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PeopleJoseph Stalin, Vyacheslav Molotov, Andrei Zhdanov, Emelyan Yaroslavsky, Pyotr Pospelov, Vladimir Lenin, Karl Marx, Friedrich Engels TermsShort Course of the History of the All-Union Communist Party (Bolsheviks), Dialectical Materialism, Historical Materialism
제3장 러일전쟁과 제1차 러시아 혁명 시기의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1904~1907년)
1. 러일전쟁. 러시아에서 혁명운동의 한층 더한 고양. 페테르부르크의 파업. 1905년 1월 9일 겨울궁전 앞 노동자 시위. 시위대에 대한 발포. 혁명의 시작.
19세기 말부터 제국주의 국가들은 태평양에서의 패권과 중국 분할을 둘러싸고 투쟁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투쟁에는 차르 러시아도 참가했다. 1900년 차르 군대는 일본군, 독일군, 영국군, 프랑스군과 함께 외국인 제국주의자들을 겨냥한 중국의 인민 봉기를 전례 없이 잔혹하게 진압했다. 그보다 앞서 차르 정부는 중국을 압박하여 포르트아르투르 요새가 있는 랴오둥 반도를 러시아에 넘기게 했다. 러시아는 중국 영토에 철도를 부설할 권리를 얻어냈다. 북만주에 철도, 즉 동청 철도(КВЖД)가 부설되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군대가 투입되었다. 북만주는 차르 러시아의 군사 점령을 당했다. 차리즘은 조선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만주에 「노란 러시아」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극동에서 영토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차리즘은 또 다른 약탈자인 일본과 충돌하게 되었다. 일본은 빠르게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여 역시 아시아 대륙에서의 탈취, 무엇보다 중국을 희생시킨 탈취를 추구하고 있었다. 일본도 차르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조선과 만주를 차지하려 했다. 일본은 그때 이미 사할린과 극동을 빼앗을 꿈을 꾸고 있었다. 극동에서 차르 러시아가 강해지는 것을 다소 두려워하던 영국은 은밀히 일본 편에 서 있었다. 러일전쟁이 무르익고 있었다. 새로운 시장을 찾던 대부르주아지와 가장 반동적인 지주층이 차르 정부를 이 전쟁으로 몰아갔다.
차르 정부가 선전포고를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일본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 러시아에 훌륭한 첩보망을 갖추고 있던 일본은 이 싸움에서 상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리라고 계산했다.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1904년 1월 러시아의 포르트아르투르 요새를 기습하여, 그곳에 있던 러시아 함대에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이렇게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차르 정부는 전쟁이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고 혁명을 저지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계산했다. 그러나 그 계산은 들어맞지 않았다. 전쟁은 차리즘을 더욱 뒤흔들어 놓았다.
무장과 훈련이 형편없고 무능하고 부패한 장군들이 지휘하는 러시아 군대는 잇달아 패배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이익을 챙긴 것은 자본가, 관리, 장군들이었다. 도처에서 도둑질이 성행했다. 군대의 보급은 형편없었다. 포탄이 부족할 때 군대는 조롱이라도 하듯 성상(聖像)을 실은 화차를 받았다. 병사들은 쓰라린 심정으로 말했다. “일본놈들은 우리에게 포탄을 쏘는데, 우리는 그놈들에게 성상을 쏘는구나.” 부상병을 수송하는 대신 특별 열차는 차르 장군들이 약탈한 재산을 실어 날랐다.
일본군은 포르트아르투르 요새를 포위하고 이어서 함락시켰다. 차르 군대에 잇달아 타격을 가한 일본군은 무크덴 근처에서 차르 군대를 격파했다. 30만의 차르 군대는 이 전투에서 전사자, 부상자, 포로를 합쳐 12만 명가량을 잃었다. 뒤이어 포위된 포르트아르투르를 구원하러 발트해에서 파견된 차르 함대가 쓰시마 해협에서 완전히 격파되고 전멸했다. 쓰시마에서의 패배는 완전한 파국을 뜻했다. 차르가 파견한 군함 20척 가운데 13척이 침몰·격파되었고 4척이 포획되었다. 차르 러시아는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차르 정부는 일본과 치욕적인 강화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고 러시아로부터 포르트아르투르와 사할린의 절반을 빼앗았다.
인민 대중은 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이 전쟁이 러시아에 해롭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인민은 차르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렀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이 전쟁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취했다.
멘셰비키는 트로츠키를 포함하여 조국방위파의 입장, 즉 차르와 지주와 자본가의 “조국”을 방위한다는 입장으로 빠져들었다.
이와 반대로 레닌과 볼셰비키는 이 약탈 전쟁에서 차르 정부가 패배하는 것이 차리즘을 약화시키고 혁명을 강화하게 될 것이므로 유익하다고 보았다.
차르 군대의 패배는 가장 광범한 인민 대중 앞에 차리즘의 부패를 드러냈다. 인민 대중 속에서 차리즘에 대한 증오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뤼순 항의 함락은 전제정치 몰락의 시작이라고 레닌은 썼다.
차르는 전쟁으로 혁명을 질식시키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러일 전쟁은 혁명을 앞당겼다.
차르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적 압박에 차리즘의 압박이 겹쳐 더욱 심해졌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징역살이 같은 노동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온 인민에게 가해진 무권리 상태로도 고통받았다. 그러므로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차리즘에 맞선 도시와 농촌의 모든 민주주의적 분자의 혁명 운동을 이끌려고 노력했다. 농민층은 토지 부족과 수많은 농노제 잔재 때문에 숨이 막혔으며, 지주와 쿨라크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차르 러시아에 사는 여러 민족은 자기 민족의 지주·자본가와 러시아의 지주·자본가라는 이중의 압박 아래 신음했다. 1900~1903년의 경제 위기는 근로 대중의 재난을 더욱 키웠고, 전쟁은 그것을 한층 더 격화시켰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대중의 차리즘에 대한 증오를 더욱 키웠다. 인민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보다시피 혁명의 원인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1904년 12월 볼셰비키 바쿠 위원회의 지도 아래 바쿠 노동자들의 거대하고 잘 조직된 파업이 벌어졌다. 이 파업은 노동자들의 승리로, 즉 러시아 노동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와 석유 기업가 사이에 단체협약이 체결됨으로써 끝났다.
바쿠 파업은 자캅카지예와 러시아의 여러 지방에서 혁명적 고양의 시작이 되었다.
“바쿠 파업은 전 러시아에 걸친 영예로운 1~2월 행동의 신호가 되었다”(스탈린).
이 파업은 위대한 혁명의 폭풍을 앞둔 번개와도 같았다.
혁명의 폭풍의 시작은 1905년 1월 9일(22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905년 1월 3일 페테르부르크의 가장 큰 공장인 푸틸로프 공장(지금의 키로프 공장)에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 파업은 노동자 네 명이 공장에서 해고된 데서 비롯되었다. 푸틸로프 공장의 파업은 급속히 확대되어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공장들도 여기에 합류했다. 파업은 총파업이 되었다. 운동은 위협적으로 커져 갔다. 차르 정부는 운동을 처음부터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1904년, 푸틸로프 파업 이전에 경찰은 도발자인 사제 가폰을 이용하여 노동자들 사이에 자기들의 조직인 “러시아 공장 노동자 집회”를 만들었다. 이 조직은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구역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파업이 시작되자 사제 가폰은 자기 모임의 집회에서 도발적인 계획을 제안했다. 1월 9일에 모든 노동자가 모여 성기(聖旗)와 차르 초상화를 들고 평화적으로 행진하여 겨울 궁전으로 가서 차르에게 자기들의 궁핍에 관한 청원서(요청서)를 올리자는 것이었다. 차르가 민중 앞에 나와 말을 듣고 그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는 얘기였다. 가폰은 차르 오흐란카를 돕겠다고 나섰다. 노동자들을 총살하게 만들어 노동운동을 피 속에 빠뜨려 익사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계획은 거꾸로 차르 정부에 불리하게 돌아섰다.
청원서는 노동자 집회에서 논의되었고, 수정과 변경이 가해졌다. 이 집회들에서는 볼셰비키도 스스로 볼셰비키임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연설했다. 볼셰비키의 영향으로 청원서에는 출판과 언론의 자유, 노동자 조합의 자유, 러시아의 국가 체제를 바꾸기 위한 제헌의회 소집, 모든 사람의 법 앞의 평등, 교회와 국가의 분리, 전쟁 중지, 8시간 노동일 실시, 농민에 대한 토지 인도 등의 요구가 포함되었다.
이 집회들에서 연설하면서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에게 자유는 차르에게 청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들고 쟁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에게 총을 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겨울 궁전으로 향하는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차르가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운동은 엄청난 힘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청원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우리 페테르부르크 시의 노동자와 우리의 아내, 자녀, 힘없는 늙은 부모들은 폐하께 진리와 보호를 구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졌고, 억압당하고 있으며, 감당할 수 없는 노동에 짓눌리고, 모욕당하며,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더 깊이 궁핍과 무권리와 무지의 수렁으로 떠밀리고 있으며, 전제정과 횡포가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은 그 끔찍한 순간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1905년 1월 9일 이른 아침, 노동자들은 당시 차르가 있던 겨울 궁전으로 향했다. 노동자들은 온 가족이 — 아내와 자녀와 노인들과 함께 — 차르에게 갔으며, 차르의 초상화와 교회의 깃발을 들고 기도가를 부르며 무장하지 않은 채 걸어갔다. 거리에는 모두 14만 명 이상이 모였다.
니콜라이 2세는 이들을 적대적으로 맞이했다. 그는 비무장한 노동자들에게 발포하라고 명령했다. 이날 차르 군대에 의해 노동자 천 명 이상이 살해되고 2천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페테르부르크의 거리는 노동자들의 피로 뒤덮였다.
볼셰비키는 노동자들과 함께 행진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의 피로 뒤덮인 바로 그 거리에서 노동자들에게 이 끔찍한 만행의 책임자가 누구이며 그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1월 9일은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월 9일에 노동자들은 피의 교훈을 얻었다. 이날 차르에 대한 노동자들의 믿음은 총격으로 무너졌다. 노동자들은 오직 투쟁으로만 자신의 권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 1월 9일 저녁부터 노동자 구역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말했다. “차르가 우리를 두들겼으니, 우리도 그를 두들기자!”
차르의 피비린내 나는 만행에 관한 끔찍한 소식은 사방으로 퍼졌다. 분노와 격분이 노동계급 전체와 온 나라를 사로잡았다. 차르의 만행에 항의하여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지 않고 정치적 요구를 내걸지 않은 도시는 없었다. 이제 노동자들은 “전제정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거리로 나섰다. 1월의 파업 참가자 수는 44만 명이라는 막대한 숫자에 이르렀다. 한 달 동안 파업한 노동자가 그 이전 10년 동안 파업한 노동자 전체보다 많았다. 노동운동은 엄청난 높이로 올라섰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2. 노동자들의 정치 파업과 시위. 농민 혁명 운동의 고양. 전함 「포툠킨」호의 봉기.
