 방법을 습득할 것을 요구했다. 힘을 모은 다음 다시 차르 정권에 맞서 공개적인 혁명 투쟁에 나서기 위해서였다”(스탈린, 제15차 당대회 속기록, 366~367쪽, 1935년).
살아남은 합법 조직들은 말하자면 당의 비합법 조직을 가려 주는 덮개이자 대중과 이어 주는 연결 수단이었다. 대중과의 연계를 유지하기 위해 볼셰비키는 노동조합과 그 밖의 합법적 사회 조직, 곧 병원 산재보험금고, 노동자 협동조합, 클럽과 문화 단체, 인민회관을 이용했다. 볼셰비키는 차르 정부의 정책을 폭로하고, 카데트를 폭로하고,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국가 두마의 연단을 이용했다. 비합법 당 조직을 보존하고 이 조직을 통해 다른 모든 형태의 정치 활동을 지도한 덕분에, 당은 올바른 당 노선을 관철하고 새로운 혁명적 고양에 대비하여 힘을 준비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는 당 안의 두 가지 기회주의에 맞서 두 전선에서 싸우면서 자신들의 혁명 노선을 실현했다. 즉 당의 공공연한 적대자인 청산파에 맞서, 그리고 당의 숨은 적인 이른바 소환파에 맞서 싸웠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청산주의라는 이 기회주의적 조류가 생겨난 첫날부터 청산주의와 타협 없는 투쟁을 벌였다. 레닌은 청산주의가 당 안에 있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앞잡이라고 지적했다.
1908년 12월 파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5차 (전러시아) 협의회가 열렸다. 이 협의회는 레닌의 제안에 따라 청산주의를 규탄했다. 청산주의란 당 인텔리겐치야의 일부(멘셰비키)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현존 조직을 청산하고, 합법성의 테두리 안에 있는 무정형의 연합으로 그것을 대체하려는 시도이며, 합법성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으려 하여 그 값이 당의 강령, 전술, 전통의 명백한 포기가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결의에 나타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1부, 128쪽).
협의회는 모든 당 조직에 청산주의적 시도에 맞서 결연히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협의회의 이 결정에 복종하지 않고 점점 더 청산주의, 혁명에 대한 배신, 카데트와의 접근의 길로 빠져들었다. 멘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당의 혁명 강령, 곧 민주공화국, 8시간 노동일, 지주 토지 몰수 요구를 점점 더 공공연히 버렸다. 멘셰비키는 당의 강령과 전술을 포기하는 대가로 차르 정부로부터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이른바 “노동자” 당의 존재 허가를 얻으려 했다. 멘셰비키는 스톨리핀 체제와 타협하고 그에 적응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청산파는 “스톨리핀 노동자 당”이라고도 불렸다.
단, 악셀로드, 포트레소프가 앞장서고 마르토프, 트로츠키와 다른 멘셰비키들이 이들을 도운 혁명의 공공연한 적인 청산파에 맞선 투쟁과 아울러, 볼셰비키는 숨은 청산파, 곧 자신들의 기회주의를 “좌파적” 문구로 감춘 소환파에 맞서서도 타협 없는 투쟁을 벌였다. 소환파라 불리게 된 것은 국가 두마에서 노동자 대표를 소환하고 합법 조직에서의 모든 활동을 아예 중단할 것을 요구한 옛 볼셰비키의 일부였다.
1908년에 볼셰비키의 일부는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국가 두마에서 소환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서 “소환파”라는 이름이 나왔다. 소환파는 독자적인 그룹(보그다노프, 루나차르스키, 알렉신스키, 포크롭스키, 부브노프 등)을 만들어 레닌과 레닌의 노선에 맞서 투쟁을 시작했다. 소환파는 노동자 직업동맹과 그 밖의 합법 단체에서 활동하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로써 그들은 노동자의 사업에 큰 해를 끼쳤다. 소환파는 당을 노동계급에서 떼어 놓고, 비당원 대중과의 연계를 끊었으며, 지하 조직 안에 틀어박히려 하면서 동시에 합법적 위장 수단을 이용할 가능성을 없앰으로써 당을 타격에 노출시켰다. 소환파는 볼셰비키가 국가 두마 안에서, 또 두마를 통해서 농민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속임수로 농민층을 자기 편으로 끌어가려 한 차르 정부의 정책과 카데트의 정책을 폭로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환파는 새로운 혁명적 고양을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을 방해했다. 그러므로 소환파는 “거꾸로 선 청산파”였다—그들은 합법 조직을 이용할 가능성을 없애려 했고, 실제로는 광범한 비당원 대중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를 포기했으며 혁명 활동을 포기했다.
