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 구제의 거장이자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이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든, 먹여야 한다!」 볼셰비키 구제를 두고 공격받자 후버가 남긴 응답이었다.
후버는 광산기사로 막대한 부를 이룬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의 구호활동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로, 1929년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구제위원회와 미국 식량청을 이끌며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고, 전후 미국구제청(ARA)을 사적 조직으로 개편해 동유럽과 러시아 구제를 주도했다. 1921년 볼가 기근에 맞서 고리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고 리가 협정을 직접 주도해 식량 분배의 자율성과 소련의 금 보유분 지출을 관철, 하루 천만 명 이상을 먹였다. 대공황 속 대통령직에서는 고전했으나 은퇴 후에도 트루먼·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개혁위원회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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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4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의 퀘이커 가정에서 출생
- 1895스탠퍼드대 졸업, 광산기사로 중국·호주 등에서 부 축적
- 1914–1919벨기에 구제위원회(CRB) 위원장, 점령지 벨기에에 식량 지원
- 1917–1919미국 식량청장, '식량 독재자'로 전시 식량 통제
- 1919–1923미국구제청(ARA) 국장, 동유럽·러시아 구제 주도
- 1921.08.20리가 협정 조인, 볼가 기근 구제의 자율성·비용 조건 확정
- 1921–1928상무장관
- 1929–1933제31대 대통령, 대공황 속 재선 실패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합참의 만장일치 반대를 꺾은 유엔군 사령관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 1951년 4월 19일 의회 고별연설에서 한 말.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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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1935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35–1941필리핀군 원수 겸 군사고문
- 1941–1945미 극동군 사령관 / 남서태평양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45–1951연합군 최고사령관, 일본 점령통치
- 1950–1951유엔군 사령관, 한국전쟁
- 1952–1964레밍턴 랜드 이사회 의장
동맹망으로 냉전을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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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프린스턴대학교 졸업
- 1911설리번 앤드 크롬웰 국제변호사
- 1919파리 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법률고문
- 1945–1950유엔 회의·총회 미국 대표 및 외교 고문
- 1950–1952트루먼 대통령 대일 강화조약 특별고문
- 1953–1959미국 국무장관
- 1954베를린 회의 참가, 서독 NATO 가입 협상 주도
- 1959국무장관 사임, 5월 24일 사망
노르망디 상륙을 지휘하고 군산복합체를 경고한 5성 장군 대통령
이런 종류의 일에 뛰어들 때는 단 하나만 명심해야 하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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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웨스트포인트 졸업
- 1942–1945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
- 1945미국 점령 독일 군정장관
- 1945–1948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48–1953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 1951–1952NATO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53–1961제34대 미국 대통령
비밀전쟁을 제도화한 미국 정보 관료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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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1926미 국무부 외교관, 유럽·근동 담당
- 1927–1944외교·군축 협상 법률고문, 외교협회 간사·회장
- 1942–1945OSS 베른 지국장, 작전 선라이즈 협상 담당
- 1945OSS 베를린 지국장
- 1951–1953CIA 계획 담당 부국장, 중앙정보국 부국장
- 1953–1961중앙정보국장
- 1963–1964케네디 암살 진상조사 워런위원회 위원
전후 미국 국제질서를 설계한 실무가
흐루쇼프는 미국의 군비 증강이 전쟁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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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1919미 육군 포병 장교, 프랑스 전선 복무
- 1921–1940뉴욕 변호사, 월스트리트 법률가
- 1941–1945전쟁부 차관보, 전시 동원·정보·안보 정책 담당
- 1947–1949세계은행 제2대 총재
- 1949–1952미국 독일 고등판무관
- 1953–1960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
- 1953–1970외교협회 이사회 의장
- 1961케네디 대통령 군비축소 고문
쿠바에 소련 미사일이 올 것이라 홀로 경고한 CIA 국장
기습 공격은 미국에 '진주만 오명'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습 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에게 24시간의 사전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공화당원으로, 피그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여름과 가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반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으나 정보기관 내부에서 기각당했고, 9월 20일 신혼여행 중 보낸 전문에서 '상상력 있는 분석'을 촉구한 끝에 10월 14일 U-2 정찰기를 명령해 미사일 기지를 발견했다. 케네디 암살 후 존슨 행정부에서도 재임했으나 베트남 확전을 둘러싼 불화로 1965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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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Consolidated Steel Corporation 수석부사장
- 1937Bechtel-McCone 공동 창업
- 1941–1945California Shipbuilding Corporation 사장
- 1950–1951미국 공군 차관
- 1958–1961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 1961–1965제6대 CIA 국장
핵폐기를 진심으로 믿었으나 SDI만은 양보하지 않았던, 냉전의 마지막 미국 대통령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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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일리노이주 탬피코의 아일랜드계 가정에서 출생
- 1937–1964할리우드 배우, 영화 53편 출연, 영화배우조합 회장 역임
- 1967–1975캘리포니아 주지사, 대학 시위 진압과 복지 개혁 추진
- 1981–1989제40대 대통령, 레이거노믹스·군비 증강·'악의 제국' 연설
- 1986.10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전면 핵폐기 직전까지 갔으나 SDI로 결렬
- 1987.06브란덴부르크문 앞 '이 벽을 허무시오' 연설
- 1987.12INF 조약 서명, 중거리 핵미사일 전량 폐기
- 1994–2004알츠하이머병 진단,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데탕트로 소련과 핵무기 제한의 틀을 열고 워터게이트로 무너진 유일한 사임 대통령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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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선거로 뽑히지 않은 채 데탕트의 마지막 국면을 이끈 대통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워싱턴의 눈 치우기가 힘들다는 포드의 말에 브레즈네프가 '우리의 첫 거래는 죽 드리죠, 소련 제설차'라고 받았다.