1월 9일 이후 노동자들의 혁명 투쟁은 한층 격렬한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노동자들은 경제 파업과 연대 파업에서 정치 파업과 시위로, 일부 지역에서는 차르 군대에 대한 무장 저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끈질기고 조직적인 성격을 띤 것은 노동자 대중이 상당수 집중되어 있던 대도시 —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바르샤바, 리가, 바쿠 — 의 파업이었다.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두에는 금속 노동자들이 섰다. 노동자들의 선진 부대는 자신들의 파업으로 의식이 덜 깬 층을 뒤흔들어 깨우고, 노동계급 전체를 투쟁으로 일으켜 세웠다. 사회민주주의의 영향력은 빠르게 커졌다.
여러 곳에서 메이데이 시위는 경찰 및 군대와의 충돌을 동반했다. 바르샤바에서는 시위대에 대한 총격으로 수백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났다. 바르샤바의 총격에 대해 노동자들은 폴란드 사회민주당의 호소에 따라 항의 총파업으로 응답했다. 5월 내내 파업과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러시아 전역에서 5월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20만 명이 넘었다. 바쿠, 로지,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에 휩쓸렸다. 파업 노동자들과 시위대는 점점 더 자주 차르 군대와 충돌했다. 이러한 충돌은 오데사, 바르샤바, 리가, 로지 등 여러 도시에서 일어났다.
투쟁은 폴란드의 대공업 중심지인 로지 시에서 특히 격렬한 성격을 띠었다. 로지의 노동자들은 시내 거리를 수십 개의 바리케이드로 뒤덮고 사흘 동안(1905년 6월 22~24일) 차르 군대와 시가전을 벌였다. 여기서는 무장 투쟁이 총파업과 하나로 합쳐졌다. 레닌은 이 전투를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이 벌인 최초의 무장 투쟁으로 보았다.
여름 파업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것은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노동자들의 파업이다. 이 파업은 1905년 5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즉 거의 두 달 반 동안 계속되었다. 파업에는 약 7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고, 그 가운데는 여성도 많았다. 파업은 볼셰비키 북부 위원회가 지도했다. 거의 매일 도시 밖 탈카 강변에 수천 명의 노동자가 모였다. 노동자들은 이곳 집회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토의했다. 노동자 집회에서는 볼셰비키가 연설했다. 파업을 진압하려고 차르 당국은 군대에 노동자들을 해산시키고 발포하라고 명령했다.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의 노동자가 부상했다. 도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굳건히 버티며 일터로 나가지 않았다. 노동자와 그 가족은 굶주렸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극도의 기진맥진만이 노동자들을 일터로 돌아가게 했다. 파업은 노동자들을 단련시켰다. 파업은 노동계급의 용기, 굳건함, 인내, 연대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파업은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노동자들에게 정치 교육의 진정한 학교가 되었다.
이 파업 기간에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노동자들은 대표자 소비에트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사실상 러시아 최초의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가운데 하나였다.
노동자들의 정치 파업은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도시에 이어 농촌도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봄부터 농민 소요가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거대한 무리를 지어 지주들에 맞서 나아가 그들의 영지와 제당 공장, 증류주 공장을 부수고, 지주의 저택과 영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여러 곳에서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점거하고 대규모로 숲의 나무를 베었으며, 지주의 토지를 인민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농민들은 지주의 곡식과 기타 비축물을 빼앗아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겁에 질린 지주들은 어쩔 수 없이 도시로 도망쳤다. 차르 정부는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와 카자크를 보냈다. 군대는 농민들을 총살하고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채찍질하고 고문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농민 운동은 러시아 중부, 볼가 연안, 자캅카지예, 특히 그루지야에서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갔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점점 더 깊이 농촌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당 중앙위원회는 농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농민들이여, 그대들에게 우리의 말을 전한다」를 발표했다. 트베리, 사라토프, 폴타바, 체르니고프, 예카테리노슬라프, 트빌리시 및 그 밖의 많은 현의 사회민주당 위원회들이 농민들에게 보내는 격문을 발표했다. 농촌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집회를 열고, 농민들로 서클을 조직하고, 농민위원회를 만들었다. 1905년 여름 여러 곳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조직한 농업 노동자 파업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농민 투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농민 운동이 미친 곳은 85개 군, 즉 차르 러시아 유럽 부분 전체 군 수의 약 7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농민 운동과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 군대가 겪은 여러 차례의 패배는 군대에 영향을 미쳤다. 차르 체제의 이 버팀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05년 6월 흑해 함대의 장갑함 「포툠킨」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장갑함은 오데사 근처에 정박해 있었는데, 오데사에서는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봉기한 수병들은 가장 증오하던 장교들을 처단하고 장갑함을 오데사로 몰고 갔다. 장갑함 「포툠킨」은 혁명 편으로 넘어갔다.
레닌은 이 봉기에 매우 큰 의의를 부여했다. 그는 볼셰비키가 이 운동을 지도하고, 이를 노동자·농민 및 현지 수비대의 운동과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차르는 「포툠킨」에 맞서 군함들을 보냈으나, 이 군함들의 수병들은 봉기한 자기 동료들에게 발포하기를 거부했다. 며칠 동안 장갑함 「포툠킨」에는 혁명의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그러나 당시 1905년에는 볼셰비키당이 훗날 1917년처럼 운동을 지도한 유일한 당이 아니었다. 「포툠킨」에는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 아나키스트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봉기에 개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참여했는데도 봉기는 올바르고 충분히 경험 있는 지도를 받지 못했다. 수병들의 일부는 결정적인 순간에 동요했다. 흑해 함대의 나머지 군함들은 봉기한 장갑함에 합류하지 않았다. 석탄과 식량이 없었던 혁명의 장갑함은 어쩔 수 없이 루마니아 연안으로 가서 루마니아 당국에 항복했다.
전함 「포툠킨」의 수병 봉기는 패배로 끝났다. 후일 차르 정부의 손에 들어간 수병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일부는 처형되었고, 일부는 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봉기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전함 「포툠킨」의 봉기는 육군과 해군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중적 혁명 행동이었으며, 차르 군대의 대규모 부대가 혁명 편으로 넘어간 최초의 사례였다. 이 봉기는 육군과 해군이 노동계급, 인민과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을 노동자와 농민, 특히 병사와 수병 대중 자신에게 더욱 이해하기 쉽고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노동자들이 대중적 정치 파업과 시위로 나아간 것, 농민 운동의 강화, 인민과 경찰·군대의 무장 충돌, 마지막으로 흑해 함대의 봉기—이 모두는 인민의 무장 봉기를 위한 조건이 무르익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이 사정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진지하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혁명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차르를 혁명으로 위협하여, 혁명에 맞서 차르와 거래를 모색했고, 인민을 「달래고」 혁명 세력을 분열시켜 「혁명의 공포」를 미연에 막기 위해 「인민을 위한」 소규모 개혁을 요구했다. 「농민에게 토지를 더 떼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베어 버릴 것이다」라고 자유주의 지주들은 말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차르와 권력을 나눠 가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투쟁하고, 부르주아지는 권력에 슬금슬금 다가간다」라고 레닌은 이 시기에 노동계급의 전술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전술에 대해 썼다.
차르 정부는 계속해서 노동자와 농민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탄압만으로는 혁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차르 정부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탄압과 아울러 책략 정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도발자들을 시켜 유대인 포그롬과 아르메니아인·타타르인 학살을 일으켜 러시아의 여러 민족을 서로 맞붙였다. 다른 한편으로는—젬스키 소보르나 국가 두마 형태의 「대표 기관」을 소집하겠다고 약속하고, 불리긴 장관에게 그러한 두마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맡겼으나, 그 두마에는 입법권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조치는 혁명 세력을 분열시키고 인민의 온건한 층을 혁명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해 취해진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불리긴 두마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고, 인민 대표제에 대한 이 희화를 무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멘셰비키는 반대로—두마를 무산시키지 않기로 결정하고, 두마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3.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전술적 의견 차이. 제3차 당대회. 레닌의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마르크스주의 당의 전술적 기초.
혁명은 사회의 모든 계급을 움직이게 했다. 혁명이 불러온 국내 정치 생활의 전환은 그들을 오래도록 자리 잡아 온 낡은 위치에서 밀어냈고,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재편성하도록 강제했다. 각 계급과 각 당은 자신의 전술, 자신의 행동 노선, 다른 계급에 대한 태도, 정부에 대한 태도를 마련하려고 애썼다. 차르 정부조차도 자신에게는 이례적인 새로운 전술을 「대표 기관」을 소집하겠다는 약속의 형태로—불리긴 두마로—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회민주당도 자신의 전술을 마련해야 했다. 고조되는 혁명이 이를 요구했다.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제기된 시급한 실천적 문제들, 곧 무장봉기의 조직, 차르 정부의 전복, 임시 혁명정부의 수립, 이 정부에 대한 사회민주당의 참여, 농민층에 대한 태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 등도 이를 요구했다. 사회민주당의 통일되고 숙고된 마르크스주의적 전술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멘셰비키의 기회주의와 분열 행위 때문에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이 시기에 두 개의 분파로 갈라져 있었다. 이 분열을 아직 완전한 것으로 볼 수는 없었고, 두 분파가 아직 형식상으로는 별개의 두 정당이 아니었으나, 실제로는 저마다 자기 중앙 기관과 자기 신문을 가진 서로 다른 두 정당과 매우 흡사했다.
멘셰비키가 조직 문제에서 당 다수파와 빚어 온 기존의 의견 차이에 전술 문제에서의 새로운 의견 차이를 보탠 사정이 분열을 더욱 깊게 했다.
통일된 당이 없었으므로 통일된 당 전술도 없었다.
정기 제3차 당대회를 곧바로 소집하여 대회에서 통일된 전술을 정하고, 소수파가 대회의 결정을 성실히 실행하고 대회 다수파의 결정에 복종하도록 의무를 지웠다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볼셰비키가 멘셰비키에게 제안한 것이 바로 이 길이었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제3차 당대회라는 말은 듣기조차 싫어했다. 당이 승인하고 모든 당원에게 의무적인 전술 없이 당을 더 이상 내버려 두는 것은 범죄라고 여긴 볼셰비키는 제3차 당대회 소집의 발의를 스스로 맡기로 결정했다.
대회에는 볼셰비키 조직이든 멘셰비키 조직이든 당의 모든 조직이 초청되었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제3차 당대회 참가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대표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대회를 협의회라고 불렀으나, 실제로는 그것이 대회, 곧 멘셰비키의 당대회였으며, 그 결정은 모든 멘셰비키에게 의무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1905년 4월 런던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당대회가 소집되었다. 대회에는 20개 볼셰비키 위원회의 대표 24명이 모였다. 당의 주요 조직은 모두 대표를 보냈다.
대회는 멘셰비키를 “당에서 떨어져 나간 부분”이라고 규탄하고, 당의 전술을 마련하는 본래의 안건으로 넘어갔다.
대회와 동시에 제네바에서는 멘셰비키 협의회가 열렸다.
“두 개의 대회 — 두 개의 당”이라고 레닌은 이 상황을 규정했다.
대회와 협의회는 본질상 같은 전술 문제들을 논의했으나, 이 문제들에 대해 채택된 결정은 정반대의 성격을 띠었다. 대회와 협의회에서 채택된 두 가지 결의 계열은 당 제3차 대회와 멘셰비키 협의회 사이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전술상 의견 차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이 의견 차이의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다.
