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PeopleJoseph Stalin, Vyacheslav Molotov, Andrei Zhdanov, Emelyan Yaroslavsky, Pyotr Pospelov, Vladimir Lenin, Karl Marx, Friedrich Engels TermsShort Course of the History of the All-Union Communist Party (Bolsheviks), Dialectical Materialism, Historical Materialism
제5장 제1차 제국주의 전쟁 전 노동운동 고양기의 볼셰비키당 (1912~1914년)
1. 1912~1914년 혁명운동의 고양.
스톨리핀 반동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민중에게 채찍과 교수대 외에는 아무것도 주려 하지 않는 정부가 튼튼할 수는 없었다. 탄압이 너무나 일상화되어 민중을 더 이상 두렵게 하지 못하게 되었다. 혁명이 패배한 첫해에 노동자들을 덮쳤던 피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새로운 혁명적 고양이 불가피하다는 볼셰비키의 예견은 옳았다. 이미 1911년에 파업 참가자 수가 10만 명을 넘었고, 그 전 몇 해에는 겨우 5만~6만 명이었다. 1912년 1월의 프라하 당 협의회도 노동운동에서 시작된 활기를 지적했다. 그러나 혁명 운동의 진정한 고양은 레나 노동자 총살과 관련하여 대규모 정치 파업이 터진 1912년 4~5월에 시작된다.
1912년 4월 4일, 시베리아의 레나 금광에서 파업 중에 차르 헌병 장교의 명령으로 5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죽거나 다쳤다. 행정 당국과 교섭하러 평화롭게 가던 레나 광부들의 무장하지 않은 무리에 대한 총살은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차르 전제정의 이 새로운 유혈 만행은 광부들의 경제 파업을 꺾기 위해, 레나 금광의 주인인 영국 자본가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저질러진 것이었다. 영국 자본가들과 그들의 러시아인 동업자들은 노동자들을 가장 파렴치하게 착취하여 레나 금광에서 엄청난 이윤을 — 해마다 700만 루블 이상을 — 거두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보잘것없는 임금을 주고, 쓸 수 없이 썩은 음식을 먹였다. 압박과 모욕을 견디지 못한 레나 금광의 노동자 6천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레나 총살에 프롤레타리아트는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모든 공업 중심지와 지역에서 대규모 파업, 시위, 집회로 응답했다.
“우리는 너무나 충격을 받고 경악하여 곧바로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가 어떤 항의를 표명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각자가 겪은 마음속 들끓음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눈물도, 항의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조직된 대중 투쟁만이 도움이 된다.” — 한 기업 집단의 노동자들은 결의문에 이렇게 썼다.
차르의 장관 마카로프가 국가 두마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단이 레나 총살과 관련하여 제기한 질의에 대한 답변으로 뻔뻔스럽게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선언하자 노동자들의 격렬한 분노는 더욱 커졌다. 레나 노동자 학살에 항의하는 정치 파업의 참가자 수는 30만 명으로 늘어났다.
레나의 나날들은 마치 폭풍처럼 스톨리핀 체제가 조성한 그 “안정”의 분위기 속으로 들이닥쳤다.
이에 관해 스탈린 동지는 1912년 볼셰비키의 페테르부르크 신문 『즈베즈다』에 이렇게 썼다.
“레나의 총성이 침묵의 얼음을 깨뜨렸고 — 민중 운동의 강물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흘러가기 시작했다!.. 현 체제에서 사악하고 파멸적인 모든 것, 고난 많은 러시아가 앓던 모든 것이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사실, 레나의 사건 속에 모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나의 총성이 파업과 시위의 신호가 되었다.”
청산파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혁명을 매장한 것은 헛수고였다. 레나 사건은 혁명 세력이 살아 있음을, 노동계급 속에 거대한 혁명적 에너지가 축적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1912년 메이데이 파업에는 약 4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이 파업들은 뚜렷한 정치적 성격을 띠었으며, 민주공화국, 8시간 노동일, 모든 지주 토지의 몰수라는 볼셰비키의 혁명적 구호 아래 진행되었다. 이 기본 구호들은 광범한 노동자 대중뿐 아니라 농민과 병사까지도 단결시켜 전제정에 대한 혁명적 공세에 나서게 하려는 것이었다.