소환파의 행동을 논의하기 위해 1909년에 소집된 볼셰비키 신문 『프롤레타리』 확대 편집국 회의는 소환파를 규탄했다. 볼셰비키는 소환파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고 선언하고 그들을 볼셰비키 조직에서 제명했다.
청산파와 소환파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당의 소부르주아적 동반자에 지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어려운 시기에 청산파와 소환파는 자신들의 참모습을 특히 뚜렷이 드러냈다.
4.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한 볼셰비키의 투쟁. 8월 반당 블록.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 당의 일관된 노선을 위해 청산파와 소환파에 맞서 두 전선에서 타협 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트로츠키는 멘셰비키 청산파를 지지했다. 바로 이 시기에 레닌은 그를 “유두시카 트로츠키”라고 불렀다. 트로츠키는 빈(오스트리아)에서 문필 그룹을 조직하고 “분파를 초월한”, 그러나 실제로는 멘셰비키적인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레닌은 당시 트로츠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트로츠키는 가장 비열한 출세주의자이자 분파주의자처럼 행동했다... 당에 대해 떠벌리면서 행동은 다른 어떤 분파주의자보다도 나쁘다.”
그 뒤 1912년에 트로츠키는 8월 블록, 즉 레닌과 볼셰비키당에 맞선 모든 반(反)볼셰비키 그룹과 조류의 블록을 조직했다. 볼셰비즘에 적대적인 이 블록에는 청산파와 소환파가 함께 결합하여 이로써 서로 한패임을 입증했다.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모든 기본 문제에서 청산파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자신의 청산주의를 중간주의, 즉 조정주의로 위장하여, 자기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며 이른바 양자의 화해를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트로츠키가 공공연한 청산파보다 더 비열하고 더 해롭다고 말했다. 그가 “분파 밖에” 서 있는 듯이 노동자들을 속이면서 실제로는 멘셰비키 청산파를 전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주의는 중간주의를 퍼뜨린 주요 그룹이었다.
“중간주의는,” 스탈린 동지는 이렇게 쓴다, “정치적 개념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적응의 이데올로기이며, 하나의 공통된 당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소부르주아지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레닌주의와 맞지 않으며 그에 적대적이다.”(스탈린, 『레닌주의의 제문제』, 제9판, 379쪽).
이 시기에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리코프는 실제로 트로츠키의 은밀한 대리인임이 드러났는데, 그들은 레닌에 반대하여 트로츠키를 적잖이 도왔기 때문이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리코프 및 트로츠키의 다른 은밀한 동맹자들의 협력으로 1910년 1월 레닌의 뜻에 반하여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무렵 여러 볼셰비키가 체포되어 중앙위원회의 구성이 바뀌었고, 동요하는 분자들이 반(反)레닌적 결정을 통과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하여 이 전원회의에서는 볼셰비키 신문 『프롤레타리』를 폐간하고, 트로츠키가 빈에서 발행하던 그의 신문 『프라우다』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카메네프는 트로츠키 신문의 편집부에 들어갔고, 지노비예프와 함께 이 신문을 중앙위원회의 기관지로 만들려고 애썼다.
레닌이 고집한 끝에서야 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청산주의와 소환주의를 규탄하는 결정을 채택했지만, 이때에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청산파를 그 진짜 이름으로 부르지 말자는 트로츠키주의적 제안을 고집했다.
결과는 레닌이 예견하고 경고한 대로 되었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결정에 복종하여 자신들의 기관지 『프롤레타리』를 폐간했고, 멘셰비키는 계속하여 자신들의 파벌적 청산파 신문 『사회민주당원의 목소리』를 발행했다.
레닌의 입장을 스탈린 동지가 전적으로 지지했으며, 그는 『사회민주당원』 제11호에 특별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는 트로츠키주의 협력자들의 행태를 규탄했고,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리코프의 배신적 행태로 볼셰비키 파벌에 생겨난 비정상적 상태를 없앨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논문에서는 나중에 프라하 당 협의회에서 실현된 당면 과제들, 즉 전당 협의회 소집, 합법적 당 신문 발행, 러시아에 비합법적인 실무 당 중앙 기구 창설을 제기했다. 스탈린 동지의 논문은 레닌을 전적으로 지지한 바쿠 위원회의 결정에 기초한 것이었다.