당 제3차 대회의 전술 노선. 대회는 진행 중인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현 시점에서는 자본주의에서 허용되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혁명의 완전한 승리에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이해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이 혁명의 승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조직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며 근로 대중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경험과 기술을 얻고 부르주아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승리를 목표로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술은 농민층만이 지지할 수 있었다. 농민층은 혁명이 완전히 승리하지 않고서는 지주를 처리하고 지주의 토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민층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연스러운 동맹자이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이 혁명의 완전한 승리에 이해관계가 없다. 이들은 가장 두려워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억누를 채찍으로서 차르 권력이 필요하므로, 차르 권력의 권한을 다소 제한하는 선에서 그것을 보존하려 애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입헌군주제를 기초로 차르와 거래하여 일을 끝맺으려 애쓸 것이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끌 경우에만,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지도자로서 농민층과의 동맹을 보장할 수 있을 경우에만,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고립될 경우에만, 사회민주주의가 차르 체제에 반대하는 인민 봉기를 조직하는 일에 적극 참여할 경우에만, 봉기가 승리한 결과 반혁명의 뿌리를 뽑고 전 인민의 제헌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임시 혁명정부가 수립될 경우에만, 사회민주주의가 유리한 조건에서 혁명을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임시 혁명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지 않을 경우에만 승리할 것이다.
멘셰비키 협의회의 전술 노선. 혁명이 부르주아적이므로 혁명의 지도자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일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층이 아니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접근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혁명성으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놀라게 하지 않는 것, 그들이 혁명에서 등을 돌릴 구실을 주지 않는 것이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혁명에서 등을 돌리면 혁명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봉기가 승리할 수도 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봉기가 승리한 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놀라게 하지 않도록 물러나 있어야 한다. 봉기의 결과 임시 혁명정부가 수립될 수도 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여기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이 정부는 성격상 사회주의적이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사회민주주의가 여기에 참여하고 혁명성을 드러내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놀라게 하여 혁명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전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젬스키 소보르나 국가 두마 같은 어떤 대의 기관이 소집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면 노동계급이 밖에서 압력을 가하여 그것을 제헌의회로 바꾸거나 제헌의회를 소집하도록 떠밀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고유한, 순전히 노동자만의 이해관계가 있으므로 바로 이 이해관계에 힘써야 한다. 일반 정치 혁명이어서 프롤레타리아트뿐 아니라 모든 계급과 관계되는 부르주아 혁명의 지도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두 분파의 두 가지 전술은 간단히 말해 이러했다.
멘셰비키 전술에 대한 고전적 비판과 볼셰비키 전술에 대한 천재적 근거 제시는 레닌이 역사적인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했다.
이 저서는 1905년 7월, 즉 제3차 당대회가 열린 지 두 달 뒤에 출간되었다. 책의 제목만 보면 레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시기의 전술 문제만 다루고 있으며 러시아 멘셰비키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멘셰비키의 전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국제적 기회주의의 전술을 폭로했고, 부르주아 혁명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술을 논증하고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구별하면서, 부르주아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는 시기의 마르크스주의 전술의 기초를 함께 정식화했다.
다음은 레닌이 소책자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전개한 기본적인 전술적 원칙들이다.
1) 레닌의 책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전술적 원칙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사상,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레닌은 이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인정했다. 그가 지적한 대로 이 혁명은 “단순히 민주주의적 변혁의 테두리를 직접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혁명이 상층만의 혁명이 아니라 전체 인민, 전체 노동계급, 전체 농민층을 움직이는 인민 혁명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 혁명이 지니는 의의를 축소하고, 그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을 낮추며,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혁명에서 배제하려는 멘셰비키의 시도를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에 대한 배신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는, 레닌이 썼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 혁명에서 물러서 있거나, 그 혁명에 무관심하거나, 그 혁명의 지도권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주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반대로 가장 정력적으로 참여하고, 일관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위해, 혁명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가장 결연하게 투쟁하라고 가르친다”(레닌, 제8권, 58쪽). “우리는, 레닌이 이어서 썼다, 현재 사회주의를 가까이 끌어당길 수단으로서 완전한 정치적 자유, 즉 민주주의 공화국 외에 다른 것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같은 책, 104쪽).
레닌은 혁명의 두 가지 가능한 결과를 예견했다.
가) 차르 체제에 대한 결정적 승리, 차르 체제의 전복과 민주주의 공화국의 수립으로 끝나는 경우.
나) 또는 힘이 모자라면, 인민을 희생시킨 차르와 부르주아지의 거래, 어떤 불구의 헌법, 십중팔구 그러한 헌법의 희화(戲畫)로 끝날 수 있는 경우.
프롤레타리아트는 최선의 결과, 즉 차르 체제에 대한 결정적 승리에 이해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혁명의 결과는, 레닌이 썼다, 노동계급이 전제정에 대한 공격의 힘은 강력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무력한 부르주아지의 조력자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인민 혁명의 지도자 역할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레닌, 제8권, 32쪽).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지의 조력자라는 운명을 벗어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가 될 모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레닌에 따르면 이러한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지위상 가장 선진적이고 유일하게 일관된 혁명적 계급이므로, 바로 그 때문에 러시아의 전(全)민주주의적 혁명 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고 있다”(같은 책, 75쪽).
둘째,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로부터 독립된 자신의 정치적 당을 가지고 있어, 그 당이 프롤레타리아트를 “단일하고 독자적인 정치적 역량”으로 결집시킬 수 있게 해준다(같은 책, 75쪽).
셋째,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보다 혁명의 결정적 승리에 더 큰 이해관계를 가지므로, 어떤 의미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지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더 유리하다”(같은 책, 57쪽).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군주제, 상비군 따위와 같은 낡은 것의 일부 잔재에 의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라고 레닌은 썼다. 부르주아지에게는 부르주아 혁명이 낡은 것의 모든 잔재를 너무 결정적으로 쓸어버리지 않고 그 일부를 남겨두는 것, 다시 말해 이 혁명이 충분히 철저하지 않고, 끝까지 가지 못하며, 결정적이지도 무자비하지도 않은 것이 유리하다… 부르주아지에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방향의 필요한 개혁이 더 느리게, 더 점진적으로, 더 신중하게, 더 우유부단하게,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더 유리하다… 이러한 개혁이 평민, 즉 농민층과 특히 노동자들의 혁명적 자발성과 주도성과 에너지를 되도록 적게 발전시키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프랑스인들의 말대로 ‘총을 한쪽 어깨에서 다른 쪽 어깨로 옮기기’가, 즉 부르주아 혁명이 그들에게 쥐여줄 그 무기, 그 혁명이 줄 그 자유, 농노제가 말끔히 제거된 토대 위에 생겨날 그 민주주의적 제도들을 부르주아지 자신에 맞서 돌리기가 그만큼 더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동계급에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방향의 필요한 개혁이 바로 개혁의 길이 아니라 혁명의 길로 이루어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개혁의 길은 지연과 질질 끌기의 길이며, 민족 유기체의 썩어가는 부분들이 고통스러울 만큼 더디게 죽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썩어가는 부분들 때문에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고통받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이다. 혁명의 길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장 덜 고통스러운, 신속한 수술의 길이며, 썩어가는 부분들을 곧바로 도려내는 길이고, 군주제와 그에 걸맞은, 역겹고 비열하며 썩어서 그 부패로 공기를 오염시키는 제도들에 대해 양보와 신중함을 최소한으로 하는 길이다”(같은 책, 57~58쪽).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공화국을 위해 최전열에서 싸우며, 부르주아지가 물러서지 않을까 헤아리라는 어리석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어울리지 않는 충고를 경멸하며 물리친다,”라고 레닌은 계속했다(같은 책, 94쪽).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을 지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로 바뀌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실제로 부르주아 혁명의 맹주(盟主)이자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레닌에 따르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차르 체제에 대한 결정적 승리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을 수 있는 동맹자가 있어야 한다. 이는 지도라는 관념 자체가 요구하는 바였다. 지도받는 이들이 없으면 지도자는 지도자이기를 그치고, 이끌리는 이들이 없으면 맹주는 맹주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레닌은 농민층을 그러한 동맹자로 여겼다.
둘째,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의 지도권을 두고 싸우며 자신이 혁명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려 하는 계급이 지도의 무대에서 밀려나 고립되어야 한다. 이 역시 혁명의 지도자가 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지도라는 관념 자체가 요구하는 바였다. 레닌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그러한 계급으로 여겼다.
“민주주의를 위한 일관된 투사는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될 수 있다,라고 레닌은 썼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를 위한 승리하는 투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농민층 대중이 그의 혁명적 투쟁에 가담하는 조건에서뿐이다”(같은 책, 65쪽).
그리고 이어서:
“농민층은 소부르주아적 요소와 나란히 반(半)프롤레타리아적 요소의 대중을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농민층 역시 불안정하며,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엄격히 계급적인 당으로 결집하게 만든다. 그러나 농민층의 불안정은 부르주아지의 불안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농민층은 현재 사유재산을 무조건 지키는 데보다는, 이 재산의 주요 형태 가운데 하나인 지주의 토지를 빼앗는 데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농민층은 그렇다고 사회주의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소부르주아적이기를 그치는 것도 아니지만, 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하고 가장 급진적인 지지자가 될 수 있다. 농민층을 일깨우는 혁명적 사건의 진행이 부르주아지의 배신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로 너무 일찍 중단되지만 않는다면, 농민층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위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농민층은 반드시 혁명과 공화국의 기둥이 될 것이다. 오직 완전히 승리한 혁명만이 토지 개혁 분야에서 농민층이 원하고 꿈꾸며 실제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농민층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레닌, 제8권, 94쪽).
볼셰비키의 이러한 전술은 “부르주아 계급들을 혁명의 사업에서 멀어지게 하여 혁명의 규모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 멘셰비키의 반론을 검토하면서, 레닌은 그 전술을 “혁명을 배신하는 전술”,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 계급들의 가련한 앞잡이로 만드는 전술”이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승리하는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층이 맡은 역할을 참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부르주아지가 멀어질 때 혁명의 규모가 약해질 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은 부르주아지가 멀어지고 농민층 대중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능동적인 혁명가로 나설 때에야 비로소 러시아 혁명의 진정한 규모가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야 비로소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변혁의 시대에 가능한 최대의 혁명적 규모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혁명이 일관되게 끝까지 수행되려면, 부르주아지의 불가피한 비일관성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힘, 곧 바로 ‘부르주아지를 멀어지게 할’ 수 있는 힘에 의지해야 한다”(같은 책, 95~96쪽).
이것이 부르주아 혁명의 지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에 관한 기본적인 전술 명제, 곧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지도적 역할)에 관한 기본적인 전술 명제이며, 레닌이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전술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새로운 방침이었으며, 그때까지 마르크스주의의 무기고에 있던 전술 방침과는 깊이 달랐다. 지금까지는 예컨대 서유럽의 부르주아 혁명에서처럼 지도적 역할은 부르주아지에게 남아 있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좋든 싫든 부르주아지의 조력자 역할을 했으며, 농민층은 부르주아지의 예비군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결합을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경우에도 가능한 한 자신의 당면한 계급적 요구를 옹호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정당을 가져야 한다고 곧바로 단서를 달았다. 이제 새로운 역사적 환경에서는 레닌의 방침에 따라 사태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혁명의 지도적 힘이 되고, 부르주아지는 혁명의 지도에서 밀려나고, 농민층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으로 바뀌었다.