“전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5월 파업과 그에 결부된 가두 시위, 혁명적 격문, 노동자 군중 앞에서의 혁명적 연설은 러시아가 혁명적 고양의 시기에 들어섰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라고 레닌은 「혁명적 고양」이라는 글에서 썼다(레닌, 제15권, 533쪽).
노동자들의 혁명성에 놀란 청산파는 파업 투쟁에 반대하면서 이를 “파업 도박”이라고 불렀다. 청산파와 그 동맹자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을 “청원 운동”으로 바꿔치기하려 했다. 노동자들에게 “권리”(결사·파업 등에 대한 제한의 철폐)를 요구하는 종잇조각, 즉 “청원서”에 서명하게 하고, 그 뒤 이 종잇조각을 국가 두마에 보내자고 제안했다. 청산파는 겨우 1,300명의 서명밖에 모으지 못했으나, 볼셰비키가 내건 혁명적 구호 둘레에는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결집했다.
노동계급은 볼셰비키가 가리킨 길을 걸어갔다.
이 시기 나라의 경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공업 침체는 이미 1910년에 활기로, 주요 공업 부문의 생산 확대로 바뀌었다. 선철 제련량은 1910년에 1억 8,600만 푸드였고 1912년에는 2억 5,600만 푸드였으며, 1913년에는 2억 8,300만 푸드에 이르렀다. 석탄 생산량은 1910년에 15억 2,200만 푸드였고 1913년에는 이미 22억 1,400만 푸드였다.
자본주의 공업의 성장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도 빠르게 성장했다. 공업 발전의 특징은 대기업과 초대형 기업으로의 생산 집중이 더욱 진전된 것이었다. 1901년에 노동자 500명 이상의 대기업에서 전체 노동자의 46.7%가 일했다면, 1910년에는 이런 유형의 기업에서 이미 약 54%, 즉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일했다. 이는 전례 없는 공업 집중이었다. 북아메리카처럼 발달한 공업국에서도 당시 대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전체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다.
볼셰비키당과 같은 혁명적 정당이 있는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과 대기업으로의 집중은 러시아 노동계급을 나라 정치생활의 가장 큰 힘으로 만들었다. 기업에서의 야만적인 노동자 착취 형태가 차르의 오프리치니크들이 벌이는 견딜 수 없는 경찰 체제와 결합하여 모든 중대한 파업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했다.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이 서로 얽혀 있다는 점은 대중 파업에 특별한 혁명적 힘을 주었다.
혁명적 노동 운동의 선두에는 영웅적인 페테르부르크 프롤레타리아트가 섰고, 페테르부르크의 뒤를 이어 발트 연안 지방, 모스크바와 모스크바 현, 그다음으로 볼가 연안과 러시아 남부가 나섰다. 1913년에는 운동이 서부 지방, 폴란드, 캅카스까지 퍼졌다. 1912년에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공식 보고에 따르면 72만 5천 명, 더 완전한 다른 자료에 따르면 100만 명 이상이었다. 1913년에는 공식 보고에 따르면 6만 1천 명, 더 완전한 자료에 따르면 127만 2천 명이었다. 1914년 전반기에는 이미 약 15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이와 같이 1912~1914년의 혁명적 고양과 파업 운동의 규모는 나라를 1905년 혁명 초기의 정세에 접근시켰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대중 파업은 전 인민적 의의를 지녔다. 파업은 전제정치를 겨냥한 것이었다. 파업은 근로 인구의 압도적 다수의 동정을 받았다. 공장주들은 직장폐쇄로 노동자들의 파업에 보복했다. 1913년 모스크바 현에서 자본가들은 5만 명의 섬유 노동자를 거리로 내쫓았다. 1914년 3월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하루 만에 7만 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다. 다른 기업과 다른 산업 부문의 노동자들은 대규모 모금으로, 때로는 연대 파업으로 파업 중인 동지들과 직장폐쇄를 당한 동지들을 도왔다.
노동 운동의 고양과 대중 파업은 농민 대중도 깨워 투쟁에 끌어들였다. 농민들은 다시 지주에 맞서 투쟁에 나섰고, 지주의 영지와 쿨라크의 농장을 파괴했다. 1910~1914년 동안 1만 3천 건 이상의 농민 행동이 일어났다.