청산파와 트로츠키주의자로부터 소환파와 신(神)건설파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반당적 분자들로만 이루어진 트로츠키의 8월 반당 블록에 대항하여, 비합법 프롤레타리아 당의 보존과 강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당 블록이 만들어졌다. 이 블록에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와 플레하노프가 이끄는 소수의 당원 멘셰비키가 들어 있었다. 플레하노프와 그의 당원 멘셰비키 그룹은 여러 문제에서 멘셰비키적 입장에 남아 있으면서도 8월 블록과 청산파로부터 단호히 갈라서서 볼셰비키와의 합의를 얻으려고 애썼다. 레닌은 플레하노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러한 블록이 당에 이롭고 청산파에 파멸적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반당적 분자들에 대항해 플레하노프와 임시 블록을 맺었다.
스탈린 동지는 이 블록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이때 유형지에 있었다. 유형지에서 레닌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탈린 동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생각에 블록(레닌 — 플레하노프)의 노선만이 올바른 노선이다. 1) 이 노선만이, 모든 진정한 당원 분자들의 결집을 요구하는 러시아에서의 활동의 실제 이익에 부합한다. 2) 이 노선만이, 노동자 메키(메키 — 멘셰비키의 약칭이다.— 편집자)와 청산파 사이에 구렁을 파고 후자를 흩어 버리고 죽임으로써, 합법 조직들을 청산파의 압제에서 해방하는 과정을 앞당긴다”(문집 『레닌과 스탈린』, 제1권, 529 — 530쪽).
볼셰비키는 비합법 활동과 합법 활동을 능숙하게 결합한 덕분에 공개 노동자 조직에서 중대한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열린 네 개의 합법 대회, 즉 인민대학 대회, 여성 대회, 공장 의사 대회, 금주 대회의 노동자 그룹에 볼셰비키가 끼친 중대한 영향에서 드러났다. 이 합법 대회들에서 볼셰비키의 발언은 커다란 정치적 의의를 지녔고 전국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인민대학 대회에서 발언한 볼셰비키 노동자 대표단은 모든 문화 활동을 억압한 차리즘의 정책을 폭로하고, 차리즘을 타도하지 않고서는 나라의 진정한 문화적 발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공장 의사 대회에서 발언한 노동자 대표단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살아가야 하는 끔찍한 위생 조건을 이야기하고, 차리즘 체제를 전복하지 않고서는 공장 의료를 제대로 세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볼셰비키는 살아남은 여러 합법 조직에서 청산파를 차츰 밀어냈다. 플레하노프파 당 그룹과의 독특한 통일전선 전술 덕분에 볼셰비키는 멘셰비키가 장악한 노동자 조직 여러 곳(비보르크 구역, 예카테리노슬라프 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활동으로 합법 활동과 비합법 활동을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었다.
5. 1912년 프라하 당 협의회. 볼셰비키가 독자적인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형성되다.
청산파 및 소환파와의 투쟁은 트로츠키주의자와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 앞에 절박한 과제, 즉 모든 볼셰비키를 하나로 결집하고 그들을 독자적인 볼셰비키 정당으로 형성하는 과제를 제기했다. 이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기회주의적 조류를 당에서 끝장내기 위해서만 절박하게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역량을 집결하는 일을 끝까지 완수하고 노동계급을 새로운 혁명적 고양에 대비시키기 위해서도 이는 필요했다.
그러나 이 과제를 수행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당에서 기회주의자들, 멘셰비키를 몰아내 당을 깨끗이 해야 했다.
이제 볼셰비키 가운데 볼셰비키가 멘셰비키와 한 당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데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톨리핀 반동 시기에 멘셰비키가 보인 배신적 행동,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을 청산하고 새로운 개량주의 정당을 조직하려 한 그들의 시도는 그들과의 결별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멘셰비키와 한 당에 있는 동안 볼셰비키는 어떤 식으로든 멘셰비키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떠맡았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스스로 당과 노동계급의 배신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멘셰비키의 노골적인 배신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떠맡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한 당의 테두리 안에서 멘셰비키와 통일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그 당에 대한 배신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멘셰비키와의 사실상의 결별을 끝까지 밀고 나가 형식적·조직적 결별에까지 이르게 하고, 멘셰비키를 당에서 추방하는 것이 필요했다.