플레하노프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역시 지지했다”는 이야기는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플레하노프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사상에 추파를 던졌고 그것을 말로는 인정하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상의 본질에 반대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동맹 정책,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고립 정책 아래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이끄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을 뜻한다. 그런데 알려진 바와 같이 플레하노프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고립 정책에 반대하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의 타협 정책을 주장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동맹 정책에 반대했다. 실제로 플레하노프의 전술적 입장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부정하는 멘셰비키적 입장이었다.
2) 레닌은 차르 체제를 전복하고 민주 공화국을 쟁취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인민의 승리를 거두는 무장 봉기라고 보았다. 레닌은 멘셰비키와는 달리 “전(全)민주주의적 혁명 운동이 이미 무장 봉기의 필요성을 낳았다”고, “봉기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이 이미 “당의 본질적이고 주요하며 필수적인 과업의 하나로서 당면 과제가 되었다”고,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시키고 봉기를 직접 지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같은 책, 75쪽).
대중을 봉기로 이끌고 봉기 자체를 전인민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중의 혁명적 창발성을 해방하고 대중을 봉기를 위해 조직하며 차르 정권의 권력 기구를 와해시킬 수 있는 구호와 호소를 대중에게 내놓아야 한다고 레닌은 보았다. 그러한 구호로 그가 본 것은 제3차 당대회의 전술적 결정이었으며, 레닌의 책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은 이 결정을 옹호하는 데 바쳐진 것이었다.
그러한 구호로 그가 본 것은 다음과 같다.
가) “봉기의 시작과 진행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질 수 있는 대중적 정치 파업의 적용”(같은 책, 75쪽),
나) “8시간 노동일과 노동계급의 기타 당면 요구를 혁명적 방법으로 즉시 실현”하는 것의 조직(같은 책, 47쪽),
다) 지주 토지의 몰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주주의적 개혁”을 혁명적 방법으로 “수행하기 위한 혁명적 농민위원회의 즉각적인 조직”(레닌, 제8권, 88쪽),
라) 노동자의 무장.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도시에서는 8시간 노동일을, 농촌에서는 민주주의적 개혁을 혁명적으로 실현하는 전술이다. 이는 당국을 염두에 두지 않고 법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당국도 합법성도 무시하고, 기존 법률을 깨뜨리며 새로운 질서를 제멋대로, 선포하는 방식으로 세우는 실현이다. 이것은 차르 정권의 권력 기구를 마비시키고 대중의 활동성과 창조적 창발성을 해방한 새로운 전술적 수단이었다. 이 전술을 토대로 도시에서는 혁명적 파업위원회가, 농촌에서는 혁명적 농민위원회가 성장했으며, 이 가운데 전자는 나중에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후자는 농민 대표 소비에트로 발전했다.
둘째, 대중적 정치 파업의 적용, 곧 총정치 파업의 적용이다. 이것은 나중에 혁명 과정에서 대중을 혁명적으로 동원하는 일에 으뜸가는 역할을 했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쥐어진 새롭고 매우 중요한 무기로서, 그때까지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의 실천에서 알려지지 않았으나 나중에 시민권을 얻었다.
레닌은 인민이 봉기에서 승리하면 차르 정부는 임시 혁명정부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임시 혁명정부의 임무는 혁명의 성과를 공고히 하고, 반혁명의 저항을 진압하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최소 강령을 실현하는 것이다. 레닌은 이 임무들을 실현하지 않고서는 차리즘에 대한 결정적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임무들을 실현하고 차리즘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달성하려면, 임시 혁명정부는 평범한 정부가 아니라 승리한 계급인 노동자와 농민의 독재 정부, 곧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독재 정부여야 한다. 레닌은 “혁명 후의 모든 임시 국가 체제는 독재를, 그것도 정력적인 독재를 요구한다”는 마르크스의 잘 알려진 명제를 인용하면서, 임시 혁명정부가 차리즘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보장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차리즘에 대한 혁명의 결정적 승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승리는 바로 독재일 것이다. 즉 필연적으로 군사력, 대중의 무장, 봉기에 의거해야 하며, 이러저러한 ‘합법적’, ‘평화적’ 방법으로 만들어진 기구들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독재일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에게 즉시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개혁을 실현하면 지주와 대부르주아지와 차리즘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 없이 이 저항을 꺾고 반혁명적 시도를 격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사회주의적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독재일 것이다. 이 독재는 (혁명 발전의 여러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의 기초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농민에게 유리하도록 토지 소유를 근본적으로 재분배하고,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관철하며, 농촌뿐 아니라 공장 생활에서도 아시아적이고 예속적인 모든 특징을 뿌리째 뽑고, 노동자의 처지를 진지하게 개선하고 생활 수준을 높이는 일을 시작하며, 마지막으로 — 순서상 마지막이지만 중요성에서는 마지막이 아닌 — 혁명의 불길을 유럽으로 옮길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승리가 우리의 부르주아 혁명을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며, 민주주의적 변혁은 부르주아적 사회경제적 관계의 틀에서 직접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승리는 러시아와 전 세계의 장래 발전에 거대한 의의를 가질 것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에너지를 이만큼 높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러시아에서 시작된 혁명의 이 결정적 승리만큼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승리로 이끄는 길을 크게 단축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같은 책, 62 — 63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임시 혁명정부에 대해 취할 태도와 그 정부에 참여해도 되는지의 문제에 관해서는, 레닌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 당 제3차 대회의 해당 결의를 전적으로 옹호했다.
“세력 관계와 그 밖에 미리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여러 요인에 따라, 우리 당의 위임 대표들이 임시 혁명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반혁명적 시도와 무자비하게 투쟁하고 노동계급의 독자적 이익을 옹호할 목적에서 허용된다. 그러한 참여의 필수 조건으로는 당이 위임 대표들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 그리고 완전한 사회주의적 변혁을 지향하며 그런 한에서 모든 부르주아 정당에 대해 타협 없이 적대적인 사회민주주의의 독립을 확고히 지키는 것이 제시된다. 사회민주주의가 임시 혁명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혁명의 성과를 보호하고 공고히 하고 확대할 목적에서, 무장하고 사회민주주의의 지도를 받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임시정부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사상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넓은 층에 선전해야 한다.”(레닌, 제8권, 37쪽).
멘셰비키는 임시정부가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정부일 것이며, 프랑스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한 프랑스 사회주의자 밀레랑이 저지른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싶지 않다면 그런 정부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레닌은 멘셰비키가 여기서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을 혼동하고 있으며 문제에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접근할 능력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하여 이 반대를 물리쳤다. 프랑스에서는 나라에 혁명적 정세가 없던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이 반동적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정부에 참여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한창 고조된 시기에 혁명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는 혁명적 부르주아 정부에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는 문제가 제기되어 있었다. 이런 사정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러한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게 하고, 유리한 조건에서는 의무로 만든다 — 반혁명을 ‘아래로부터’, 곧 밖에서만이 아니라 ‘위로부터’, 곧 정부 내부에서도 타격하기 위해서이다.
3)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의 승리와 민주주의 공화국의 쟁취를 위해 싸우면서도, 민주주의 단계에 머물러 혁명 운동의 규모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의 수행에 한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레닌은 민주주의적 과제를 수행한 뒤에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피착취 대중이 이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이 점을 알고 있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轉化)해 가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을 사회민주주의의 의무로 여겼다. 레닌에게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가 필요했던 것은, 차르 체제에 대한 혁명의 승리를 이룩한 다음 그것으로 혁명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 상태를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지속시키고, 반혁명의 잔재를 철저히 쓸어버리고, 혁명의 불길을 유럽으로 옮기고, 그동안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으로 깨우치고 거대한 군대로 조직되게 한 뒤 — 사회주의 혁명으로 곧바로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부르주아 혁명의 규모와,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그 규모에 부여해야 할 성격에 대해 말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전제정치의 저항을 힘으로 짓밟고 부르주아지의 동요를 무력화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변혁을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민 가운데 반(半)프롤레타리아적 분자의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힘으로 꺾고 농민층과 소부르주아지의 동요를 무력화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변혁을 수행해야 한다. 혁명의 규모에 관한 모든 논의와 결의에서 신이스크라파(즉 멘셰비키.— 편집자)가 너무도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업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같은 책, 96쪽).
또는 이렇게도 썼다.
“전 인민, 특히 농민층의 선두에 서서 — 완전한 자유를 위해, 철저한 민주주의적 변혁을 위해, 공화국을 위해! 모든 근로자와 피착취자의 선두에 서서 — 사회주의를 위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은 실제로 이러해야 하며, 혁명 시기에 노동자 정당이 내리는 모든 전술적 문제의 해결과 모든 실천적 걸음에 스며들어 이를 규정해야 할 계급적 구호는 바로 이것이다”(같은 책, 105쪽).
어떤 불명확함도 남지 않도록, 레닌은 『두 가지 전술』이 출간된 지 두 달 뒤 「사회민주주의와 농민 운동의 관계」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우리는 즉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할 것이며, 바로 우리의 힘, 즉 의식적이고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에 비례하여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연속혁명을 지지한다. 우리는 중도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같은 책, 186쪽).
이는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상호관계 문제에 관한 새로운 방침이었고, 부르주아 혁명이 끝날 무렵 사회주의 혁명으로 곧바로 이행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중심으로 힘을 재편성한다는 새로운 이론, 곧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한다는 이론이었다.
이 새로운 방침을 마련하면서 레닌은 첫째, 지난 세기 40년대 말 「공산주의자 동맹에 보내는 호소」에서 제시된 연속혁명에 관한 마르크스의 잘 알려진 명제에, 둘째, 1856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농민의 혁명 운동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결합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잘 알려진 생각에 의거했다. 이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독일의 모든 일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농민 전쟁의 어떤 제2판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러한 천재적 사상은 그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발전하지 못했고,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은 그것을 관 속에 묻어 망각 속에 던져 넣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했다. 잊힌 마르크스의 명제를 세상에 끌어내어 완전히 복원하는 과업은 레닌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레닌은 마르크스의 이 명제를 복원하면서 단순한 반복에 그치지 않았고 — 그칠 수도 없었다 —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정연한 사회주의 혁명 이론으로 가다듬었으며, 사회주의 혁명의 필수적 계기로서 새로운 계기,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 승리의 조건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도시·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적 분자의 동맹을 이론에 도입했다.
이 방침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전술적 입장을 산산이 부수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 혁명 이후 농민 대중, 그중에서도 빈농 대중이 반드시 혁명에서 이탈한다는 데서 출발했으며, 그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 이후에는 50~100년, 아니 그 이상의 장기간에 걸친 중단기, 장기간의 “화해” 시기가 도래해야 하고, 그 기간 내내 프롤레타리아트는 “평화롭게” 착취당하고 부르주아지는 “합법적으로” 부를 축적하다가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고립된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체 부르주아지에 맞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의 반(半)프롤레타리아적 요소들, 수백만의 “근로 대중과 피착취 대중”을 동맹자로 거느린 헤게모니 장악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하는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이 동맹한 부르주아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머지 근로 대중 및 피착취 대중이 동맹한 사회주의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로 성장해야 했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독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했다.