군대에서도 혁명적 행동이 시작되었다. 1912년에는 투르케스탄의 군대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발트 함대와 세바스토폴에서는 봉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볼셰비키당이 지도한 혁명적 파업 운동과 시위는 노동계급이 부분적 요구나 "개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차리즘으로부터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라는 새로운 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에 더 가까이 있기 위해 레닌은 1912년 여름 파리에서 갈리치아(구 오스트리아)로 옮겨 갔다. 이곳에서 그의 주재로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책임 일꾼들의 협의회가 두 차례 열렸다. 하나는 1912년 말 크라쿠프에서, 다른 하나는 1913년 가을 크라쿠프 근처의 포로니노 마을에서였다. 이 협의회들에서는 노동 운동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즉 혁명적 고양, 파업과 당의 임무, 비합법 조직의 강화, 두마 사회민주주의 파벌, 당 출판물, 보험 운동에 관한 결정이 채택되었다.
2.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 제4차 국가 두마의 볼셰비키 파벌.
볼셰비키당이 자기 조직을 강화하고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획득하는 사업에서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된 일간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였다. 이 신문은 레닌의 지시에 따라 스탈린, 올민스키, 폴레타예프의 발기로 창간되었다. 대중적인 노동자 신문 『프라우다』는 혁명 운동의 새로운 고양과 함께 탄생했다. 1912년 4월 22일(신력 5월 5일)에 첫 호가 나왔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축제였다. 『프라우다』의 창간을 기념하여 5월 5일을 노동자 출판물의 날로 정하기로 했다.
『프라우다』보다 앞서 선진 노동자들을 위한 주간 볼셰비키 신문 『즈베즈다』가 발행되고 있었다. 『즈베즈다』는 레나 사건 시기에 큰 역할을 했다. 그 지면에는 노동계급을 투쟁으로 동원한 레닌과 스탈린의 전투적 정치 논문 여러 편이 실렸다. 그러나 혁명적 고양의 조건에서 볼셰비키당에게는 주간 신문만으로는 이미 충분하지 않았다. 가장 광범위한 노동자 층을 겨냥한 일간 대중 정치 신문이 필요했다. 그러한 신문이 바로 『프라우다』였다.
이 시기 『프라우다』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프라우다』는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대중을 볼셰비즘 편으로 끌어들였다. 검열 당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 논설과 통신을 실었다는 이유로 끊임없는 경찰의 박해와 벌금, 압수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프라우다』는 수만 명의 선진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었다. 막대한 벌금은 노동자들 사이의 폭넓은 모금이 있었기에 『프라우다』가 낼 수 있었다. 압수된 『프라우다』 호의 상당 부분이 그래도 독자에게 전달되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선진 노동자들이 아직 밤중에 인쇄소에 와서 신문 뭉치를 들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차르 정부는 2년 반 동안 『프라우다』를 여덟 번 폐간했으나, 노동자들의 지원을 받아 『프라우다』는 『진리를 위하여』, 『진리의 길』, 『노동 진리』 같은 비슷한 새 제호로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프라우다』가 하루 평균 4만 부씩 나갈 때, 멘셰비키 일간지 『루치』의 발행 부수는 1만 5천~1만 6천 부를 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프라우다』를 자신들의 노동자 신문으로 여겼고, 크게 신뢰했으며, 그 목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였다. 『프라우다』의 각 호는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니며 수십 명의 독자에게 읽혀 그들의 계급의식을 형성하고, 교육하고, 조직하고, 투쟁으로 불러냈다.
『프라우다』는 무엇을 썼는가?
『프라우다』의 각 호에는 노동자들의 통신 수십 편이 실렸는데, 그 안에는 노동자의 생활, 야만적인 착취, 자본가와 그 관리인, 공장 감독이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온갖 압박과 모욕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날카롭고 적확한 폭로였다. 『프라우다』의 단신에는 일자리를 찾다 절망한 굶주린 실업자들의 자살 소식이 실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프라우다』는 여러 공장과 산업 부문 노동자들의 요구와 절박한 사정에 대해 썼고, 노동자들이 자기 요구를 위해 어떻게 투쟁하는지를 썼다. 거의 매호마다 여러 기업의 파업에 대해 썼다. 크고 오래 끄는 파업이 일어났을 때, 신문은 다른 기업과 산업 부문의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모금으로 파업 참가자들을 돕게 했다. 때로는 파업 기금에 수만 루블이 모였는데, 대다수 노동자가 하루에 겨우 70~80코페이카를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막대한 액수였다. 이는 노동자들을 프롤레타리아적 연대와 모든 노동자의 이해가 하나라는 의식의 정신으로 교육했다.