하원의원 25년과 부통령을 거쳐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공화당 정치가로,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않고 백악관에 오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닉슨이 연 데탕트를 계승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의 틀, 운반수단 2,400기와 MIRV 1,320기의 상한을 잡았고, 이듬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며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법으로 만들었다. 닉슨에 대한 사면이 최대 논란이 되었고, 1976년 카터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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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73하원의원 (미시간 5선거구)
- 1965–1973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 1973–1974부통령
- 1974–1977제38대 미국 대통령
- 1974.11블라디보스토크 회담, 브레즈네프와 SALT II 기본 틀 합의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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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
쿠바 미사일 위기 첫날 밤,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한 국가안보보좌관
레이 클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걱정해온 그것들,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번디가 물었다. '확실한가?'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1961–1966)으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베트남전 확전의 핵심 설계자였다. 1962년 10월 15일 저녁 CIA로부터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증거를 보고받았으나, 비밀 유지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다음 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6년 퇴임 후 포드재단 회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를 주창하며 핵군축 논의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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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예일대학교 수학 학사
- 1943–1946미군 정보장교
- 1949–1953하버드대학교 정부학 교수
- 1953–1961하버드대학교 문리학부 학장
- 1961–1966미국 국가안보보좌관
- 1966–1979포드재단 회장
- 1979–1989뉴욕대학교 역사학 교수
레이건 곁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밀어붙여 냉전 종식을 이끈 국무장관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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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뉴욕시 출생,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성장
- 1942–1945해병대 장교, 앙가우르 전투 참전
- 1969–1974노동장관 → OMB 국장 → 재무장관, 브레턴우즈 체제 종료
- 1974–1982벡텔 사장, 중동 건설 사업 확장
- 1982–1989국무장관,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INF 조약
- 1989–2021스탠퍼드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핵군축 및 탄소세 운동
- 1993회고록 『격랑과 승리』(Turmoil and Triumph) 출간
데탕트와 '연계' 전략으로 초강대국 핵무기 통제의 틀을 설계한, 현실주의 외교의 화신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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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 1977–2023키신저 어소시에이츠 설립, 저술 및 12명의 대통령에 대한 외교 자문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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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매사추세츠주 밀턴의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출생
- 1942–1945해군 뇌격기 조종사로 58회 출격, 지치지마에서 격추되어 잠수함에 구조
- 1953–1966자파타 오프쇼어 석유회사 창업, 텍사스의 백만장자
- 1967–1971텍사스주 하원의원, 두 차례 상원 선거 낙선
- 1971–1977유엔 대사, 공화당 전국위 의장, 중국 주재 대표, CIA 국장
- 1981–1989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부통령
- 1989–1993제41대 대통령: 몰타 회담으로 냉전 종식, 독일 통일 지지, 걸프전
- 2018휴스턴에서 94세로 사망
냉전 종식기의 신중한 전략가
몰타 회담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결국 회담의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미국 공군 장교 출신의 국가안보 관료로, 대통령과 외교·군사 관료 사이의 정책 조정을 중시한 현실주의적 전략가였다. 그는 제럴드 포드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냉전 말기의 군비·유럽 외교를 조율했다. 1989년 몰타 회담에는 성급한 정상회담이 기대만 키울 수 있다며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회담이 열리자 미소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는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동맹과 국제기구를 중시하며 이라크 침공과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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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국 공군 소위 임관
- 1953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 1967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 1972–1973리처드 닉슨 대통령 군사보좌관
- 1973–1975국가안보 담당 대통령 부차관보
- 1975–1977제럴드 포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1989–1993조지 H. W. 부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2001–2005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 의장
냉전 종식을 설계한 실무형 외교가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가 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출생
- 1952–1954프린스턴대 졸업 후 해병대 장교로 복무
- 1957–1980휴스턴에서 기업 변호사로 활동
- 1981–1985레이건 대통령 백악관 비서실장
- 1985–1988미국 재무장관, 플라자 합의와 베이커 계획 추진
- 1989–1992미국 국무장관, 몰타 회담과 냉전 말기 외교를 조정
- 1992–1993부시 행정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복귀
- 2010년대–공공정책과 국제 현안에 자문역으로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