오직 이 길에서만 단일한 강령, 단일한 전술, 단일한 계급 조직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당을 재건할 수 있었다.
오직 이 길에서만 멘셰비키가 파괴한 당의 진정한(형식적일 뿐만이 아닌) 통일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 과제는 볼셰비키가 준비하고 있던 제6차 전당 협의회가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제는 사안의 한 측면에 불과했다. 멘셰비키와 형식적으로 결별하고 볼셰비키가 별도의 당으로 정식 조직되는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한 정치적 과제였다. 그러나 볼셰비키 앞에는 또 다른, 더 중요한 과제가 놓여 있었다. 과제는 멘셰비키와 결별하고 별도의 당으로 정식 조직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도 멘셰비키와 결별한 뒤 새로운 당을, 곧 서구의 일반적인 사회민주당들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당을, 기회주의적 요소에서 벗어나 프롤레타리아트를 권력 쟁취 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당을 창건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에 맞서 싸우면서 모든 멘셰비키는 색조의 차이를 가리지 않고, 악셀로드와 마르티노프에서 마르토프와 트로츠키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서구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무기고에서 가져온 무기를 사용했다. 그들은 러시아에, 이를테면 독일이나 프랑스의 사회민주당과 같은 당을 두려 했다. 그들이 볼셰비키와 싸운 것도 볼셰비키에게서 서구 사회민주주의와는 다른 무언가 새롭고 보통이 아닌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서구의 사회민주당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마르크스주의적 요소와 기회주의적 요소의, 혁명의 벗과 혁명의 적의, 당성의 지지자와 반대자의 혼합물, 뒤죽박죽이었으며, 앞의 것이 뒤의 것과 점차 사상적으로 화해하고 사실상 점차 뒤의 것에 종속되어 가는 혼합물이었다. 기회주의자들, 혁명의 배신자들과의 화해—무엇을 위해서인가, 하고 볼셰비키는 서구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물었다. “당 내의 평화”를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라고 그들은 볼셰비키에게 대답했다. 누구와의 통일인가, 기회주의자들과의 통일인가? 그렇다, 기회주의자들과의 통일이라고 그들은 대답했다. 그러한 당들이 혁명적 당일 수 없음은 분명했다.
볼셰비키는 엥겔스가 죽은 뒤 서구 유럽 사회민주당들이 사회혁명의 당에서 “사회개혁”의 당으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이들 당은 저마다 조직으로서 이미 지도하는 힘에서 자기 자신의 의회 의원단의 부속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볼셰비키는 그러한 당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것, 그러한 당은 노동계급을 혁명으로 이끌 수 없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요한 것이 그러한 당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당이라는 것, 곧 기회주의자들에게는 타협하지 않고 부르주아지에게는 혁명적이며, 굳게 단결되고 단일한 당, 사회혁명의 당,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당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볼셰비키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당을 갖고자 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그러한 당을 건설하고 준비했다. 「경제주의자」, 멘셰비키, 트로츠키주의자, 소환파, 경험비판론자에 이르는 온갖 부류의 관념론자들과 벌인 투쟁의 전 역사가 바로 그러한 당을 준비한 역사였다. 볼셰비키는 참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당을 갖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새로운 볼셰비키당을 창건하고자 했다. 볼셰비키는 낡은 『이스크라』 시절부터 이미 그러한 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집요하고 끈질기게 그 당을 준비했다. 이 준비 작업에서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 『두 가지 전술』 등과 같은 레닌의 저작들이었다. 레닌의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그러한 당의 사상적 준비였다. 레닌의 저서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는 그러한 당의 조직적 준비였다. 레닌의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은 그러한 당의 정치적 준비였다. 끝으로 레닌의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그러한 당의 이론적 준비였다.
역사상 그 어느 정치 집단도 볼셰비키 집단만큼 당으로 결성될 준비를 철저히 갖춘 적이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볼셰비키를 당으로 결성하는 일은 이미 완전히 준비되고 무르익은 일이었다.