모든 정치적 사건, 모든 승리와 패배에 노동자들은 『프라우다』에 편지와 축하문, 항의문 따위를 보내 호응했다. 『프라우다』는 논설에서 노동운동의 과제를 일관된 볼셰비키적 관점에서 밝혔다. 합법 신문은 차르 정권의 전복을 직접 호소할 수 없었다. 암시로 써야 했는데,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이 암시를 잘 이해하고 대중에게 설명해 주었다. 예를 들어 『프라우다』가 “1905년의 완전하고 삭감되지 않은 요구”에 대해 쓰면, 노동자들은 그것이 차르 정권의 전복, 민주공화국, 지주 토지의 몰수, 8시간 노동일을 내건 볼셰비키의 혁명적 구호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프라우다』는 제4차 두마 선거를 앞두고 선진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프라우다』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의 타협을 지지하는 자들, 즉 「스톨리핀 노동자당」의 지지자인 멘셰비키의 배신적 입장을 폭로했다. 『프라우다』는 노동자들에게 “1905년의 삭감되지 않은 요구”의 지지자들, 곧 볼셰비키에게 투표하라고 호소했다. 선거는 다단계였다. 먼저 노동자 집회에서 대표를 뽑고, 다음에 대표들이 선거인을 뽑고, 마지막으로 선거인들이 두마의 노동자 대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선거 당일 『프라우다』는 노동자들에게 투표하도록 권하는 볼셰비키 선거인 명단을 발표했다. 지명된 후보자들이 체포될 위험에 놓이지 않도록 이 명단을 미리 발표할 수는 없었다.
『프라우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14년 봄 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직장폐쇄가 일어났을 때는 대중 파업을 선언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았으므로, 『프라우다』는 노동자들에게 다른 투쟁 형태, 곧 공장에서의 대중 집회와 거리 시위를 호소했다. 신문에 이를 직접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호소는 「노동운동의 형태에 대하여」라는 소박한 제목의 레닌 논문을 읽은 의식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그 논문은 현 시기에는 파업을 노동운동의 더 높은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라는 호소를 뜻했다.
이렇게 『프라우다』를 통해 볼셰비키의 비합법적 혁명 활동과 노동자 대중에 대한 합법적 선동 및 조직이 결합되었다.
『프라우다』는 노동자의 생활, 노동자의 파업과 시위만 다룬 것이 아니었다. 『프라우다』는 농민의 생활, 농민층의 기근, 농노제적 지주들의 농민 착취, 스톨리핀 「개혁」의 결과로 쿨라크 농장주들이 농민의 가장 좋은 토지를 약탈한 사실을 체계적으로 밝혔다. 『프라우다』는 농촌에 얼마나 많은 불씨가 쌓여 있는지를 의식 있는 노동자들에게 보여주었다. 『프라우다』는 1905년 혁명의 과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고 프롤레타리아트를 가르쳤다. 『프라우다』는 이 두 번째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진정한 지도자, 인민의 영도자로 나서야 하며, 이 혁명에서 혁명적 농민층이라는 강력한 동맹자를 얻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멘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에 대한 생각을 버리게 만들려고 했다. 멘셰비키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주입했다. 인민에 대한 생각, 농민층의 기아에 대한 생각, 농노제를 고수하는 흑색백인단 지주들의 지배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오직 “결사의 자유”를 위해서만 투쟁하며, 그것에 관한 “청원서”를 차르 정부에 제출하라고.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에게 설명했다. 혁명을 포기하고 농민층과의 동맹을 포기하라는 멘셰비키의 설교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며, 노동자들이 농민층을 자기 동맹자로 자기 편에 끌어들인다면 반드시 차르제를 이길 것이며, 멘셰비키 같은 나쁜 목자들은 혁명의 적으로서 내쳐져야 한다고.
『프라우다』는 「농민 생활」란에서 무엇을 썼는가?
1913년의 통신 몇 편을 예로 들어 보자.
「농지 문제」라는 제목의 통신은 사마라에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부굴마 군 노보하스불라트 촌의 농민 45명이 분할지(分割地) 소유자들에게 공동체 토지를 떼어 줄 때 측량사에게 저항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그중 상당수가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프스코프 현에서 온 짧은 통신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프시차 촌(자발리예 역 부근)의 농민들이 경찰 보조대에 무장 저항을 했다. 부상자가 있다. 충돌 원인은 농지 분쟁이다. 프시차에 경찰 보조대가 집결했고, 부지사와 검사도 그곳으로 갔다.”
