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초기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인물 7명

김두봉

김두봉
정치·당 지도 북조선로동당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889–1958? ↓ 실각 후 실종 1958

독립운동가이자 언어학자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를 지낸 연안파 지도자

1948년 7월,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인공기를 채택한 날, 김두봉이 직접 태극기를 내리고 새 국기를 게양했다. 1년 전만 해도 그는 소련 장군에게 태극기의 철학적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사람이었다.

주시경 문하의 한글학자 출신 독립운동가로, 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이끌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에 올랐으나 실권은 김일성에게 있었고, 1958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실종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8–1916주시경 문하에서 한글 연구, 《말모이》 편찬 참여
  • 19193·1 운동 참가 후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 1920–1930년대상하이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언어학 연구 병행
  • 1942–1945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 결성, 옌안파 지도
  • 1946.2–1946.8조선신민당 위원장
  • 1946.8–1949.6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9–1957.9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초대 국가원수
  • 1957–19588월 종파 사건 연루로 모든 직위 해임, 실종

최용건

최용건

만주 항일투쟁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을 지낸 국가원수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1924운남군관학교 졸업
  • 1925–1927황푸군관학교 교관
  • 1936–1940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제7군장
  • 1942–1945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 부참모장
  • 1946–1955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1957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 1957–1972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97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김일성

김일성

소련 극동에서 귀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자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년대만주 항일 유격대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 1945–1948소련 점령기 북부 조선의 권력 기반 형성
  • 1948–1972내각 수상·노동당 지도자
  • 1961소련과 우호·협조·상호원조 조약
  • 1972–199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소련에서 온 고려인 장군,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남일 대장과 해리슨 중장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18부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3년 전쟁을 멈춘 10분, 그는 조선의 얼굴이었다.

러시아 극동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1937년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옮겨갔으며 소련군 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 참전했다. 1946년 조선 북부로 파견되어 김일성의 측근으로 부상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총참모장을 맡았다. 1951년부터 2년간 판문점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로서 협상을 이끌었고 1953년 7월 27일 조선인민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 세계에 조선의 얼굴로 알려졌다. 전후 외무상·부수상을 지내며 소련파 고려인 동료들이 숙청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으나, 1976년 원인 불명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9–1946소련에서 교사·교육 공무원으로 근무, 소련군 대위로 독소전 참전
  • 1946–1950조선 북부 파견, 교육성 부상까지 승진
  • 1950–1953조선인민군 총참모장,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
  • 19537월 27일 정전협정 조선인민군 측 서명
  • 1953–1959외무상
  • 1957–1976내각 부수상
  • 1966–1972철도상·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 1972–1976정무원 부총리·국가경공업위원회 위원장

강건

강건

소련군 출신으로 남침 작전계획을 완성한 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유성철 작전국장의 증언: '바로 내 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했다. 지뢰였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만주 항일유격대와 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측근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올랐다. 1950년 5월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과 함께 남침을 위한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완성했고, 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을 지휘했다.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 8일, 금강 인근에서 후퇴하는 국군이 매설한 지뢰가 탄 지프가 폭발해 즉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며, 사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33–1940만주 항일유격대 및 동북항일연군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대위 계급
  • 1946연변에서 활동 후 귀국,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 지휘
  • 1948–1950조선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 1950.05바실리예프 중장과 남침 작전계획 완성
  • 1950.06–09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전선 지휘

김정일

김정일

소련 출생 기록과 백두산 신화 사이의 후계자

1992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17년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유일한 공개 육성이었다.

1970년대부터 후계자로 공고화된 그는 1994년 김일성 사후 권력을 승계하여, 소련 붕괴 뒤의 고립과 경제위기 속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를 이끌며 17년간 국가를 통치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2소련 출생 기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식 서사의 갈림
  • 1964–1974조선노동당 중앙위에서 승진
  • 1980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후계자로 공고화
  • 1991–1994인민군 최고사령관·국가 권력 승계 준비
  • 1994–201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 2000첫 남북 정상회담

방학세 이그나티예비치 방

Пан Игнатьевич Хак Се

조선 보안기구의 창설자이자 정치탄압의 집행자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란코프가 1946년(란코프는 9월), 영어 위키백과가 1945년 10월로 갈린다. 1947년에는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란코프는 그가 조선 국가보위의 최초 책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러시아 제국 출신 고려인으로, 출생지는 문서로 확정되지 않았고 출생 연도도 출처에 따라 1912~1914년으로 갈린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와 정보기관에서 일했고,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와 란코프가 1946년, 영어 위키백과는 1945년 10월로 적는다. 1947년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1948년 9월 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이 되었으나,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사회안전상(1951년 3월/5월설)과 내무상(1960년 11월까지)을 지냈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를 탄압 체계의 조직자이자 명령에 순종한 집행자로 함께 서술한다. 소련파였으나 충성으로 숙청을 피해 1992년 7월 18일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1944카자흐스탄 강제이주 후 크질오르다에서 검사, 1942~1944년 크질오르다·탈디쿠르간 검찰 근무(러시아어 위키백과). 1940년 당 입당. 란코프는 1946년 이전 행적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고 본다
  • 1947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란코프). 영어 위키백과는 1947년 5월 내무국 총국장으로 적으나, 1948년 이후 내무성 산하 국(局) 체제와 어긋나 단정하기 어렵다
  • 1948최고인민회의 대의원(러시아 위키백과)
  • 1948년 9월–1951년 2/3월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영어 위키백과).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 1951년 3월/5월–1952년사회안전상(정치보위국이 사회안전성으로 개편). 3월설은 영어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월설은 영어 위키백과 사회안전성 문서
  • 1952년 10월–1960년 11월내무상(사회안전성이 내무성으로 개편)
  • 1956년 8월8월 종파사건 때 내무상으로서 경찰을 동원해 평양을 감시하고 '종파주의자' 수사를 지도(영어 위키백과). 같은 사건 문서에는 당시 그가 해외에 있었다는 기술도 병존한다
  • 1956–1980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1956년 4월 선출, 1970년 11월·1980년 10월 재선)
  • 1960년 11월–1972년중앙재판소 부소장, 1966년 11월부터 당 연락국 정보 책임자
  • 1972년 12월–1992년중앙재판소 소장(1982년·1986년 재임명, 사망 시까지 재임)