제6차 당 협의회의 과업은 이미 준비된 이 일을 멘셰비키를 축출하고 새로운 당, 볼셰비키당을 결성하는 행위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제6차 전러시아 당 협의회는 1912년 1월 프라하에서 열렸다. 20개가 넘는 당 조직이 이 협의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따라서 이 협의회는 형식상 당대회의 의의를 가졌다.
파괴된 당 중앙기구를 복구하고 당 중앙위원회를 창설했음을 알리는 협의회 통지서에는, 반동기의 여러 해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하나의 일정한 조직으로 형성된 이래 당에게 가장 힘겨운 시기였다고 씌어 있었다. 온갖 박해와 외부로부터의 무거운 타격, 당 내부 기회주의자들의 배신과 동요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자신의 기치와 조직을 지켜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기치, 그 강령, 그 혁명적 유훈이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 조직도 살아남았다. 그 조직은 훼손되고 약화될 수는 있었으나 그 어떤 박해로도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었다”라고 협의회 통지서는 말하고 있었다.
협의회는 러시아 노동운동의 새로운 고양과 당 사업의 활기를 보여 주는 최초의 징후들을 지적했다.
협의회는 각지의 보고에 따라 “각지 도처에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 사이에 지방의 비합법적 사회민주주의 조직과 집단을 강화하기 위한 활발한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고 확인했다.
협의회는 후퇴기 볼셰비키 전술의 가장 중요한 규칙, 즉 비합법적 사업을 여러 합법적 노동자 단체와 조합에서 하는 합법적 사업과 결합하는 규칙이 각지 도처에서 인정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라하 협의회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 이 중앙위원회에는 레닌, 스탈린, 오르조니키제, 스베르들로프, 스판다랸, 골로쇼킨[1] 등이 들어갔다. 스탈린 동지와 스베르들로프 동지는 유형 중이었기 때문에 결석한 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중앙위원회 후보에는 칼리닌 동지가 선출되었다.
러시아에서 혁명 사업을 지도하기 위한 실무 중심기구(중앙위원회 러시아국)가 스탈린 동지를 책임자로 하여 창설되었다. 중앙위원회 러시아국에는 스탈린 동지 외에 야. 스베르들로프, 스. 스판다랸, 스. 오르조니키제, 엠. 칼리닌, 골로쇼킨[2] 동지가 들어갔다.
프라하 협의회는 볼셰비키가 기회주의에 맞서 벌여 온 지난 모든 투쟁을 총괄하고, 멘셰비키를 당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프라하 협의회는 멘셰비키를 당에서 축출함으로써 볼셰비키당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공식화했다.
볼셰비키는 멘셰비키를 사상적으로, 조직적으로 격파하고 당에서 축출한 뒤, 당의 옛 깃발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지켰다. 그리하여 볼셰비키당은 1918년까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에 괄호를 치고 “볼셰비키”를 덧붙여 계속 불렀다.
레닌은 1912년 초 고리키에게 프라하 협의회의 결과에 관해 이렇게 썼다.
“마침내 청산파 같은 쓰레기들에 맞서 당과 당 중앙위원회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신도 우리와 함께 이를 기뻐하리라 믿는다”(레닌, 제29권, 19쪽).
프라하 협의회의 의의를 평가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이렇게 말한다.
“이 협의회는 우리 당의 역사에서 지극히 큰 의의를 가졌다. 왜냐하면 이 협의회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고, 전국의 볼셰비키 조직을 단일한 볼셰비키당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다”(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15차 당대회 속기록, 361~362쪽).
멘셰비키를 축출하고 볼셰비키가 독자적인 당으로 공식화된 뒤, 볼셰비키당은 더욱 굳건하고 강해졌다. 당은 기회주의적 분자들을 몰아내어 자신을 깨끗이 함으로써 강화된다 — 이것은 제2인터내셔널 사회민주당들과 원칙적으로 구별되는 신형 당인 볼셰비키당의 구호 가운데 하나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당들은 말로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안에 마르크스주의의 적, 공공연한 기회주의자들을 묵인했고, 그들이 제2인터내셔널을 와해시켜 파멸시키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와 달리 볼셰비키는 기회주의자들과 타협 없이 투쟁했고, 프롤레타리아트 당에서 기회주의의 더러움을 씻어 냈으며, 그리하여 신형 당, 레닌의 당, 훗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쟁취한 당을 만들어 냈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대열에 기회주의자들이 남아 있었다면, 볼셰비키당은 올바른 길로 나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끌 수 없었을 것이고, 권력을 잡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조직할 수 없었을 것이며, 내전에서 승리자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프라하 협의회는 그 결정에서 당의 주요한 당면 정치 구호로 최소 강령, 곧 민주공화국, 8시간 노동일, 지주 토지 전체의 몰수를 내세웠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혁명적 구호 아래 제4차 국가 두마 선거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구호 아래 1912~1914년에 노동자 대중의 혁명 운동이 새롭게 고양되었다.