우파 현에서 온 통신은 농민 분배지의 매각에 대해, 기아와 농촌 공동체 탈퇴에 관한 법률이 농민의 토지 상실 과정을 심화시켰다는 것을 전했다. 보리솝카라는 외딴 농장이 있다. 여기에는 경작지 543데샤티나를 소유한 27채의 집이 있다. 기아 기간에 5명의 호주가 31데샤티나를 데샤티나당 25~33루블에 영구 매각했는데, 땅값은 그보다 3~4배나 비싸다. 여기서 7채의 집은 177데샤티나를 저당 잡혔고, 데샤티나당 18~20루블을 받고 6년 동안 연 12퍼센트를 지불하기로 했다. 주민의 궁핍과 터무니없는 이자를 고려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177데샤티나 가운데 절반은 고리대금업자의 손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막대한 액수를 6년 안에 채무자의 절반이라도 갚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프라우다』에 실린 글 「러시아의 대토지 소유와 소농 토지 소유」에서 레닌은 기생충 같은 지주들의 손에 얼마나 막대한 토지가 집중되어 있는지를 노동자와 농민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3만 명의 최대 지주들만이 약 7천만 데샤티나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양의 토지가 1천만 농민 가구의 몫이었다. 대지주 한 명당 평균 2,300데샤티나가 돌아갔고, 쿨라크 가구를 포함한 농민 가구당 평균 7데샤티나가 돌아갔으며, 이 가운데 5백만의 영세 농민 가구, 즉 전체 농민층의 절반은 가구당 1~2데샤티나를 넘지 않는 토지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들은 농민의 빈곤과 기아의 뿌리가 대지주 토지 소유, 농노제의 잔재에 있으며, 농민층은 노동계급이 이끄는 혁명을 통해서만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농촌과 연결된 노동자들을 통해 『프라우다』는 농촌에 침투하여 선진적 농민들을 혁명 투쟁으로 일깨웠다.
『프라우다』가 창간되던 시기에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은 전적으로 볼셰비키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합법적 조직 형태인 두마 의원단, 언론, 보험금고, 노동조합은 아직 멘셰비키에게서 완전히 빼앗지 못한 상태였다. 노동계급의 합법 조직에서 청산파를 몰아내기 위한 볼셰비키의 결연한 투쟁이 필요했다. 이 투쟁은 『프라우다』 덕분에 성공을 거두었다.
『프라우다』는 당성을 위한 투쟁, 대중적 노동자 혁명 정당의 재건을 위한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프라우다』는 합법 조직들을 볼셰비키당의 비합법 거점 주위로 결집시키고 노동운동을 하나의 뚜렷한 목표, 즉 혁명 준비로 향하게 했다.
『프라우다』에는 엄청난 수의 노동자 통신원이 있었다. 단 한 해 동안에만 1만 1천 건이 넘는 노동자 통신이 이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프라우다』는 편지와 통신을 통해서만 노동자 대중과 연결된 것이 아니었다. 기업들의 수많은 노동자가 날마다 편집부에 들렀다. 『프라우다』 편집부에는 당의 조직 사업 가운데 상당 부분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지방 당 세포 대표자들과의 만남이 마련되었고, 이곳으로 공장의 당 사업에 관한 정보가 들어왔으며, 이곳에서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의 당 지령이 전달되었다.
대중적 혁명 노동자 정당의 재건을 위해 청산파와 2년 반 동안 완강하게 투쟁한 결과, 볼셰비키는 1914년 여름까지 러시아 활동적 노동자의 5분의 4가 볼셰비키당과 「프라우다파」 전술을 따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예컨대 1914년에 노동자 신문을 위한 모금을 한 7천 개 노동자 단체 가운데 5,600개 단체가 볼셰비키 출판물을 위해 돈을 모았고, 겨우 1,400개 단체만이 멘셰비키 출판물을 위해 모금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그 대신 멘셰비키에게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야 출신의 「부유한 친구」가 많았는데, 이들은 멘셰비키 신문 유지에 필요한 자금의 절반 이상을 대 주었다.