이 이론은 도시와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적 대중이 지닌 혁명적 가능성을 부정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외에는 야당적 또는 혁명적 결합이 우리나라에서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사회적 세력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플레하노프의 말)는 데서 출발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통속적 이론을 뒤엎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동맹자 없이 전체 부르주아지에 맞서, 모든 비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계층에 맞서 홀로 서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본이 프롤레타리아만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수백만 반(半)프롤레타리아 계층도 착취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짓눌린 이 계층이 사회를 자본주의의 억압에서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으며, 사회의 경제가 더 발전한 결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의 다수, 사회의 다수가 되었을 때에야 이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 썩어빠진 반(反)프롤레타리아적 방침을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 이론은 근본에서부터 뒤집어엎었다.
레닌의 이론에는 사회주의가 따로 떨어진 한 나라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직접적 결론이 아직 없었다. 그러나 그 이론에는 조만간 그런 결론을 내리는 데 필요한 모든, 또는 거의 모든 기본 요소가 들어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레닌은 1915년, 즉 10년 뒤에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상이 레닌이 그의 역사적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전개한 기본적 전술 명제들이다.
레닌의 이 저작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그가 멘셰비키의 소부르주아적 전술 방침을 사상적으로 격파하고,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더욱 전개하고 차르 체제에 새로 공세를 가하기 위한 무기를 쥐여 주었으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해야 할 필연성에 대한 분명한 전망을 제시한 데 있다.
그러나 레닌 저작의 의의가 이것으로 다하는 것은 아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의의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새로운 혁명 이론으로 풍부하게 하고, 우리나라 프롤레타리아트가 1917년에 자본주의에 대해 승리를 거둔 수단이 된 볼셰비키당의 혁명적 전술의 기초를 놓았다는 데 있다.
4. 혁명의 새로운 고양. 1905년 10월의 전러시아 정치 파업. 차리즘의 후퇴. 차르의 선언.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출현.
1905년 가을에 이르러 혁명 운동은 온 나라를 휩쓸었다. 그것은 엄청난 힘으로 고조되었다.
9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인쇄공들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파업은 페테르부르크와 다른 여러 도시로 번졌다. 모스크바 자체에서도 인쇄공들의 파업은 다른 부문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 총정치 파업으로 발전했다.
10월 초에 모스크바-카잔 철도에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하루 지나 모스크바 철도 교차점 전체가 파업에 들어갔다. 곧 파업은 나라의 모든 철도를 휩쓸었다. 우편과 전신이 업무를 중단했다. 러시아 여러 도시의 노동자들은 수천 명씩 모여 집회를 열고 작업 중단을 결의했다. 파업은 공장에서 공장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지역에서 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파업 노동자들에게 하급 사무원, 학생, 인텔리겐치야 — 변호사, 기술자, 의사 — 가 합류했다.
10월 정치 파업은 가장 외딴 지역에 이르기까지 거의 온 나라를, 가장 뒤떨어진 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노동자를 휩쓸어 전러시아적인 것이 되었다. 총정치 파업에는 철도 노동자, 우편·전신 사무원 및 그 밖에 역시 많은 파업자를 낸 이들을 제외하고도 공업 노동자만 약 100만 명이 참가했다. 나라의 온 생활이 정지되었다. 정부의 힘은 마비되었다.
노동계급은 전제정에 맞선 인민 대중의 투쟁을 이끌었다.
대중적 정치 파업이라는 볼셰비키의 구호는 성과를 냈다.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힘과 위력을 보여 준 10월 총파업은, 죽도록 겁먹은 차르로 하여금 10월 17일 선언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1905년 10월 17일 선언에서는 인민에게 “시민적 자유의 확고한 기초: 인신의 실질적 불가침, 양심·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약속되었다. 입법 두마를 소집하고 모든 계급의 주민을 선거에 참여시키겠다는 것도 약속되었다.
이리하여 부리긴의 자문 두마는 혁명의 힘에 의해 쓸려 나갔다. 부리긴 두마를 보이콧한다는 볼셰비키의 전술은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10월 17일의 선언은 인민 대중에 대한 기만이었고, 차르의 속임수였으며, 차르가 쉽게 믿는 사람들을 잠재우고 시간을 벌어 힘을 모은 뒤 혁명을 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일종의 숨돌리기였다. 차르 정부는 말로는 자유를 약속하면서 실제로는 본질적인 것을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노동자와 농민은 당분간 정부로부터 약속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기대하던 광범한 정치적 사면 대신 10월 21일에는 정치범의 극히 일부만 사면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인민의 힘을 분열시키려고 유혈적인 유대인 학살(포그롬)을 여러 차례 조직했는데, 이 학살로 수천수만의 사람이 죽었다. 또 혁명을 탄압하려고 「러시아 인민 동맹」, 「대천사 미하일 동맹」이라는 비적 같은 경찰 조직을 만들었다. 반동적인 지주, 상인, 사제, 부랑자 출신의 준범죄적 분자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이 조직들을 인민은 「검은 백인대」라고 불렀다. 검은 백인대원들은 경찰의 비호 아래 선진 노동자, 인텔리겐치야 출신 혁명가, 학생을 공공연히 구타하고 살해했으며, 시민들의 집회와 회합에 불을 지르고 총을 쏘았다. 차르 선언의 결과는 당분간 이러했다.
그 무렵 인민 사이에는 차르의 선언에 관한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차르가 겁을 먹고 선언을 내렸네. 죽은 자에겐 자유를, 산 자에겐 체포를.”
볼셰비키는 10월 17일의 선언이 함정이라고 대중에게 설명했다. 그들은 선언 이후 정부의 행동을 도발이라고 규탄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들고 무장봉기를 준비하라고 호소했다.
노동자들은 더욱 힘차게 전투대 조직에 착수했다. 그들은 총파업으로 쟁취한 10월 17일의 첫 승리가 차르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앞으로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투쟁을 요구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레닌은 10월 17일의 선언을, 일시적으로 힘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룬 순간으로 평가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은 차르에게서 선언을 얻어냈지만 아직 차르주의를 쓰러뜨릴 힘이 없고, 차르주의는 이미 예전의 수단만으로는 통치할 수 없어 말로나마 “시민적 자유”와 “입법” 두마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때라는 것이다.
10월 정치 파업의 격동하는 나날, 차르주의와 투쟁하는 불길 속에서 노동자 대중의 혁명적 창조력은 새롭고 강력한 무기인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냈다.
모든 공장의 대표자 회의인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세계에서 아직 보지 못한 노동계급의 대중적 정치 조직이었다. 1905년에 처음 태어난 소비에트는 1917년 볼셰비키당의 지도 아래 프롤레타리아트가 세운 소비에트 권력의 원형이었다. 소비에트는 인민 창조력의 새로운 혁명적 형태였다. 소비에트는 차르주의의 온갖 법과 규범을 깨뜨리며 오로지 혁명적인 주민층에 의해 만들어졌다. 소비에트는 차르주의에 맞서 투쟁에 일어선 인민의 자발적 활동의 표현이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를 혁명 권력의 싹으로 보았다. 그들은 소비에트의 힘과 의의가 전적으로 봉기의 힘과 성공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멘셰비키는 소비에트를 혁명 권력의 싹으로도, 봉기의 기관으로도 보지 않았다. 그들은 소비에트를 민주화된 도시 자치 기관 같은 지방 자치 기관으로 보았다.
1905년 10월 13일(26일)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공장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선거가 있었다. 밤에 소비에트의 첫 회의가 열렸다. 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모스크바에서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조직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러시아 최대의 산업·혁명 중심지이자 차르 제국의 수도에 세워진 소비에트로서 1905년 혁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멘셰비키의 나쁜 지도 탓에 자기 과제를 완수하지 못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때 레닌은 아직 페테르부르크에 없었고 여전히 외국에 있었다. 멘셰비키는 레닌이 없는 틈을 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 숨어들어 그 지도권을 장악했다. 이런 조건에서 멘셰비키 흐루스탈료프, 트로츠키, 파르부스 등이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봉기 정책에 반대하도록 돌려세운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병사들을 소비에트에 접근시켜 공동 투쟁으로 묶는 대신 병사들을 페테르부르크에서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고 봉기를 준비하는 대신 제자리걸음을 하며 봉기 준비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모스크바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혁명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존재 첫날부터 혁명적 정책을 끝까지 추진했다.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지도권은 볼셰비키에게 있었다. 볼셰비키 덕분에 모스크바에서는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나란히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생겨났다.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무장 봉기의 기관이 되었다.
190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여러 대도시와 거의 모든 노동자 중심지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만들어졌다. 병사·수병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해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합치려는 시도가 있었다. 몇몇 곳에서는 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도 만들어졌다.
소비에트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소비에트는 흔히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구성도 불분명했지만, 권력으로서 행동했다. 소비에트는 점거라는 방식으로 출판의 자유를 실현했고, 8시간 노동일을 제정했으며, 차르 정부에 세금을 내지 말라고 인민에게 호소했다. 개별적인 경우에는 차르 정부의 돈을 몰수해 혁명의 필요에 돌렸다.
5. 12월 무장 봉기, 봉기의 패배. 혁명의 후퇴. 제1차 국가 두마. 제4차(통일) 당대회.
1905년 10월과 11월에도 대중의 혁명 투쟁은 막대한 힘으로 계속 발전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다.
1905년 가을 지주에 맞선 농민의 투쟁은 광범한 규모를 띠었다. 전국 군(郡)의 3분의 1이 넘는 지역이 농민 운동에 휩싸였다. 사라토프현, 탐보프현, 체르니고프현, 트빌리시현, 쿠타이시현과 그 밖의 몇몇 현은 진정한 농민 봉기에 휩싸였다. 그런데도 농민 대중의 공세는 아직 충분하지 못했다. 농민 운동에는 조직성과 지도가 모자랐다.
트빌리시, 블라디보스토크,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쿠르스크, 수후미, 바르샤바, 키예프, 리가 등 여러 도시에서 병사들 사이의 동요도 커졌다. 크론시타트에서, 그리고 세바스토폴의 흑해 함대 수병들 사이에서 봉기가 일어났다(1905년 11월). 그러나 이 봉기들은 서로 흩어져 있었던 탓에 차르 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군대와 함대 일부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계기는 장교들의 지나치게 거친 대우, 형편없는 음식(「완두콩 폭동」) 등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봉기한 수병과 병사 대중에게는 아직 차르 정부를 전복해야 한다는 필요성, 무장 투쟁을 힘차게 계속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없었다. 봉기한 수병과 병사들은 아직 지나치게 평화적이고 느긋한 기분이었으며, 봉기 초기에 체포한 장교들을 석방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적지 않았고, 상관들의 약속과 설득에 넘어가 마음을 놓아 버렸다.