간단한 결론.
1908~1912년은 혁명 활동에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혁명이 패배한 뒤 혁명 운동이 쇠퇴하고 대중이 지친 조건에서 볼셰비키는 전술을 바꾸어, 차르 체제에 대한 직접적 투쟁에서 이 투쟁의 우회로로 옮겨 갔다. 스톨리핀 반동의 가혹한 조건에서 볼셰비키는 대중과의 연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주 작은 합법적 가능성까지도(보험금고와 노동조합에서 두마 연단에 이르기까지) 이용했다. 볼셰비키는 혁명 운동의 새로운 고양에 대비하여 쉬지 않고 힘을 모았다.
혁명이 패배하고 반대파 흐름이 와해되며 혁명에 대한 환멸이 퍼지고, 당에서 이탈한 인텔리겐치야(보그다노프, 바자로프 등)가 당의 이론적 기초에 맞서 수정주의적 공격을 강화하는 어려운 정세 속에서, 볼셰비키는 당의 깃발을 접지 않고 당 강령에 대한 충실성을 지키며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비판자들”의 공격을 물리친, 당 안의 유일한 세력이었다(레닌의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상적 단련과 혁명의 전망에 대한 이해는 레닌을 중심으로 결집한 볼셰비키의 기본 핵심이 당과 당의 혁명적 원칙을 지켜내도록 도왔다. “우리를 괜히 ‘굳센 바위’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라고 레닌은 볼셰비키에 대해 말했다.
이 시기에 멘셰비키는 점점 더 혁명에서 멀어진다. 그들은 청산파가 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비합법적 혁명 정당을 청산하고 없애 버릴 것을 요구하며, 점점 더 공공연히 당 강령과 당의 혁명적 과제와 구호를 버리고, 노동자들이 “스톨리핀 노동자당”이라 이름 붙인 자기들의 개량주의 정당을 조직하려 시도한다. 트로츠키는 “당의 통일”이라는 구호 뒤에 위선적으로 숨어 청산파를 지지하는데, 이 통일은 실제로는 청산파와의 통일이다.
다른 한편, 볼셰비키 가운데 일부는 차르 체제와 싸우는 새로운 우회로로 전환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합법적 가능성을 이용하지 말 것과 국가 두마에서 노동자 대표를 소환할 것을 요구한다. 소환파는 당을 대중에게서 떼어 놓으려 하고, 새로운 혁명적 고양에 대비한 힘의 결집을 방해한다. 소환파는 “좌파적” 문구 뒤에 숨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청산파와 마찬가지로 혁명적 투쟁을 포기한다.
청산파와 소환파는 레닌에 맞서 하나의 공동 블록, 곧 트로츠키가 조직한 8월 블록으로 뭉친다.
청산파와 소환파에 맞선 투쟁, 8월 블록에 맞선 투쟁에서 볼셰비키는 승리하여 비합법적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을 성공적으로 지켜낸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프라하 협의회(1912년 1월)이다. 이 협의회에서 멘셰비키는 당에서 추방되었고, 볼셰비키가 멘셰비키와 한 당 안에서 형식적으로 통합되어 있던 상태는 영원히 끝났다. 볼셰비키는 정치 그룹에서 독자적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으로 형성된다. 프라하 협의회는 새로운 유형의 당, 레닌주의의 당, 볼셰비키당의 출발점이 되었다.
프라하 협의회가 이룬, 기회주의자와 멘셰비키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정화는 당과 혁명의 이후 발전에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의를 가졌다. 만약 볼셰비키가 노동자 대의의 배신자, 타협주의자인 멘셰비키를 당에서 추방하지 않았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1917년에 대중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쟁취로 이끌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