그때 볼셰비키를 「프라우다파」라고 불렀다. 『프라우다』와 함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세대 전체가 성장했으며, 이 세대가 훗날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했다. 『프라우다』 뒤에는 수만, 수십만의 노동자가 서 있었다. 혁명적 고양기(1912~1914년)에 대중적 볼셰비키당의 튼튼한 기초가 놓였으며, 제국주의 전쟁 시기 차르 정부의 어떠한 박해도 이 기초를 파괴할 수 없었다.
“1912년의 『프라우다』는 1917년 볼셰비즘의 승리를 위한 기초를 놓은 것이다”(스탈린).
당의 또 다른 전러시아적 합법 기관은 제4차 국가 두마의 볼셰비키 원내단이었다.
1912년에 정부는 제4차 두마 선거를 공고했다. 우리 당은 선거 참여에 큰 의의를 부여했다. 두마 사회민주주의 원내단과 『프라우다』 신문은 볼셰비키당이 대중 속에서 혁명 사업을 수행하는 전러시아적 규모의 주요 합법 거점이었다.
볼셰비키당은 두마 선거에서 독자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구호 아래 출마하여 정부 여당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카데트)를 동시에 타격했다. 볼셰비키는 민주공화국, 8시간 노동일, 지주 토지 몰수의 구호 아래 선거 운동을 벌였다.
제4차 두마 선거는 1912년 가을에 실시되었다. 10월 초 정부는 페테르부르크의 선거 진행에 불만을 품고, 여러 대규모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선거권을 침해하려 했다. 이에 대응하여 우리 당의 페테르부르크 위원회는 스탈린 동지의 제안에 따라 대규모 기업의 노동자들에게 하루 파업을 호소했다. 곤경에 빠진 정부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자들은 집회에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압도적 다수로 스탈린 동지가 작성한, 선거인과 대의원에게 주는 「위임장」에 투표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이 자기 노동자 대의원에게 주는 위임장」은 1905년의 미해결 과제를 상기시켰다.
“우리는 — 「위임장」에서 말했다 — 러시아가 다가오는 대중 운동, 어쩌면 5년(1905년)보다 더 깊은 운동의 전야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운동의 선봉은 5년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사회의 가장 선진적인 계급인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일 것이다. 그 동맹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러시아의 해방에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고통 많은 농민층뿐이다.”
「위임장」은 앞으로 인민의 행동이 두 전선에서의 투쟁, 즉 차르 정부에 반대하는 투쟁이자 차리즘과의 타협을 추구하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투쟁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투쟁을 호소한 「위임장」에 큰 의의를 두었다. 노동자들도 자신의 결의문에서 이 호소에 호응했다.
볼셰비키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바다예프 동지가 두마에 선출되었다.
노동자들은 나머지 주민 계층과 따로 두마 의원을 선출했다(이른바 노동자 쿠리아). 노동자 쿠리아에서 뽑힌 9명의 대의원 가운데 6명이 볼셰비키당 당원이었다. 바다예프, 페트롭스키, 무라노프, 사모일로프, 샤고프, 말리놉스키(후일 도발자로 드러났다)이다. 볼셰비키 대의원들은 노동계급의 5분의 4 이상이 있는 대규모 공업 중심지에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일부 청산파는 노동자로부터, 즉 노동자 쿠리아를 통해 선출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두마에는 볼셰비키 6명에 청산파 7명이 있게 되었다. 처음에 볼셰비키와 청산파는 두마에서 하나의 공동 사회민주주의 원내단을 구성했다. 볼셰비키의 혁명 사업을 방해하는 청산파와 완강하게 투쟁한 끝에, 볼셰비키 대의원들은 1913년 10월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통합 사회민주주의 원내단에서 탈퇴하여 독자적인 볼셰비키 원내단을 구성했다.
볼셰비키 대의원들은 두마에서 혁명적 연설을 하여 전제 체제를 폭로했고, 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자본가들의 비인간적인 노동자 착취에 관하여 정부에 질의했다.
그들은 두마에서 토지 문제에 관해서도 발언했으며, 연설에서 농민들에게 농노제적 지주에 반대하는 투쟁을 호소하고, 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 대한 분배에 반대한 카데트당을 폭로했다.
볼셰비키는 국가 두마에 8시간 노동일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물론 흑색백인단적인 두마에서 채택되지 않았으나 큰 선전 구실을 했다.