혁명은 무장 봉기에 바짝 다가섰다. 볼셰비키는 차르와 지주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로 나서라고 대중을 호소하고, 그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볼셰비키는 쉬지 않고 무장 봉기를 준비했다. 병사와 수병 사이에서 혁명 사업이 진행되었고, 군대 안에 당의 군사 조직이 만들어졌다. 여러 도시에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전투 대원단이 조직되었고, 대원들에게 무기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해외에서 무기를 사들여 비밀리에 러시아로 보내는 일이 조직되었다. 무기 수송을 조직하는 일에는 당의 저명한 일꾼들이 참여했다.
1905년 11월 레닌은 러시아로 돌아왔다. 차르의 헌병과 밀정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도, 레닌은 이 시기에 무장 봉기 준비에 직접 참여했다. 볼셰비키 신문 『신생활』에 실린 그의 논문들은 당의 일상 활동에서 지침이 되었다.
이때 스탈린 동지는 자캅카지예에서 방대한 혁명 사업을 수행했다. 스탈린 동지는 멘셰비키를 혁명과 무장 봉기의 반대자로서 폭로하고 격파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결전에 대비하도록 굳건히 준비시켰다. 차르의 선언이 발표된 날 트빌리시의 집회에서 스탈린 동지는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참으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그러자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무장, 둘째는 무장, 셋째는 다시 또다시 무장이다.”
1905년 12월 핀란드의 탐메르포르스에서 볼셰비키 협의회가 열렸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형식상으로는 하나의 사회민주당에 속해 있었지만, 실제로는 각자 별개의 중앙을 가진 두 개의 다른 당을 이루고 있었다. 이 협의회에서 레닌과 스탈린이 처음으로 직접 만났다. 그전까지 두 사람은 편지나 동지들을 통해 연락을 유지했다.
탐메르포르스 협의회의 결정 가운데 두 가지를 특히 지적해야 한다. 하나는 사실상 두 개의 당으로 갈라진 당의 통일을 회복하자는 결정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첫 번째 비테 두마를 보이콧하자는 결정이다.
이때 이미 모스크바에서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으므로, 협의회는 레닌의 권고에 따라 서둘러 회의를 끝냈고, 대표들은 봉기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나 차르 정부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차르 정부 역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과 강화를 맺어 어려운 처지를 어느 정도 덜어낸 차르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공세로 넘어갔다. 차르 정부는 농민 봉기에 휩쓸린 여러 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포로를 두지 말라”, “탄환을 아끼지 말라”는 사나운 명령을 내렸으며, 혁명 운동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해산하라고 지시했다.
모스크바의 볼셰비키와 그들이 이끄는, 광범한 노동자 대중과 연결된 모스크바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이와 관련하여 무장 봉기를 즉각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12월 5일(18일) 모스크바 위원회는 소비에트에 정치 총파업을 선포하되 투쟁 과정에서 이를 봉기로 전환하도록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노동자 대중집회에서 지지를 받았다.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노동계급의 의지를 고려하여 만장일치로 정치 총파업을 시작하기로 결의했다.
모스크바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봉기를 시작할 때 자신의 전투 조직 — 약 1천 명의 전투 대원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볼셰비키였다. 모스크바의 여러 공장에도 전투 부대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봉기자들은 약 2천 명의 전투 대원을 갖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수비대를 중립화하고 그 일부를 떼어내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12월 7일(20일) 모스크바에서 정치 파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파업을 전국으로 확산시키지 못했다 — 파업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고, 이는 처음부터 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을 약화시켰다. 니콜라예프스카야 철도, 지금의 옥탸브리스카야 철도는 차르 정부의 손에 남아 있었다. 이 철도의 운행은 중단되지 않았고, 정부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근위 연대를 이동시켜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 자체에서 수비대는 동요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부분적으로 수비대의 지원을 기대하고 봉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시간을 놓쳤고, 차르 정부는 수비대 안의 동요를 진압했다.
12월 9일(22일) 모스크바에 첫 바리케이드가 나타났다. 곧 모스크바의 거리는 바리케이드로 뒤덮였다. 차르 정부는 포병을 투입했다. 정부는 봉기자들의 병력보다 여러 배나 우세한 군대를 집결시켰다. 9일 동안 수천 명의 무장 노동자들이 영웅적인 투쟁을 벌였다. 페테르부르크, 트베리, 서부 지방에서 연대를 이동시킨 뒤에야 차르 정권은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봉기의 지도 기관들은 전투 직전에 일부는 체포되고 일부는 고립되었다. 볼셰비키 모스크바 위원회는 체포되었다. 무장 행동은 서로 단절된 개별 구역들의 봉기로 변했다. 지도 중심을 잃고 도시 전체의 투쟁 계획도 없이, 구역들은 주로 방어에 머물렀다. 이것이 모스크바 봉기의 약점의 주된 원천이자 패배 원인의 하나였다고 레닌은 훗날 지적했다.
모스크바의 크라스나야 프레스냐에서 봉기는 특히 완강하고 격렬한 성격을 띠었다. 크라스나야 프레스냐는 봉기의 주요 요새이자 중심이었다. 이곳에는 볼셰비키가 이끄는 최고의 전투 부대들이 집결했다. 그러나 크라스나야 프레스냐는 불과 칼로 진압되었고, 피로 물들었으며, 포병이 지른 화재의 불길 속에서 타올랐다. 모스크바 봉기는 진압되었다.
봉기는 모스크바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여러 도시와 지역도 혁명적 봉기에 휩싸였다. 무장 봉기는 크라스노야르스크, 모토빌리하(페름), 노보로시이스크, 소르모보, 세바스토폴, 크론시타트에서 일어났다.
러시아의 억압받는 민족들도 무장 투쟁에 나섰다. 그루지야는 거의 전역이 봉기에 휩싸였다.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곧 고를롭카, 알렉산드롭스크, 루간스크(보로실로프그라드)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라트비아에서도 투쟁은 완강한 성격을 띠었다. 핀란드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적위대를 만들고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모든 봉기는 모스크바 봉기와 마찬가지로 차르 정권에 의해 비인간적인 잔혹함으로 진압되었다.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는 12월 무장 봉기에 대해 서로 다른 평가를 내렸다.
멘셰비키 플레하노프는 무장 봉기 후 당을 비난했다.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 했다.” 멘셰비키는 봉기가 불필요하고 해로운 일이며, 혁명에서 봉기 없이도 해낼 수 있고, 무장 봉기가 아니라 평화적 투쟁 수단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그러한 평가를 배신적인 것이라고 규탄했다. 그들은 모스크바 무장 봉기의 경험이 노동계급의 성공적인 무장 투쟁 가능성을 확증했을 뿐이라고 보았다.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플레하노프의 비난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대답했다.
“반대로, 더욱 단호하게, 정력적으로, 공세적으로 무기를 들어야 했고, 평화적 파업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과 두려움 없는 무자비한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대중에게 설명해야 했다”(레닌, 제10권, 50쪽).
1905년 12월 봉기는 혁명의 최고점이었다. 12월에 차르 전제정은 봉기를 패배시켰다. 12월 봉기가 패배한 뒤 혁명은 점진적 후퇴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혁명의 고양은 점진적 쇠퇴로 바뀌었다.
차르 정부는 이 패배를 이용해 혁명을 끝장내려고 서둘렀다. 차르의 사형집행인들과 간수들은 피비린내 나는 일을 벌였다. 폴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자캅카지예, 시베리아에서 토벌대가 마구 날뛰었다.
그러나 혁명은 아직 진압되지 않았다. 노동자와 혁명적 농민은 싸워 가며 천천히 후퇴했다. 노동자의 새로운 층이 투쟁에 끌려 들어왔다. 1906년에는 10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1907년에는 74만 명이었다. 1906년 상반기에 농민 운동은 차르 러시아 군(郡)의 절반가량을 휩쓸었고, 하반기에는 전체 군의 5분의 1을 휩쓸었다. 육군과 해군의 동요도 계속되었다.
차르 정부는 혁명에 맞선 투쟁에서 탄압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탄압으로 첫 성공을 거둔 뒤, 정부는 새로운 “입법” 두마를 소집하여 혁명에 새로운 타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그러한 두마를 소집하면 농민을 혁명에서 떼어내고 그렇게 해서 혁명을 끝장낼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 1905년 12월에 차르 정부는 새로운 “입법” 두마 소집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 이 두마는 볼셰비키의 보이콧으로 쓸려 나간 옛 “자문” 부리긴 두마와 달랐다. 차르의 선거법은 물론 반민주적이었다. 선거는 보통선거가 아니었다. 여성과 2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비롯하여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예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선거는 평등하지 않았다. 유권자는 당시 말로 4개 쿠리아로 나뉘었다. 토지 소유자(지주), 도시(부르주아지), 농민, 노동자 쿠리아가 그것이다. 선거는 직접선거가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치는 간접선거였다. 선거는 사실상 비밀선거도 아니었다. 선거법은 한 줌의 지주와 자본가가 두마에서 수백만 노동자와 농민을 압도적으로 누르도록 보장했다.
차르는 두마로 대중을 혁명에서 떼어놓으려 했다. 당시 농민층의 상당 부분은 두마를 통해 토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카데트,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은 봉기 없이, 혁명 없이도 인민에게 필요한 질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속였다. 이러한 인민 기만에 맞선 투쟁에서 볼셰비키는 탐메르포르스 협의회에서 채택된 결정에 따라 제1차 국가 두마 보이콧 전술을 선언하고 실행했다.
차르 체제와 투쟁하면서 노동자들은 동시에 당의 역량 통일,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통일을 요구했다. 통일에 관한 탐메르포르스 협의회의 결정으로 무장한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의 이 요구를 지지하고 멘셰비키에게 당의 통일 대회를 소집하자고 제안했다. 노동자 대중의 압력 아래 멘셰비키는 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닌은 통일에 찬성했지만, 혁명 문제에 관한 의견 차이가 흐려지지 않는 통일에 찬성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에 심각한 의견 차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쓴 조정파(보그다노프, 크라신 등)는 당에 큰 해를 끼쳤다. 레닌은 조정파와 싸우면서, 볼셰비키가 자기 강령을 가지고 대회에 나와야 하며 볼셰비키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통일이 어떤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노동자들이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볼셰비키는 그러한 강령을 작성하여 당원들의 토의에 부쳤다.
1906년 4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4차 대회가 열렸으며, 이 대회는 통일 대회라고 불렸다. 대회에는 당의 57개 지방 조직을 대표하는, 결정권을 가진 대의원 111명이 참석했다. 그 밖에 대회에는 민족별 사회민주당의 대표들도 참석했는데, 번드에서 3명, 폴란드 사회민주당에서 3명, 라트비아 사회민주조직에서 3명이었다.
12월 봉기 때와 그 뒤에 볼셰비키 조직들이 괴멸한 탓에, 모든 조직이 대의원을 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멘셰비키는 1905년 "자유의 날들"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아무 공통점이 없는 소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야를 대거 자기 대열에 받아들였다. 트빌리시의 멘셰비키(트빌리시에는 산업 노동자가 적었다)가 가장 큰 프롤레타리아 조직인 페테르부르크 조직과 같은 수의 대의원을 대회에 보냈다는 점만 지적해도 충분하다. 그 때문에 스톡홀름 대회에서는 근소하기는 했으나 다수가 멘셰비키 편에 섰다.