두마의 볼셰비키 원내단은 당 중앙위원회, 레닌과 긴밀히 연결되어 그에게서 지시를 받았다. 스탈린 동지는 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이 원내단을 직접 지도했다.
두마에서의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볼셰비키 의원들은 두마 밖에서도 크게 활동했다. 그들은 공장으로 나갔고, 보고를 하러 전국의 노동자 중심지를 돌아다녔으며, 당의 결정을 설명하는 비밀 집회를 열고 새로운 당 조직을 만들었다. 의원들은 합법 활동과 비합법·지하 활동을 능숙하게 결합했다.
3. 합법 조직에서의 볼셰비키의 승리. 혁명 운동의 한층 더한 성장. 제국주의 전쟁 전야.
볼셰비키당은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모든 형태와 발현을 지도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당은 지하 조직을 세웠다. 당은 비합법 전단을 발행했다. 당은 대중 속에서 비밀 혁명 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당은 노동계급의 여러 합법 조직을 점점 더 장악해 갔다. 당은 노동조합, 인민회관, 야간 대학, 클럽, 보험 기관을 쟁취하려고 애썼다. 이 합법 조직들은 오래전부터 청산파의 피난처 구실을 해왔다. 볼셰비키는 합법 단체를 우리 당의 거점으로 바꾸기 위해 정력적인 투쟁을 벌였다. 비합법 활동과 합법 활동을 교묘히 결합하여, 볼셰비키는 두 수도에서 노동조합 단체 대부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볼셰비키는 특히 1913년 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집행부 선거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금속노동자 3천 명이 모인 회의에서 청산파에게 표를 던진 사람은 겨우 150명이었다.
제4차 국가 두마의 사회민주당 원내단이라는 합법 조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두마에서 멘셰비키는 의원이 7명, 볼셰비키는 6명이었지만, 주로 비노동자 지역에서 당선된 멘셰비키 7인은 노동계급의 겨우 5분의 1을 대표했을 뿐이고, 나라의 주요 산업 중심지(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코스트로마, 예카테리노슬라프, 하리코프)에서 당선된 볼셰비키 6인은 나라 노동계급의 5분의 4 이상을 대표했다. 노동자들은 7인이 아니라 6인(바다예프, 페트롭스키 등)을 자기들의 의원으로 여겼다.
볼셰비키가 합법 조직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차르 정부의 야만적인 박해와 청산파·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략에도 불구하고 비합법 당과 대열 안의 굳건한 규율을 지켜냈고, 노동계급의 이익을 끝까지 옹호했으며, 대중과 긴밀히 결합했고, 노동운동의 적들과 타협 없는 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합법 조직에서 볼셰비키의 승리와 멘셰비키의 패배는 전반적으로 진행되었다. 두마 연단에서의 선동 분야에서나 노동자 출판물과 기타 합법 조직 분야에서나 멘셰비키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혁명 운동에 휩싸인 노동계급은 멘셰비키를 물리치고 분명히 볼셰비키 주위로 결집했다.
게다가 멘셰비키는 민족 문제에서도 파산자임이 드러났다. 러시아 변방의 혁명 운동은 민족 문제에 관한 명확한 강령을 요구했다. 그러나 멘셰비키에게는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었던 번트의 "문화적 자치"를 빼면 아무런 강령도 없었다. 오직 볼셰비키에게만 스탈린 동지의 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와 레닌의 논문 「민족자결권에 대하여」, 「민족 문제에 관한 비판적 논평」에 서술된 민족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강령이 있었다.
이러한 멘셰비키의 패배 이후 8월 블록이 온통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가지각색의 분자들로 이루어진 이 블록은 볼셰비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분해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8월 블록은 머지않아 볼셰비키의 타격을 받아 와해되었다. 처음에는 전진파(보그다노프, 루나차르스키 등)가 블록에서 떠나갔고, 그다음에는 라트비아인들이 탈퇴했으며, 그다음에는 나머지가 뿔뿔이 흩어졌다.
볼셰비키와의 투쟁에서 패배한 청산파는 제2인터내셔널에 도움을 청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그들을 도우러 나섰다. "볼셰비키와 청산파의 화해"를 내세우고 "당 내의 평화" 수립을 내세워, 제2인터내셔널은 볼셰비키에게 청산파의 타협적 정책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회주의적인 제2인터내셔널의 결정에 복종하기를 거부했고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합법 조직에서 거둔 볼셰비키의 승리는 우연이 아니었고 우연일 수도 없었다.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은 오직 볼셰비키만이 올바른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명확한 강령, 그리고 투쟁 속에서 단련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볼셰비키의 승리가 혁명적 고양의 성장을 반영했다는 점도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이유이다.
노동자들의 혁명 운동은 새로운 도시와 지역을 휩쓸며 갈수록 확대되었다. 1914년에 들어서도 노동자 파업은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힘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파업은 점점 더 완강해졌고 더 많은 노동자를 휩쓸었다. 1월 9일에는 노동자 25만 명이 파업했는데, 그중 14만 명이 페테르부르크에서였다. 5월 1일에는 50만 명 이상이 파업했는데, 그중 페테르부르크에서만 25만 명 이상이었다. 파업에서 노동자들은 비상한 끈기를 보였다. 페테르부르크의 오부호프 공장에서는 파업이 두 달 넘게 계속되었고, 레스네르 공장에서는 약 석 달 동안 계속되었다. 페테르부르크의 여러 기업에서 일어난 집단 중독 사건은 노동자 11만 5천 명의 파업을 불러일으켰고, 뒤이어 시위가 벌어졌다. 운동은 계속 고조되었다. 1914년 상반기(7월 초까지 포함)에 모두 142만 5천 명의 노동자가 파업했다.
5월에는 바쿠에서 석유 산업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시작되어 러시아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목을 끌었다. 파업은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6월 20일 바쿠에서는 노동자 2만 명의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바쿠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바쿠 노동자들에 대한 항의와 연대의 표시로 모스크바에서 파업이 시작되어 다른 지역으로 번져갔다.
7월 3일 페테르부르크의 푸틸로프 공장에서는 바쿠 파업과 관련하여 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았다. 페테르부르크 프롤레타리아트는 크게 격앙되었다. 7월 4일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당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의 호소에 따라 노동자 9만 명이 항의의 표시로 파업했고, 7월 7일에는 13만 명이, 7월 8일에는 15만 명이, 7월 11일에는 20만 명이 파업했다.
모든 공장이 동요에 휩싸였고, 곳곳에서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다. 바리케이드를 세우려는 시도에까지 이르렀다. 바리케이드는 바쿠와 우치에서도 세워졌다. 여러 곳에서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았다.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비상" 조치를 취했고, 수도는 군사 진영으로 변했으며, 『프라우다』는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국제적 규모의 새로운 힘, 곧 제국주의 전쟁이 무대에 등장했으며, 이 전쟁은 사태의 흐름을 바꾸어 놓게 되어 있었다. 7월의 혁명적 사건이 일어나던 바로 그때, 프랑스 대통령 푸앵카레가 다가오는 전쟁의 개시를 두고 차르와 협상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왔다. 며칠 뒤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차르 정부는 볼셰비키 조직을 분쇄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했다. 혁명의 고양은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으며, 차르 정부는 이 전쟁에서 혁명으로부터의 구원을 찾았다.
간단한 결론.
새로운 혁명적 고양의 시기(1912~1914년)에 볼셰비키당은 노동운동을 이끌었고, 볼셰비키적 구호 아래 이 운동을 새로운 혁명으로 이끌어 갔다. 당은 비합법 활동과 합법 활동을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 청산파와 그 동무들인 트로츠키주의자 및 소환파의 저항을 꺾으면서, 당은 합법적 운동의 모든 형태를 장악하고 합법적 조직을 자신의 혁명 활동의 거점으로 만들었다.
노동계급의 적들 및 노동운동 안의 그 앞잡이들과 투쟁하면서, 당은 자신의 대열을 강화하고 노동계급과의 연계를 넓혔다. 혁명적 선동을 위해 두마의 연단을 폭넓게 이용하고 훌륭한 대중적 노동자 신문 『프라우다』를 창간함으로써, 당은 혁명적 노동자의 새로운 세대인 프라우다파를 길러냈다. 이 노동자층은 제국주의 전쟁 시기에도 인터내셔널리즘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치에 충실했다. 이들은 훗날 1917년 10월 혁명의 날들에 볼셰비키당의 핵심을 이루었다.
제국주의 전쟁 직전에 당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행동을 지도했다. 이것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중단되었으나, 3년 뒤 차리즘을 타도하기 위해 다시 시작된 선봉 전투였다.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리즘의 기치를 활짝 펼친 채 제국주의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