이러한 대회 구성은 여러 문제에 관한 결정이 멘셰비키적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이 대회에서는 형식적인 통일만 이루어졌다. 실제로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각자 자기 견해를 지키고 각자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했다.
제4차 대회에서 토의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농업 문제, 정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과제에 대한 평가, 국가 두마에 대한 태도, 조직 문제였다.
이 대회에서 멘셰비키가 다수였는데도 그들은 노동자들을 자기에게서 떼어놓지 않으려고 당원 자격에 관한 당 규약 제1조의 레닌의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농업 문제에서 레닌은 토지 국유화를 옹호했다. 레닌은 토지 국유화가 혁명이 승리했을 때, 차르 체제를 전복한 뒤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경우 토지 국유화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농촌 빈농층과 동맹하여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가기 쉽게 해 주었다. 토지 국유화는 지주 토지 전체를 농민에게 이롭도록 무상으로 몰수(압수)할 것을 요구했다. 볼셰비키의 농업 강령은 농민을 차르와 지주에 반대하는 혁명으로 불러냈다.
멘셰비키는 다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시유화 강령을 옹호했다. 이 강령에 따르면 지주 토지는 농민 공동체의 처분에도, 심지어 사용에도 넘어가지 않고 시(곧 지방 자치체, 즉 젬스트보)의 처분에 넘어갔다. 농민은 이 토지를 각자 자기 힘에 맞게 임차해야 했다.
멘셰비키의 시유화(市有化) 강령은 타협적이었고, 따라서 혁명에 해로웠다. 이 강령은 농민을 혁명 투쟁으로 동원할 수 없었고, 지주 토지 소유를 완전히 없애는 것을 겨냥하지도 않았다. 멘셰비키의 강령은 혁명이 어중간하게 끝나는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멘셰비키는 농민을 혁명으로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았다.
당대회는 다수결로 멘셰비키의 강령을 채택했다.
멘셰비키는 특히 현 정세의 평가와 국가 두마에 관한 결의를 토론할 때 자신들의 반(反)프롤레타리아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멘셰비키 마르티노프는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에 공공연히 반대하고 나섰다. 멘셰비키에게 답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문제를 이렇게 정면으로 제기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냐, 민주적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냐 — 당 안에서 문제는 이렇게 제기되며, 우리의 의견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 두마에 관해 말하면, 멘셰비키는 자신들의 결의에서 두마를 혁명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민중을 차르 체제에서 해방하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떠받들었다. 볼셰비키는 이와 반대로 두마를 차르 체제의 무력한 부속물, 차르 체제의 종기를 가리는 가림막으로 보았으며, 차르 체제는 두마가 자신에게 불편해지는 즉시 내던져 버릴 것이라고 보았다.
제4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에는 볼셰비키 3명과 멘셰비키 6명이 들어갔다. 중앙 기관지 편집부에는 멘셰비키만 들어갔다.
당내 투쟁이 계속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제4차 당대회 이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투쟁은 새로운 힘으로 타올랐다. 형식상 통합된 지방 조직들에서는 당대회 보고를 두 사람이 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한 사람은 볼셰비키를 대표하고 다른 한 사람은 멘셰비키를 대표했다. 두 노선을 토론한 결과 조직 구성원의 다수는 대개 볼셰비키 편에 섰다.
현실은 볼셰비키가 옳았음을 점점 더 입증했다. 제4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멘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자신의 기회주의를, 대중의 혁명 투쟁을 지도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점점 더 드러냈다. 1906년 여름과 가을에 대중의 혁명 투쟁은 다시 강화되었다. 크론시타트와 스베아보리에서는 수병들이 봉기했고, 농민층의 지주 반대 투쟁이 타올랐다. 그런데 멘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대중이 따르지 않는 기회주의적 구호를 내놓았다.
6. 제1차 국가 두마의 해산. 제2차 국가 두마의 소집. 제5차 당대회. 제2차 국가 두마의 해산. 제1차 러시아 혁명 패배의 원인.
제1차 국가 두마가 충분히 순종적이지 않았으므로 차르 정부는 1906년 여름에 이를 해산했다. 차르 정부는 민중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고, 전국에서 토벌대의 학살 활동을 벌였으며, 머지않아 제2차 국가 두마를 소집하겠다는 결정을 공표했다. 차르 정부는 눈에 띄게 뻔뻔해졌다. 혁명이 쇠퇴하고 있음을 보고 이제 혁명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볼셰비키는 제2차 두마에 참여할 것인가 보이콧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결정해야 했다. 볼셰비키는 보이콧을 말할 때 대개 적극적 보이콧을 뜻했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수동적으로 물러나 있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적극적 보이콧을, 차르가 민중을 혁명의 길에서 차르의 “헌법”의 길로 돌려놓으려는 시도를 민중에게 경고하고, 그런 시도를 좌절시키며, 차르 체제에 대한 민중의 새로운 공세를 조직하는 혁명적 수단으로 보았다.
불리긴 두마에 대한 보이콧의 경험은 보이콧이 “유일하게 올바른 전술이었으며, 사건들이 그것을 전적으로 확인해 주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레닌, 제10권, 27쪽). 이 보이콧은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민중에게 차르식 헌법의 길이 위험하다고 경고했을 뿐만 아니라, 두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것을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보이콧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혁명이 고양되어 가는 시기에 이루어졌고 그 고양에 의거했기 때문이며, 혁명이 퇴조하는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마를 무산시킬 수 있는 것은 혁명이 고양되는 조건에서뿐이다.
비테 두마, 곧 제1차 두마에 대한 보이콧은 12월 봉기가 패배한 뒤, 곧 차르가 승리자가 되어 혁명이 퇴조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때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하고 레닌은 썼다, 당시에는 차르의 (차르의— 편집자) 이 승리를 결정적 승리로 볼 근거가 아직 없었다. 1905년 12월 봉기는 1906년 여름의 산발적이고 부분적인 일련의 군사 봉기와 파업으로 이어졌다. 비테 두마를 보이콧하라는 구호는 이 봉기들을 집중하고 일반화하기 위한 투쟁의 구호였다”(레닌, 제12권, 20쪽).
비테 두마에 대한 보이콧은 두마를 무산시키지 못했다. 두마의 권위를 상당히 떨어뜨리고 주민 일부가 두마에 대해 가졌던 믿음을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두마를 무산시키지는 못했다. 이제 분명해진 바와 같이, 보이콧이 혁명이 퇴조하고 쇠퇴하는 정세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1906년 제1차 두마에 대한 보이콧은 실패로 끝났다. 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유명한 소책자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05년 볼셰비키가 ‘의회’를 보이콧한 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매우 귀중한 정치적 경험을 풍부하게 안겨주었다. 합법적 투쟁 형태와 비합법적 투쟁 형태, 의회적 투쟁 형태와 의회 밖의 투쟁 형태를 결합할 때에는 때로 의회적 형태를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유익하며 심지어 필수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906년 볼셰비키가 ‘두마’를 보이콧한 것은 이미 오류였다. 작은 오류이고 쉽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 그에 상응하는 변경을 가하면 — 정치와 정당에도 적용된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현명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현명한 사람은 아주 중대하지 않은 실수를 하고, 그것을 쉽고 빠르게 바로잡을 줄 아는 사람이다”(레닌, 제25권, 182~183쪽).
제2차 국가 두마에 관해서는, 레닌은 정세가 변했고 혁명이 퇴조했으므로 볼셰비키가 “국가 두마 보이콧 문제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보았다(레닌, 제10권, 26쪽).
“역사는, 하고 레닌은 썼다, 두마가 소집되면 두마 안과 그 주변에서 유익한 선동을 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 카데트에 맞서 혁명적 농민층과 접근하는 전술이 두마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같은 책, 29쪽).
이 모든 것에서 나오는 결론은 이러했다. 혁명이 고양될 때에는 단호히 공격하되 맨 앞줄에서 공격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고양이 없을 때에는 올바르게 후퇴하되 맨 마지막으로 후퇴할 줄도 알아야 한다. 달라진 정세에 맞추어 전술을 바꾸고, 뿔뿔이 흩어져서가 아니라 조직적으로, 침착하게, 당황하지 않고 후퇴하며, 간부들을 적의 타격에서 빼내어 대오를 다시 짜고 힘을 축적하여 적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아주 작은 가능성까지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볼셰비키는 제2차 두마 선거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두마에 들어간 것은 멘셰비키가 한 것처럼 카데트와 블록을 이루어 두마에서 “입법”이라는 유기적 활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마를 혁명의 이익을 위한 연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반해 멘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카데트와 선거 협정을 맺고 두마에서 카데트를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두마를 차르 정부를 억제할 수 있는 입법 기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 조직의 대다수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정책에 반대했다.
볼셰비키는 새 당대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1907년 5월 런던에서 제5차 당대회가 열렸다. 이 당대회 무렵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민족별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포함하여) 당원이 15만 명에 달했다. 당대회에는 모두 336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볼셰비키는 105명, 멘셰비키는 97명이었다. 나머지 대의원들은 민족별 사회민주주의 조직, 즉 폴란드와 라트비아의 사회민주주의자 및 번트를 대표했는데, 이들은 앞선 당대회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받아들여졌다.
트로츠키는 당대회에서 자신만의 별도의 중간파, 즉 준멘셰비키 소집단을 꾸리려고 했으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볼셰비키가 폴란드인과 라트비아인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회에서 안정적인 다수를 차지했다.
당대회에서 벌어진 투쟁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태도였다. 이 문제를 둘러싼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투쟁은 이미 제2차 당대회에서도 있었다. 당대회는 모든 비프롤레타리아 정당, 즉 흑색백인단, 10월당원, 카데트, 사회혁명당원에 대해 볼셰비키적 평가를 내리고, 이들 정당에 대한 볼셰비키의 전술을 정식화했다.
당대회는 볼셰비키의 정책을 승인하고, 흑색백인단 계열 정당인 「러시아 인민동맹」, 군주주의자, 통합 귀족회의는 물론 「10월 17일 동맹」(10월당원), 상공업당, 「평화적 쇄신」당과도 무자비한 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 모든 정당은 명백히 반혁명적이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즉 카데트당에 대해서는 당대회가 타협 없는 폭로 투쟁을 벌일 것을 제안했다. 당대회는 카데트당의 위선적이고 거짓된 “민주주의”를 폭로하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농민층 운동의 선두에 서려는 시도에 맞서 투쟁할 것을 제안했다.
이른바 나로드니키 계열 정당 또는 노동파 정당(인민사회당원, 노동단, 사회혁명당원)에 대해서는 당대회가 그들이 사회주의자로 가장하려는 시도를 폭로할 것을 권고했다. 동시에 당대회는 차르 체제와 카데트 부르주아지에 맞선 공동의 동시 공격을 위해 이들 정당과 개별적으로 협정을 맺는 것을 허용했다. 이들 정당이 당시에는 민주주의 정당이었고 도시와 농촌 소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당대회 이전부터 멘셰비키는 이른바 “노동자 대회”를 소집하자고 제안했다. 멘셰비키의 계획은 사회민주주의자와 사회혁명당원, 아나키스트가 모두 참가하는 대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이 “노동자” 대회는 “무당파 정당”인지 “광범위한” 소부르주아적 무강령 노동자 정당인지 모를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정당을 청산하고 노동계급의 전위 부대를 소부르주아 대중 속에 용해시키려는 멘셰비키의 이 극히 해로운 시도를 폭로했다. 당대회는 멘셰비키의 “노동자 대회” 구호를 단호히 규탄했다.
당대회의 작업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노동조합 문제였다. 멘셰비키는 노동조합의 “중립성”을 옹호했는데, 이는 노동조합에서 당이 지도적 역할을 하는 데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당대회는 멘셰비키의 제안을 부결하고 노동조합에 관한 볼셰비키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당이 노동조합에 대한 사상적·정치적 지도를 쟁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5차 당대회는 노동운동에서 볼셰비키의 커다란 승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우쭐대지 않았고, 승리에 안주하지도 않았다. 레닌은 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앞으로 멘셰비키와의 투쟁이 더 남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
스탈린 동지는 1907년에 나온 자신의 글 「대표의 수기」에서 당대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전 러시아 선진 노동자들이 단일한 전러시아 정당으로 실제로 통합된 것—이것이 런던 당대회의 의의이며, 이것이 그 전반적 성격이다.”
이 글에서 스탈린 동지는 당대회의 구성에 관한 자료를 제시했다. 볼셰비키 대표들은 주로 대규모 공업 지역(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우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등)에서 당대회에 파견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반해 멘셰비키는 수공업 노동자와 반(半)프롤레타리아가 우세한 소규모 생산 지역, 그리고 순전한 농민 지역 여러 곳에서 당대회에 들어왔다.
“분명히”—스탈린 동지는 당대회의 결과를 총괄하면서 지적했다—“볼셰비키의 전술은 대공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술이며, 계급적 모순이 특히 분명하고 계급투쟁이 특히 격렬한 지역들의 전술이다. 볼셰비즘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술이다. 다른 한편, 멘셰비키의 전술이 주로 수공업 노동자와 농민적 반(半)프롤레타리아의 전술이며, 계급적 모순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고 계급투쟁이 가려져 있는 지역들의 전술임도 그에 못지않게 분명하다. 멘셰비즘은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반(半)부르주아적 분자들의 전술이다. 숫자가 이렇게 말해 준다”(『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5차 당대회 회의록』, 11~12쪽, 1935년).
제1두마를 해산한 차르는 더 순종적인 제2두마를 얻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2두마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차르는 이 두마도 해산하고, 선거법을 더욱 악화시켜 제3두마를 소집하기로 했다—그 두마가 더 순종적일 것이라는 희망에서였다.
제5차 당대회 직후 차르 정부는 이른바 6월 3일 쿠데타를 단행했다. 1907년 6월 3일 차르는 제2차 국가 두마를 해산했다. 대표 65명으로 이루어진 사회민주당 두마 원내단은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새 선거법이 공포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는 더욱 삭감되었다. 차르 정부는 계속 공세를 취했다.
차르의 장관 스톨리핀은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펼쳤다. 수천 명의 혁명적 노동자와 농민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차르의 감옥에서는 혁명가들을 괴롭히고 고문했다. 특히 노동자 조직, 그중에서도 우선 볼셰비키가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차르의 밀정들은 핀란드에서 비밀리에 지내던 레닌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혁명의 지도자를 해치우려 했다. 레닌은 큰 위험을 무릅쓰고 1907년 12월 다시 국외로, 망명지로 건너가는 데 성공했다.
스톨리핀 반동의 어두운 시기가 닥쳐왔다.
이리하여 제1차 러시아 혁명은 패배로 끝났다.
다음과 같은 원인들이 이 패배에 작용했다.
1. 혁명에는 아직 차르 체제에 맞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견고한 동맹이 없었다. 농민들은 지주에 맞서 투쟁에 나섰고, 지주에 맞서 노동자와 동맹하려 했다. 그러나 차르를 전복하지 않고서는 지주를 전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고, 차르가 지주와 한통속으로 행동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농민의 상당 부분은 아직도 차르를 믿었고 차르의 국가 두마에 희망을 걸었다. 그래서 많은 농민은 차르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노동자와 동맹하려 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진정한 혁명가인 볼셰비키보다 타협주의 정당인 사회혁명당을 더 믿었다. 그 결과 지주에 맞선 농민의 투쟁은 충분히 조직되지 못했다. 레닌은 이렇게 지적했다.
“…농민들은 너무 분산되어, 조직되지 않은 채, 충분히 공세적이지 못하게 행동했으며, 여기에 혁명이 패배한 근본 원인의 하나가 있다”(레닌, 제19권, 354쪽).
2. 농민의 상당 부분이 노동자와 함께 차르 체제 전복에 나서기를 꺼린 것은 군대의 행동에도 나타났다. 군대의 대다수는 병사 외투를 입은 농민의 아들들이었다. 차르 군대의 일부 부대에서는 동요와 봉기가 있었으나, 대다수 병사는 아직도 차르를 도와 노동자의 파업과 봉기를 진압했다.
3. 노동자들도 충분히 한마음으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노동계급의 선진 부대는 1905년에 영웅적인 혁명 투쟁을 전개했다. 더 뒤떨어진 층, 즉 공업이 가장 덜 발달한 현의 노동자들, 농촌에 사는 노동자들은 더디게 움직였다. 그들의 혁명 투쟁 참여는 1906년에 특히 강화되었으나, 이때에는 노동계급의 전위가 이미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4. 노동계급은 혁명의 선진적이고 기본적인 힘이었지만, 노동계급의 당 대열에는 필요한 통일과 결속이 없었다. 노동계급의 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라는 두 집단으로 갈라져 있었다. 볼셰비키는 일관된 혁명 노선을 취하여 노동자들에게 차르 체제의 전복을 호소했다. 멘셰비키는 타협주의 전술로 혁명의 걸림돌이 되었고, 노동자의 상당 부분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노동계급을 분열시켰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혁명에서 언제나 한마음으로 나서지는 못했고, 노동계급은 자기 대열의 통일조차 아직 이루지 못하여 혁명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지 못했다.
5. 1905년 혁명을 진압하는 데 서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차르 전제정을 도왔다. 외국 자본가들은 러시아에 투자한 자본과 막대한 수익을 잃을까 걱정했다. 게다가 러시아 혁명이 승리하면 다른 나라 노동자들도 혁명에 나설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서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사형집행인 같은 차르를 도왔다. 프랑스 은행가들은 혁명을 진압하라고 차르에게 큰 차관을 주었다. 독일 황제는 러시아 차르를 돕는 간섭을 위해 수천 명의 군대를 출동 태세로 대기시켰다.
6. 1905년 9월에 체결된 일본과의 강화도 차르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전쟁의 패배와 혁명의 가공할 성장은 차르가 서둘러 강화에 조인하도록 만들었다. 전쟁의 패배는 차르 체제를 약화시켰으나, 강화의 체결은 차르의 지위를 강화했다.
간단한 결론.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우리나라 발전에서 하나의 역사적 시기를 이룬다. 이 역사적 시기는 두 시기로 이루어진다. 제1시기에 혁명은 10월의 총정치파업에서 12월의 무장봉기로 상승해 갔으며, 만주 전장에서 패배를 거듭하던 차르의 약점을 이용하고, 불리긴 두마를 쓸어버리고, 차르에게서 양보에 양보를 얻어냈다. 제2시기에 차르는 일본과 강화를 맺은 뒤 정신을 차리고,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공포와 농민층의 동요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비테 두마를 선심으로 던져 주고 노동계급에 대한, 혁명에 대한 공세로 전환했다.
혁명의 불과 3년 동안(1905~1907년) 노동계급과 농민층은 평상시의 평화적 발전 30년 동안에도 얻을 수 없었을 풍부한 정치 교육의 학교를 얻었다. 혁명의 몇 해는 평화적 발전 조건에서는 수십 년이 걸려도 명확히 할 수 없었던 것을 명확히 했다.
혁명은 차리즘이 인민의 철천지원수이며, 차리즘은 무덤만이 고칠 수 있는 곱사등이와 같다는 것을 드러냈다.
혁명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인민이 아니라 차르와의 동맹을 추구하며, 그들은 반혁명 세력이어서 그들과의 합의는 인민에 대한 배신과 다름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뿐이며, 오직 노동계급만이 자유주의 카데트 부르주아지를 밀어내고, 농민층을 그 영향에서 해방시키고, 지주를 격파하고, 혁명을 끝까지 이끌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혁명은 마지막으로, 근로 농민층이 동요하면서도 노동계급과 동맹할 수 있는 유일하게 진지한 세력임을 보여 주었다.
혁명 시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안에서는 두 노선, 즉 볼셰비키의 노선과 멘셰비키의 노선이 투쟁했다. 볼셰비키는 혁명의 전개, 무장봉기에 의한 차리즘 전복,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카데트 부르주아지의 고립, 농민층과의 동맹, 노동자와 농민 대표로 구성되는 임시혁명정부의 수립, 혁명을 승리로 끝까지 이끄는 것을 향해 나아갔다. 반대로 멘셰비키는 혁명을 위축시키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봉기에 의한 차리즘 전복 대신 차리즘의 개혁과 "개선"을,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대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농민층과의 동맹 대신 카데트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임시혁명정부 대신 나라의 "혁명 세력"의 중심으로서 국가 두마를 제안했다.
이렇게 멘셰비키는 타협의 수렁으로 굴러떨어져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 영향의 전달자가 되었고, 실제로는 노동계급 안에서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당과 나라에서 유일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세력임이 드러났다.
이처럼 심각한 의견 차이가 있은 뒤이므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실제로는 볼셰비키당과 멘셰비키당의 두 당으로 분열된 것은 당연하다. 제4차 당대회는 당 내부의 실제 상태를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그것은 당의 형식적 통일을 유지하고 다소 강화했을 뿐이다. 제5차 당대회는 당의 실제적 통일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으며, 그 통일은 볼셰비즘의 기치 아래 이루어졌다.
혁명 운동을 총괄하면서 제5차 당대회는 멘셰비키의 노선을 타협주의적 노선이라 규탄하고, 볼셰비키의 노선을 혁명적·마르크스주의적 노선이라 승인했다. 이로써 대회는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전 과정이 이미 확증한 바를 다시 한번 확증했다.
혁명은 볼셰비키가 정세가 요구할 때 공세를 취할 줄 알며, 선두에 서서 공세를 취하고 인민을 이끌어 돌격할 줄 알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혁명은 그 밖에도, 정세가 불리해지고 혁명이 퇴조할 때 볼셰비키가 질서 있게 후퇴할 줄도 안다는 것, 곧 간부를 보존하고 힘을 모으며 새 정세에 맞게 재편한 뒤 다시 적에게 공세를 취하기 위해, 볼셰비키가 당황과 소란 없이 올바르게 후퇴할 줄 알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올바르게 공세를 취할 줄 모르면 적을 이길 수 없다.
올바르게 후퇴할 줄, 당황과 혼란 없이 후퇴할 줄 모르면 패배했을 때 궤멸을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